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시에 대한 생각
-엘리엇 킴
시의 길이는 차라리 과불급이다.
시는 발상에 맞는 길 이를 지녀야 한다.
너무 짧은 글은 단단한 바위와 같아 느낄 수는 있으나 속을 훤히 깨닿기 힘들다.
짧은 시는 때로 시인 자신이 가 닿을 수 없는 경지를 말하기 위함이다.
긴 시는 신들린 듯이 흘러간다.
그것은 무당이 춤추는 굿과 같다.
긴 시의 주조는 음류성이며 남겨지는 것은 완성이라는 각화된 껍질이다.
긴 시의 속은 언제나 흐르고 있다.
시에서 적정한 길이를 체득하면서 동시에 그만큼의 정확한 발화를 했던 문인은
내가 아는 한 'Shakespeare'가 대표적이며 그는 완성이 지향이며 절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한 정신의 균형미는 이미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는 타고난 각성자(깨달은 사람)이다.
중국의 시인들은 뜻글자인 한자의 단단한 함축성과 그 짧은 꼬리인 성조의 메아리에 제약을 받아
소리글자에 고유한 펼침의 미학을 누릴 수 없었다.
표의문자인 한자는 글자 하나하나가 소우주이면서
동시에 하나하나가 닫힌 알틀이기도 하다.
특히나 중국시인들의 표현방식은 그들의 뛰어난 시적인 안목의 깊이와 넓이에도 불구하고
현대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커다란 천편일률에 해당하며 전면개방적인 다양성이 결여되어 불합리하면서 비과학적인 면이 있었다. 시에도 과학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한국문학사에서 1920년대 이후에 한자의 마지막 과도세대에 속하는 시인들이
최초로 한시에 해당하는 내용을 현대적 의식하에 소리글자로 펼쳐 썼다.
그 과도시대의 그림자는 최근까지도 길게 드리워져 있다.
한용운은 불교와 선을 통해 구도와 깨달음의 시를 썼다.
그가 우리말로 쓴 님을 향한 그리움의 시들은 가감없는 절창의 한 경지를 깨닫게 한다.
김소월은 한국역사에 대대로 어려 있는 한의 정서를 읊었다.
이 두 시인의 우리말 표현방식은 우리말의 언어미학을 심화시키고 고양시켰다.
두 사람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우리말에 내재되어 있으나 아직도 드러나고 있지 않은 아름다움의 거대한 독보적 성채를
각각 마음껏 펼쳐이룰 수 있었으리라.
이상은 죄절과 초월이 뒤섞인 색다른 한 형상이다.
정지용, 청록파 시인들, 윤동주, 청마 유치환, 서정주, 김수영, 고은 등은
현대 한국시의 형성에 독자적인 기여를 하였다
정지용은 한국현대문학의 귀틀을 놓았다 할 수 있을만큼 엄정하면서 단결한 문체를 사용하였다.
그는 기독교적인 인간미와 유교의 기개를 서정화하였다.
이러한 점을 벗어버린 향토시인 '향수'가 그의 대표적이라는 점은 한국시사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박목월은 자연과 인성이 아름다운 노을 속에 공존하는 소박성과 향토미를 서정적으로 노래하였다.
윤동주는 인간심성의 순수미와 자연의 소박함을 아우르며 노래하였다.
청마 유치환은 애상의 도를 노래하였다.
서정주는 민속적, 주술적 감성과 유불선 사상이 혼재되어 있다.
그것은 한국인에게 원류적이다.
그의 시는 한국인에게 주어진 종합선물세트 한 상자에 해당한다.
그의 시가 당대 최고라는 수식은 앞서 지나가고 있는 세대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라 여겨진다.
시인 고은은 불교의 선사상과 민중의식의 겹무늬를 지니고 있다.
초기의 불교사상과 후기의 민중의식-이 두 가지 요소의 상호융화가 요구되었다.
그가 여러가지 실험을 통해 다양한 색채를 띄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런 충고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이미 과거에 대한 충고가 될 것이다.
최근의 시인들 중에 이렇다 할 출중한 시인이 있다는 생각은 그다지 없다.
그들은 앞서 언급한 이전 시인들이 지녔던 정서의 폭과 깊이에 다다르지 못하고 있다.
40대 이상인 현대 한국시인들의 정서적인 아이러니는 다음과 같다.
그들이 나고 자랐던 고향이 서구적인 현대 물질문명에 의해
가능한 범위 내에서 인공화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좁은 국토의 난개발화는 과도기에 해당하는 동시대의 쓰리고 슬픈 현실이다.
그것은 개발도상국가의 사람들이 처한 피치못할 정서적인 상실감이자 현대사회의 비극이라 할 수 있다.
인간감성의 정체성은 동심의 고향이다.
고향에 대한 상실감은 메우거나 극복할 수 없는 상처이며 여생에 남을 마음의 흉터이다.
그 흉터가 정신적인 불안과 방황의 마음에 낀 녹처럼 남아 있는 시대적 상황에 살고 있는
이 시대 한국인들과 한국적 정감을 노래하는 한국의 시인들은 불행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진정한 시는 이러한 과도기적인 상황을 초극하는
세계적인 정신성의 소산이 되어야 하리라는 생각을 해 본다.
동양의 정신성과 서구 물질문명의 첨예한 대립에서 빚어낸 화합의 미학이
이땅에서 문학적으로 탄생한다면 한국문학사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귀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현 시대의 한국시가 전반적으로 근본에서 이탈해 있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마치 호랑이 없는 골에 토끼들이 있는 격이라고나 할까?
(2007년 대치동에서 엘리엇 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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