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킴 작품방/편지글(서한집)

한메일-현재2005년 4월 07일 목요일, 오후 14시 04분 25초 +0900

imaginerNZ 2007. 11. 19. 04:47
 

현재


 

 `현재`는 끝이자 시작이다. 시간의 끝과 시작이 인간의 감각에 생생하게 녹아 붙어 있는 것이, 우리가 만들어 일컫는 엉뚱한 말- `현재`이다. 모든 것은 현재에 이루어진다. 그것은 안과 밖이 없고 다만 앞과 뒤의 상대적 순서만이 있을 뿐이다. 과거는 지나간 현재이고 현재는 원래 이름할 수 없으며 미래는 현재가 되기까지는 어떤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말하는 미래의 가능성은 다만 지각적 예측에 불과한 것이다.

  현재는 시간의 개념만으로 파악할 수 없다. 그것은 오히려 시간이 아니다. 그것은 빛이나 공기에 비해 아득하여 무한히 조밀한 기운과 같다. 우리의 감각으로 느끼는 무찰하고 매끄럽고 부드러워 그 흐름의 양태가 유려한 물도 한없이 거칠고 투박하고 단단하다. 물의 입자는 너무 굵고 단단하기 때문이다.

  현재는 역시 공간도 아니다. 사람의 파악력이 닿지 않는 세계 안에서 사람의 정신은 어느 한 군데 붙박힌 한 그루 나무와 같다. 그는 세계를 영위하지 못한다. 그 식물성의 꿈속에 신이 등장한다. 그는 자유자재로이 생각하고 움직일 수 있고 억겁의 꿈을 지녀서 시간과 공간의 십자가 너머에 있어 사람이 느끼기에 모든 기적을 낳을 수 있다. 식물이 느끼는 기적 중의 하나는 근처에서 얼씬거리는 고양이 한 마리의 사소한 하품이나 걸음걸이이다. 파악할 수 없어 규정할 수 없는 세계의 속성에 대해 사람의 영혼은 몇 겹의 식물성 꿈을 꾸며 잠들어 있다.

  현재는 늘 기억 속에만 존재한다. 사람의 원시적 감각기관은 그것을 따라잡거나 파악하지 못한다. 그것은 마치 감각의 바람 속에서 진공이 구현되는 것과 같다. 물리적 성질을 띤 빛은 눈에 띄는 현상 중에 현재에 조금 가깝다. 그 부재인 어둠은 조금 더 가깝다. 물질이 존재하지 않아 현상도 없는 무한한 진공의 어둠은 시간과 공간의 정지상태에 도달한다. 그것을 우리는 인간의 언어로 `현재`라거나 무(無)라거나 등등으로 그냥 불러 볼 수도 있다. 그것은 미발생, 불규정의 것이며 시공 속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가무도, 어떤 필도, 기타 어떤 수단으로도 표상할 수 없다. 그러나 구르는 정신의 어두운 구체(球體)에 문득 와 닿는 것은, 다름 아닌 강보에 싸인 아가의 빈 듯 차오르는 듯, 대상너머 저 깊이 바라보는 눈망울에서 갓기억 속에 스친 `현재`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