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킴 작품방/수필집(미셀러니)

검은 양말을 사러 몇년만에 10여분간 들른 백화점에서의 단상(單想)

imaginerNZ 2009. 10. 20. 15:27
 

검은 양말을 사러 몇년만에 10여분간 들른 백화점에서의 단상(單想)

 

검정과 순백은 색채의 하늘과 땅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색채는 검정과 순백의 사이에서 제각기 자태를 

사람의 망막 위에 계속 멎으며 

시신경을 통해 뇌 안으로 끊김없이 흘려 보내고 있다.

우리가 개의 눈이나 곤충의 겹눈을 가지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더 나아가 색체 프리즘의 방사폭이 영(0)이 된다고 상상해 보라.

 

일례로, 그대가 살아 숨 쉬고 있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든

혹은 지금의 나처럼 백화점 매장  한 가운데 선 채로

우주가 대폭발하는 백뱅의 와중에 있다고 상상해 보라

그대가 입고 입는 옷의 색깔이 light green 원피스이든 cardinal red 재킷이든

그밖에 어떤 색채와 형태의 옷을 입고 있든지 간에

온갖 파장과 온갖 산란이 빚어내는 색채며 형태와 매무새가 

문명의 체통을 유지하기 위해

일견 어지럽고 불규칙해 보이는 면모의  비교미와 통일적 조화를 위해 

그대의 영육을 감싸고 있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굳이 삶의 낙엽과 같은 돈을 주고 무엇을 사랴? 라는 의문에

오늘  빈 손으로 백화점을 휑하니 빠져나왔다.

 

아직도 나에게는 신고 있는 마지막 검은 양말 한 쌍이 남아 있고

(사실 이 양말 한 켤레는 각자 사별을 한 후에 재혼을 한 상태다)

나는 이 소중한 양말이 양말의 이데아가 닳아 없어지기까지

조금이라도 덜 닳도록 얌전히 걸어 다닐 것이고

귀가 후에는 어김없이 빨아 널기를 반복하며 거듭 신게 될 것이다.

 

머지 않은 장래에 언젠가 하나 남은 이토록 소중한 양말에 구멍이 나서

양말이 과로사로 애처로운 최후를 맞게 되면

오래 전 젊은 시절에 그랬듯이

인정과 사연과 활기와 사람 사는 맛이 나는 시장에 가서

모든 빛을 흡수하는 검은 양말을 양껏 사리라는 생각을 하면서...   

 

흑과 백 사이 천지간에

 살아생전에 우리가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시간의 조각들은 늘 현재에 놓여 있다.

(200910201523 엘리엇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