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시대 화상석(장식으로 그림을 새긴 돌)에 그려진 흉노와 한나라의 전투 장면. 말탄 기병들의 접전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사진 제공 아이필드 |
■ 日교수 著‘지금은 사라진…’서 본 한민족과 닮은점
《“우리는 기련산을 잃어 가축을 먹일 수도 없고, 우리는 연지산을 잃어 여인들의 얼굴을 물들일 수도 없다.” 우리에게 오랑캐의 대명사로 알려진 흉노의 이 서글픈 민요에 등장하는 연지산은 한국 결혼문화인 연지 곤지의 기원이 되는 연지꽃이 생산되는 곳이었다. 기련산과 연지산은 현재 중국 간쑤(甘肅) 성과 칭하이(靑海) 성 경계를 이루는 산으로 흉노의 거점이었으나 한무제에게 정복당했다. 그 시점은 기원전 1세기 직전으로 한무제가 고조선에 한사군을 설치한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사마천의 ‘사기’는 흉노에 대해 언급하면서 동아시아에서 침략적 유목민(오랑캐) 대 문명화된 정주민(한족)의 이분법 구도를 처음 정립했는데 이후 흉노는 북방아시아 최초의 기마유목국가로 꼽혀 왔다.
최근 출간된 사와다 이사오(澤田勳) 일본 가나자와호시료대 교수의 ‘지금은 사라진 고대 유목국가 이야기-흉노’(아이필드)는 흉노에 대한 다양한 연구 결과가 집적돼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책을 통해 흉노와 한민족의 유사점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
기원전 1세기경 흉노 무덤에서 발굴된 유골의 경우 그동안 서양 학자들이 추정한 아리안계가 아닌 몽골계의 특징이 확인됐다. 1세기경 흉노 무덤은 고구려의 굴식 돌방무덤(횡혈식석실고분)의 형태를 취한 점도 주목된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아내로 삼는 고구려의 형사취수(兄死娶嫂)제나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화살 명적(鳴鏑)의 원형도 찾아 볼 수 있다.
중국과 서양 학자들은 흉노가 아리안계냐 투르크계냐 몽골계냐 라는 인종적 기원에 집착해 왔다. 사와다 교수는 인종·민족 개념이 성립되기 전 고대 유목민에 대해 인종적 접근을 시도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며 언어와 문화의 포괄적 접근의 필요성을 제기했다.
이는 그동안 중국 중심에서 북적(北狄), 동이(東夷), 서융(西戎)으로 차별화되던 동북아 기마유목민족의 역사를 서로 융합한 지평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 준다.
이후 흉노는 선비, 돌궐, 거란(요), 여진(금, 청), 몽골(원) 등 동북아시아 기마정복국가의 원형을 간직한다. 선비족 이후 동북방 초원의 패자를 뜻하는 칸(가안)의 원형이라 할 선우를 중심으로 한 10진수 단위의 군사조직이나 특정 씨족 중심으로 왕과 왕비, 귀족을 할당하는 문화가 그렇다.
실제 몽골에서는 원(몽골제국)을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중국에 맞서 북적으로 구별돼 온 흉노 오환 선비 돌궐과, 동이(동호)로 구별돼 온 거란(요)과 몽골(원)의 역사를 하나의 몽골사로 묶고 있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말 거란, 말갈·여진, 몽골 등 동이족의 역사를 한국사의 확대된 지평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주장이 공식 제기됐으나 이를 북적의 범주까지 확대하진 않고 있다.
사와다 교수의 책과 관련해 중국의 만리장성을 방어용이 아닌 침략용으로 재해석하며 동북아 유목 민족의 역사를 중국 중심의 해석에서 해방시켜야 한다는 니콜라 디코스모 미국 프린스턴대 교수의 ‘오랑캐의 탄생’(황금가지)도 곱씹어 볼 만하다.
권재현 기자 confett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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