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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펀- 한문의 기원은 한민족의 녹도문

imaginerNZ 2007. 10. 29. 03:29

 

 

-펀- 한문의 기원은 한민족의 녹도문

 

 

< 최초로 문자를 만든 동이족(한민족) >


- 한자의 원조인 갑골문은 중국이 아닌 동이족(배달민족)의 문자이다 -

일반적으로 한문은 중국인이 만든 중국의 문자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한자의 원조는 황하유역의 <은나라>의 갑골문이라고 합니다.

 

(최근들어 만주에서 '은나라 갑골문자' 보다 더 오래된 원시 한자들이 발견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국의 역사서들은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비롯하여

 

<주나라> 때부터야 비로소 중국 고대사의 확실한 연대를 기록하기 시작합니다.

 

(중국 고대사 - 하나라 -> 상(은)나라 -> 주나라 -> 진시황 -> 한나라 -> ...) 

즉 주나라 이전시대는 자기네 나라 역사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갑골문자의 발굴로 중원 땅에 실존했던 국가였음이 뒤늦게 밝혀지게 될 때까지,

<주왕조> 이전의 나라인 <은나라>는 기록과 물증이 없어 전설 속의 왕조로 알려져 왔었습니다.

저 유명한 사마천도 <사기(史記)>에서 은나라는 <동이족(배달민족)>의 국가라고

은나라의 건국시조 <설>은 <동이족>이라고 분명히 기록했습니다.


은왕조는 동이족이 통치하였던 국가였으며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었던 것입니다.

은나라의 건국시조도, 나라 자체도 동이족의 국가인데

 

거기서 나온 문자만 동이족이 아닌 한족(漢族)의 문자라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이 아닐까요?


- 한문과 한글은 우리 민족의 완벽한 문자 시스템 -

한문의 근원인 <녹도문> 또는 <갑골문자>도 우리조상(동이족,  즉 밝달(배달)민족)이 만들었고

 

거기서 나온 한문 또한 동이족의 문자였습니다.

후대에 한문을 집대성하여 정리한 사람으로 알려지고 중국인들이 문자의 시조라 여기는 '창힐' 역시 동이(배달)민족인 <자부선인>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동이족이었습니다.

만물을 형상화한 한문은 <신시배달시대>( 한웅 배달(밝달)시대)의 "녹도문자"가 뿌리가 되어 탄생한  뜻글자이고,

후대인 단군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가림토문자"에서 만들어진 한글은 소리글자입니다.

즉, 뜻글자인 한문과 소리글자인 한글을 함께 써야 완벽한 문자체계가 이루어집니다.

이 두 문자를 함께 써야만 모든 소리를 완벽하게 말할 수 있고, 그 뜻을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과 미래의 후손들을 위해 문자를 최초로 발명한 우리의 선조들은 그렇게 완벽한 문자를 만드셨습니다.

다시 말해 한자는 과거 없었던 글자를 중국사람들이 만든 것이 아니라,

<배달 한국>시대의 <녹도문> 이래 동이족들이 세운 <은나라>에서 쓰던 글자들이 계속 발전해 온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역사에는 한문을 언제 수입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태고문자(녹도문) : 남해각자 (南海刻子) - 한자의 뿌리로 보이는 녹도문자의 하나.

- 경남 남해군 낭(양)하리의 금산(錦山) 중턱바위에 녹도문인 남해각자가 있다.

- 송호수 저 "위대한 민족" 표지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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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군시대 이후 동이족이 힘이 없어지고,

진나라, 한나라 등 한족의 세력이 커지면서 한문(桓文 = 韓文)은 한문(漢文)으로 바뀌어졌으며,

 

(진나라 한나라 등도 임금등 지도자들은 대부분 동이족)

단군조선의 제후국이며 동이족이 세운 <은나라>와 그 문자인 <갑골문>도 중국의 나라와 문자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후 (근래들어) 한문은 중국의 고리타분한 글자요 한자를 쓰는 것은 사대주의라는 비판 속에서,

진짜 기원도 모르면서 그래도 무의식적으로 한글과 한자를 병용해온 것은

두 가지 문자의 발명국 후손으로써 당연한 귀결이었던 것입니다.

 

 

-한문의 기원은 <배달국>의 녹도문-

 

 <고대 한국> -> <배달(밝달)한국> -> <(고)조선>

일반적으로 한문의 기원을 <은나라>의 갑골문자에 찾고 있습니다.

 

( 중국 고대의 나라  :  <황제헌원씨> -> 요,순임금 -> 하 -> 상(은) -> 주 -> 진 -> 한 ... )

 

<은나라>도 동이족(한민족)이 세운 나라.

 

은나라 왕의 선조는 동이족(한민족)인 <황제헌원씨>

 

중국 고전 <초사> - " <황제헌원씨>는 백민(배달민족)으로 동이인(한민족) 이다."

 

요,순 임금 뿐만이 아니라 하나라, 상(은)나라,주나라,진나라,한나라...등등의 임금이 모두

 

동이인(한민족)인 <황제헌원씨>의 후손. 

 

좀 심하게 말하면 중국은 역사적으로 동이족 임금에 한족 백성의 나라. )

 

그런데 갑골문자는 어디서 온 것일까요?

그 이전시대의 중국에는 "창힐문자"가 있었습니다.

 

중국문자의 시초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창힐은 배달국 14세 치우천황과 동시대(B.C.28세기∼B.C.27세기)의 인물이었습니다.

 

(펀주: 치우천왕 - 고조선의 뿌리인 배달(밝달)한국의 14대 한(환)웅천왕)


창힐의 고향 산동반도 지역에서는 창힐문자가 발견되고 있습니다.

 

(펀주: 당시 산동반도는 한민족(동이족)의 활동지.

 

당시 동이인(배달민족 = 한민족)은 최소한 청동기시대 이상의 문명. 

 

그 이외 민족은 석기시대. 차이가 많이 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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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1. 남해군 낭하리 암각화 - 약 6천년전 고대 한민족 초기문자 <녹도문>

 

2.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 옛 비석

 

3. 창힐문자

 

4. 위 - 만주(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토기의 접시부분에 <녹도문>

 

    아래 - 갑골문자



 

자아 그림을 보세요. 중간에 있는 비석(倉聖鳥跡書碑)문이 "창힐문자" 입니다.

그런데 그보다 더 오래된 문자가 있습니다.

 

그 왼쪽에 보이는 <신지문자> 이른바 <녹도문>입니다.

『환단고기』「태백 일사」소도경전본훈 기록에 보면 환웅천황께서 신지(神誌: 벼슬이름) 혁덕에게 명하여

<녹도의 글>로써 천부경을 기록케 하였다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녹도(사슴 발자국 모양)란 문자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2번 그림)은 1942년에 발행한 『영변』지에 실려 있습니다.

『환단고기』의 저자 계연수 선생이 평안북도 영변군 묘향산에서 천부경이 새겨진 옛 비석을 발견한 내용과 더불어 신지 전자(篆字)를 옮겨 놓은 것이지요.

『환단고기』를 세상에 공개한 이유립 옹도 저서 『대배달민족사』에 평양 소재 법수교 고비(古碑)라고 밝히면서 신지 전자를 소개해 놓았습니다.

그밖에 구한말 서예의 대가인 김규진 선생이 저술한 『서법진결』과 백두용(白斗鏞) 편, 『해동역대명가필보 (海東歷代名家筆譜)』에도 <신지 전자>가 실려있습니다.

이 <신지 전자>의 초기 모습이 바로 위 그림 맨 왼쪽의 낭하리 암각화 (1번 그림)입니다.

『환단고기』에 인용된『대변설』의 주에 이르기를 "남해현 낭하리 에 계곡 바위 위에 신시의 고각(古刻)이 있다.
 
그 글에 환웅천황께서 사냥 나왔다가 제사를 삼신께 드린다고 했다"고 했습니다.

이 문자는 5세 환웅이신 태우의 환웅천황의 막내아들 태호 복희씨께서 육서(六書)의 원리로서 개량하게 됩니다.

그래서 좀더 세련된 형태가 되었지요. 이것을 용서(龍書)라고 하며 이것이 널리 통용되던 신지문자입니다.

주로 중국보다는 우리나라에서 사용되다가 14세 치우천황 때 창힐이 배달국의 자부 선생으로부터 배워 중국에 널리 보급했습니다.

그전에는 주로 결승문자(結繩文字: 노끈문자)가 사용되고 있었죠.

결승문자는 남미 인디언, 잉카제국에서 통용된 것입니다.

창힐이 중원(중국대륙)에 유통시킨 <신지문자>는 훗날 동이족인 은나라 사람들에 의해 한문의 기원이 되는 갑골문자로 개량되었습니다.

갑골문자는 동이족이 만들었지만 현대 중국어의 어순과 비슷하다고 합니다.

왜냐면 당시 중국은 화하족(중국 한족)과 동이족이 뒤죽박죽 섞이다보니

 

머릿수 많은 중국인들 언어체계로 통합되었기 때문이겠지요.

중국사서의 고전(古典)인 사마천의 『사기(史記)』의 기록에 의하면 은나라가 망하고

 

은나라 왕실의 기자(箕子)가 고조선으로 도망쳐 왔다고 합니다.

당연히 갑골문자를 들고 왔다고 봐야겠죠.

 

<신지문자>(녹도문)보다 더 진보된 형태라고 할 수 있겠구요.

그가 정착한 지역은 현재 유물, 유적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지금의 발해 북안, 요하 서쪽입니다. (만주 서부)

은나라 계통 유물인 네모진 솥이 출토되었는데요.

 

거기에 기후(箕侯 = 기자 제후)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 고조선의 국경선이 그 지역(요서)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고조선에는 별도의 문자가 사용되고 있었지요.

하나는 <가림토문> 하나는 <신지문자>입니다.

요녕성 여대시 윤가촌에서 출토된 토기의 접시부분에는 <신지문자> 가 새겨져 있습니다.(위의 그림 오른쪽 위)

거기에다 중국에서 사용된 <갑골문자(한자)>까지 들어왔습니다.

 

그리하여 무려 3가지의 문자가 사용되었던 것입니다.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부국강병을 추구하는 열국 제후들의 노력으로 산업생산량과 교역이 급속히 증가하게 되었습니다.

자연 고조선과의 교역량도 급증하게 되었지요.

따라서 시간이 흐를수록 한자사용이 증가하게 되었고 동아시아의 공용문자가 되었습니다.

가림토문과 신지문자는 점차 소멸된 것이지요.

 

(펀주: 가림토는 후에 훈민정음으로 부활.)

 




  

출처 : 한국고대사
글쓴이 : 동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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