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동북아민족사

흉노.돌궐.거란.몽골.말갈.여진.만주족의 역사.

imaginerNZ 2012. 2. 18. 04:03

흉노.돌궐.거란.몽골.말갈.여진.만주족의 역사.

*참조: 中國王朝史

(夏, 기원전 5000- 기원전 1600 )

( 또는 , 기원전 1600-기원전 1046)

(周, 기원전 1120-기원전 770)

춘추시대(春秋, 기원전 770-기원전 403)

전국시대(戰國, 기원전 403-기원전 221)

(秦, 기원전 221-기원전 207)

(楚, 기원전 207-기원전 202)

(漢, 기원전 202- 서기 8)

(新, 서기 8-25)

후한(後漢, 서기 25-220)

삼국시대(三國時代, 서기 220-280)

서진(西晋)의 무제(武帝), 중국 재통일, 서기 280년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 서기 430-589),

북조는 기마민족인 선비족(鮮卑族)이 점령, 통치(서기 430-589).

(隋, 589-618)

(唐, 618-907)

후진(後晋, 936-946), 돌궐(突厥)

(遼916-1125), 거란(契丹)

북송(北宋, 960-1127)

(金, 1115-1234), 퉁구스족 계통의 여진족

남송(南宋, 1127-1279)

(元, 1271-1368), 몽고족

(明, 1368-1644)

(淸, 1644-1911), 만주족

흉노.

BC 3세기 말에서 AD 1세기 말까지 중국의 북방에서 활동한 기마유목민족. 인종은 투르크계•몽골계•아리아계 등 여러 설이 있으나 투르크 계통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언어는 알타이어족에 속한다.

이들은 시대에 따라 중국의 사서(史書)에서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려졌는데 은(殷)나라와 주(周)나라 때에는 귀방(鬼方)•곤이(昆夷) 등으로, 주나라 말기에는 험윤, 춘추시대에는 융(戎)•적(狄)이라 하였으며 전국시대에 비로소 흉노 또는 호(胡)라 하였다. 흉노는 진한시대에 진한과 자웅을 겨룰 정도로 강성했다.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은 것도 흉노 때문이었다.

흉노족들은 본디 현재의 간쑤성[甘肅省(감숙성)]•산시성[陝西省(섬서성)]•산시성[山西省(산서성)] 등에 거주하다가 점점 북쪽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무렵(BC 221) 흉노 족장(族長) 두만(頭曼)은 몽골고원의 제족연합(諸族聯合)에 일단성공하였으나, 그 아들 묵돌[冒頓:?∼BC 174]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선우[單于:북아시아의 유목국가의 군주를 가한(可汗)이라고 칭하기 이전에 사용한 칭호]가 되어 월지(月氏)•동호(東胡) 등을 복속시키고 한(漢)나라의 북변을 공격하였다. 고조(高祖)는 이들을 공격하였으나 따퉁[大同(대동)] 부근에서 이들에 포위된 뒤 간신히 탈출하여 그 뒤 한나라 왕실의 딸을 흉노 추장에게 시집보내고 매년 많은 공물을 보낼 것을 약속하여 BC 198년 화의를 맺었다.

그 뒤 흉노는 오손(烏孫)이나 동(東)투르기스탄의 오아시스 여러 나라를 지배, 흉노의 지배권은 동쪽으로 러허강[熱河(열하)]에서 동투르기스탄, 북쪽은 예니세이강 상류, 남쪽은 오르도스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나라 무제(武帝) 때는 흉노를 공격하여 외몽골 방면으로 축출하면서 그들의 점령지를 한의 세력판도에 넣기 시작하였고, 이때 흉노족 사이의 분열로 5사람의 선우가 난립하다가 결국 후한(後漢) 초기인 48년 남(南)흉노와 북(北)흉노로 분열하게 되었다.

남흉노는 후한에 투항하여 중국 내부에 살면서 중국의 서북 방위를 담당하다가 진(晉)나라 말기 반란을 일으켜 진을 멸망시킨 5호16국 가운데 하나로 전조(前趙)•북량(北凉)•하(夏) 등이 흉노가 세운 나라들이다.

북흉노는 지금의 러시아와 몽골의 국경지대에 거주하다가 선비족(鮮卑族)의 공격을 받아 선우가 살해되고 후한과 남흉노 연합군의 공격으로 본거지를 상실하였으며 잔당들은 선비족의 국가 또는 유연(柔然) 등에 복속하였다. 흉노의 여러 부족의 족장들은 1년에 3차례씩 선우의 본거지에 모여 무속적인 제사를 지내고 동시에 부족의 일을 의논하였다. 유목•수렵을 주생업으로 하면서 말•양을 방목하였으며 하영지(夏營地)와 동영지(冬營地)를 오가며 천막식 원형가옥에 거주하였다. 스키타이•시베리아계 문화 이외에 한나라 문화, 이란 문화를 다량 흡수한 것으로 보여진다.

유럽에 게르만민족의 대이동을 일으키고 그로 인해 결국 로마제국의 멸망을 가져온 공포의 아시아민족 훈족이 있다. 이들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이 아틸라 대왕(훈족의 , 재위 434453)인데 러시아에서 발굴된 아틸라 대왕의 유적에서 흉노유품이 나와 유럽으로 쳐들어간 훈족이 흉노라는 것이 밝혀졌다. 훈족은 현재 헝가리인인 마자르족의 선조로 알려져 있다.

돌궐

투르크(Turk)의 음을 따서 한자화한 말로, 처음에는 철륵(鐵勒:예니세이강 상류, 바이칼호 지방에 살았던 투르크 종족)의 한 부족으로서 알타이산맥 방면에서 유연(柔然:몽골지방의 고대 유목민족)에 소속되어 있었다. 그 중 한 씨족인 아사나씨(阿史那氏)의 족장 토문(土門:만인의 長이라는 뜻)이 유연 ·철륵을 격파하고 독립하여 일리가한[伊利可汗]이라 칭하였다(552).

이 무렵부터 그의 아우 디자불로스는 서방으로 진출하였고, 3대 목간가한(木杆可汗) 때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협력하여 에프탈을 멸망시켰다(563∼567). 그 결과 돌궐은 동쪽으로는 중국 둥베이[東北:만주], 서쪽으로는 중앙아시아에까지 세력이 미쳤으나 동족간의 다툼으로 583년 분열하여 동돌궐은 몽골고원, 서돌궐은 중앙아시아를 지배하였다. 동돌궐은 수(隋)나라 말기에서 당(唐)나라 초기에 걸친 중국 내부의 혼란을 틈타 중앙집권화를 도모하여 그 세력이 강대해졌으나, 당나라의 공격과 철륵 제부족의 독립 등으로 630년 멸망하고 당나라의 간접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682년 다시 몽골고원에 독립국가를 세워 카파간가한[默綴可汗] ·빌케가한[毗伽可汗] 등이 등장하였다. 그들은 한때 중앙아시아에 원정할 만큼 세력을 떨쳤으나, 다시 동족간의 다툼으로 쇠약해져 744년 철륵의 한 부족인 위구르에게 멸망하였다.

서돌궐은 동로마제국과 결탁하여 사산왕조 페르시아를 토벌하기도 하였으나 둘로 분열하였다. 당나라는 이 틈을 이용하여 이주(伊州:하미)와 서주(西州:투르판) 등의 주현(州縣)을 설치하였다. 그 후 서돌궐은 한때 통일을 이룩하였으나 당은 657년 이를 토벌하고 2명의 가한을 두어 통제하였다. 7세기 말 돌기시(突騎施)가 일어나 이 두 가한을 추방함으로써 서돌궐은 멸망하였다.

돌궐은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으며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으로는 처음으로 문자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기록, 즉 돌궐비문을 남겼다. 일반적으로 원시적인 샤머니즘을 믿고 있으나, 한때 불교가 가한을 중심으로 한 상층계급에서 유행하였다.

거란.

거란은 퉁구스족과 몽골족의 혼혈로 형성된 유목민족이며 5세기 이래 요하 상류인 시라무렌유역에서 여러 부족으로 분열되어 거주하였는데, 당나라 말기, 916년 야율아보기가 여러 부족을 통합한 다음 황제를 칭하고 (遼916-1125)를 건국하였다. 그러나 960년 북송이 건국됨으로써 대치하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이 사이에 동부만주에서는 여진족의 완옌부가 점차 강대해져, 1115년 그 추장 아구다가 독립하여 제위에 올라국호를 금이라 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요의 토벌군은 번번히 패퇴를 거듭하였으므로 요는 금과의 화친을 고려하여 사신을 파견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금은 일찍부터 연운 16주 회복을 꾀한 송의 요청에 따라 대요협공조약을 맺었으므로 요는 갑자기 곤경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이에 요나라 마지막 황제 천조제는 연경과 다퉁 그리고 서쪽의 협산(내몽골)으로 도망가 금군의 추격을 피했으나, 25년 여도곡에서 사로잡혀, 요는 멸망하였습니다.

몽골.

몽골의 여러 부족이 있는데 몽골은 징기스칸의 부족 이름이 나중에 초원의 민족이름이 된 것입니다. 징기스칸의 이웃 부족 타타르는 서양에 몽골이라는 뜻으로 알려졌습니다. 몽골은 12세기 테무친이 주변의 초원 부족을 통합하여 생겨났다. 이들은 힘이 세지자 먼저 쫓겨나왔던 카타이를 여진(주글렌)과 함께 쳐서 복속시키고 이후 다시 여진을 눌러 중국북부를 통일하고 이후 세계정복에 나섰다. 세계대제국 몽골제국은 분할 상속에 의해 여러 나라로 분할이 되고 그 중 중국에 있던 나라가 원나라이다. 중앙아시아와 중동, 인도에 세워졌던 다른 나라들도 상당 기간 존재하다가 없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원래 숫자가 얼마 안되는 몽골족은 대부분 그 지역 피지배민과 동화되어 갔을 것으로 보지만 중앙아시아와 시베리아에는 상당수 몽골족이 타타르족이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다. 중국의 몽골족은 이후에 명나라에 쫓겨 몽골로 되돌아 가지만 이후 청(여진)의 지배시기에 대체로 청나라에 복속하게 되었다. 이후 러시아가 동진하여 몽골지역에 몽골나라를 세워준 것이 지금의 몽골이다. 몽골 국가는 200만도 안되는 인구이다. 대부분의 몽골족은 몽골 국가가 아닌 중국의 내몽골자치주에 살고 있으며 그 수가 거의 2천만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말갈-여진-만주족.

말갈은 6∼7세기경 중국 수 ·당 시대에 만주 북동부에서 한반도 북부에 거주한 퉁구스계 민족으로서 주(周, 기원전 1120-기원전 770)나라 때에는 숙신(肅愼), 한(漢, 기원전 202- 서기 8)나라 때에는 읍루(挹婁)라 불렀다. 본래 쑹화강[松花江] 유역의 물길(勿吉)이 지배하였으나 6세기 중엽 물길의 세력이 약화되자 각 부족들이 자립하였는데, 이들을 총칭하여 말갈이라 부른다. 이들 부족 중 대표적인 것은 예맥(濊貊) 계통으로 농업을 주로 하던 속말(粟末), 백산(白山)과 순수 퉁구스계로 수렵에 의존하던 백돌(伯咄)·불녈(拂涅)·호실(號室) ·흑수(黑水) ·안차골(安車骨) 등 7개 부족이었다.

그 중에 속말과 백산부족은 고구려에 복속하였다가 고구려가 멸망하자 영주(營州:遼寧省朝陽)로 이주하였고, 후에 발해가 성립되자 대부분의 말갈족이 발해의 지배를 받았다. 그러나 흑수부족만은 쑹화강과 헤이룽강[黑龍江] 하류 지역에 근거를 두고 발해에 대항하였고 발해 멸망 이후 흑수말갈은 거란에 복속되어 여진(女眞)이라 불렀으며, 그후 생여진(生女眞)과 숙여진(熟女眞)으로 나뉘었다가 생여진은 금(金, 1115-1234)나라를 건국시킨 주체가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후금(나중에 청으로 개칭, 1644-1911)을 건국하고 만주족으로 불리었다.

말갈은 이처럼 시대마다 부르는 명칭은 달라졌지만 같은 종족이 이어져왔다는 것이 이들 학자들의 주장이다. 즉 말갈족이 단일 계통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이 주장은 현재 중국 학계에서 암묵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그러나 말갈족이 단일 계통을 이어왔다는 주장에 대해선 비판이 많다.

그 이유는 우선 말갈이 거주하는 지역이 매우 복잡하게 퍼져 있기 때문이다. 말갈의 선조라고 하는 숙신은 흑룡강 중하류 지역에 있었다. 그런데『수서』에 등장하는 말갈족들의 거주지는 북만주 지역에서 남만주는 물론 한반도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다시 말해 7개의 말갈부 가운데 흑수부를 제외한 말갈족 거주지는 이전에 예맥, 부여, 옥저 등이 있던 곳과 중복되고 있다. 그런데 예맥이나 부여, 옥저는 그 땅과 주민이 대부분 고구려로 이어졌고 다음에는 발해로 이어졌다. 즉 우리의 역사로 이어져 왔다.

숙신, 읍루, 물길은 그 지역의 주민들이 자신들을 지칭해 부르던 명칭이 아니다. 이는 과거 중국인들이 만주 지역의 주민들을 일방적으로 분류해 불렀던 명칭이다. 말갈 역시 말갈족이 자신들을 지칭해 부르던 명칭이 아니라 당나라 사람들이 만주 지역의 주민들을 싸잡아 부르던 명칭이었다.

속말말갈은 송화강 지역의 주민들을 뜻한다. 백산말갈은 백두산 지역의 주민을 말하고, 흑수말갈은 흑룡강 지역의 주민을 말한다. 우리는 이들이 말갈이라 하여 모두 숙신에서 유래한 같은 종족으로 봐선 안 된다. 흑수말갈을 제외한다면 다른 대부분의 '말갈'은 예맥의 고구려계로 볼 수 있다. 그리고 발해 건국의 주체가 되었던 속말말갈과 백산말갈 역시 모두 고구려 유민으로 볼 수 있다.

즉 발해는 고구려와 말갈이라는 이질적인 두 종족이 결합한 나라가 아니라 고구려 유민들이 건국한 나라였던것이다. 고구려가 발해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엄청난 종족의 대이동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원래 남아있던 고구려의 유민들이 고구려의 거의 모든땅을 수복한 발해로 자연히 흡수되었던것이다.

여진이 우리와 관계를 가진 것은 발해(渤海)가 멸망한 뒤 이들이 그 고토(故土)에 준거한 고려 초기부터이다. 여진족 중에서도 고려와 관계를 가진 것은 고려의 북서부에 있던 압록강 유역 양안(兩岸)의 서여진[西蕃]과 동북의 함경도 지방 일대에 걸쳐 거주한 동여진[東蕃]인데, 고려가 이들 두 곳의 여진과 직접적으로 교섭한 것은 왕건의 북방개척에서 비롯되었다. 고려 초기에 여진은 고려를 상국으로 섬겼고, 고려는 이를 회유하여 무역을 허락하고 귀화인(歸化人)에게는 가옥과 토지를 주어 살게 하였다. 당시 여진인은 활 ·말 ·화살 ·모피 등 전쟁 도구를 조공(朝貢)하고, 의료 ·식량 ·농기구 ·그릇 등 생활필수품을 주로 수입해 갔다.

이와 같은 고려의 회유정책에 의하여 여진과의 관계는 평온상태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숙종(肅宗) 때 하얼빈[哈爾濱] 지방에서 일어난 완옌부[完顔部] 추장 영가(盈歌)가 여진족을 통합, 북간도(北間島) 지방을 장악한 뒤 두만강까지 진출하였다. 1104년(숙종 9) 영가의 뒤를 이은 조카 우야소[烏雅束]는 더 남하하여 고려에 복속한 여진부락을 경략하였다.

1107년(예종 2) 고려는 윤관을 도원수(都元帥)로, 오연총(吳延寵)을 부원수로 하여 군사 17만을 동원, 함흥평야 일대의 여진족을 토벌하고 북청(北靑)까지 진출하여 함주(咸州)를 중심으로 9성(九城)을 쌓았다. 그러나 9성을 쌓은 뒤 이의 방어 자체도 어려웠고 또 여진족이 9성을 돌려달라고 애원하여 9성을 쌓은 지 만 1년 만에 여진족에게 돌려 주었다. 그 뒤 아구다[阿骨打]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여 1115년 국호를 금(金)이라 칭하고, 1117년 고려에 형제관계를 요구하여 왔고, 1125년 요(遼)를 멸망시킨 뒤에는 고려에 사대(事大)의 예를 강요할 뿐만 아니라 송나라와의 교류에도 간섭하였다. 당시 집권자 이자겸(李資謙)과 경주파 문신(文臣)은 금나라와 타협함으로써 이후 고려의 북방개척정책은 일시 좌절되었다. 1234년 금나라가 몽고에 멸망하자 여진족은 만주지방에서 부족단위로 할거하였고, 원(元) ·명(明) 교체 이후에는 압록강 ·두만강 연안에서 빈번히 소란을 피웠다.

고려를 이은 조선 초기의 대여진정책은 회유와 무력의 양면정책을 썼다. 회유정책으로는 귀순을 장려하여 관직 ·토지 ·주택을 주어 귀순자를 우대하였고, 복속하지 않는 여진족의 본거지를 토벌하였다.

세종은 4군(郡) ·6진(鎭)을 개척하여 압록강에서 두만강에 이르는 연안선을 확보하고 여기에 삼남(三南) 사람을 이주시켰다. 세조 때는 남이(南怡) ·어유소(魚有沼) 등이 압록강변의 여진을 토벌[丁亥西征]하였고, 신숙주(申叔舟)는 회령(會寧) 부근의 여진을 축출하고 모련위(毛憐衛) 여진족의 근거지를 토벌[庚辰北征]한 뒤 하삼도(下三道) 백성 l만을 이주시켰다.

명나라가 임진왜란 때 조선에 원병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국력이 차차 쇠약해지자 이 틈을 타 여진족은 세력을 확장해 나가다가, 1616년(광해군 8) 여진의 추장 누루하치[奴兒哈赤]가 선양[瀋陽]에 후금(後金, 후에 청으로 개칭, 이때부터 만주족으로 불리움)을 세우고 1627년(인조 5)에는 정묘호란, 1636년에는 병자호란으로써 조선을 정복, 그 뒤 조선은 청나라에 조공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