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동북아민족사

고구려와 돌궐

imaginerNZ 2007. 12. 16. 23:40

돌궐-1

 

高句麗와 터키


‘삼국사기’ 고구려 영양왕 18년(607)조에는 “일찍이[初] 수(隋) 양제(煬帝)가 계민(啓民)의 장막에 행차했을 때 고구려 사신이 계민의 처소에 있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여기서 계민은 돌궐(突厥)의 계민 가한(可汗·황제)을 뜻하는데, 돌궐은 투르크의 음역(音譯)으로서 현재 터키의 전신이다. 따라서 이는 수 양제가 북방 투르크 제국을 방문했더니 때마침 고구려 사신도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내용은 ‘수서(隋書)’ 양제 본기(本紀) 대업(大業) 3년(607) 조에도 실려 있는 사실이다. 이때 양제는 고구려 사신에게 “돌아가 네 왕에게 마땅히 빨리 와서 조현(朝見)하도록 하라”며, 그러지 않으면 계민과 함께 공격하겠다고 협박한다. 양제는 고구려와 투르크의 통교(通交)에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이다. 고구려와 투르크는 한때 거란과 말갈 등의 지배권을 두고 갈등을 겪기도 했지만 수나라가 중원을 통일하자 동맹 관계를 맺어 공동 대응했던 것이다. 영양왕은 재위 9년(598) 말갈(靺鞨)군사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요서(遼西)를 선제공격하고, 양제의 부친 문제(文帝)의 30만 대군을 전멸시킨 장본인이므로 양제의 입조(入朝) 요구는 허세였다. 양제는 몇 년 후 고구려를 침공했다가 되레 왕조가 망하고 말았다.

‘주서(周書)’ 이역(異域) 돌궐(突厥) 열전은 “투르크는 대개 흉노의 별종이다”라면서 흥미로운 시조 전설을 전한다. 전쟁에서 패해 한 아이만 살았는데 이리가 먹여 살렸다. 이를 안 이웃 국왕이 아이를 죽이고 이리도 죽이려 했으나 이리는 북쪽 산으로 달아나 소년의 핏줄인 열 명의 아들을 낳았다. 이들은 금산(金山·알타이 산) 남쪽에 살면서 철공(鐵工)이 된다. 금산이 두무(兜?·투구) 모양이고, 속어에 두무가 투르크(突厥)이기 때문에 투르크라고 불렸다. 이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로마 시조 로물루스와 유사하다.

투르크는 13세기에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는데, 현재 터키의 국사 교과서는 고구려를 투르크의 형제국이라고 설명한다고 한다. 내년 3월이 한국과 터키 수교 50주년이라는데, 영양왕 18년을 기점으로 삼을 경우 내년은 수교 1400년이 된다.

이덕일·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