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동북아민족사

[스크랩] 흉노족과 훈족의 관계

imaginerNZ 2008. 9. 6. 06:52
흉노족과 훈족의 관계
 

  흉노족과 훈족이 연관성이 있다고 인정되는 것은 사실이나 엄밀히 말해 정확히 같은 민족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조금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고구려가 멸망했을때 고구려의 유민이 발해를 세웠지만 같은 고구려족이라고 할수 없기 때문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들은 발해족이다. 다시말해 발해족은 고구려족 지배층에 흑수말갈, 백산말갈 등이 합쳐져 새로운 발해족을 형성하였기 때문이다.

  또 흉노족과 훈족이 연관성이 있다고는 하나 서쪽으로 이주한 흉노는 4세기경 훈족이라는 이름으로 유럽인들에게 나타났을 때는 이주과정에서의 새로운 문화의 유입과 인종적인 혼혈로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같은 민족이라고 보기는 어려울것 같다.

  흉노족은 현 바이칼 호수를 중심으로 그 지역에서 유목을 하던 유목민족으로 유방이 세운 전한시대에 활동했던 민족이다.(기원전 4세기 - 기원전 1세기가 전성기라고 보면됨) 한나라의 시조인 유방이 흉노족의 왕인 묵특에게 져서 한나라의 공주를 대대로 시집보내겠다고 빌 정도로 강력한 세력을 가졌으며, 참고로 중국은 흉노족을 막기위해 만리장성을 쌓았고,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망시킨후 조선의 멸망시킨 것은 흉노의 왼팔을 자른 셈이다라고 사서에 적을 정도로 보아 당시 중국민족에게는 대단히 강력한 세력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후에 흉노는 한나라와의 싸움과 내부권력타툼으로 서흉노와 동흉노로 분열되었고, 서흉노는 기원전 1세기경 한나라의 장수에 의해 선우(흉노족의 왕을 뜻하는 말)가 죽음을 당해 멸망되었으며, 동흉노 역시 남흉노와 북흉노로 분열되어 남흉노는 중국에 복속된 국가로 전략하였다.

  후에 북흉노는 후한의 사주를 받은 정령(현재 러시아의 예니세리 강 상류에 거주하던 투르크계 유목민족), 남흉노, 선비족(흉노족의 공격을 받고 현 몽고고원 동부에 거주하던 동호족은 세갈래로 나누어 선비, 오환, 그리고 나머지는 흉노족에 귀속되게 되는데, 이때부터 선비족이 역사서에 등장한다...)등의 연합공격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며, 그후 기원후 2세기에서 부터는 초원의 지도자로 선비족이 군림하게 된다.

  한편 훈족의 기원에 대해서는 각 학자들이 연구하고 있으나 기원전 1세기경 한나라의 공격에 의해 무너진 서흉노의 후예들일거라는 추측이 일반적이며, 남흉노는 중국민족의 일부가 되었고, 북흉노 역시 선비족 등 유목민족에 포함되었다가 후에 결국은 현재의 중국민족과 현재의 몽고족의 일원의 한부분을 형성하게 되었다.


THE WORLD OF THE HUNS(1973년)

- OTTO J. MAENCHEN-HELFEN

- 인종

훈족에 대한 4가지의 묘사


① 가장 오래된 것 - Ammianus Marcellinus(330-400) 392년 안티옥 출신의
그리스인. 훈에 대한 서술은 증오와 공포로 가득 차 있음. 훈을 단지 '약탈자의 무리'로
묘사함. "그들의 철제칼은 약탈했거나 다른 것과 바꾼 것이다. 이들 유목민은 야금
기술을 가지고 있지 않다."
② Sidonius Apollinaris 훈족의 시체를 검시하면서 기록
③ Jordanes
④ Priscus - 아틸라에 대한 묘사를 남김.

  378년 8월 9일, 훈족에 쫓긴 고트족이 아드리아노플에서 로마군의 2/3를 격파.

  364년 Hilary of Poitier는 적그리스도의 출현을 예고함. 훈을 악마화할 여건은 훈이 등장하기 전에 이미 마련돼 있었다. 4세기 말 로마인들은 북아프리카부터 골 지방까지 종말론에 사로잡혀 있었다. (## 로마의 멸망은 곧 세계의 멸망)
(## 당시 로마의 정치는 불안정했다. 286년 디오클레이티안 황제는 로마를 동서로 분할했고, 수 많은 황제들이 쿠데타로 바뀌었다.)
구약성경 Ezekiel(38장 1절부터 39장 20절)에 나오는 Gog과 Magog(북으로부터 쳐내려오는, 세상의 종말을 가져오는 종족)을 각각 Goth 족과 Massagetae와 동일시하는 생각이 퍼져 있었음.(Ambrose) 당시에는 마사게타이족이 사라진 뒤였지만 로마인들은 훈족이 마사게타이족이라고 여김.
묵시록의 심판자인 말탄 기사의 이미지는 국경을 넘어 침략하는 유목민족의 투영물.
로마인들은 훈족을 악마가 보낸 군대라고 믿었기 때문에 굳이 훈족의 유래에 대해 연구를 할 필요가 없었다. 훈의 이미지는 유황 냄새와 지옥의 화염에 휩싸여 있었다.



- 전쟁

훈족의 말


로마의 수의사 Vegetius가 훈족의 말에 관해 유일한 기록을 남김. 그는 그의 책 lomedicina 2권 서문에서 '훈족이 침입한 이후로 로마인들은 자신들의 말을 잘 돌보지 않고 그냥 풀밭에 방치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수의사들의 일거리가 줄어들고 있다' 고 불평함. 로마인들이 말을 잘 돌보지 않게 된 것은 훈족을 비롯한 유목민들이 말을 그냥 풀밭에 풀어 놓는 것을 보고나서부터.
' 훈족의 말은 로마의 말과 다른다. 유목민들의 말은 혹심한 추위같은 나쁜 기후조건에서도 생존능력이 뛰어나, 마굿간이나 수의사의 치료가 필요없다. 로마인들은 이점을 간과하고 있다. 로마의 말은 매우 민감해서 좋은 잠자리와 따듯한 마굿간이 없으면 병에 걸리고 만다'

Vegetius의 훈의 말에 대한 평가


수명이 길다. 인내력이 뛰어나고 추위와 허기를 잘 견녀내 전쟁에 적합하다.

훈족 말의 생김새 묘사

.
갈고리 모양의 머리(great hooked heads), 튀어나온 눈, 좁은 콧구멍, 넓은 턱,
튼튼하고 뻣뻣한 목, 무릎 아래에난 털, 휘어진 등, 지나치게 큰 갈비뼈 , 긴털 많은 꼬리, 힘센 脛骨, 넓은 발굽, 오목한 허리를 가졌다.
몸체는 뼈가 드러나고 등에도 기름기가 없다. 키는 크지 않고 몸길이가 길다.
배는 쳐지지 않았고 뼈가 크다. 마른 몸매가 보기좋다.
저자의 판단으로는 훈의 말은 프르제발스키種은 아니다. 프르제발스키는
곧추선 갈기와 짧은 털의 꼬리를 특징으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훈족이 여러
다른 종의 말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음.
오르도스에서 출토된 흉노족 청동 유물의 말은 위의 묘사와 비슷하다(hooked heads, long bushy tail) 205p 사진.

Sidonius의 기록 - '훈족의 몸은 말몸의 일부처럼 보인다. 말이 아무리 빨리 달려도 훈족의 몸은 말의 사지에 잘 붙어있다. 다른 종족은 말을 타지만, 훈족은 말 위에서 산다고 해야 맞다.'


- 활과 화살


Sidonius - ' 훈족은 최고의 궁수다'
Procopius - '훈족은 말에서 내려 전속력으로 달리면서도 정확하게 목표물을
맞출 수 있다.'
훈족은 화살촉을 날카로운 뼈조각으로 만들었다.

1932년 Alfoldi 와 Werner는 훈족의 활을 제작하여 복원했다. 훈족의 활은 길이 140-160cm의 복합곡궁이었다. 나무 심에 힘줄로 바깥을 대고 角材로 안을 댔다.

훈족의 활에는 여러 종류가 있었다. 전사의 무덤에서 발굴된 것은 모두 전투용활이다. 사냥시에는 복합곡궁을 사용하지 않았을 것. 중국 낙양에서 발견된 B. C.
3세기 경의 흉노족 사냥 장면에 등장하는 활은 복합곡궁이 아니다.
복합곡궁은 활 전문 기술을 가진 사람만이 만들 수 있다. 영국의 longbow 같은
단순한 활도 전문 기술이 없으면 만들지 못한다.

제조방법

 

활대를 중심부터 가장자리로 갈수록 가늘게 다듬어야한다. 그래야 활시위를 최대한 당겼을 때 활대가 골고루 휘어진다. 활대 나무결과 재질에 작은 흠이나
일어나 부분을 정밀하게 다듬어야한다. (Pope, Hunting with Bow and Arrow)
보통의 활 하나를 만드는데 8일이 걸리고, 한 번 쏴보고 다시 고치는 과정을 거쳐 성능이 좋은 제대로 된 활 하나가 나오는데는 몇 달이 걸리기도 한다.

Elmer, R. P. , Archery (1926), Target Archery (1946) 의 저자
'내가 아는 한 백인 중에서 복합곡궁을 만드는데 성공한 사람은 셋 밖에 없다. 그들 모두 「황인종이 만드는 것을 백인종이 못 만들라는 법이 어디있는가?」라는 슬로건을 걸고 덤벼들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고대 동양인들이 만든 활과 겨룰 만한 것은 만들어내지는 못했다.'

필자는 1929년 Tuva 서부의 Barlyq-Alash-Aksu 지역의 노인에게서 자기가 어렸을 때(1870-80년대) 활을 만들줄 아는 사람은 단 두 사람 밖에 없었다는 말을 들음.
나무와 각재를 모양에 맞게 다듬고, 활 등에 댈 힘줄의 모양을 만들고, 활 각부분의 약한 곳과 강한 곳의 최적비율을 맞추는 일등은 오랜 기간의 훈련이 필요하다.
훈의 전사들에게 활은 제일 귀중한 재산이었다. 죽은 사람을 묻을 때도 그의 유품 중 아직 쓸 수 있는 온전한 활은 부장하지 않았다. 대신 가짜 활이나 못쓰게 된 활을 묻었다. Tashkent 오아시스의 Aktobe 무덤(4세기 경으로 추정)에서 발굴된 활은 여러 못쓰게 된 활에서 떼어낸 부품으로 만든 가짜였다.
아틸라 치하의 게르만족 귀족의 (Moravia의 Blucina 지방 ) 무덤에서도 하나의 완전한 활을 이룰 수 없는, 여러 활에서 떼어낸 부품들만이 발견됨.

Procopius
훈족과 함께 로마를 괴롭힌 ' 고트족도 말은 잘 탔다. 하지만 훈족처럼 잘 싸우지는 못했다. 그들에게는 훈족이 가진 활이 없었다.'

- 종교


훈에 대해 기록한 로마인이나 오구즈 투르크의 관습을 기록한 아랍인 Ibn Fadlan 등은 공통적으로 이들이 잘 씻지 않는다고 말함.

Ammianus
' 훈족은 한 번 옷을 입으면 헤어지고 다 떨어져 누더기가 되어 천이 한조각 한조각씩 떨어져 나갈 때까지 입는다.'
이들은 훈족의 씻지 않는 풍습이 종교적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몽고와 투르크 풍습의 목적은 물의 신을 노하게 하지 않으려는 것.

Priscus는 아틸라의 옷이 깨끗한 것을 보고 놀랐다는 기록을 남김.

훈족은 샤만을 가지고 있음이 확실. 훈의 지배계층에 등장하는 이름 Atakam, Eskam 중의 Kam은 투르크어의 샤만을 뜻하는 'qam'이다.

아틸라는 가축의 내장과 뼈에 간 금을 보고 운세를 점쳤다고 한다. 몽고나 투르 족은 양의 어깨뼈를 불 속에 넣고 열기에 뼈가 갈라지는 모양을 보고 점을 친다. 서양의 고대인들이 양의 뼈로 점을 쳤다는 기록이나 고고학적 증거는 남아있지 않다. 타시켄트 남서쪽 Sarmatoid의 Vrevskii 묘지와 Bukhara의 Lavyandak 에서 기원전 1세기 경의 양 어깨뼈가 발견됐는데(일부는 불에 그슬려짐) 이것은 非이란계 유목민의 것으로 보인다. 투르크어에서 '占'이란 말은 'yrq' 인데 이는 '갈라진 틈'이라는 뜻이다.

훈족은 자신들의 왕 아틸라를 '하늘의 아들'로 여겼다. 하지만 아틸라와 일반 훈족 사이에는 다른 나라의 왕과 백성 사이만큼의 큰 신분적 차이는 없었다.
'아틸라는 왕관을 쓰지도 않았고 옷은 수수했다. 그의 칼, 신발, 馬俱에도 금장식은 찾아 볼수 없었다. 그는 나무 잔으로 술을 마셨고, 나무 접시에 음식을 담아
먹었다. 아틸라는 훈족 내부의 다툼을 듣고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Priscus)

'아틸라가 죽었을 때 훈족은 풍습대로 머리칼을 자르고 얼굴에 깊은 상처를 내며 슬퍼했다. 전사의 죽음은 여자들의 눈물 대신 남자들이 흘리는 피로 위로받는다. ' (Ammianus, Getica)

슬픔의 표시로 얼굴에 상처를 내는 풍습은 투르크, 마자르, 슬라브족들 사이에 널리 퍼져있었다. 이 풍습은 최근까지도 세르비아, 알바니아와 타지키스탄의 일부에 남아있는 것으로 보고됐다.(Rakhimov, 1959)

- 인종

'아틸라는 수염이 적었다' Priscus는 아틸라와 그 친척들을 가까이서 접할 수 있었던 덕에 자세한 묘사를 할 수 있었다. 당시 로마인들은 수염을 남성의 상징으로 여겼기에 훈족의 성긴 수염이 이상하게 보였다. '훈족은 다부지고 튼튼한 몸과 강한 목을 가졌다' (Ammianus)
'아틸라는 까무잡잡한 얼굴에 키가 작았다' (Priscus) 반면 훈족이 복속한 Alan 족은 키가 크고 피부가 희었다. 볼가강 유역의 사마르티아인 무덤의 뼈로 추정하건대 이들의 신장은 보통 180cm임.
'훈의 머리는 둥글고 모양이 없다(shapeless). 눈은 안보일 정도로 작고 깊이 파였다.'(Jordanes) 코는 아주 납짝했다.(Sidonius) ' 말에서 내린 훈족의 키는 중간 정도인데 말에 앉아 있으면 커보인다.' 훈족의 앉은 키는 컸다.

많은 훈족은 유럽계와 혼혈이 많이 됐을 가능성이 있다. 훈의 장군 Balamber는 고트족 귀족의 여자와 결혼했고, 아틸라의 마지막 아내의 이름은 게르만족 계통인 Ildico였다.

고인류학적 증거는 훈족이 인종적으로 유럽계와의 혼혈이 심했음을 뒷받침한다. 로마군의 주둔지가 있던 헝가리의 Gyor, Szechenyi 광장에서 발굴된 훈시대의 23개의 인골을 분석한 결과, 6개가 유럽계, 6개는 몽골계 유골(퉁구스계의 특징이 강함)이 분명하고, 나머지는 불분명. 인위적으로 변형된 아이의 두개골도 발굴.
헝가리의 Adony에서도 몽골로이드 계통의 유골 4구가 발견됨.
(헝가리의 인류학자 Nemeskeri, J의 논문
Anthropological Examination of the Skull from Gyongyosapati, 1945)
An Anthropological Examination of Recent Macrocephalic Finds, 1952)

Mosonszentjanos의 Avar족 무덤에서도 몽골계통의 유골이 발굴된다.


-
언어

우리가 훈의 언어에 대해 알 수 있는 길은 그들의 이름을 통해서다.
Vambery가 훈족의 이름을 수집하고 연구함.(Der Ursprung der Magyaren,1882)
cur ('수르' 로 발음?)는 훈족 언어의 접미사. '사령관', '대장' '우두머리'라는 뜻 주로 부족명이나 부족을 대표하는 우두머리의 이름 뒤에 붙는다.
Alpilcur, Ultincur 등.
6∼7 세기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Talas 골짜기와 Issyk-kul 호수 해안가의 투르크 비문에서도 발견됨.
Tuva의 Uibat 비문에는 il cur 라는 말이 나옴. il cur 는 투르크어 il qan, il basi 와 같은 뜻.
이슬람권의 투르크계 지배층 이름에도 cur 가 많이 쓰임.
현대의 키르키즈족 언어에도 cur 의 변형인 coro 라는 접미사가 부족명 뒤에 붙는다.
Qara-coro, Zol-coro, Boro-coro, Ono-coro 등.
gur 또한 부족명의 접미사로 많이 쓰인다.
gir gur의 변형. altziagiri, ultziagiri, autziagiri, alugiagiri 등.

부족명으로 판단하건대 훈족의 대다수는 투르크어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2003년 월간조선에서 퍼옴

출처 : 碧 空 無 限
글쓴이 : 언덕에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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