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킴 작품방/수필집(미셀러니)

고추가루와 한국음식(엘리엇 킴 수필)

imaginerNZ 2007. 5. 2. 04:02

고추와 한국음식

[Red Pepper and Korean Food]

                                            엘리엇  M  킴

 

 

우리 식탁에 올려진 음식에 고춧가루나 고추조각이 지나치게 골고루(?) 침범해 있다.

일본을 통해서 고추가 수입된 근세 이후에 저장수단으로 점차 자리를 잡아 나가다 마침내는 식탁을 거의 점령하는 지경에 이른 것이다. 고추가 도입되기 이전에는 저장수단의 으뜸은 소금 절임(염장)과 초절임(초장)이었다. 절임을 하는 채소의 종류에 따라 짠맛을 기본으로 하여 거기에 시원한 맛, 쌉싸름한 맛, 시큼한 맛, 달착지근한 맛 등등과 이러한 여러 맛들이 성분비율별로 복합된 다양한 맛이 우러나온다. 그 예를 들면 그저 짭질한 맛, 짭싸름한 맛,짭다롬한 맛, 짭떠름한 맛, 짭싸름한 맛, 새콤달콤한 맛, 시큼싸름한 맛, 달콤싸름한 맛, 새콤떠름한 맛, 시큼짜싸름한 맛, 달콤짜싸르한 맛, 떱짜싸르한 맛, 떱시큼짜싸르한 맛, 등등 거의 쓴신짠단떫은 맛이 무한조합으로 배합, 형성된다.

 

 

김치는 염장한 백김치나 물김치종류가 주를 이루었다. 야채염장은 각종 비타민과 무기질이 풍부한 채소들을 월동기간에 보관하여 상식을 하기 위한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 그 점은 일본의 야채절임과 유사하다. 그 이유는 일본의 채소염장방식이 우리나라에서 전래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이 고추의 선수입국이었음에도 식단구성에 고추가 주를 이루지 못한 것은 고추의 지나친 향신성(매운 맛)이 너무 자극적인 점을 들어 일반화되지 못한 것으로 생각된다. 과불급을 적용한 사례라고나 할까? 아마도 지배계층이 최초로 접한 고추는 그 알싸함 이외에 별로 실용적인 쓸모가 없는 외래식물 정도로만 여겨져서 일반에 널리 전파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추를 처음 접한 일본인들은 저장수단으로 탁월한 고추의 효능을 미처 파악하기 전에 단지 맵다는 이유로 무관심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마도 고추는 농익은 선홍이나 진홍의 색깔 때문에 기껏해야 관상용 정도로 재배되었을 것이다. 필자가 어렸을 적에 뜰이 제법 너른 일본식 목조주택(처마에 비둘기 집이 있고 방문에는 마름모꼴의 유리창이 달려 있었던 집)에 살고 있었을 때 일본고추라고 부르던 앵두알처럼 동그란 고추가 뜰에 자라고 있었는데 식용이 아니라 순수관상용이었다.

 

 

그러면 한국음식과 일본음식의 몇 가지 특징을 우선 짚어보기로 하자. 한국에서는 궁중 및 상류층이나 사찰에서 음식을 담당하였던 사람들이 자연산 식재료 및 양념의 수확수집, 보관관리, 조리응용에 이르기까지 사제간의 전수와 시행착오와 비교분석의 끊임없는 연구를 통해 맛의 오묘한 차이와 조화의 방법을 체득함으로써 맛을 승화시키는 경지에 오른 경우가 많았다. 그것은 한마디로 ‘개성적인 깊이가 있는 손맛에서 우러나는 다양성이다. 식재료와 양념의 면에서 일본보다 극과 극에 이르는 맛의 범위가 더 넓고 다양한 풍토에서 보다 다양한 맛의 조화와 깊이가 생길 수 있었다. 현대의 일본음식을 살펴보자. 첫째로, 부드럽고 때깔이 곱고 앙증맞다. 물론 음식의 세세한 가짓수나 정교하게 공들인 장식술은 한국음식보다 한 발 앞서 있다. 둘째로, 자연의 인공화, 즉 맛의 기호화 과정이 배어 있다. 알기 쉽게 말해 일본음식의 조리사들은 항상 ’인공적 자연식‘을 꿈꾸며 이를 실천하려는 각고의 노력을 한다. 한국 사람들이 느끼기에 일본음식이 밋밋하고 약간 느끼한 맛이라고 생각하는 연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일본음식의 미각범위가 한국 사람들의 폭과 깊이가 있는 미각에는 다소 좁다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에 한국음식을 대하는 일본인들은 맛의 범위가 더 폭넓고 그 조합이 다양하다는 점을 대번에 깨닫게 된다. 사람의 미각의 폭과 깊이가 더 다양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닫는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체험을 하게 되면 일본사람들은 자신이 이전에 전혀 드러나지 않아 몰랐던 자신의 미각적 취향과 이러한 미각적 취향을 최초로 드러나게 해준 특정한 한국음식을 처음 접한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한국음식의 특징은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있다. 풀어 말하면, 자연에 분포하고 있는 온갖 종류의 동식물성 재료들의 쾌미각과 불쾌미각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쾌미각만을 추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일 쾌미각만을 추구한다면 그러한 음식들은 단순소박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결국 인공에 의존하는 길을 갈 수 밖에 없다. 즉 ‘자연의 인공화’라는 결과를 필연적으로 낳게 된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유럽음식과 일본음식이다.

 

 

그러면 한국음식이 쾌미각뿐만이 아니라 불쾌미각까지 한데 아울러 수용한다는 말은 무슨 뜻이 담겨 있는가? 사람의 미각은 진화론적으로 쾌미각보다는 불쾌미각에 더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 이유는 독성이 있는 먹거리를 식별하여 인체를 보호하려는 보호본능에서 비롯된다. 일종의 자기방어기제로서의 중독예방기능을 수행하는 방향으로 사람의 미각돌기는 발달해 온 것이다. 그러면 진화론적 여유의 맛을 즐기려는 쾌미각에는 어떤 맛들이 있을까? 쾌미각의 대표격인 단 맛에서부터 감칠 맛, 구수한 맛, 부드러운 맛, 녹는 맛, 시원한 맛, 적당히 시큼한 맛 등등이 있다.

쾌미각은 맛 자체뿐만이 아니라 운동하는 혀가 음식물에 접촉하고 주물럭거리는 순간순간의 촉감도 내포하고 있다. 혀의 촉감은 지나치게 크고 자극적이거나 강하고 거친 것보다 입안에서 씹거나 삼키기에 적당한 크기이면서 부드럽고 순한 것을 선호한다.

 

 

반면에 개체보호를 위해 오랜 기간에 걸쳐 발달해 온 불쾌미각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대부분의 미각돌기는 정도 이상의 쓴 맛, 신 맛, 짠 맛을 식별하고 식료에서 배제시키기 위한 기능을 수행한다. 빠른 이해를 위해서 우리 음식에 반영된 불쾌미각의 식재료를 예로 들어보자. 한국 사람들은 단순히 쾌미각만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불쾌미각까지 쾌미각에 한데 아울러 섞어 즐기려는 자연의 미각을 즐긴다. 일례로 취나물, 씀바귀, 도라지 같은 식물 특유의 쓴 맛에 그 쓴 맛을 은은하게 해 주는 매끄럽고 구수한 참기름, 적당한 양의 설탕과 간소금, 거기에 최초의 접촉 시에 다른 맛감들을 잠깐 망각시키는 톡 쏘는 고춧가루 등으로 음식의 조화로운 자연맛을 살리는 식의 조리법은 지구상의 다양한 문화권내의 고유음식들에는 거의 전무하다. 단순히 쓴 맛은 더 이상 쓴 맛이 아니라 복합적인 맛의 향연으로 승화된 맛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한 음식이 차려진 식탁을 ‘조화로운 자연의 식탁’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우리 조상과 당대의 한국 사람들은 식탁에까지 자연을 무리 없이 이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자연이입의 식탁!’ 그 식탁위에 차려진 음식을 조리하는 ‘손맛’을 한국 사람들은 대대로 지키고 가꾸어 온 것이다.

 

 

그런데, 외래종식물인 고추가 유입 이후부터 장기간에 걸쳐 서서히 우리의 식탁에 침투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고추에 들어 있는 캡사이신 성분이 마침내 매섭게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추가 들어가는 식품 중에 대표적인 발효식품은 김치이다. 애초에 고추는 톡 쏘면서 알싸한 자극미각만으로 일반화된 것이 아니다. 도래초기에 그 매서우리만치 빠알간 색깔, 코끝을 찡하게 하면서 입안을 얼얼하게 하는 매운 맛 특유의 향이 음식에 약간씩 그것도 드물게 첨가되거나 장식을 위해 음식위에 이런 저런 모양으로 썰려서 또는 통째로 얹는 것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는 지금처럼 고추를 음식으로 여기고 된장에 푹 찍어 와삭거리며 씹어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어떤 과정을 거쳐 고추가 대중에게 일반화되었을까?  첫째로, 한국음식의 특성 중의 하나는 국이나 탕, 면국 종류가 많은 점이다. 거기에 고추를 약간 넣어 맵싸한 국물 맛을 냈을 때 술국이나 숙취해소용 해장국으로 남자들에게는 삽시간에 인기를 끌었으리라. 알코올에 마비된 장을 자극하여 활성화시키는 역할을 고추가 담당한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여성들이 별로 선호하지 않은 반면에 술을 좋아하는 남성들에게는 인기가 ‘짱’이었을 것이다. 또 한 편으로 삭풍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유라시아의 겨울철에 추위를 이겨내야 하는 병사들이며 관공사에 노역을 제공해야 했던 평민들에게는 고추가 든 음식이 매우 효과적인 방한제의 구실을 하였을 것이다. 추위에 위축된 신체기능을 덥혀 원활하게 하는 기능을 고추는 해냈던 것이다. 남정네들 사이에 고추가 인기를 끌기 시작하면서 어쩌면 사나이들끼리 맛의 담력을 테스트하는 시합 아닌 시합이 생겨났을 법도 하다. 늦여름 또는 초가을의 붉게 물들기 직전의 진녹색에 약간 붉으레한 색이 물들기 시작하는 고추나 늦가을 햇살까지 듬뿍 받아 매섭도록 빠알갛게 익을 대로 익은 고추를 누가 더 많이 먹을 수 있는지를 겨루는 시합이 그것이다. 그러는 시합의 와중에 남편의 고추먹기 시합을 지켜보던 아낙이 남편이 연신 뿜어내는 ‘하~흐, 하~흐’하는 소리에 안타까운 마음에 급한 김에 손에 잡히는 대로 밥상머리에 있는 된장종지를 들고 달려가 남편에게 ‘이거라두 잡쑤!’하면서 냅다 들이밀었을 법도 하다. 그 아낙네의 행위는 된장이 속을 부드럽고 편하게 해준다는 평소의 생각이 암암리에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고추와 된장이 마침내 우연한 천생연분의 행복을 누리게 된 것이다. 장을 자극하는 고추의 남성적인 매운 맛을 된장이 물과 섞여 우유처럼 콜로이드화 되면서 여성의 약손인 듯 장을 부드럽게 발라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점에 주목한 한국의 손맛여성들이 드디어 고추에 손을 대기 시작하여 국물음식에 시원한(!) 고추의 맛을 우러담기 시작했고 그러는 와중에 우연히도 고추가 월동용 야채의 보관과 느린 숙성에 아주 제격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마침내 갖가지 종류의 김치나물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드디어 고추의 필수식품화가 대대적으로 시작되었다. 고춧가루만 넣으면 모든 야채의 장기보관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일반화된 것이다. 그래서 점차 온갖 종류의 산나물과 야채등속이 김치화 하게  된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김치가 발효되면서 생성된 유산균의 시큼한 맛이 건강에 좋다는 사실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김치의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복합적인 맛을 보면서 거기에 각종 비타민이나 무기질이 듬뿍 들어 있음을 부지불식간에 알았고 김치가 잔병치레를 예방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한 마디로 김치 없인 못 사는 한국 사람들이 된 것이다. 아울러 김치의 신선한 맛과 영양을 보존하는 연구에 한국의 여성들이 지혜를 발휘해 왔음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그 결과로 생겨난 것이 가정별로 전수되고 있는 비법, 즉 ‘손맛’인 것이다. 한국 김치의 ‘손맛’은 주재료인 야채의 종류(배추, 무, 갓, 달래, 고들빼기 등등) 와 부재료인 갖은 양념(고춧가루, 깨, 생강, 마늘, 파, 양파, 부추 등등)과 젓갈(새우젓, 멸치젓, 자리젓 등등)과 때로 추가되는 과일(배, 잣, 대추, 밤 등등)과 싱싱한 생선(갈치, 명태, 고등어, 홍어 등등)의 종류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거기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가문들 특유의 비법에 따라 담궈지는 김치이고 보면 김치맛의 가짓수는 거의 무한조합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우리 민족은 김치민족인 것이다.

 

 

이러한 김치가 식탁의 맛을 좌지우지하다 보니 식탁에 동시에 올려진 여러 종류의 김치는 물론이고 함께 올려진 국, 찌게, 탕에도 고춧가루가 가미되고, 식탁에 차려진 각종 음식의 색깔이 불그스레 단풍이 든 듯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만약 우리에게 된장을 이용한 음식이 없다고 가정해 보자. 지금도 그 수가 타국에 비해 많지만, 위장장애를 앓고 있는 사람들이 두세 배는 족히 늘어날 것이다. 화끈하게 매운 음식들을 이것저것 먹고 나서 편안하게 속을 달래어 줄 된장음식(된장국, 된장찌개, 청국장, 된장비빔밥, 된장삼겹살, 막장, 쌈장 등등)은 고추음식에는 필수적이다. 그러나 과불급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좋은 음식도 지나치면 해가 되는 법이다. 일반 서민들이 애용하는 식당에 가면 고춧가루의 남용을 시각적, 미각적으로 대번에 감지할 수 있다. 여러분이 매운 맛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이라 치고 한국의 서민식당에 들어가서 앉아있다고 가정을 하고 먹을 수 있는 음식의 가짓수가 몇 개나 되는지 한 번 세어보라. 그들이 판단하기에 한국의 서민식탁은 고춧가루 공해에 찌들어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의 서민식탁은 과불급의 고춧가루가 여기저기 뿌려지고 버무려져  있는 것이다. 더욱이 서민식당 음식의 메뉴가 마치 무슨 규정의 적용을 받기라도 하는 듯 너무 제한적이다. 

 

 

그 이유를 추론해 보면, 궁중이나 양반가문의 음식들이 아직도 본격적으로 대중화하지 못한 탓이 주원인일 것이다. 예전에 상류층 사람들이 먹던 음식은 끊임없이 전래, 개발되어 내려온 전수비법과 한반도 각 지역에서 진상된 특산물을 재료로 한 음식이다. 그 특징은 첫째로, 다양한 계절별 주재료와 음식궁합이 맞아 떨어지는 양념과 전수요리의 달인들이 발휘하는 마술에 가까운 손맛이 어우러진다는 점이다. 그 손맛의 기본은 주재료의 독특한 향미를 우선적으로 살리면서 그 향미를 보존하면서도 상승화 작용을 낳을 수 있는 양념을 선정하고 그 양념에 고유한 향취를 주재료에 어울리게 가미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둘째로 위정자의 소화기 장애 및 기타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는 재료나 요리법을 적극적으로 배제시켰다는 점이다. 아마도 궁중의 조리전담기구인 수라간의 상궁이나 나인들은 음식의 성분이 인체에 미치는 긍정적 또는 부정적 영향에 대한 한의학적 조예도 깊었고 초본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 및 가축의 해부학적인 지식도 겸비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에서 지나치게 자극적인 양념의 사용이 초래할 수 있는 소화기 계통의 장애를 그들은 적극적으로 피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가 생긴다면 그것은 경우에 따라 자신의 목숨이 달린 문제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 예부터 전해 내려온 음식의 전통은 크게 두 갈래이다. 상류층 사람들이 먹던 음식과 서민음식이 그것이다. 현대사회는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노력에 의한 부의 축적이 얼마든지 가능한 비계급적인 민주자본주의 사회이다. 한국음식의 세계화를 위해서는 모든 한국음식의 세계화를 위해 모두가 힘을 합해야 할 시기이다.

 

 

그런 관점에서 한국적 음식문화에서 개선해야 할 사항을 몇 가지 언급하고 싶다.

 

첫째, 지나친 자극성의 절제이다. 일례로 고춧가루의 남용이 절제되어야 한다. 모든 음식을 조리할 때 지나치게 자극적인 양념을 적절히 사용해야 한다. 자극에 길들여진 미각을 극단적으로 자극하려는 ‘미각의 악순환’은 장을 혹사하는 섭생에 불과하다. 그 해결의 열쇠를 간단한 사례에서 찾아보자. 단순이분법으로 본다면, 탕이나 찌게를 주문할 때 최소한도로 ‘하얗게’ 혹은 ‘벌겋게’의 두 가지 주문이 가능할 것이다. 필자의 경우에 위장기능저하에 대해 흔히 내려지는 진단인 신경성 위장장애를 겪고 있었던 시절이 있었다. 혼자 사는 몸이라 음식점을 자주 들락거렸는데 ‘고춧가루 넣지 말고 하얗게’라고 늘상 주문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하얗게 나온 국물이 더 따끔거리는 것이 아닌가? 그러한 사태의 연유는, 고춧가루는 넣지 않았지만 그야말로 얼싸한 끝물 풋고추와 마늘이며 생강 따위는 그대로 넣었으니 색깔만 그렇지 결코 덜 맵다고 할 수 없는 국물이 ‘징’하게 나왔던 것이니 매운 김치는 고사하고 수저를 들고 밥에 나물반찬만 휘적거리다 나올 밖에 별 도리가 없었다. 

 

 

둘째, 한국요리의 백미인 궁중음식의 대중화이다. 지나치게 자극적이지 않은 맛깔스런 갖가지 궁중음식이 세계적인 일품요리로 탄생하고 정착하기를 바란다. 한국의 궁중음식은 세계 어디에 내어 놓아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맛과 품위가 있는 음식들이기 때문이다.

 

셋째, 개선해야 할 청결 및 위생의 문제이다. 우선적으로 언급할 점은 시설개선의 문제이다. 주방과 화장실을 청결하게 하기 위해 끊임없이 자체관리와 점검을 하면서 동시에 현대적인 시설로 개보수가 이루어져야 한다.

 

, 식탁 위에 비치되는 물품의 개선이다. 일례로 화장실용 두루마리 휴지가 식탁위에 놓여 있는 것을 처음 본 외국인들은 깜짝 놀란다. 그것을 티슈나 냅킨으로 교체해야 한다.  그리고 물수건이나 행주로 대충 식탁을 닦은 후에 거기에 수저를 놓는다. 수저받침이 식탁에 도입되어야 한다.

 

다섯째, 주문식단제의 도입이 필요하다. 주재료의 조리방식 및 양념의 종류와 양을 손님이 선택하고 주문할 수 있도록 하는 주문식단제 도입의 필요성이다. 한정식이나 기타 대중음식을 시키면 반찬의 가짓수나 양이 너무 많다. 이러한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상상하기 싫을 정도이다. 그 많은 반찬을 한 번 내어 놓은 후에 과연 다 버릴 것인가? 아마도 거의 다 재활용을 할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음식점에서 먹는 반찬들은 일부 고급스런 음식점들의 경우 이외에는 남이 침 묻은 젓가락으로 골라 먹던 반찬들을 다시 먹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손님은 자신이 원하는 조리법으로 조리된 적당한 양의 주 메뉴와 반찬을 선택하고 주문할 권리가 있다.

 

여섯째, 해물탕과 같은 탕음식에 갑각류인 새우나 전복 따위며 각종 조개류의 껍질이 그대로 들어 있는 점도 개선해야 할 사항이다. 그 껍질에 붙어 있던 이끼며 떨어져 나간 껍질부스러기들이 탕에 든 각종 해물이며 야채며 각종 극자극적인 향신성 양념과 함께 뒤죽박죽이 되어 끓고 있다고 생각 해 보라.

 

일곱째, 불판의 현대화이다. 구이집에 가면 자욱한 연기가 실내를 온통 부옇게 만들고 있다. 고기 굽는 냄새가 손에 머리카락에 외투며 속옷까지 속속들이 배어드는 것이다. 마치 고기 태운 연기에 냄새를 뒤집어 쓴 형용이라고나 할까? 뭐 그런 셈이 된다. 주방에서 미리 또는 살짝 구워내는 방법이나 불판위에서 연기를 바로 흡수하는 통풍흡입장치의 설치를 의무화하거나 연기가 나지 않는 불판의 개발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후자는 아직 대중화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개발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여덟째, 이른바 퓨전음식의 가능성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이다. 지금은 세계화 시대이다. 새로운 한국음식의 전통을 창달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다종다양한 외국음식을 과감하게 한국음식문화에 도입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이 시도되어야 한다.         

 

 

결국 한국대중음식의 질을 높이는 첫 발걸음은 고춧가루의 무한자극에서 우리의 장을 편하고 부드럽게 해방시켜 주는 것, 즉 우리 한국인의 장(腸)이 자연스레 원하는 노래를 부르며 음식물을 안무할 수 있도록 해 주는 것이다. 아마도 그 해법은 극한적인 자극에 일부 마비된 섬세한 미각을 되찾아 다양성의 미각을 우리의 미각기관이며 소화기관에 선물하는 것이리라.      

 

 

잎이 달린 여린 가지를 통째로 살짝 데쳐 소금으로 간을 하고 참기름에 조물조물 버무린 고추나물 맛은 데쳐서 무친 나물의 으뜸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기억 속의 그 나물맛을 음미하노라면 세상에 부러운 맛이 없다. 지금 이 함박눈 내리는 계절에 고추나물 감을 구하러 서울에서 가까운 근교의  비닐하우스를  찾아가, 붉게 타오르는 알싸한 맛의 고추가 아니라  고추나물을 몇 근 살까?하는 생각이 얼핏 든다.

[2:27pm, 12/16(Tue),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