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정-한자의 음독과 훈독
내 고향이 제주도이므로 펜이 안으로 굽는 대로 제주도 이야기부터 하겠다.
제주도방언은 한국어와 일본어 사이에 놓여 있는 살아 있는 유일한 다리언어이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은 한국어와 일본어가 분리되기 이전 언어인 한일공통조어에 대한 감각을 어느 정도 지니고 있는 유일한 사람들이며 그 중에 누군가가 살아 숨쉬는 감각으로 그 조어의 재구성을 실현할 수 있기를 바라나 최근 들어 제주도의 신세대들이 정보화 시대의 영향으로 제주도 고유방언구사의 능력이 희석되고 방언구사집단이 차츰 순수성을 상실하며 해체되어 가고 있다는 점은 그지없이 안타까운 일이다.
어린 시절을 반추해 보면 시골에 계신 할머니와 할아버지 그리고 동네 어르신들이 쓰던 사투리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거의 하나의 독립적(?) 언어에 가깝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한국이나 만주지역 또는 몽골 대초원에 있는 다른 지역들(만주지역언어는 사멸했다.)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많은 언어상의 변화를 거듭해 왔지만 유달리 제주도는 예부터 사면이 바다에 둘러싸여 있어 언어의 보존성이 뚜렷하여 일본열도까지 아우르는 동북유라시아의 알타이어족 거주지역 중에 유일하게 고대알타이조상어의 원형을 일본어와 함께 가장 잘 간직하고 있는 언어라 할 수 있다. 추론컨대 옛 알타이조어는 `ㄴ, ㅇ`받침 등을 제외하고 받침의 발음이 후성으로 흘러 넘어가는 체계로 현재의 일본어와 유사한 발음이었을 것이다. 한국어의 발음에 최초의 큰 변화(`제 1 변화기`라 칭하자)가 일어난 것은 중국인들과 접촉하고 한자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일대일 대응식으로 단자단음표기의 원칙아래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중국한자를 우리말에 도입하면서 가장 편리하고 변별력이 뚜렷한 방법은 하나의 문자를 하나의 명확한 발음으로 표기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한 개의 한자를 둘 또는 세 개의 음으로 표현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번거로웠을 것이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말에도 단음화 응축현상이 자연스레 일반화되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연개소문`은 `엔가이쇼먼`이나 `엔괴쇠믄이‘에 가까운 발음이었을 것이다. 덧붙여서 우리는 아메리카인디언이 사람의 이름을 합성하여 짓는 방법에 주목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목 알타이어족은 사람의 이름을 지음에 있어 그 사람이 사는 주거지역의 특징에 특정한 행동양식을 합성하거나 또는 아이가 자라나 특정 유형의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는 부모의 마음에 주어+술어의 순서로 합성하여 남자의 경우에는 양치기의 우수성이나 앞서 싸우는 용감한 전사나 훌륭한 매잡이 사냥꾼이나 백발백중 활잡이나 지리에 밝은 이, 또는 점술에 능한 자 등등으로 여자의 경우에는 솜씨 좋은 요리사나 양젓술 잘 빚는 이나 가죽옷 잘 만드는 이나 아이 잘 키우는 이 등등으로 명명하였으며 후대에 들어 술어부분에 간단한 명사화 성분이 추가되었을 개연성이 높다. 굳이 예를 들면 남자의 경우에는 `말 타고 활 잘 쏴`에서 `말 타고 활 잘 쏘는 이`로, `가죽옷 잘 지어`에서 점차 `가죽옷 잘 짓는 이`로 변화했을 것이다. 그 후 몽만한인(거주의 시기순으로 언급. 몽골 부근의 대초원에서 만주 및 한반도에 흩어져 살던 우리 조상의 여러 부족들)은 중국개명문화와의 접촉의 직접성에 의해 음독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와는 반대로 최초로 한자를 일본에 도입한 초기 일본의 지배층을 구성했던 한반도 출신의 도해인들은 한자전래의 간접성에 의해 훈독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이 일본어에 고언어가 살아 숨쉬는 아이러니가 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동북알타이조상어의 특성을 잠깐 살펴보고 넘어가기로 하자. 그 방법은 현재의 후알타이 제 언어에서 유추할 수밖에 없다.
한 예로 일본의 어느 유수기업의 명칭은 `시미즈(淸水)`이다. 우리말로는 `샘물`에 해당하며
그 고대어형은 `쇠미`이며 `무르`는 어의중복에 해당한다. 왜냐하면 `쇠미`는 새어(솟아) 나오는 물이라는 뜻이기 때문이며 `쇠미`-`쇠미+즈`/`쉬미+즈`에서 나왔다. 우리말에 `연못`의 뜻은 연(蓮)이 자라는 못(`못`-`묏`-`뫼+즈)`의 뜻이다. 따라서 샘물의 추론적 고언어형태는 `쇠미+반치음 스(즈)`이며 여기에 가장 가까운 현대어는 일본어 `시미즈`이다. 어쩌면 `무르`(물) 또는 `미르`는 떠낸 또는 흐르는 물을 뜻하고`묏, 밋` `미즈`(못)는 고인 물을 뜻하였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고대인들은 현재의 제주도사람들이 주위의 사물을 일컬을 때 `~주(게)`라고 하는데 예를 들어 어두운 밤중에 근처 덤불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사람이주(게) 짐승이라?`(사람이지 짐승이랴?)라고 한다. 고대인들은 `저것은 샘이지(쇠미즈)`라고 명명했을 지도 모른다. 즉 일본어의 `시미즈`에 붙은 `즈`는 명사에 붙는 어미였을지도 모른다. 모든 사물의 명칭에 붙어 있던 우리말의 ‘ㅅ’에 해당하는 성분이 일부 일본어 명사에 아직도 화석처럼 남아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한국어의 점진적 제 2 변화기는 (왕조시대에 유일한 지식계급이었던 사대부계층이 명료한 단자단음의 해석방식을 적용했던 한문위주의 의사표현에 전적으로 의존한 점이 한문을 고급언어로, 전래의 우리말은 늘어지고 상스러운 저급언어로 암암리에 규정짓는 경향이 궁중과 사대부계층에 심리적으로 자리잡아 지속적. 잠재적으로 하향적 압력으로 작용하다,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임진왜란 이후의 사회변화기를 겪고 외국과의 교류의 점진적 확대와 완만한 경제 발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구의 증가에 의해 의사소통의 빈도가 잦아졌고 결국에는 발음이 명료화의 한 단계로 까다로운 발음의 단순, 압축화와 그런 경향의 일부로 까다로운 복모음의 단음화가 서서히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그러다 외국열강들에 의한 문호개방의 충격에서 비롯된 가속적인 서구화가 이전 어느 시대보다도 옛스러운 복모음의 단모음화를 가속화시켰다. 아마도 서구문물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초기인 1920 ~ 1930년대 이후에 도회지인 서울의 지배적 중상류 식자층은 명료한 단자단음의 표기 및 해석방식을 적용했던 한문위주의 의사표현과 문물의 표기에 전적으로 의존하다 보니 의사소통의 간명한 신식성을 중시하게 되었고 그것이 마치 유행처럼 서서히 일반인에게 고급스런 서울식 표준발음으로 마음 속에 자리잡았고 그 결과 고래의 복모음을 촌스럽다거나 상스럽다고 느끼게 되어 일부 복자음과 대다수 복모음이 역사상 유례없는 퇴조의 길을 걷게 되어 현재는 일부 저속어나 은어 또는 대다수 사투리의 노인층에 남아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을 뿐이다.
덧붙여 말하면, 우리가 선입견을 갖고 있는 완전히 사라진 발음은 훈민정음 창제 이후에
4개(여린 비읍, 반치음, 옛 이응, 옛 히읗)이고 1개(아래아)는 제주도지역에서만 사용되고 있어 사멸 직전 단계에 있다. 그러나 우리말 표기가 과학화되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던 훈민정음 창제 이전에도 한문문화의 영향으로 제 수명이 다하여 다수의 고유음가가 사라졌음은 명약관화하다. 훈민정음 이후에만 유독 사라진 음가의 소실이 있었고 그 이전에는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음가의 증발이 없었다고 하기보다는 적지 않은 고유발음이 아무리 적어도 2개에서 6개까지 많게는 10여 개까지 사라졌다는 추론은 가능하다.(우리말에서 표기가능하나 전혀 사용되지 않는 글자가 꽤 있다. (`슈 + 에`의 경우가 그러하며 소/쇠(牛)의 옛 발음은 `슈+에(아래아 포함)` 가까운 것으로 추정되는데 제주도에서는 오늘날에도 노인들이 `소`를 `슈 + 에`에 가깝게 발음한다.)
그 이유는 한자의 도입이 우리말에 끼친 영향이 누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컸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를 한 가지만 든다면 우리는 삼국시대 이전의 우리 조상의 정확한 성명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삼국사기에 나오는 조상들의 이름이나 관직명은 모두 한자어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대)막리지, (대)대로, 간지, 개로(왕), 유리(왕), 이사금[곰], 차차(웅), 흑치상지, 등등의 명칭은 우리말이 거의 주가 되고 관직명 대,왕,웅 등의 한문이 덧대어져 있을 뿐이다. 그리고 성씨의 경우에도 처음에는 매우 다양했으나 한자가 도입되면서 점차 축소되고 고정화되었을 것이다. 타임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돌아가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우리 조상명을 정확히 들을 가능성은 없다. 다만 깊이 있는 추론적 연구와 우연한 고서의 발견이나 체계적인 능묘의 발굴로 접근의 노력은 가능할 것이다.
일본어는 동북아의 선사알타이음이 비교적 잘 보존된 살아 있는 화석에 가깝다. 한국어나 일본어를 공부하는 외국인들은 한국어는 받침의 발음과 변성적 후속음가 때문에, 그리고 일본어는 한자어간에, 한자어와 고유어간에 또는 고유어간에 동음이의어가 너무 많아서 골치를 앓고 있다.
한국어를 공부하는데 있어 애로사항의 원인은 한자도입기의 단자단음표기의 영향으로 인한 단음화 응축현상 때문임을 밝혔다. 그러면 일본어를 공부할 때 대두되는 어려움은 어데서 비롯된 것일까? 간단하다. 그것은 한자의 간접전래로 인한 음독에 기인한다. 한문은 뜻글자의 특성상 한 글자 한 글자가 하나의 소우주라 할 만하며 상형글자의 특성상 글자만도 몇 십만 자에 달함은 물론 그 조합은 극히 복잡다단하다. 문명의 시작이 상대적으로 빠르고 농경문화가 일찍이 정착되었고 철학적, 개념적, 추상어가 많았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일본은 본토인 한반도의 동족과 마찬가지로 단어의 수가 많지 않았고 그나마 거의 구상적인 단어들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적은 범주의 고유언어군으로 커다란 범주의 한자어군을 더구나 훈독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골치가 아플 일이다. 결국 수다한 동음이의어의 양산은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을 것이다. 거기에다 소리나는 대로 적는 특성이 일조를 한 것도 사실이다.
*언젠가 먼 미래에 순우리말 종성자음 중에 `ㄷ,ㅌ 계열/ㅅ, ㅈ, ㅊ 계열/ ㅋ, ㅌ, ㅍ, ㅎ 등이 먼저 후성화하고 그 이후에 일부의 `ㄱ, ㄹ` 도 후성음화될 수도 있다. (물론 한자어는 극소수를 제외하고 뜻글자의 명료성을 그대로 유지할 것이며 그러면 많은 받침이 후성화된 순우리말이 한자어의 명료하게 고정된 발음을 부드러이 감싸 안는 형국으로 문장이 구성되면서 동시에 상호변별력을 유지하고 문장의 의미를 파악하는데 동음이의어의 범람으로 인한 문의 파악의 어려움이 크게 증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훈민정음은 인간의 언어발달사상 중세라는 비교적 늦은 시기에 발명된, 즉 중세사람이 만든 인공기호라는 점에 있다. 교착어의 어근과 어간의 음가를 명확히 해 주기 위해 그 시대에 한글창제에 관여했던 명석한 학자들은 뚜렷한 시각적 변별성을 위한 기호논리 아래, 아득한 옛날부터 소리나는 대로 자연스레 사용되어 온 동부아시아 알타이어의 한 갈래인 우리말의 꼬리(어미, 조사)앞에 있는 머리(어간, 어근)를 볏짚단처럼 엮었다. 한글의 과학적 표기체계에 비추어 이 것은 매우 합리적이면서 동시에 기계적이다. 어쨌든 가장 자연스러웠던 옛 시절의 우리말로 우리 글은 결국 근접하게 될 것이다. 세계화가 이루어지면 우리 글의 번거로운 자음받침의 사용은 우리 후손들이나 의욕적인 외국인들에게 많은 시간의 낭비를 초래하면서도 그 댓가로는 겨우 해석적 논리의 시녀로만 남아 있을 것이다. 훈민정음의 자음바침은 한 번도 실용화 되어보지 않은 채 편리한 사용의 효용성을 염두에 두지 않은 중세의 학자적 논리에 의해 발명된 것이기 때문이다. 가능한 범위네에서 순우리말을 소리나는 대로 쓰는 문제는 세월과 효용이 해결해 줄 것이다.
*제주도 방언의 감각을 웬만큼 물려받은 나는 어쩌다 일본어를 대하다 깊고 아득한 전율감을 많이 느낀다. (사실 나는 일본어를 거의 못한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아득한 동북아의 벌판 한가운데 어느 초원에 발을 내딛는 듯한 느낌이 들 때가 많다. 이제 겨우 기초일본어 책 한 권을 이따금 쳐다보고 있는 데도 그렇다. 확실한 직감은 일본어의 어의구성이 원시알타이조상어의 그것처럼 놀라울 정도로 원초적, 구상적, 비추상적이며 더욱 놀라운 사실은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면 유치하다 싶을 정도의 어원도 비일비재하다는 사실이다. 한자를 음독한 것이 원시고유어를 지켜낸 아이러니가 된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특성을 가진 일본어를 모국어로 하는 일본인들조차 모르고 한국의 현대인 특히 젊은이들도 직감할 수 없는 일본어의 비밀을 나 같은 제주도 섬사람이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제주도와 일본은 둘 다 외부로부터 단절된 섬이며 외부언어의 변천에 둔감했다는 사실이다. 즉 한국어와 일본어가 사촌관계라면 일본어와 제주방언은 형제관계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흔한 예로 제주방언에 -수꽈?(-습니까?), -마씨?(-말입니까?). -시녜.(-는데) 등이 일본어에서는 -스까?, - 마쓰?, -스네. 등으로 쓰인다. 물론 한반도의 한국어도 어느 정도 비슷하며 특히 함경도방언에 등장하는 `-댔시오`는 일본어의 `-데쓰`, `-데쓰네`와 유사하다는 점과 일본어의 억양이 경상도의 억양과 비슷하다는 주장은 역시 흥미로운 일이다. 함경도방언의 ‘-댔시오’가 제주도에서는 ‘-댄마씨’로 쓰이는 점도 흠미롭다.
사견을 전제로 유추해 보면 선사시대 일본으로 건너간 선도래인의 몇 차례의 파장은 지정학적으로 보아 태백산맥 동쪽의 경상도와 강원도 영동지방과 함경도의 선주인들이 주류를 이뤘을 것이다. 도래의 제 1단계는 북방에서 유목민족이 남하를 시작하기 오래 전부터 남하의 진행기에 이르기까지 한반도에 선주하여 살았던 선주민들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그들은 일본의 선주민인 선조몬 계통의 선조였을 것이며 그들은 그 당시 항해기술의 미발달로 태백산맥 동쪽과 남쪽에 거주했던 부족의 일부가 통나무를 엮은 떼를 타고 동해해류의 움직임을 따라 일본의 구주와 혼슈남단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도래의 제 2 단계는 기원전 10-4세기에 걸쳐 북방에서 남하한 장골의 기마유목민족들이 한반도 전역의 선주인들을 점진적으로 정벌하고 지배하여 초기 부족국가를 제각기 형성하게 되었는데 그들이 한반도를 거의 장악하고 서로 대치하는 과정에서 패배한 부족들의 일파나 개척민들이 이전의 반도 선주민인 선조몬인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열도로 진입하였을 것이다. 그들의 출발지역은 비교적 발달된 판자조선술로 한반도 남부의 삼한지역과 영동지역 및 함경도 해안지역이었을 것이다. 거기에서도 한반도와 마찬가지로 인류사의 흐름은 되풀이되어 후도래인인 기마유목민족이 우수한 병기와 기마전술로 일본열도의 조몬인들을 압박하며 북쪽으로 밀어내고 혼슈 중남부와 구주, 이어 시코쿠지역에 야요이인으로 정착하여 점차 야요이문화를 형성하게 되었다. 한반도 북부에 설치된 한사군과 토착 만한인의 대립도 일본유입을 촉진하는 간접적인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야요이문화는 일본왕족형성의 토대가 되었으며 최초에는 세력을 분점한 부족장간의 선발로테이션으로 임명되다가 차차 가문혈통의 결합을 통해 일권적 형태로 안정화되었을 것이다. 그 후 불교의 한반도 전래를 전후해 지정학적으로 불리함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교류가 가능할 정도의 원양항해 기술을 축적한 백제의 선진문화가 왕족과 귀족, 그리고 승려와 과학자들을 일본으로 진출시켜 일본의 문화부흥에 크게 이바지하면서 왕족과 지배계층에 고구려나 신라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인구를 이식하게 되었고 마침내는 일본의 귀족과 왕족의 주류혈맥을 이루게 되었다. 그 결과 백제와 일본은 동맹국의 기틀을 확고히 다졌으며 백제가 고구려나 신라의 외침을 받아 위기에 처할 때마다 선조국에 대한 혈맹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백제멸망 직전에는 동진강 하구에서 백제일본연합군과 라당 연합군 간의 대해전에서 전자가 패하여 백제는 멸망하고 그 왕족과 지배계층의 유민들이 일본으로 향한 마지막 대이주가 이루어졌다. 일본인들이 한국을 경원시하게 된 첫째 이유는 동맹혈연국인 가야와 백제가 멸망한 舊怨(잊을 수 없는 옛 원한)이 대대로 작용하였다는 점이 없지 않았고 따라서 일본을 누대로 통치해 온 가야와 백제계 일본 왕실의 입장에서 한반도는 하나의 실지(失地)로 여겨졌음은 당연지사이다. 그들의 고대 이후의 한반도에 대한 일방적 역사기술은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다. 아마도 짐작컨대 고서기나 일본서기의 저자는 가야나 백제계 후손임이 틀림없다. 그가 신라계의 후손이라면 조상의 나라에 대해 그런 편향적인 역사기록을 남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본이 누대에 걸쳐 한반도인들을 원망하고 증오해 왔다는 사실은 패망한 가야와 백제의 유민이 명백히 일본 지배계층의 주류를 형성했다는 점을 반증한다. 최근에 일본왕이 고대 어느 일왕의 어머니가 백제계임을 사석에서 밝힌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니며 빙산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다. 백제계는 세월이 흐를수록 가야계의 바탕에 혈연의 농도를 높여 완전히 왕족의 주류를 형성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현 일왕이 고대 일왕이 백제를 향해 지어 말년에 백제를 그리워하며 그곳에서 운명했다는 백제궁과 근처 백제사 터를 방문하게 된다면 어떤 심정을 느낄지 자못 궁금하다. 선조들이 잃어버려 떠나온 옛 가야와 백제의 영광과 영토를 생각하게 될까? 아니면 그 곳에 남아 살고 있는 한반도인들을 일선동체의 미명하에 동족으로 생각할까? 아니면 한 뿌리의 혈연끼리의 깊게 패인 원한의 골을 바라보고 있을까?
*Cheju-do dialect is the only living bridge-language between the Korean language and the Japanese langu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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