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하는 삶/달라이 라마 성하

[스크랩] 귀의(歸依)와 보리심(菩提心) / 달라이라마

imaginerNZ 2007. 9. 29. 03:27
 

귀의(歸依)와 보리심(菩提) / 달라이라마


불법승(佛法僧) 삼보(三寶)께 마음을 바쳐 의지[歸依]하고, 보리심(菩提心, bodhicitta)을 일으킨 사 람을 불교도라고 부릅니다. '보리심'을 다른 말로는 '자비심'이나 '이타심' 또는 '착한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불교의 삼보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佛敎], 수행자의 집단인 승가(僧家)를 말합니다. '귀의(歸 依)'와 '보리심'의 핵심에는 다른 중생들을 돕는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보리심을 일으키는 수행을 할 때 는 다른 중생들을 돕는 행동이 필수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반면에 귀의하는 수행을 할 때는 윤리적으로 절제된 생활을 하고, 다른 중생들을 해치지 않으며, 인과법칙을 존중하는 훈련을 합니다.

 

삼보에 귀의하는 수행을 기초적으로 잘 닦지 않으면 높은 단계의 보리심을 깨달을 수가 없습니다. 그 렇기 때문에, 삼보에 귀의했는지 안 했는지에 따라서 불교도와 비(非)불교도를 구분합니다.

 

그러나 삼보에 귀의할 것을 서약하는 불교의식에 공식적으로 참가하는 것이 삼보에 귀의한다는 의미 는 아니며, 그런 의식에 참가했다고 해서 불교도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불교에는 삼보에 귀의하는 의식 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의식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개인이 깊이 숙고한 후에, 불 법승 삼보가 참으로 진실이고, 궁극적으로 귀의할 대상이라고 확신한다면, 아직 스승을 만나지 못했을 지라도 그는 실제로 불교도가 된 것입니다. 그 사람은 정신적인 행복을 삼보에게 맡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귀의한다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삼보에 귀의하는 불교의식에 참가했더라도, 삼보가 궁극적으로 귀의할 대상이라는 확신을 얻지 못하고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그 의심 때문에 당분간은 수행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귀의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처님에 대해서 말할 때, 부처님을 과거의 인도에서 태어나 정신적 삶의 길을 보여준 역사적 인물이라고 한정시켜서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의식(意識)의 수준들'이나 '정신적 깨달음의 수준 들'이라는 개념을 바탕에 두고 '부처님의 경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부처의 경지는 '존재의 어떤 정신적 상태'를 말합니다. 그래서 불교 경전에서는 과거의 부처님들, 현재의 부처님들, 미래의 부처님들이라는 말을 씁니다.

어떻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다음에 나올 질문입니다.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것'에 대해 생각하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은 존재인 부처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 자신에게 있는지를 우선 묻게 됩니다.  그 대답은 불교의 본질을 어떻게 이해하 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불교가 있으면, 승가(僧伽)도 분명히 있습니다.

 

승가는 불교가 가르치는 길 을 따라가며, 불교의 진리를 깨닫고 실천한 사람들을 말합니다. 만일 승가의 구성원 중에서 '거친 단계 의 악행과 번뇌가 없는 정신적 상태들'에 도달한 사람들이 있다면, 우리도 악행과 번뇌에서 완전히 벗어 날 가능성이 있다고 상상하게 됩니다. 그렇게 번뇌에서 완전히 해방된 상태를 부처의 경지라고 부릅니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의 불교와, '귀의'와 관련해서 말할 때의 불교를 구분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불 교는 경전상의 불법(佛法), 즉 부처님의 가르침과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해서 수행한 후에 얻는 정신적 깨달음을 말합니다.

 

귀의와 관련해서 말할 때의 불교는 두 가지 면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는 고통과 소 멸과 번뇌를 수행시키는 길[道, 수행]이고, 다른 하나는 '소멸' 그 자체입니다. 진정한 소멸과 그 소멸로 이끌어가는 길을 알아야만 해탈의 상태가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출처 : 티벳문화원혜등정사
글쓴이 : 송주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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