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킴 작품방/편지글(서한집)

사랑의 근본에 관한 에쎄이: 사랑하는 당신에게 삶과 죽음에 대하여

imaginerNZ 2007. 5. 2. 04:57

사랑하는 당신에게 삶과 죽음에 대하여
[To My Love, on Life and Death]
              
이 글을 당신이 읽으면서 마음 아파하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오.
그러니 남이 쓴 글을 대하듯이 담담히 읽어주면 고맙겠소.


당신에게 몇 가지를 말하고 싶어요.
우선 삶에서 진실한 것은 삶, 즉 살아있다는 것뿐.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우리의 마음으로 자연을 보는 한 자연은 진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인공의 때가 묻지 않은 자연 속에서 살아가는
식동물들이 대하는 자연이 더 진실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개체의 자연지향은 부분적이고 방향적이기는 합니다.


우리가 알맹이 그대로의 삶, 즉 삶의 진실인 삶을 보기란 불가능합니다.
진화의 현생적 결과물인 우리가,
우리의 몸과 마음의 지향적인 시각을 완전히 배제하거나,
자신이 만든 인공적인 것들에 둘러싸여 살아가는 우리 인간이,
설령 이 모든 인공적인 것들을 제거하거나,
이것들을 등지고 자연 속으로 원시귀향을 한다고 해도,
있는 그대로의 자연을 볼 수는 없습니다.


속세를 떠나기로 결심을 하고 고행정진을 하기 위해 출가를 하는 순간에
출가자는 이 번잡한 문명사회에 걸려있는 인연의 도르래에서 굴러 나오는
기다란 실꼬리를 뒤에 남기며 입산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의 탯줄이며 뿌리칠 수 없는 근원적인 번뇌입니다.
그것이 문명시대 이후를 살아온 인간의 운명이기에
동시대를 사는 현대인들도 또한 같은 운명을 짐 지고 살아갑니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운명의 등껍질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거북이의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자연에 사는 거북이는 자신의 운명 속으로 언제든 숨어들 수 있는
지혜로운 동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람은 나체동물입니다.
덥수룩한 털이나 두터운 가죽이나 딱딱한 껍질이나
뾰족한 뿔이나 날카로운 이빨이나 기다란 부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람의 운명은 자신에게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운명 안으로 숨어들어갈 수 없습니다.
사람은 운명을 피해 보호받거나 숨을 곳이 없는 달랑 맨몸 하나뿐인 동물입니다.
그래서 인류는 뇌로 사활을 건 생존의 승부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결과로,
우리 인간은 이미 과잉진화된 인간의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삶에서 진실한 것은 인간의 삶이요,
역시나 식동물들에게도 진실한 것은 식동물의 삶인 것입니다.
즉 모든 생명체에게 진실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종(種) 전체의 공통적인 특징이
기본적으로 고스란히 배어있는 개체의 삶입니다.
[사회와 질서는 그 다믐의 문제이지요]


삶은 지상의 활기[活氣]입니다.
이 지구상에 살아있는 모든 생명체들은 환경이 배태한 것들이며
결국 하나의 온전한 자연에 속한 구성체이면서 자생적으로 온존합니다.
생명은 자연의 일부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생명적인 자연은 어머니자연처럼 영속적이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함께 하는 그늘이 배어 있습니다.
그것은 생의 중단, 즉 죽음입니다.
죽음은 생물학적인 삶의 지우개입니다.


사람들이 드물지 않게 하는 말 중에 운명공동체라는 말이 있습니다
죽음을 걸고 하는 맹세도 있습니다.
우정의 맹세나 결사공동체의 맹약이나 결혼서약 같은 것들은
역설적으로 죽음을 걸고 하는 맹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식을 낳아 키우는 것은 말없는 사랑의 맹세입니다.
여자와 남자가 만나 사랑을 하면서 사랑의 다짐을 할 때
그것도 일종의 죽음의 맹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죽음의 맹세를 하는 이유는
맹세를 하는 순간에
‘삶은 생명에게 주어진 유일한 진실이며
또한 삶은 생명에게 부여된 길지 않은 전부’라는 생각을 암암리에 하기 때문입니다.
삶이 끝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죽음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세계이며
그 세계의 시간성은 한정 없이 길기에
죽음은 차라리 짧은 삶의 여정을 거쳐 도달하게 되는 ‘귀향’의 정서에 가깝습니다.
그러한 느낌을 체득한 사람끼리 하게 되는 진정한 정감의 서약이 죽음의 맹세인 것입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죽음을 앞에 둔 삶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약속은
삶의 밑천인, 애잔하리만치 연약한 목숨을 걸고 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따라서 ‘태어나면서부터 한정적인 삶의 유일한 맹세는 죽음입니다.’    
   
 
한편, 이러한 죽음 중에 한 가지 종류인 자살은 ‘능동적인 결단과 실행’입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자살을 접하게 되면
흔히 소심함, 무기력감, 자포자기, 일탈적 몽상감, 만용, 비겁함, 책임회피 등을 떠올립니다.
그렇지 않으면 애국, 헌신, 희생, 용기, 애정 등을 떠올립니다.
사람들이 자살을 이렇게 두 가지로 크게 나누는 것은
자살을 선악의 저울에 올려놓고 저울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저울은 고장 난 듯이 비스듬히 기울어진 저울입니다.
그런 면에서 삶은 지구가 살짝 기울어져 있듯이 일정한 기울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기울기이며 그 기울기는 무엇인가를 향해 기울어져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살에 대해 전자의 경우를 떠올리나
후자의 경우는 자살의 범주에서 따로 떼어내 미화해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보았을 때
자살이 살아있는 사람들에게 희망과 모범적 사례와 교훈을 주는 긍정적인 것이라 해도
자의에 의한 죽음, 즉 자살은 포괄적 범주의 죽음처럼 예외 없이 자살입니다.
매우 짧은 순간에 행해지는 돌발적인 죽음도 자의에 의한 것은 자살입니다.


자살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스스로 행한다는 것입니다.
자살은 살아있는 자들의 세상에 남겨지는
어떤 혈연적, 심리적, 사회적인 의의와
무관하게 이루어지는 독자적인 행동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결행’입니다.


자신의 삶의 전체적인 의의를 스스로 결정짓고 외로이 마감하는
능동적인 행동방식이 자살입니다.
아무런 생의 의미나 결과를 담고 있지 않은
‘가장 순수하고 고독한 행위’가 바로 자살입니다.
물론 살아 숨쉬며 활동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살은 종말론적인 것으로밖에 비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삶이 본질적으로 스스로에 대한 일방적인 편향성과
대체불가능한 애착성을 띠고 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죽음이 생물학적으로 재앙에 가까운 공포심과 혐오감과 단절감을 주기 때문에
삶이 죽음의 종류 중에, 그것도 삶을 스스로 훼손한다고 여겨지는 자살에 대해
결단코 긍정적인 호감을 가지거나 후한 점수를 줄 수는 없습니다.


한편으로 인간이 죽음에 대해 가지는 잘못된 편견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죽음을 재앙이라고 여깁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은 생명의 자연스런 연속과정이지요.
살아있는 이가 죽은 이를 애도하는 것은
개인적 유대인 사랑의 상실을 슬퍼하는 것이며
동시에 인류 전체에게 운명지어진 죽음을 슬퍼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삶과 사랑은 따뜻한 애착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삶과 사랑의 고개를 넘어서고
차가운 죽음까지도 다 껴안는 인간의 최종적인 감성은 무엇일까요?
더 나아가 모든 생명체가 느끼고 있는 그 아련한 느낌은 무엇일까요?
그것이 어떤 종류의 감성인지 조용히 묵상에 잠겨 보십시오.
이글의 끝에 그것을 밝히겠습니다.


삶과 죽음은 머리와 꼬리처럼 연결되어 있습니다.
삶 없는 죽음은 없으며 죽음 없는 삶도 없습니다.
그것은 두 가닥 중에 한 가닥을 뽑는 추첨과 같은 것입니다.
생명현상과 죽음은 우주자연의 한 가지 미미한 질서이자 설정에 불과합니다.
그것은 개체적으로는 하나의 쳇바퀴이며
포괄적으로는 제법 큰 하나의 수레바퀴입니다. 
그러한 질서는 작게는 반복적이며 크게는 순환적입니다.
그래서 인간이 생각하고 의미부여를 하는 것만큼
삶이나 또는 죽음이 복잡미묘한 현상은 아닙니다.
본질적인 의미에서 삶이나 죽음은 매우 단순합니다.
인류가 자신의 운명과 그 영역을 가속적으로 넓혀왔다고 해서
인간의 삶과 죽음이 다른 생명체의 삶과 죽음보다
진화했거나 변화했거나 선진화되었거나
혹은 더 복잡다단하거나 더 의미 있고 더 세련되고 더 고차원적인 것이 아닙니다.
삶과 죽음은 소박하거나 점잖거나 화려하거나 낭만적이거나
숭고하거나 초월적이거나 하지 않습니다.
삶 또는 죽음은 사회계층이나 직위고하나 빈부귀천이 없습니다.
삶의 관점에서만 바라볼 때 위와 같은 구분이 생기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웬만큼 살고 나이가 들어 희끗한 머릿결에 자연 앞에 섰을 때
자연이 하는 말에 조용히 귀 기울여 보세요.
삶과 죽음의 바탕은 감정이 없습니다.
생멸은 하나의 현상입니다.
그것은 분리되지 않는 하나의 생명현상과 그 끝입니다.
다섯 마디의 생명현상이 ‘생장로병사[生長老病死]’입니다.


삶을 바탕으로 미화하거나 죽음을 바탕으로 미화하는 것은
본질적인 삶과 죽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의 관점에서 생멸을 파악할 때 생기는 것이 미화입니다.
생멸을 동시적으로 파악하려 할 때 우리의 마지못할 유일한 도구는 삶, 그 자체입니다.
죽음을 도구로 삼기에는 죽음은 한없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은 삶 하나뿐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뿐인 삶을 미화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편으로 우리가 사물을 미화하는 것은 삶의 안목이 대상인 사물에 투영된 것입니다.
그것은 일종의 간접화법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역사를 관통하는 예술미학의 특징이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정서적인 4차원화가 예술입니다.
예술은 지고(至高)의 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그것이 살아있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차원이라고 여겨져 왔습니다.
그러나 생명체에게는 진정한 마지막 차원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 점에 관해서도 이 글 끝에서 밝히겠습니다.


삶의 진실은 삶이고 추상의 죽음은 삶의 종식입니다.
삶과 죽음을 미화할 수는 있으나 그건 미화의 몫입니다.
삶 혹은 죽음에 관한 어떤 미화도 자연의 영역에 속하지 않습니다.
만일 누군가 그런 미화를 한다면
그것의 전부는 인간욕구의 장식적인 객관적 신비주의에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욕구는 너무나 본능적인 추상향적[抽象鄕的]인 확산심리입니다.
그것은 혼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입니다.
죽음이 삶에 미치는 여파는 혼의 불확정적인 공간을 울리며 삶의 진실을 되새기게 합니다.
죽음이 삶에 미치는 여파는 모든 창조의 원천이며 역사를 이끄는 원동력입니다.
대규모 죽음의 현상이 빈번하여 죽음의 영향력이 강력했던 사회일수록
그 사회의 생명현상은 더 다양하고 세분화되며 더욱 생생하며 더 심미적이었습니다.
예술의 꽃도 한 층 더 크고 아름다웠습니다.
더 섬세하고 더 예리하고 더 장대하고 더 거룩했습니다.
작든 크든 예술은 생명의 고난을 지나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이라고 할 수 있겠죠.
그런 면에서 삶은 스스로 지은 노래를 스스로에게 불러주며 스스로 돌아듣고 있습니다. 


결국 삶은 삶이고 죽음은 죽음입니다.
이 둘은 존재와 부존의 현상일 뿐 거기에 덧보태거나 뺄 것은 없습니다.
삶의 세계나 죽음의 세계(?)를 미화하려는 욕구는
인간본성의 성분 중에 비중이 낮은 상층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부위는 이상향[utopia]을 꿈꾸는 기능을 전담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신성[神性]의 뇌역[腦域]입니다.


결론적으로
이글은 살아있는 자들의 삶의 몫이나 관심에 관한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에 관하여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어떤 기법도 사용하지 않고
어떤 감정도 잔존하지 않는 투명함으로
있는 그대로의 마음으로
필 가는 대로나마 절대표현(absolutely express)하려 한 것입니다.
그런 관점을 진실로 헤아리는 독자가 있다면
그는 이글이 동결건조(凍結乾燥)한 것이 아님을 입증하는 삶일 겁니다.


앞서 언급했듯이
인간뿐만이 아니라
모든 생명 있는 것들의 최종적인 감성,
즉 시공감각적[時空感覺的]인 우주의 안테나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그리움[Grium]’입니다.
모든 감성은 그리움으로 귀결되기 때문이겠죠?


- 이글은 미완성이면서 살아생전에 이루어질 기약이 없는 사랑을 하고 있는 심경과 처지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의 토로가 암시적이면서 단속적으로 군데군데 비치는 것은 이 사람의 개체성의 탓입니다.
이글을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평온한 행복을 빌며 헌정(獻呈)합니다.  
[10:46pm, 4/02(Sun), 2006 ; 대치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