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동북아민족사

[스크랩] 우리는 단군의 자손인가?

imaginerNZ 2007. 9. 21. 02:30

우리는 단군의 자손인가?

 

우리는 단군의 자손으로 단일ㆍ배달민족이며 한겨레라고 배워왔다. 단군의 건국이념은 홍익인간이며 지금도 유용한 사회적 덕목이라고 알고 있다. 개천절도 제정하고, 교정에는 단군상도 세웠다. 기원전 2333년에 나라를 열었다고 해서 단기(檀紀)라는 기년법을 서기나 불기처럼 쓴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게 사실일까? 누군가 의미를 부여한 이 시대의 신화는 아닐까?

 

간단한 질문을 해보자. 우리 인구의 10% 정도가 김해 김씨라고 한다. 김해 김씨가 단군의 후손인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김해 김씨가 단군의 후손이라고 한다면, 김해 김씨의 조상들이 가만히 있겠는가. 조상을 욕보이는 말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김해 김씨의 시조는 단군과는 전혀 관계없는 수로왕이기 때문이다.

 

수로왕의 전설은 이렇다. 지금의 김해 구지봉 주변에는 그 이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하늘에서 "이곳에 사람이 있느냐"고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한다. 그래서 9간이라 불리는 족장들이 "우리가 있다"고 대답하자, 다시 "내가 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으므로, "구지봉"이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러면 잘 듣거라. 나는 황천(皇天)의 명령으로 이곳에 와서 나라를 새로 세우고 임금이 되고자 한다. 그래서 이곳에 내려왔으니 너희들은 모름지기 산꼭대기의 흙을 파면서 이렇게 노래하여라. "거북아 거북아 머리를 내놓아라 내놓지 않으면 구워서 먹겠다."" 일러준 대로 노래를 부르자, 하늘 한 가운데에서 자줏빛 줄이 구지봉으로 길게 드리워졌다. 그 줄 끝에는 붉은 보자기에 금합이 싸여 매달려 있었으며 그 금합 속에는 해같이 둥근 황금알 6개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황금알은 모두 사내아이로 변하였는데, 그 중에서 가장 먼저 태어난 아이를 수로(首露), 황금알에서 태어났으므로 그들의 성을 금(金)이라고 하였다. 수로는 김해의 대가야국(실제로는 가라국)의 왕이 되었고 나머지 아이들도 아라가야, 고녕가야, 대가야(이는 후대 고령의 대가라국을 지칭하는 것), 성산가야, 소가야의 왕이 되었다고 한다. 

 

            

               김알지 탄생지 계림.

 

김해 김씨 시조는 수로왕

 

인용이 길어졌지만, 한마디로 말하면 김수로왕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는 단군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셈이다. 수로왕의 전설대로라면 함안, 고령, 고성, 성주 등으로 흩어져간 가야국의 왕들도 모두 김씨였던 셈이다. 단군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환웅도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였으므로, 환웅과 하늘에서 내려온 6개의 알이 어떤 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6개의 알을 시조로 하는 김해김씨를 단군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억지일 뿐만 아니라, 김해김씨가 단군의 후손을 자처해서도 안 될 일이다. 김수로왕의 부인이 되었다는 허황후 허황옥은 어떤가? 그녀는 인도 아유타국의 공주라고 한다. 그녀와 그녀의 후손 역시도 단군의 자손이란 말인가?

 

좀더 넓게 생각해보자. 고구려를 건국한 주몽은 누구인가. 주몽의 출생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전한다. 그 중 고구려인들이 스스로 기록한 광개토대왕 비문에 의하면 주몽은 천제(天帝)의 아들로서, 모친은 하백(河伯)의 딸인데, 알을 깨고 세상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가 자라나서 천제의 명을 받고 전국을 순수(巡狩)하러 남하하게 되었는데, 도중에 부여 땅의 엄리수(奄利水)라는 큰 강을 건너지 않을 수 없게 되자, 주몽은 나루터에서 "나는 천제의 아들이요,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니 나를 위해 다리를 놓아 달라"고 하자, 거북들이 물 위로 떠올라 다리를 놓아주어 강을 건너 졸본(卒本)으로 남하하여 고구려를 건설하였다는 설화이다. 주몽 역시 천제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므로, 환인의 아들인 환웅과 동격인 셈이다. 그리고 그는 강의 신인 하백 딸의 몸에서 알로 태어났다. 주몽 역시 단군의 자손일 수는 없다.

 

백제를 세운 비류와 온조는 누구인가? 바로 주몽의 아들들이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이 유리가 주몽을 찾아오자, 비류와 온조는 자기들이 나라를 이어받을 수 없음을 알고 남쪽으로 내려와 세운 나라가 바로 백제라고 한다. 백제의 왕실도 단군의 자손은 아닌 셈이다. 

 

               

               김해 허씨 시조 허황후릉. 김해 허씨 시조 허황후릉.

 

주몽 역시 천제의 아들

 

신라로 가보자. 신라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박혁거세 신화를 인용해 보자. 옛날 진한 땅에는 여섯 마을이 있었다. 기원전 69년 3월 초하룻날의 일이었다. 여섯 촌의 우두머리들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 둑 위에 모여 의논했다. "지금 우리들에게는 위에서 백성들을 다스릴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법도를 모르고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큰일이 아닐 수 없소. 하루 바삐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 임금으로 모시고 나라를 창건하여 도읍을 세우도록 합시다." 이에 높은 산에 올라 사방을 둘러보니 남쪽 양산 기슭 나정 우물가에서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워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 모양은 마치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것과 같았다. 사람들이 그리로 달려가 보니 자줏빛의 큰 알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그 옆에 있던 말은 사람을 보자 울음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사람들은 깜짝 놀라 그 알을 조심스럽게 쪼개 보았다. 아이의 몸에서는 광채가 나며 임금의 위용을 드러내었다. 새와 짐승들이 모여 춤을 추고 천지가 진동하며 해와 달이 맑고 밝게 빛났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혁거세왕(赫居世王)이라 했는데, 이는 세상을 밝게 다스린다는 말이다.

 

박혁거세 신화 속에서 박혁거세가 나온 알이 흰 말이 낳은 알인지 흰 말이 딴 곳에서 물어온 알인지 알 수 없지만, 흰 말이 낳은 알이라면 더더욱 박혁거세를 단군의 후손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고, 경주 박씨도 단군의 자손일 리가 없다.

 

경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의 경우도 남다른 출생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65년에 탈해왕이 밤에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의 수풀 속에서 닭 울음소리를 듣고서 신하 호공(瓠公)을 시켜 가보게 하였다. 금빛의 작은 함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고 흰 닭이 그 밑에서 울고 있다고 호공이 보고하자, 왕이 직접 가서 함을 열어보니 용모가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나왔다. 이때부터 시림을 계림(鷄林)이라 하고 아이는 금함에서 나왔으므로 성을 김씨라 하였다고 한다.

 

박혁거세도 알에서 나와

 

경주 석씨의 경우는 어떨까? 삼국유사에 따르면 용성국(龍城國)의 왕이 적녀국(積女國)의 왕녀를 아내로 맞았는데, 왕비는 7년간 기도한 끝에 큰 알 하나를 낳았다. 왕이 불길한 조짐이라 하여 내다 버리게 하였는데, 왕비는 알을 비단으로 싸고 궤짝에 넣어 흐르는 물에 띄웠다. 표류하던 궤짝을 신라 아진포(阿珍浦:迎日)의 한 노파가 건져 보니 옥동자가 있었으므로 데려다 길렀다. 이 아이가 자라나면서 날로 지용(智勇)이 뛰어났는데, 성명을 알 길이 없었으므로 궤짝을 건질 때 까치가 울었다 하여 까치 작(鵲)의 한 쪽 변을 떼어 석(昔)으로 성을 삼고, 알에서 나왔다 하여 탈해라 이름지었다. 남해왕(南解王)의 사위가 되었는데, 뒤에 선왕(先王)인 남해왕의 유언에 따라 신라의 임금이 되었다. 그가 곧 석씨의 시조이다. 역시 알에서 태어났으니 단군의 자손이라고 하기 어렵다.

이렇게 보면, 고구려의 왕실, 백제의 왕실, 신라의 왕실, 가야의 여러 나라의 왕실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고구려의 고씨, 백제의 부여씨 혹은 여씨, 신라의 박 석 김씨, 가야의 김씨와 허씨 등이 모두 단군의 자손이 아니다.

 

이들 가문은 모두 단군신화 못지않은 훌륭한 시조전승을 가지고 있고 또 그 가문의 족보가 전해오고 있는데, 이들을 모두 단군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또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도 왜 김해 김씨나 김해 허씨, 경주 김씨나 경주 박씨, 경주 석씨 등은 자신들은 단군의 자손이라고 이야기할 수 없었을까?

 

결국 단군신화가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신화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시대적인 상황과 요청에 따른 것이었다. 우리가 식민지지배를 받으면서 우리의 정체성, 영속성, 단일성을 확보해 식민통치에 대처하고 민족의식을 키우고자 하였던 까닭이다.

 

우리가 유구한 역사를 가진 민족이므로 우리 역사를 침탈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해야 했고, 우리가 단일한 혈통을 유지해 온 순수한 민족이므로 이민족의 지배나 혼입을 용납할 수 없다고 목청을 높여야 했고, 단군을 시조로 한 혈연공동체를 강조해 식민지지배라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우리 정체성을 잃지 말기를 스스로 다짐해야만 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김해 김씨나 경주 김씨, 경주 박씨의 시조가 각각 하늘에서 내려왔거나 기이한 출생을 하였다는 것보다는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평양지역의 신화인 단군신화가 우리 전체를 결속시키는 데 유리하였을 것이다. 단군은 딱히 어느 한 가문의 시조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신화는 그저 신화일 뿐

 

역사의 단절, 민족 정체성의 상실, 민족 문화의 위기라는 극한적인 상황에서 단군신화는 우리를 결속시키고, 우리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더없이 유용한 우리들의 신화였던 것이다. 어떠한 의문도 용납되지 않았고, 우리들은 그 신화와 호흡하면서 우리들의 위기를 극복하였다.

 

공산당이 싫다고 하다가 입이 찢어져 죽은 이승복의 이야기나, 제방에 생긴 구멍을 손가락으로 막고 있다가 죽어간 네덜란드 소년의 이야기도 우리들 시대에 우리가 만든 신화이다. 단군신화는 과거의 신화 즉 고려시대에 유용하였던 신화를 이 시대의 신화로 재활용한 것이다.

 

그러나 신화는 논리와 합리라는 기제가 작동하지 않는 시대의 이야기다. 신화는 사람들을 이성적으로 설득하기보다는 감성적인 언어로 마비시킨다. 신화가 많은 사회일수록 합리적인 언어가 통용되지 않는 사회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는 "인간은 자신의 역사를 만든다. 그러나 역사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고 했다. 우리가 배웠던 과거에 대한 지식 중 많은 부분이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 역사적 지식의 상당 부분은 우리가 공유했던 신화인 셈이다. 하지만 그런 지식이 미래에도 유용하리란 보장은 없다. 내일은 또 내일의 역사를 만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출처 : 좋은 글의 美學
글쓴이 : 언덕에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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