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의 역사 - 돌궐
글쓴이 : 김규형 조회수 : 30507.11.06 22:10 http://cafe.daum.net/chosunsa/POVo/1580
돌궐을 찾아보자 돌궐을 찾아보면 한민족의 또다른 진실이 보인다.... 앞에 거란을 찾아보았듯이...거란의 옆에 돌궐이 있었다... 역사를 지우려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어떤 것이 거짓의 역사인지를 하나 하나 밝혀보자 돌궐제국(突厥帝國) 돌궐족은 스텝의 여러 민족 중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문자 기록을 남긴 민족이다4). 몽골의 오르콘(Orkhon)강 유역에서 발견된 튀르크어 비문(碑文)은 돌궐제국과 당시 상황에 대한 여러가지 역사적 자료를 제공하여 준다. 이 비문에는 돌궐제국을 �튀르크(Köktürk) 제국이라 칭하고 있는데, 이 비문을 통해 우리는 돌궐(튀르크)족이 자신들의 역사에 대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스텝의 유목 민족으로서 독자적인 역사와 전통을 소유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비문을 통해서 당시의 중앙아시아 역사에 대한 중국의 사료들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도 알 수 있다. 중국인들은 돌궐이 스텝지역의 패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기간에 독립된 2개의 돌궐제국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비문을 해석하여 볼 때, 돌궐은 하나의 제국을 이루고 지속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돌궐족 자신들과 스텝의 서쪽 국가들에 의해 쓰여진 튀르크(Türk)라는 말의 뜻이 최초로 나타난 것은 1072년 중세 튀르크 학자 카쉬가르 마흐무드가 그의 사전에 '강력하다'라고 기록하면서부터이다. 이 후로 많은 역사 학자들이 마흐무드(Mahmud)의 이 근거없는 민간어원론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이미 19세기말에 A. Vambery는 이 말의 동사 türe-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성된 것'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발표했으며 튀르크 언어학자들은 Vambery의 이론을 따르고 있다. 한편, 중국과 중국의 영향권에 있던 나라들은 튀르크족을 돌궐(突厥)이라 불렀는데 이 말은 중국인이 소위 북방 오랑캐인 튀르크족을 경멸하는 뜻으로 만들어낸 조어(造語)로서 튀르크(Türk)와는 별개의 말이다. 돌궐의 뜻은 "사나운 말 같은 큘(Kül)부족"이라는 뜻이다. 즉, 이 말은 돌궐족의 초기 부족명이 궐(厥), 즉 큘(kül)임을 암시하고 있다. 돌궐제국을 이룬 튀르크족은 흉노의 일파로 보여지며, 본거지는 알타이산맥의 외트켄(Ötken) 산으로 알려져 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부족을 튀르크라고 부르게 된 이유는 그들이 알타이 산록에 거주하였고, 알타이산이 투구처럼 생겨 그와 같은 의미의 이름을 붙였다고 하나 이것은 당시의 중국인들이 만들어낸 근거없는 이야기로 여겨진다. 이 부족의 원래 직업은 철공이었으며, 처음에는 연연의 복속국이었으나, 후에는 같은 알타이계 족속인 연연을 뒤엎고 제국을 건설했다. 이들은 스텝민족 사상 처음으로 취락을 건설함으로써 초원지대의 도시 건설 단계에 들어가게 되었다. (가) 돌궐제국의 성립(成立) 돌궐제국의 성립 역시 스텝제국의 전형적인 형태를 따라 지도력있는 한 개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돌궐제국은 부민(Bumin) 혹은 투멘(Tumen) 이라고 불리우는 고대 튀르크족 지도자에 의해 AD 545년경 건설되었는데, 그는 552년 서위(西魏)와 연합하여 연연을 멸망시킴으로 스텝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553년 부민이 사망한 후에 아들 무칸(Muqan)과 동생 이스테미(Istemi)가 동부 스텝과 서부 스텝을 나누어 다스리게 되었다. 동돌궐의 지배자는 전체 돌궐제국을 대표하는데 그의 왕호는 카간(Kagan)이며, 서돌궐은 형식상 동돌궐에 부속되어 있었는데 서돌궐의 통치자 관직명은 제 2의 통치자의 뜻으로 야부그(Yabgu)였다. 한편, 돌궐은 초기에 중국 사회가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세력을 키우며 침략을 통해 경제적인 부를 축척했다. 그러나 583년 통일된 수(髓)나라와의 충돌에서 패배하게 되고, 이미 내부분열로 인해 동서로 나뉘어져 있던 돌궐은 수나라에 의해 이용당하기 시작하였다.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략하다가 실패함으로써 나라가 멸망하게 되면서 이 시기를 이용하여 돌궐이 잠깐 부흥하였으나, 곧이어 등장한 당(唐)나라에 의해 반 세기 동안 지배를 받게 되었다. 683년에 이르러 쿠툴루그 일테리쉬(Kutlug Ilterish)에 의해 돌궐제국은 당나라의 지배하에서 벗어나 독립하여 제 2의 돌궐제국, 즉 후돌궐을 세웠다. 돌궐비문에 나타난 빌게카간, 큘테킨 등은 바로 이 후돌궐의 집권자들이다. 일테리쉬는 독립 후 10년만에 동부 스텝을 장악하고 제국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였다. 그러나 스텝 지역의 반복되는 역사에서 보여지듯이 돌궐의 통치 영역은 얼마 되지 않아 각종 유목민족 부족들의 세력 쟁탈전의 전장으로 변하여 극심한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742년에 바스밀(Basmil)부족이 우이구르, 카를룩 부족과 세력을 합하여 어린 나이에 카간이 된 돌궐의 마지막 왕 텡그리(Tengri)를 제거함으로써 돌궐제국은 공식적으로 끝이났다. 그 후 바스밀과 카를룩, 그리고 우이구르 사이의 세력 다툼에서 우이구르의 일테베르가 정권을 장악하여 자신을 카간으로 선포함으로 우이구르(Uygur)제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나) 돌궐제국의 구조(構造) 돌궐제국은 체계적인 정치기구를 갖추어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조직이 완전하지는 않았다. 예를 들어 왕에 해당하는 카간(Kagan)은 세습제였지만, 임명제도가 명확한 것은 아니었다. 이로 인해 부족들간의 싸움이 잦았고, 카간은 절대군주이긴 하였지만 중요한 결정은 혼자서 내릴 수 없었다. 군사조직은 다른 스텝 제국과 유사했으며, 그들의 전술은 급습이였다. 그들의 군사력은 카간의 지도력에 의해 그 세기가 좌우되었다. 유목민족 사회는 모계사회와 부계사회가 교체하며 존재했는데, 이는 유목집단이 흥왕할 때는 부계가 세력을 잡았고 쇠퇴기에는 모계가 세력을 잡았던데 기인한다. 이 사회의 가장 작은 공동체단위는 장(帳)이었고, 장이 모여 성(姓)을 형성했으며 성이 모여 한 부족을 이루었다. 부족을 이루는데는 그 부족이 소유하는 토지와 군사력이 필수였다. 한 공동체 혹은 국가가 형성되려면 이러한 여러 부족이 연합해야 했었다. (다) 돌궐제국의 대외관계(對外關係) 돌궐의 대외 관계는 과거의 스텝 제국들이 그러했듯이 주로 충돌과 전쟁의 관계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전쟁들은 경제적 이해관계가 얽혀있는 비단길에 대한 지배 문제와 많은 관련이 있었다. 역사적으로 중앙 아시아를 지배하는 민족은 중국과 비쟌틴제국과의 교역로를 지배했었다. 이때까지는 비단길을 통한 동서 무역이 페르시아계 소그드인(Sogdian)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소그드인들은 당시 중앙아시아 스텝을 장악한 제국에게 이익의 일부를 제공하는 방법으로 보호를 받아왔었다. 557년에 돌궐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협공하여 그동안 페르시아에 위협적이었던 아프카니스탄 지방의 에프탈리테(Hephtalites)를 붕괴시키고 그 영토을 동부 킨강산맥에서 부터 트란속시아나 지경까지 넓히게 되었다. 이리하여 중앙아시아 실크로드를 장악한 돌궐제국은 페르시아와의 무역 협정을 추진했으나 이에 실패하자 곧 이어 567년에 소그드인 비단업자 마니아크(maniakh)를 단장으로 비잔틴제국에 외교사절단을 보냄으로 이 때 돌궐과 비잔틴이 외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 오랫동안 페르시아가 이 교역을 장악해 왔었는데 돌궐제국이 등장하여 소그드 상인들을 지배하게 되자 페르시아와 돌궐제국은 불편한 적대관계가 계속되게 되었다. 초기에는 돌궐이 중국에서 산 비단을 페르시아에게 팔고 페르시아가 다시 비잔틴에게 파는 형식이 구상되었으나, 이러한 구상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돌궐은 비잔틴과의 직접 무역을 시도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직접 무역은 돌궐제국과 비잔틴제국간의 외교관계의 증진으로 발달했는데, 돌궐과 비쟌틴의 우호관계는 특히 전통적으로 페르시아와 적대관계에 있는 비쟌틴으로서는 동서에서 페르시아를 위협한다는 의미에서 전략적으로도 중요했던 것이다. 아바르인에 대한 기득권 문제로 비잔틴과 돌궐이 한때 긴장하기도 했으나 비교적 돌궐과 비잔틴의 관계는 무난히 계속되었다. 돌궐과 비잔틴의 호의적인 관계는 전통적으로 페르시아와 적대관계에 있는 비잔틴제국으로서는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돌궐과 비쟌틴과의 관계는 군사적 동맹관계로 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흑해 북부와 루마니아 지방에 있던 아바르(Avar)를 중간에 두고 돌궐과 비잔틴이 장기적으로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비잔틴제국은 기독교화하기 시작한 아바르를 자신들의 복속국으로 취급했으나, 돌궐은 전통적으로 아바르인들이 돌궐의 속민(屬民)임을 주장하며 나왔다. 학자들은 월지국, 연연, 에프탈리테, 아바르가 인종적으로 연관되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현존하는 자료에 의하면, 이들 국가들의 구성원이 대부분 인도-유럽계통의 토하르족(Tocharian)이라 추정되고 있는데, 그러나 이들 국가의 지배층은 알타이계 부족일 가능성이 많다. 한편, 돌궐제국의 중국과의 무역은 중국에게 말을 주고 비단을 가져오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이러한 무역에서 중국은 그렇게 큰 이득을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경우 돌궐이 그들의 물건을 가져다가 강제로 떠맡기듯이 하는 억지 무역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돌궐과의 충돌을 원치않은 중국은 대부분 그 요구에 응했던 것이다. 또한 중국은 자신이 대국이라는 의식속에서 돌궐이 가져온 물건을 조공으로 여겨 후하게 대접했다. 그러나, 비단길을 장악한 돌궐과 생산국인 중국과의 이러한 불균등한 무역 관계와 무역에 대한 양국의 개념 차이는 결국 양국 사이에 무력 충돌을 야기시켰다. 즉, 물량이 많은 중국은 돌궐이 무역품으로 가져오는 것이 비록 하찮은 것이지만 조공으로 생각해서 답례하는 형식으로 무역을 행했었는데, 돌궐은 순수한 무역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러한 개념의 차이는 돌궐이 더욱 더 불균등한 무역을 강요하자 충돌로 발전하게 되었던 것이다. (라) 이슬람교의 침투(浸透)와 탈라스 국제전(國際戰) 돌궐제국이 건설되던 당시에는 애니미즘적인 샤마니즘이 신앙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으나, 6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사이에 불교가 전래되었다. 7세기 초에는 서돌궐의 대다수가 불교를 신봉하게 되었다. 동돌궐도 비록 원로였던 톤유쿡(Tonyukuk)이 불교가 국민들로 하여금 전쟁을 하지 못하게 한다는 이유, 즉 스텝의 기질에 맞지 않다는 이유로 불교를 반대했지만 국민들 사이에서는 불교가 비교적 성행하고 있었다. 기독교의 경우 네스토리안 교도들에 의해 경교라고 불리우는 기독교가 전파되었으나, 별로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순식간에 아라비아반도를 통일한 이슬람 아랍인들은 7세기 중엽 사산조 페르시아를 무너뜨리고 페르시아를 이슬람화시킨 후5), 중앙아시아 스텝의 서쪽과 경계를 같이 하게 되면서 중앙아시아에 대한 이슬람의 영향을 증대하기 시작했다. 아랍 이슬람인들은 처음부터 전쟁을 통한 중앙아시아 지배나 혹은 포교를 목적으로 직접 포교자를 파송하지는 않았으며, 이슬람화된 페르시아계 무역 상인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이슬람이 전파되기 시작했다. 사실, 이때까지 타지역에 대한 이슬람의 전파는 한 지역을 무력으로 복속시키고 그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방법이었다. 8세기 중엽에 가서는 중앙아시아에 대한 아랍 이슬람의 영향력이 크게 증대되어 기존세력인 돌궐, 티베트, 당나라 등과 함께 아랍 이슬람 움마야드왕조도 세력 경쟁을 하게 되었다. 특히 움마야드왕조의 페르시아 지역 통치자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Qutaiba ibn-Muslim)은 서돌궐의 여러 부족을 점령하며 박트리아, 부하라, 사마르칸드지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때 돌궐은 제국 내부의 분열로 아랍의 침입을 방어할 힘이 전혀 없었다. 그리하여 자연스럽게 스텝의 서쪽 트란속시아나 사람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아랍제국의 중앙아시아 진출이 시도되고 있을 때, 당나라에서는 713년 현종이 즉위하여 팽창주의정책을 추진하고 있었고, 티베트제국 또한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팽창주의정책을 쓰고 있었다. 말하자면 돌궐제국이 쇠약해진 틈을 타서 주변의 세 제국이 팽창하려는 야욕을 품게된 것이다. 곧이어 734년 스텝제국 돌궐은 붕괴되고 그 뒤를 이어 튀르크계인 우이구르인이 스텝의 동쪽에 세력을 장악하여 우이구르제국을 형성하게 되었다. 747년 당나라는 고구려 출신인 고선지장군의 지휘하에 파미르고원으로 원정군을 파견하였고, 여기에서 티베트를 크게 물리쳤다. 750년 중국의 타쉬켄트 원정때의 잔인한 약탈행위는 그 지역 서부 튀르크인들로 하여금 압바스 왕조 칼리프에게 원조 요청을 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아랍 이슬람 압바스 군대는 중국과 사이가 좋지않은 티베트, 돌궐계 카를룩(Karluk)과 연합하게 되었고, 중국은 전통적으로 중국과의 관계가 좋은 튀르크계 우이구르제국과 연합하여 751년 여름 7월에 이들 동맹군과 중국-우이구르 연합군이 중앙아시아 타쉬켄트(Tashkent) 부근 탈라스(Talas)강 유역에서 충돌하게 되었다. 이 전쟁은 아랍-티베트-카를룩 동맹군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중앙아시아 심장부인 튀르키스탄(Türkistan)은 1세기 동안 티베트의 지배를 받게 되었고, 스텝 서부 트란속시아나는 압바스 왕조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다. 탈라스강의 전투는 중국과 중앙아시아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하였는데, 이로인해 이때부터 트란속시아나에서의 중국의 영향이 그치게 된 것이다. 또 이슬람교가 튀르크족의 군소국가들과 부족들에게 전해져 중앙아시아에 튀르크계 이슬람세계가 형성되고 역사 속에서 팽창하여 오늘날 거대한 이슬람세력으로 남아있게 된 것이다. 이로인해 그 후 튀르크 민족은 두 개의 상이한 지역으로 구분되어 각각 서로 다른 역사를 가지게 되었다. 서튀르크족은 이슬람의 영농정착국가로 변화하였고 후에 셀추크(Selchuk)제국을 건설하여 중동과 페르시아의 이슬람 보호자로 군림하게 되었으며, 동튀르크와 중부튀르크는 스텝 전통을 유지하며 불교를 믿다가 후에 몽골이 등장하여 세계를 정복할 때 그 근거지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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