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킴 작품방/수필집(미셀러니)

엘리엇 킴 수필선: 남녀의 사랑에 대하여

imaginerNZ 2007. 5. 19. 05:42

남녀의 사랑에 대하여[On Love between Man and Woman]

                                                                  -엘리엇 M. 킴


   이 땅에 서구문화가 유입이 된지도 100년이 훨씬 지난 요즘에 그 서구문화가 정착되고, 해(害)와 익(益)의 곰팡이처럼 숙성하고 있다는 점을 여러 분야에서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 한 사례로 들 수 있는 것이 성문화의 변화라고 할 수 있다. 혼전 섹스, 원조교제, 기혼과 미혼이 서로서로 교차하는 바람피우기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성`이라는 것은 인류사에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일까? 아마 과거와 달리 급격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인구과잉의 현대사회에서 `성`은 증대된 남녀간의 접촉에 의해 우발적이고 다차원적이며 대중적인 속성을 띄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자주 만나다 보니 어쩌다 호기심 어린 관심에 미묘한 감정이 싹터서 그렇게 되기도 하고 가벼운 상대를 만났다 헤어지는 엇박자의 되풀이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전문적인 소개단체에 의해 명시적으로 또는 암암리에 그렇게 되기도 하고 때로는 어느 일방의 부와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려는 의도에서 작위적으로 그렇게 되기도 하는데 이 경우는 성이 하나의 자본재의 역할을 한다고 볼 수 있다. 인류사에 있어 성의 배분문제는 가장 심각하고 중요한 심리적, 사회적 문제였다. 권력층이 `성`을 과도하게 점유하거나 또는 `성`이 무차별화 하는 역사의 단계에 진입하면 그 강대한 집단의 피라미드 구조가 어이없을 정도로 급격히 무너지는 현상이 예외없이 발생해 왔다. 개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한 개인이 정도 이상의 성을 추구하면 그 개인에게 남겨지는 것은 도덕적 상실감, 허탈, 원죄적 타락감, 자아상실로부터 벗어나려는 자기최면적 대응심리 등등 개인이 해결하기에는 과도하게 복합적인 심리의 굴절적 반사현상이 작용하게 되어 그 자기장에서 벗어나기가 매우 어렵다. 물론 일정 정도의 도덕적 마비감에 빠져 든 사람은 무신경해질 것이다. 양자 모두 보편적 삶의 진로에서 일탈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심리에는 이러한 제한 없는 성의 개방을 원하는 본능이 숨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문학의 영원한 고전적 테마가 `사랑과 제도의 갈등`이라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그러면 과연 이 현대사회의 `성`에 현명하게 대처하는 태도는 무엇일까? `성`의 특징은 개체적인 개별성이다. 그러나 그 개체 각자를 궁극적으로 지배하며 삶에 있어서 균형추 역할을 하는 것은 `정신`성이다. 바꿔 말하면 개체를 지배하는 것은 사람이 칭하기를 `신(神)의 정기(精氣)`인 것이다. 예부터 성을 통제하고 적절히 분배하는 기능을 수행해 왔던 것은 종교였다. (물론 종교에 따라 그 통제의 정도는 다양하다.) 왜냐하면 종교는 뭇 짐승과 다른 인간생활의 궁극 지향적 특성을 함유한 `신의 정기`를 고양시키는 강력한 수단 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육신발생의 불가피불가결한 도구이자 혈통계승의 필수적인 방법인 성을 통제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고 대처수단에는 한계가 있다. 압죄지 않는 느슨한 통제가 필요할 지도 모른다. 정신적 양식의 강요가 아니라 실용적 상식이 더 필요한지도 모른다. 서로 수긍할 수 있는 선에서 묵계의 관습처럼 열린 허용과 결과에 대한 용인이 필요할 지도 모른다.

 

   ‘성’에 대해 나의 견해를 말하자면, 가장 이상적인 이성을 추구하라고 말하고 싶다. 이상적인 사람을 찾아 헤매면서 겪는 `성`은 가장 이상적인 이성 앞에서는 초라하게 사그러드는 빛을 발할 뿐이다. 진정으로 사랑하는 연인은 현세의 온갖 습속과 유행을 넘어선다. 만약 그들의 사랑이 사회제도, 특히 법이나 관습과 배치될 때 그들은 기꺼이 사회적 불행을 선택하려 하나 현실적 인생의 결과는 세 가지 경우만 낳는다. 어느 한 쪽이 눈물로 사랑을 포기하여 헤어지거나, 아니면 둘이 하나 되어 죽음을 선택하거나 또는 사회적 불행이나 불리를 감수한다. 인간이 만든 제도의 말발굽이 참사랑을 짓밟은 경우는 늘 있어 왔다. 문학적 비극의 관점에서 둘은 영원한 평행선을 달려왔고 달리고 있으며 앞으로도 달릴 것이다. 물론 행복하게 맺어진다면 더없이 좋은 귀감이 될 것이고 누구나 아낌없이 축복할 것이다.

 

   끝으로 참사랑을 꿈꾸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은 말은 `친구가 되어 가능하면 많은 사람을 만나 보라`는 것이다. 자기 짝을 찾을 기회의 가능한 영역을 최대한 확대하라는 것이다. 이 기회의 확대는 내성적이거나 외향적인 성격 또는 미모나 기타 사회적 여건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 참사랑을 나눌 사람의 사교영역이 넓든 좁든 그대가 쉼 없이 그이를 향하여 영역을 넓혀 나가다 보면 이상형이거나 그에 가까운 사람을 만날 확률이 그만큼 커질 것이다. 젊음은 어떤 면에서는 잠재적 열정 속에 기다림일 수도 있기에. (단, 남녀간의 참사랑을 희원하는 사람은 이 영역을 지나치게 확대하지 않기 바란다. 지나치게 확대하여 우주대자연에서 사랑을 구하는 광인이나 기인이나 도인이나  혹은 사회생활면에서 나같은 덜 떨어진 글장이가 되기 쉬우니 하는 말이다.)

 

   그래서 참사랑을 하게 되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부연이 제 얼굴을 내밀고 둘을 하나로 맞을 것이며 생명의 아름다움과 환희를 함께 느끼며 푸른 하늘이 태양의 마음결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바람을 다스리는 메모 한 편을 적는다. 



바람


남과 여가 바람을 피우는 것은

빈 마음을 채워 주는 분위기와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바람이 이는 곳을 지향하나 바람에 실려 있어

결국 명확히 지향하는 대상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대자연의 품 안에서

대상 없는 그리움, 그 등불을 마음에 피워

음악을 들으며 책을 읽고

여행을 하고 그림을 그리며

自古의 친구를 벗하여 귀 기울여 듣고

인생과 예술을 논하라.

 

그러면 인생에 있어 참된 일탈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나아가 숭고한 아름다움에 도달하여 영원토록 거기에 머물게 되리라.

(2001년 12월 7일 오후 4시 9분 경 ; 분당 미금역의 카페 SAY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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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부분: 2011년초에 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