세수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기계적인 동작인 세수를 하루 종일 하고 있지 않으면 처음에는 갑갑함에 가끔 얼굴을 문지르다 눈꼽을 떼고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나도 모르게 세수 안한 얼굴을 잠시 잊게 되고 평소의 성격대로 세월아 네월아 시간가는 줄 모르게 된다. 그제야 비로소 마음이 하나의 조그만 풀꽃 같은 자연이 된다. 세수하지 않고 참솔차를 한잔 끓여서 작은 베란다에 관목처럼 앉아 참새소리를 들으며 바다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거나 Milford Reserve(리저브는 일종의 작은 공원으로 건축을 유보한 자연풍치지구)의 푸른 잔디밭이나 그 한 켠에 늘어선 울울한 숲을 바라보거나 또는 예쁘게 지어지고 알록달록 칠해진 목가(木家)들을 바라보면서, 또는 가끔 고개를 들어 푸른 하늘에 취하기도 하면서,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상념이나 추억에 잠겨본다. 세수를 하지 않으면 사자나 원숭이 또는 비둘기나 승냥이가 된 듯한 느낌이 든다. 끓인 우유 위에 뜬 하얗고 얇은 막이 얼굴에 끼어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짐승들은 세수를 하지 않으니 그 막이 몸의 일부인 듯 되어버려 이물감이나 갑갑함을 느끼지 못할 것이다. 흘낏 본 참새의 얼굴은 그지없이 천연덕스럽다. 내 인공에 익고 가리워진 시선이 귀찮기라도 한 듯 제 할 일을 하러 포르릉 날아가 버린다. 하루 종일 먹이를 찾고 있는 그 참새가 무척 부럽다. 두꺼운 낯짝으로 어슬렁거리는 이웃집 아기고양이 토비나 동물원에서 햇살아래 낮잠을 즐기는 사자나 은여우가 부럽다. 아무런 귀찮은 일이나 신경 쓸 일이 그들에게는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그들이 이런 글을 쓰는 나를 보면 배꼽을 잡고 나무라며 웃을 것이다. 그걸 고민이라고 하고 게다가 글까지 쓰고 있느냐고. 그 동물들의 종속과목강문계를 넘어선 왁자지껄 비웃고 떠드는 소리와 각양각색의 웃음소리가 한꺼번에 부끄러워 오그라든 사람의 귀에 쏟아져 들어오는 느낌에 잠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사람들 중에 티베트고원에 사는 사람들도 그러하다. 사막언저리에 사는 아랍인들도 오아시스의 우물물로 고양이세수는 하고 알라신에게 기도를 드리지 않는가? 티베트사람들의 그 무심한 듯한 얼굴이 외지인을 만나면 그지없이 환하고 태평한, 그 낯 두꺼운 굴주름진 덕지의 미소로 반가움을 표하지 않는가? 그들의 덕지 낀 얼굴, 살아갈 나날들을 걱정하지 않는 얼굴, 사랑싸움에 생사를 걸지 않는 얼굴, 사바세계의 모든 것을 넘어선 덕지 낀 얼굴, 어떠한 문명과 어떠한 과학과 어떠한 문화 우산 속에서도 사람이 짐승에서 한 발짝도 진보하지 못할 것임을 예시하기라도 하는 듯한 얼굴, 부러운 얼굴, 내가 흉내나 내어보는 얼굴, 여태껏 가보지 못한 티베트고원에 사는 사람들이 갑자기 그리워지며 식은 찻잔을 든다. 식은 찻잔만큼이나 썰렁해지는 마음, 세수나 해야겠다. 아니 차라리 산뜻하게 샤워나 할까. 그런데 가장 궁금한 생각이 떠오른다. 꽃들은 저마다 그토록 아기자기하게 때로 무엇보다도 화사하고 때로 가여우리 만치 어여쁘고 다소곳한데 왜 세수를 하지 않는 것일까?
이 글을 쓸 무렵 밀포드에 있는 정들었던 집(필자가 `Blue Sky`라 지었음)에서 지은 시 한 수를 아래 적는다.
행복(Happiness Calm)
시와 음악이 있다면
행복하리
잔디와 나무, 그리고 꽃이 열린 정원이 있고
기후 닿지 않을 소박한 집 한 채 있어
거기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다면
더없이 행복하리
*두더지가 아니어서
더없이 행복하리
*사랑이 반 외로움이 반이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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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바라 볼 수 있어서
*기억의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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