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과 정신작용에 대하여(About Art and Mental Action)
-엘리엇 킴
정신은 개체의 거대한 혼돈세계이다. 인간은 총체적으로 거기에 질서를 부여하려는 노력을 지속하고 있다. 어머니 자연에 감응하면서 인간은 정신에 내재된 한계와 가능성을 읽어내려는 의식적, 무의식적인 시도를 한 순간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그러한 시도 중에 인간은 가능성의 한계가 아니라 한계의 가능성을 읽으려 한다. 사고와 행위를 논리화 하려는 어떤 시도도 시도에 그치며 인간의 바탕질인 정신의 총체적 무규정성을 규정짓지 못한다. 사람들은 이점을 신성화한다. 인간의 사고와 행위를 우주의 시간성인 순간 속에 통합적으로 각인하려는 노력이 예술이다. 정신이 사고를 낳고 사고가 행위를 낳을 때 이 과정을 주재하는 정신의 수단은 통합적 감성이기 때문이다. 뭉크의 절규에서 잉태한 정신은 고흐의 고요히 침잠한 성스러운 분위기에 젖은 소리 없는 절규의 회오리가 탄생한다. 고흐는 인간정신의 혼돈을 정묘히 읽고 있다. 그것을 나는 ‘광적(狂寂)함’이라 부른다.
인간정신의 무규정적이나 지향적인 혼돈은 하나의 현상으로 일단 예술적으로만 표출될 수 있으며 그 현상은 현상이지 어떤 종류의 질서가 아니며 미학적 완성을 추구하는 작품구도의 질서도 아니다. 그 현상을 표현하려는 문예철(文藝哲)의 시도들은 뛰어난 개인적 안목으로 정신의 캔버스에 정신고유의 시공감각적 현상을 결국 묘사해 왔다. 그들이 남긴 작품들을 굳이 언술한다면 예술적 감성을 통해 대내외적인 자연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사고와 행위를 감성의 장르적인틀안에서 우주의 시간성 안에 통합했다는 점이다.
예술가들은 정신의 캔버스라는 바탕 위에 진선미의 총상화총(眞善美의 總像花叢)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뛰어난 예술작품은 진선미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다. 그 작품이 어두운 정신의 바탕, 혼돈이나 질서 이전의 하얀 색 바탕을 나름대로 읽고 표명하고 있다면 그것은 ‘진’의 추구이며 그 표현이 나름대로 정묘하다면 그것이 ‘선’의 추구이며 그 작품이 감상하는 사람들의 정신의 밋밋한 흐름에 빨려드는 아름다운 여울의 살 무늬를 일으킨다면 그것이 ‘미’의 어떤 표정이기 때문이다. 검은 영혼(陰)은 하얀 바탕(陽)을 하염없이 그리워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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