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메일 서신 -부산에 사시는 어떤 분께
오늘은 봄을 재촉하는 비가 오네요.
그동안 피웠던 강의실 난로에 손이 덜 가기 시작하네요.
그래도 오늘은 습기를 제거하느라 피웠답니다.
강의실 분위기가 다숩다고나 할까요?
아까 출근해서 비를 바라보았습니다.
비를 한참 바라보고 있으면 원시인이 된 듯한 느낌이 듭니다.
아주 아주 오래 바라보고 있으면 그 원시인이 원시시절의 어린아이가 되어 가지요*.
그래서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점점 어려지면서 화평에 잠기게 됩니다.
마음이 순순하고 착하십니다.
자존심이 강하시고 심성이 세심하시겠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의 마음은 두 가지 대립적인 요소가 공존합니다.
왜냐하면, 동질적인 요소는 합쳐지고,
그러다 보면 두 개의 대립적인 성정이 남습니다.
머리와 꼬리만 남고 진짜 알맹이는 증발한 형상처럼요.
인간의 삶에 마지막 비의가 한 가지 있다면,
그것은 이 성정의 대립을 순수합일에 이르게 하는 것이고
그것은 일종의 회복일 겁니다.
그것은 '살며 사랑하며 그리워 하며' 모든 것을 아우르는 마음자세라 생각합니다.
'순수는 다른 순수를 자신으로 바라보지요.'
'순수에게는 다른 순수가 자신을 비쳐주는 티 하나 없이 맑밝은 거울'이랍니다
-순수의 우물보기(나르시시즘)이라고나 할까요?
종교는 있으신지요?
저는 '신성이 인간의 마음에 원초적으로 깃들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특정 종교를 믿지는 않으나, 신성의 당위성은 받아들입니다.
제가 쓴 어느 수필의 말미에
"세계의 모든 곳에 내리는 비는 어떤 면에서 하나의 느낌으로 다가온다"라고 적은
기억이 납니다.
오늘 내리고 있는 비는 밤에도 계속 내릴 겁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면 제법 오래 내리죠^^.
옛 어른들이 비가 내리면,
파전을 부쳐 이가 빠진 사발에 걸죽한 막걸리를 부어 마시며
육자배기나 그 고장 민요를 신명나게 했으리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술은 하시는지요?
만약 하신다면 주량이 어느 정도이신가요?
저는 호프만 합니다.
'물술'은 못하고요. [물술:물 같은 술:소주, 양주 기타]
막걸리도 안 하는데, 아는 사람이 막걸리를 좋아해서 어쩌다 가끔 하죠.
호프를 마시면 바깥출입을 하게 되는데,
그때 잠시 바깥바람 쐬고 자연의 부름에도 응하고 심호흡도 하고 마음의 무늬를 정리한답니다.
나갔다 들어오는데, 보통 5분 정도는 듭니다.
우리 사람들은 먹는 게 급해서 술도 매우 급하게 마시는 편입니다.
저도 외인들에 비하면 급하죠.
더우기 술은 술을 부르는 경향이 있으니...
호프는 건강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괜찮은 것 같습니다.
아직까지는요*^^.
개체의 외로움을 달래거나,
복잡한 심중을 정리하거나,
가까운 사람과 마음의 무늬를 함께 하거나 할 때
술은 좋은 매개체 역할을 한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또한 술은 '삼라만상이 하나가 되게 하는 신비의 마력이 있다'는 생각도 해 봅니다.
물론 자신과 자신이 대하거나, 겉으로 소유하거나, 속에 간직하고 있는 모든 것을 잠시나마 잊게 하면서요. '우주의 시간성에 근접하는 어떤 만유의 시공'에 속하게 하는 것이 술이라는 생각도 드네요.
여행은 가끔 가시는지요?
전에는 한 달에 두어 번 양수리나 북한강변 쪽으로 나갔는데,
올해에는 별로 그러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산에 한 번 내려가서 님을 뵙고 싶은 마음도 드네요*.
아무튼, 식사 거르지 마시고, 건강 하시고, 마음은 잠든 갓난아기처럼 화평하시기를 빕니다.
-070303 대치동에서 엘리엇 킴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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