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신화는 역사적 은유다
단군신화를 우리 민족의 단일성을 주장하는 근거로 적극적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식민지시대 즉 근대의 일이다. 단군신화가 갖는 가치 자체를 부정하려는 뜻은 아니다. 단군신화에는 분명 우리가 기억해야할 소중한 정보가 담겨 있다. 이제 그 정보를 찾아보고자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단군신화 이야기가 직설적 언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내용은 현재의 우리가 보기에 은유적이다. 이른바 역사적 은유인 것이다.
“멀리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 시(詩)라 미리 이야기하지 않고 제가 귀를 쫑긋하면서 그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 말했다면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금세 “어디 어디”하고 주변을 둘러볼지도 모르고, 누가 벗느냐고 물어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엄연히 시의 한 구절이다.
김광균의 ‘설야’ 즉 ‘눈 내리는 밤’이라는 시의 한 구절이다. 그 시는 ‘멀리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표현으로 밤에 쌓이는 눈의 소리를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싸락눈 내리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이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또 요즘처럼 청바지를 입은 여자가 옷을 벗는 것을 연상해도 마찬가지다. 치마가 흘러내리며 내는 소리와 싸락눈 내리는 소리를 들어본 사람만이 시인의 비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비유는 동일한 언어와 문화생활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통용되는 경우가 많다. 설령 싸락눈 내리는 소리를 유심히 들어보지 못했더라도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감이 잡힌다. 물론 열대지방에 사는 사람은 그렇지 않다. 그들이 이런 비유를 이해하려면 많은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단군신화를 이해하는데도 많은 예비 정보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최소한 2, 3천년 전에 만들어진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 먼 옛날의 인식구조나 언어를 오늘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리석을 뿐만 아니라 위험하기 짝이 없다고 하겠다. 당시 사람들은 우리처럼 논리적인 언어를 구사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구사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사진= 서울 종로구에 있는 단군사당)
단군신화 속의 곰을 현실의 곰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멀리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는 말을 듣고 ‘누가 옷을 벗느냐’고 묻는 것과 똑같은 일이다. 시 속에서 아무도 옷을 벗지 않은 것처럼, 단군신화 속의 곰은 현실적인 곰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을 상징한다.
“멀리 여인의 옷 벗는 소리”
그런데 우리가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라고 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언어를, 토템이 일상화된 사회에 살았던 사람은 그냥 ‘난 곰이야’하면 누구나가 다 ‘아 저 사람은 곰을 숭배하고 자신들이 곰과 같다고 여기는 부족이구나’하고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결국 곰과 호랑이는 곰과 호랑이를 토템으로 가진 부족인 것이다. 그럼 하늘에서 내려왔다는 환웅은 무엇일까? 곰토템부족 혹은 호랑이토템부족이 보았을 때 자신들보다 우월한 문화를 가진 사람을 뜻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토템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신석기문화 단계의 사람들이다. 그들에 대해서 우월한 문화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청동기문화를 뜻한다고 하겠다.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과 그가 이끄는 집단은 바로 청동기문화인이다.
이렇게 환웅으로 대표되는 청동기문화를 가진 집단과 곰 및 호랑이부족은 서로 만나게 되었을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우선 기술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혹은 무력에 있어서도 우월한 청동기문화 집단들이 신석기문화인들을 그냥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석기문화인들은 처음에는 충돌을 일으켜 죽임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을 것이고, 여러 가지 불편을 겪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이 곰과 호랑이에게 먹으라고 준 쑥과 마늘, 그리고 그들이 들어가서 지내야 했던 동굴로 상징 혹은 비유되고 있다. 곰과 호랑이에게 쑥과 마늘만을 먹으라고 강요한 것이나, 또 동굴 속에 들어가서 나오지 말라고 한 것은 바로 그들 부족이 겪은 어려움을 뜻하는 것이다. 동굴은 억압의 비유인 것이다.
그러한 억압을 참지 못한 것은 역시 호랑이를 토템으로 하는 부족이었다. 그래서 호랑이토템부족은 캄캄한 동굴과도 같은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기 자신들이 원래 자리하고 있던 곳을 떠나서 청동기인들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이동해 간 것으로 생각된다.
곰토템부족은 그러한 어려움을 그대로 참고 견뎠다고 하겠다. 곰이 웅녀가 된 것은 진짜 곰이 사람이 된 것이 아니라, 청동기문화인들이 봤을 때 인간처럼 보였다는 뜻이라고 하겠습니다. 자신들이 처음 보았을 때는 미개하여 곰 같은 존재들이었지만, 자신들의 문화도 어느 정도 이해하고, 또 자신들의 지배에 순종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제 사람으로 봐줄 만하다는 의미에서 곰이 웅녀가 된 것이다.
북한이 평양에 조성한 단군릉. 사진제공= 통일뉴스
문화 이해해야 해석 가능
그리고 청동기문화인이 남자인 환웅으로, 신석기문화인이 여자인 웅녀로 묘사되어 있는 사실에서도, 신석기문화인의 입장이 청동기문화인의 하위에 있으며 또 열등한 존재로 받아들여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은 혼인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 또한 비유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비유는 두 문화의 융합을 나타낸다. 남녀의 입장이기는 하지만, 청동기문화인이 신석기문화인들을 완전히 축출하거나 제거하지 않고 자신들의 문화 속에 끌어들였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단군이 출생하였다고 한다. 물론 단군은 이 두 문화가 융합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뛰어난 지배자일 수 있겠지만, 두 문화의 결합체를 상징하기도 한다. 신석기문화를 기층으로 하고 청동기문화를 그 상층으로 하는 문화가 출현한 것이다. 환웅과 웅녀가 비유인 것처럼, 단군도 어떤 구체적인 실존인물일 가능성은 적은 것으로 판단된다.
결론을 말하면, 단군신화는 우리들이 금방 이해하기 어려운 비유와 상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내용은 신석기문화인(곰, 호랑이)과 청동기문화인(환웅, 삼부인)이 만나 우여곡절 끝에 하나의 문화로 융합(단군)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제 더 이상 단군신화를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제 여러분들은 신화를 보면 ‘멀리 여인의 옷 벗는 소리’를 연상하면서 신화 속의 비유를 찾아보려고 할 것이다. 단군신화가 역사적인 은유라는 시점에서 이해하면서 그 내용을 다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청동기문화인들이야말로 한반도에 살고 있는 우리들의 직접적인 조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 단계의 철기문화는 청동기문화인들이 중국과 접촉하면서 습득하게 되기 때문이다. 청동기시대에 들면 고조선(원래는 조선이다. 고조선은 이성계의 조선시대 이래로 우리가 편의상 부르는 용어일 뿐이다)과 같은 국가가 출현한다. 국가가 출현하였다는 것은 그 사회가 계급사회라는 뜻이며 구성원을 외부의 무력으로부터 지켜야할 필요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하다.
신석기 -> 청동기 묘사
청동기시대에 들면 전쟁과 폭력이 일상화된다. 신석기시대에 짐승을 사냥하던 소박한 화살촉은 청동기시대에 들어서 무게도 몇 배로 늘어나고, 모양도 작살처럼 생겨서 한 번 박히면 잘 빠지지도 않고 빠지더라도 큰 부상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인간을 사냥하는 화살촉으로 바뀐다. 단순한 형태의 돌도끼도 청동기시대에 들어서면 돌에 날을 세우거나 뾰쪽하게 만들어 살상력을 높이고 있다.
이처럼 단군신화 속에는, 한반도가 신석기단계로부터 청동기단계로 이행하는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순간을 생생하게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그저 낭만적인 이야기에 그치지 않고, 현재 우리가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국가가 이 땅에 출현하였으며 전쟁과 살육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단군신화는 우리시대의 언어와 다르다. 당시에는 토템이니 신석기니 청동기니 하는 말도 없었을 것이다. 곰이라는 말은 여러 가지 함의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숲 속에서 만날 수 있는 반달곰도 곰인가 하면, 현재의 말로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도 곰 혹은 그와 별로 다르지 않은 말이었을 수 있다. 동굴이라는 말도 정말 땅에 난 구멍인가 하면, 질곡이나 갑갑한 상태를 뜻할 수 있을 것이다. 신화 속에 쓰인 말은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은유다. 그래서 신화는 역사적 은유다. 그 은유의 의미를 풀어야하는 것은 우리다.
그런데 고조선은 현재의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갖는가? 우선은 국호라는 관점에서 접근해 보자. 우리는 우리를 대한민국, 한국인, 한국사, 한반도, 남한/북한 등 한(韓)을 넣은 국호를 사용하고 있고, 또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일본은 우리를 향해서, 조선, 조선인, 조선사, 조선반도라고 한다. 남조선 북조선이라는 말은 정치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입장을 이해하는 사람은 한국이라는 용어를 사용해서 우리를 지칭해 주기도 하지만, 보통은 역시 조선이다.
당연히 우리가 북한이라고 부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는 스스로를 조선이라고 할 것이다. 조선, 조선인, 조선사, 조선반도, 남조선/북조선, 조선문제 등등. 중국에서도 역시 우리는 조선이다. 최근에는 우리와의 관계가 밀접해 지면서, 한국, 한국인 등의 표현도 쓰이고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만, 기본적으로는 조선일 것으로 생각된다.
청동기 출현은 국가 암시
우리들은 곧잘 모든 것을 우리 중심으로 생각하기 쉽다. 한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는 대한민국, 한국, 한국인, 한국사, 한반도, 남한/북한 등의 표현이 우리를 지칭하는 유일한 표현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한 걸음만 바깥으로 나서면 우리를 지칭하는 용어는 일변하고, 여전히 조선이라는 용어가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대한민국, 한국인과 같은 용어 속에 들어 있는 한(韓)이라는 말은 어디서 온 것일까? 가깝게는 조선시대 말기에 성립된 대한제국에서 온 것이다. 그 당시에는 고종이 황제를 칭하였으므로 황제가 다스리는 나라여서 대한제국이라고 하였으나, 시대가 바뀌어 국민이 주권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는 의미에서 대한민국으로 우리를 부르게 된 것이다.
좀더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삼한(三韓)이라는 용어가 보인다. 고려시대 초기에는 개국공신들을 삼한공신(三韓功臣)이라고 불렀다. 통일신라시대에도 고구려 백제 유민들과 힙을 합쳐 당의 공세를 저지하고자 신라와 고구려, 백제를 아울러 삼한(三韓)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적이 있다. 더욱 거슬러 오르면,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마한, 진한, 변한을 삼한이라고 하였다. 한이라고 하는 용어는 사실상 한강 언저리와 그 이남 지역에 살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던 셈이다. 물론 대당 항쟁기에 삼한이라는 용어로 우리 전체를 나타낸 적이 있었으며, 또한 고려시대에도 고려, 후백제, 신라로 분열된 후삼국시대를 통합하는 논리로 삼한일통론을 주장한 바 있지만, 한이라는 용어의 연원은 역시 3세기 무렵의 삼한 즉 한반도의 중부 및 남부를 중심으로 생활하던 사람들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한으로 불리던 사람들의 조상은 논에 벼를 재배하는 전형적인 도작문화인이었다. 우리나라의 벼농사는 양자강 하류지역으로부터 기원전 10세기 경에 유입된 것이 아닐까. 양자강의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곳에는 우리와 비슷한 농경문화를 가진 집단이 아직도 살고 있다. 우리에게 익숙한 반달형돌칼 같은 것도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양자강유역의 도작문화인들이 발명한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이라는 말은 과연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직접적으로는 이성계가 세운 조선에서 온 것이다. 500년 동안 우리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으니 현재까지도 조선이라는 말로 우리를 부르는 것이 결코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러나 이성계의 조선이 유일한 것은 아니었다. 조선의 연원은 다름 아닌 우리가 고조선이라고 부르는 더 이른 시기의 조선이었다. 결국 조선이라는 국호는 현재 우리 땅에서 3번째로 사용되고 있다. 이른바 단군에 세웠다는 조선, 이성계가 세운 조선, 그리고 현재 한반도의 북쪽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국가이다.
조선과 한국, 정통성은?
흔히 우리가 북한이라고 부르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이성계의 조선, 단군의 조선에 사용되었던 조선이라는 국호를 선점하여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수도도 단군이 세웠다는 (고)조선의 수도가 있었던 평양이다. 북한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국호의 연원이자 자신들의 수도의 원점이기도 한 고조선이라는 국호와 평양이라는 수도를 자신들의 체제를 정당화하는 이용하고 있다.
고조선 연구에 있어서 북한이 한발 앞서서 많은 연구업적을 쌓았다. 처음에는 고조선이라는 나라가 현재의 북경에 가까운 난하 유역으로부터 점차 동진하여 요하지역을 거쳐 최종적으로 평양에 정착하였다는 고조선이동설을 제시하였다. 그래서 북경지역부터 한반도 내부에 존재하는 청동기문화를 모두 고조선의 문화라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최근 들어 단군이 처음부터 평양에서 고조선은 세운 것이라고 주장하기 전까지는 북한의 공식적인 견해였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와서 갑자기 북한의 공식적인 견해는 평양건국설로 바뀌었고, 그때에 맞추어 단군릉도 발굴되었다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단군릉은 마치 고구려의 왕릉처럼 크게 조성하였다.
왜 북한의 공식적인 견해가 바뀐 것일까? 그 의도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고조선의 연구가 현재 북한의 국가적 정통성을 설명하는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고조선에 관해서 일찍부터 연구한 것은 그들이 조선이라는 명칭을 현재 자신들의 국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군릉을 발견하고 그것을 대대적으로 성역처럼 조성한 것은, 평양이 가지고 있는 중요성을 현시점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이다. 북한의 고조선 인식의 변화는 고조선 문제는 단순히 역사적 사실의 문제가 아님을 보여준다. 극히 정치적인 문제일 수 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중국의 영토인 지역에 대해서 고조선의 영역이라고 말하기 어려운 북한과 중국과의 관계, 평양의 의미를 더 크게 부각시키고자 하는 판단 등이 고조선에 대한 인식에 개재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
과거에 있었던 사실 그 자체가 모두 오늘날 우리에게 의미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들이 과거의 사실에 주목해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비로소 역사적 사실이 된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철저하게 현재의 우리에 의해서 재구성되고 조작된 과거의 사실일 수 있다.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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