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자가 말하는 뿌리언어에 대하여(On Seekers' Root Language)
-엘리엇 킴
인간활동에 어떤 분야의 언어도 최상화하면
결국, 언어의 주술성에 귀의하게 된다.
종교적인 언어,
철학적인 언어,
예술적인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엄밀성과 정확성을 추구하는 과학의 합리적인 언어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거대구성체나 미시체계 또는 파악하기 힘든 현상에 대해 언급할 경우에
발견되지 않은 과학적 신비의 영역에 대해서는 언어의 주술성을 필요로 한다.
과학의 맹점은 모든 것을 명명백백하게 밝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과학은 결국 맹인이 될 수 있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할 수도 있다.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바꿔 말하면 과학은 과학을 낳은 인간정신을 '앞질러서(preceding)' 지배하지 못 한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앞질러서(preceding) 지배하지 못 한다는 점에서 연유한다.
물론 과학의 효용성이 인류문명체계에 가속적이고 편의적인 발전을 낳고
물질과 현상에 대한 실증의 지평을 최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미명하에
과학이 때로 온화한 인류정신에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는 점,
과학이 인류문화의 발전에 순행적이지만은 않아
정신의 작은 엇박자들이 동일파고로 집산하여
거대한 엇박자의 해일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우려하여 경계해야 할 과학적인 가능성이다.
언어에서 주술성을 배제시키면
인간의 언어는 무척추동물처럼 연체화하게 된다.
그러한 언어는 '수정되지 않은 언어'이다.
예술적 언어와 다른 분야의 언어 간에는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다른 언어는 주술성에 귀의하는 순간에 종착한 듯이 머무나
예술적인 언어는 주술성 안에서 비로소 피어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예술의 정자만이 유일하게 근원의 난자로 들어가 수정을 할 수 있다.
구도에 관한 언어도 그러하다.
경지에 대한 언술은 예술적이다.
예술은 어떤 획정된 인간활동의 한 분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예술은 통합적이어 상징적인 언어로 근원을 묘파하거나 은연히 드러내거나 때로 일목요연하다.
그것은 '암중모색'이 아니라 '은중지경' 혹은 '대오일갈' 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언어나무 혹은 예술나무를 대하고
뿌리와 줄기와 가지의 갈래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비본질적이다.
진정한 구도자는 은유와 상징을 터득하고 내면화하여 불시에 이해하고 말한다.
그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주와 그에 속한 삼라만상과 나누는 언어, 즉, 하나뿐인 '우주적인 언어'이다.
광의적인 언어(말, 다른 예술행위, 침묵)는 도를 이해하고 느끼고 깨닫는 데에 매개적인 역할을 한다.
언어를 말하는 것은 마음의 교통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의 교통이 그것이다.
자연과 인간, 신과 인간은 수용적인 관계이지 균등한 상호소통의 관계는 아니다.
물론 여기에 계시적인 존재자가 중재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경우에 계시자는 신탁적인 내용을 언어를 넘어선 언어로 전달한다.
이 언어를 넘어선 언어는 직설적이지 않아 외견상 불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는 듯하나
애매모호성(ambiguity)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언어는 언어의 직접적인 전달과 소통을 넘어서
이미 있는 존재와 현상의 근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문과 답변의 언어이다.
그것은 일종의 '언어의 뿌리', 즉 '존재의 뿌리가 뻗어 나오는 언어'이다.
이런 면을 고려해 볼 때,
근원에 대해 아득히 지향적이면서 동시에 편재적인
일종의 보편적 설명(a Kind of universial explanation)은
개별성을 띄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어긋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투리를 쓰든, 외국어를 쓰든,
코믹한 언어를 쓰든, 비감한 언어를 쓰든,
서릿발의 언어를 쓰든, 비단결의 언어를 쓰든,
노래를 하든, 그림을 그리든,
수화를 하든, 묵언을 하든,
어떤 제행무상의 언어를 쓰든지 간에
그것은 개성적인 발화체계일 뿐이며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효과를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고
아예 언어습관이 그러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한 언어적인 개성은 보다 많은 대중의 교화에 이바지할 수는 있으나
전달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다.
보편적인 언설은 근원적인 의문과 답변이며
근원과 그에 속한 것을 설명하는 데에는 근원적인 언어, 즉 '언어의 뿌리'가 사용된다.
그것은 이미 해석을 넘어서 있다.
득도를 한 수도자는 근원을 헤아리면서
동시에 '말의 뿌리'가 근원에 닿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이러한 '뿌리의 언어' 사용에 절로 익숙해진다.
설령 득도자가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알기 쉬운 언어, 사회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해도
그것은 뿌리의 언어에서 나온 것이며
그 말들은 깨달음을 알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미혹심과 삶에 대한 부조리 의식을 교화하여
인류의 구원을 위한 도구언어,
즉 '뿌리에 대한 간접적인 언어구사'를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근원, 즉 뿌리에 대한 간접적인 언어는 바로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언어이다.
그런 간접적인 언어의 구사는
측은지심의 언어, 배려의 언어, 화합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예술성의 언어는 불확정의 영역, 혼의 영역을 노래한다.
그것을 도의 영역이라 일컫는 것은
종교와 예술의 차이점을 먼저 의식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도를 깨달은 사람은 한치의 말도 어긋남이 없다.
도에 속하면 이미 깨달아 배우지 않으며
모든 말의 뿌리도 거기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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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60131)
-엘리엇 킴
인간활동에 어떤 분야의 언어도 최상화하면
결국, 언어의 주술성에 귀의하게 된다.
종교적인 언어,
철학적인 언어,
예술적인 언어도 마찬가지이다.
심지어 엄밀성과 정확성을 추구하는 과학의 합리적인 언어도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거대구성체나 미시체계 또는 파악하기 힘든 현상에 대해 언급할 경우에
발견되지 않은 과학적 신비의 영역에 대해서는 언어의 주술성을 필요로 한다.
과학의 맹점은 모든 것을 명명백백하게 밝힐 수 없다.
그런 점에서 과학은 결국 맹인이 될 수 있는 운명을 타고 났다고 할 수도 있다.
과학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지는 않는다.
바꿔 말하면 과학은 과학을 낳은 인간정신을 '앞질러서(preceding)' 지배하지 못 한다.
그것은 인간이 자연을 앞질러서(preceding) 지배하지 못 한다는 점에서 연유한다.
물론 과학의 효용성이 인류문명체계에 가속적이고 편의적인 발전을 낳고
물질과 현상에 대한 실증의 지평을 최대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학이라는 미명하에
과학이 때로 온화한 인류정신에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는 점,
과학이 인류문화의 발전에 순행적이지만은 않아
정신의 작은 엇박자들이 동일파고로 집산하여
거대한 엇박자의 해일이 될 수도 있다는 점은 우려하여 경계해야 할 과학적인 가능성이다.
언어에서 주술성을 배제시키면
인간의 언어는 무척추동물처럼 연체화하게 된다.
그러한 언어는 '수정되지 않은 언어'이다.
예술적 언어와 다른 분야의 언어 간에는 한 가지 차이점이 있다.
다른 언어는 주술성에 귀의하는 순간에 종착한 듯이 머무나
예술적인 언어는 주술성 안에서 비로소 피어난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예술의 정자만이 유일하게 근원의 난자로 들어가 수정을 할 수 있다.
구도에 관한 언어도 그러하다.
경지에 대한 언술은 예술적이다.
예술은 어떤 획정된 인간활동의 한 분야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예술은 통합적이어 상징적인 언어로 근원을 묘파하거나 은연히 드러내거나 때로 일목요연하다.
그것은 '암중모색'이 아니라 '은중지경' 혹은 '대오일갈' 이라 할 수 있다.
어떤 언어나무 혹은 예술나무를 대하고
뿌리와 줄기와 가지의 갈래수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비본질적이다.
진정한 구도자는 은유와 상징을 터득하고 내면화하여 불시에 이해하고 말한다.
그것은 개인의 능력이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우주와 그에 속한 삼라만상과 나누는 언어, 즉, 하나뿐인 '우주적인 언어'이다.
광의적인 언어(말, 다른 예술행위, 침묵)는 도를 이해하고 느끼고 깨닫는 데에 매개적인 역할을 한다.
언어를 말하는 것은 마음의 교통이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인간과 신의 교통이 그것이다.
자연과 인간, 신과 인간은 수용적인 관계이지 균등한 상호소통의 관계는 아니다.
물론 여기에 계시적인 존재자가 중재 역할을 하게 된다.
이 경우에 계시자는 신탁적인 내용을 언어를 넘어선 언어로 전달한다.
이 언어를 넘어선 언어는 직설적이지 않아 외견상 불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는 듯하나
애매모호성(ambiguity)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언어는 언어의 직접적인 전달과 소통을 넘어서
이미 있는 존재와 현상의 근원에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진정한 의문과 답변의 언어이다.
그것은 일종의 '언어의 뿌리', 즉 '존재의 뿌리가 뻗어 나오는 언어'이다.
이런 면을 고려해 볼 때,
근원에 대해 아득히 지향적이면서 동시에 편재적인
일종의 보편적 설명(a Kind of universial explanation)은
개별성을 띄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어긋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투리를 쓰든, 외국어를 쓰든,
코믹한 언어를 쓰든, 비감한 언어를 쓰든,
서릿발의 언어를 쓰든, 비단결의 언어를 쓰든,
노래를 하든, 그림을 그리든,
수화를 하든, 묵언을 하든,
어떤 제행무상의 언어를 쓰든지 간에
그것은 개성적인 발화체계일 뿐이며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의 효과를 염두에 둔 것일 수도 있고
아예 언어습관이 그러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러한 언어적인 개성은 보다 많은 대중의 교화에 이바지할 수는 있으나
전달하고자 하는 근본적인 내용과는 별 상관이 없다.
보편적인 언설은 근원적인 의문과 답변이며
근원과 그에 속한 것을 설명하는 데에는 근원적인 언어, 즉 '언어의 뿌리'가 사용된다.
그것은 이미 해석을 넘어서 있다.
득도를 한 수도자는 근원을 헤아리면서
동시에 '말의 뿌리'가 근원에 닿아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이러한 '뿌리의 언어' 사용에 절로 익숙해진다.
설령 득도자가 보통사람들이 보기에 알기 쉬운 언어, 사회적인 언어를 구사한다 해도
그것은 뿌리의 언어에서 나온 것이며
그 말들은 깨달음을 알리고 보다 많은 사람들의 미혹심과 삶에 대한 부조리 의식을 교화하여
인류의 구원을 위한 도구언어,
즉 '뿌리에 대한 간접적인 언어구사'를 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다.
근원, 즉 뿌리에 대한 간접적인 언어는 바로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적인 언어이다.
그런 간접적인 언어의 구사는
측은지심의 언어, 배려의 언어, 화합의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예술성의 언어는 불확정의 영역, 혼의 영역을 노래한다.
그것을 도의 영역이라 일컫는 것은
종교와 예술의 차이점을 먼저 의식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진정한 도를 깨달은 사람은 한치의 말도 어긋남이 없다.
도에 속하면 이미 깨달아 배우지 않으며
모든 말의 뿌리도 거기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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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706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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