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양말을 사러 몇년만에 10여분간 들른 백화점에서의 단상(單想) -수정 중

검은 양말을 사러 몇년만에 10여분간 들른 백화점에서의 단상(單想)

 
순백과 검정은 색채의 하늘과 땅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색채는 순백과 검정의 사이에서 제각기 자태를 
사람의 망막 위에 계속 멎으며 
시신경을 통해 뇌 안으로 끊김없이 흘려 보내고 있다.
우리가 개의 눈이나 곤충의 겹눈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더 나아가 색체 프리즘의 방사폭이 영(0)이 된다고 상상해 보라.
 
일례로, 그대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
혹은 지금의 나처럼 백화점 매장  한 가운데 선 채로
우주가 대폭발하는 백뱅의 와중에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대가 입고 입는 옷의 색깔이 light green 원피스이든 cardinal red 재킷이든
그밖에 어떤 색채와 형태의 옷을 입고 있든지 간에
빛의 온갖 파장과 산란과 간섭이 빚어내는 옷의 색채며 형태와 매무새가 
문명의 체통을 유지하기 위해
일견 어지럽고 불규칙해 보이는 면모의  비교미와 통일적 조화를 위해 
그대의 영육을 감싸고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만일 인류가 지구상에 존속했던 기간을  저속촬영한다면
모든 시대의 문명들은 제각기 잠깐 얼굴을 내밀었다 사라져 버릴 것이고
그대의 존재와 모습, 그리고 지금 입고 있는 옷은 거의 보이지도 않는 찰나에
형체도 흔적도 사연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시간을 무한대에 근접하기까지 빠른 속도로 회전시킨다면 
우주에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주위에 하얀 빛과 중심의 검은 어둠
또는 그 반대일 것이라는 상상을 곁들이며...
 
그러니, 굳이 삶의 낙엽과 같은 돈을 주고 무엇을 사랴? 라는 의문에
오늘  빈 손으로 백화점을 휑하니 빠져나왔다.
아직도 나에게는 신고 있는 마지막 양말-
사실 이 한 쌍의 명도가 약간 다른 흑회색 양말도 각자 사별 후에 재혼을  한 상태다-이 남아 있고
나는 이 소중한 양말이 양말의 이데아가 닳아 없어지기까지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검은 색깔을 띤 최후의 양말이
조금이라도 덜 닳도록 얌전히 걸어 다닐 것이고
귀가 후에는 어김없이 빨아 널기를 반복하거나 거듭 신게 될 것이다.
 
살아생전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는 시간의 조각들은 늘 현재에 놓여 있다.
(200910201523 엘리엇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