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도하는 삶/구도행

서양철학사 개요

imaginerNZ 2007. 12. 16. 20:15
서양의 철학사상이 발전한 과정을 기술하는 철학의 한 분야.
철학과 철학사 서술의 성격
'철학'은 서양에서 여러 갈래의 긴 역사를 거치는 동안 서로 다른 여러 가지 의미를 얻었다. 삶의 지혜에 대한 탐구('철학'이라는 용어가 나온 그리스어에 가장 가까운 의미), 우주를 전체로서 이해하려는 시도, 인간의 도덕적 책임과 사회적 의무에 대한 고찰, 신의 의도를 헤아리고 이 의도와 관련하여 인간의 지위를 탐색하는 노력, 인간의 관념의 기원·범위·타당성에 대한 엄밀한 검토, 우주에서 의지 또는 의식의 위치에 대한 탐구, 합리성을 끌어올리기 위한 인간 사유의 규칙을 조목별로 규정하는 노력 등이 그 의미이다. 물론 그밖에도 철학 작업에 붙은 의미는 더 있다. 그러나 이 의미들만으로도 철학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면적인지는 어느 정도 드러난다.
철학자들이 자기들의 전공학문을 정의했을 때 서로 쉽게 동의하지 못하는 부분적 이유는, 그들이 흔히 서로 다른 분야에서 서로 다른 이해와 관심을 가지고 철학에 접근했으며, 따라서 특별히 반성해볼 필요가 있고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경험 영역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13세기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 조지 버클리(18세기 아일랜드 교회 주교), 쇠렌 키에르케고르(19세기 덴마크 신학자) 등은 모두 철학이 종교의 진리를 주장하고 종교를 쇠퇴하게 만드는 오류를 일소하는 수단이라고 보았다. 고대 이탈리아의 피타고라스, 후기 르네상스의 르네 데카르트, 20세기의 버트런드 러셀 등은 수학자였는데, 우주와 인간 인식에 관한 그들의 견해는 연역적 사유방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플라톤, 토머스 홉스, 존 스튜어트 밀 등 몇몇 철학자는 인간의 사회적·정치적 행동을 이해하고 궁극적으로 이 행동을 변화시키려는 동기에서 철학에 뛰어들었다. 한편 밀레토스 학파(그리스 최초의 철학자들), 엘리자베스 시대의 철학자인 프랜시스 베이컨, 20세기 과정 형이상학자인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 등은 자연세계의 물리적 구성에 관심을 갖고 철학을 시작했다.
서양철학의 역사를 고대·중세·근대로 구분하는 것은 17세기에 비롯되었으며, 1805~30년 헤겔이 철학사에 관해 행한 일련의 강의는 철학서술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또 철학사를 원형적 관념들의 역사로 보는 견해와 특정한 사람들의 정신적 산물의 역사로 보는 견해로 구분할 수 있다. 철학사가 아주 포괄적이고 적절한 것이 되기 위해서는 논리적·사회학적·전기적 요인들의 상호작용, 곧 관념, 문화적 맥락, 철학자 자신들의 상호작용 등을 다루어야 한다.
고대 그리스·로마 철학
적어도 BC 4세기 이후에는, 최초의 그리스 철학자가 BC 6세기 전반에 활동한 밀레토스의 탈레스라는 사실이 널리 공인되었다. BC 6세기에는 아직 '철학자'(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라는 말이 없었다. 탈레스는 신화적 요소를 철저히 버리고 세계의 기원을 순수하게 자연에 기초하여 설명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모든 것이 에서 나온다고 주장했으며 이 주장은 깊은 내륙에서 바다동물의 화석을 발견한 데 근거한 설명이었다. 탈레스가 세계의 기원을 비(非)신화적으로 설명하려 한 것은 틀림없이 그가 소아시아 해변에 살았기 때문이었다. 그곳은 그리스 문명보다 훨씬 앞선 문명을 가진 민족들이 밀집해 있었다. 이 민족들의 신화적 설명은 서로 달랐으며 그리스인의 신화적 설명과도 크게 달랐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세계를 나타난 대로 관찰한 것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출발은 거의 필연이었다.
탈레스의 제자이자 계승자인 밀레토스의 아낙시만드로스(BC 6세기 중엽)는 질서있는 세계(우주)가 '아페이론', 즉 무한하고 무규정적인 어떤 것에서 발달했다고 주장했다. 이 아페이론 안에서 어떤 것이 생겨나 뜨거움과 차가움이라는 대립물을 낳았다. 이 대립물은 즉시 서로 투쟁하기 시작하여 우주를 형성했다. 아낙시만드로스의 후계자인 밀레토스의 아낙시메네스(BC 6세기 후반)는 공기가 모든 사물의 근원이라고 가르쳤다. 그는 탈레스처럼 특별한 종류의 물질을 세계 발전의 출발점으로 보았다. 그러나 선배 철학자들과는 달리 최초의 물질에서 다른 사물이 생겨나는 방식을 농축과 희박이라는 말로 구체적으로 규정했다. 이와 같이 탈레스에게는 단지 출발점에 불과했던 것이 어떠한 변형을 거치더라도 본질적으로 동일하게 남는 근본원리가 되었다. 이 근본원리라는 개념은 무(無)에서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다는 점을 전제한다. 또 이 개념은 모든 보존법칙의 바탕에 깔려 있다. 물질·힘·에너지 등의 보존법칙은 물리학의 발달에 기본적인 것이었다.
콜로폰의 크세노파네스(BC 560경~?)는 아낙시메네스의 철학 속에 어렴풋이 담겨 있는 내용을 처음으로 더욱 분명하게 밝혔다. 그는 신에 관한 통속적인 생각을 비판하면서 사람들이 신을 자신들 모습대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신이 유일자일 수밖에 없고 틀림없이 영원하다는 그의 논증이다. 신은 모든 존재 가운데 가장 강하므로 덜 강한 어떤 것에서 생겨났을 리 없다. 또 가장 강한 것보다 더 강한 것이란 있을 수 없으므로 신은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뀌지도 않았다. 분명히 이 논증은 무에서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고 존재하는 어떤 것도 실제로 사라질 수 없다는 공리를 바탕으로 삼았다. 이 공리를 극단으로 밀고간 사람은 엘레아 학파의 창시자인 엘레아의 파르메니데스(BC 5세기 전반)였다. 파르메니데스에 따르면 '존재하는 것'은 생성하거나 소멸할 수 없다. 왜냐하면 존재하는 것이 생성하거나 소멸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무에서 나오거나 무가 되어야 하는데 무란 본성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물이 움직이고 생성하고 소멸하는 세계는 우리에게 낯익은 사견(邪見)의 세계일 뿐이다.
그뒤 두 세대 동안 대부분의 철학자는 아무것도 생성하거나 소멸하지 않는다는 파르메니데스의 명제를 사람들의 감각이 제시한 증거와 들어맞게 만드는 길을 찾으려고 애썼다. 클라조메나이의 아낙사고라스(BC 5세기 중엽)는 아무것도 실제로는 생성할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것은 모든 것 속에 담겨 있어야 하며, 단 무한히 작은 부분의 형태로 담겨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태초에는 서로 구별할 수 없는 이 입자들이 어떤 일정한 혼합체 속에 섞여 있었다. 그러나 누스, 즉 지성이 한 지점에서 이 입자들을 빙글빙글 돌리기 시작하여 세계를 만들어냈다.
원자론자인 레우키포스(BC 5세기 중엽)와 데모크리토스(BC 5세기 후반)도 파르메니데스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레우키포스는 파르메니데스의 논증과 반대로 무가 어떤 방식으로 즉 빈 공간으로서 존재한다는 가정에서 해답을 구했다. 빈 공간과 꽉 찬 공간은 물리세계의 2가지 근본원리이다. 그리고 꽉 찬 공간은 원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원자는 아무것도 그 속으로 파고들어 쪼갤 수 없으므로 절대 나눌 수 없다. 이러한 기초 위에서 데모크리토스는 눈으로 볼 수 있는 세계의 다양한 현상을 그 원자구조를 분석함으로써 설명하는 전체적 체계를 세웠다. 파르메니데스 이후의 모든 철학자는 진짜 세계가 사람들이 지각하는 세계와 다르다고 전제했다. 이때문에 인식론의 문제들이 발생했다. 인식론의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은 엘레아의 제논(BC 5세기 중엽)이었다. 그는 운동과 다원성이 있다고 가정하면 매우 이상한 귀결이 나온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노력했다. 그가 이 증명을 위해 제시한 것이 유명한 역설, 즉 아킬레스가 거북이의 출발점에 도달하면 거북이는 좀더 앞으로 갔을 것이고 이 과정이 무한히 계속되기 때문에 아킬레스는 거북이를 앞지를 수 없다는 역설이었다(→ 아킬레스의 역설). 제논의 역설은 논리적 넌센스로 폐기되기도 했지만, 그의 논증 속에 들어 있는 난점들은 번번이 사람들의 골치를 썩이곤 했다. 왜냐하면 인간의 마음은 연속체를 전혀 조화될 수 없는 2가지 방식으로 바라보게끔 만들어져 있기 때문이다.
BC 6세기말경에는 또 한 종류의 철학이 생겨났는데 이 철학은 얼마 뒤에 이전의 철학들과 상호관계하기 시작했다. 사모스의 피타고라스(BC 572~492)는 "모든 사물은 (數)이다"라는 학설을 개진했다. 이 명제는 모든 사물의 본질과 구조는 그 사물 속에 담겨 있는 수적 관계를 찾아냄으로써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다. 피타고라스의 추종자들은 이 원리를 모든 분야에 적용하려 했다. 그중 한 사람인 메타폰툼의 히파소스는 BC 450년경 정다각형의 변과 대각선 사이의 양적 관계를 정수비로 나타낼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발견 때문에 피타고라스주의 철학은 분리되었으며, 그중 한 학파는 뛰어난 수학적 발명에 몰두하여 모든 정량적(定量的) 과학의 기초를 놓았다(→ 마테마티코이).
BC 5세기 중엽 그리스 사상은 소피스트의 출현을 통해 약간 다른 방향으로 나아갔다. 소피스트라는 이름은 "창의력있고 똑똑함을 직업으로 삼는다"는 뜻의 동사 'sophizesthai'에서 파생했는데, 이 이름은 이전까지 등장한 철학자들과 달리 가르치는 대가를 요구하는 소피스트의 성격을 잘 묘사해준다. 그들은 진짜 세계가 현상세계와 매우 다르다는 믿음을 낳은 이전까지의 철학 흐름에 반기를 들었다. 소피스트들은 사람들이 이른바 진짜 세계에 살지도 않는데 "그런 사변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라고 반문했다.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 아브데라의 프로타고라스(BC 5세기 중엽)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인간은 모든 사물의 척도이며, 있는 사물에 대해서는 그것이 있다는 척도이고 없는 사물에 대해서는 그것이 없다는 척도이다."
또 소피스트들은 대부분의 행위규칙이 관습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참으로 중요한 것은 인생에서 성공하고 다른 사람에 대한 영향력을 얻는 것이다. 예를 들어 칼케돈의 트라시마코스(BC 5세기 후반)는 "더 강한 사람이나 더 나은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 올바른 것", 달리 말해서 다른 사람을 자기 뜻에 따르게 하는 힘을 얻을 수 있는 사람에게 유익한 것이 올바른 것이라고 선언했다. 소피스트들은 교묘한 논증방식 때문에 점점 의심을 받게 되었다.
■ 그리스 철학의 기본 사상가들
소크라테스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은 교묘한 논증 때문에 소크라테스를 소피스트로 여겼으나, 그는 대가를 바라고 가르치지도 않았고 그의 목표는 소피스트의 목표와 아주 달랐다. 그의 삶과 활동에 대한 모든 기록을 살펴보면, 그는 무엇이든 직접 가르치려 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늙든 젊든, 높은 신분이든 낮은 신분이든 모든 사람과 끊임없이 대화했으며, 질문을 통해 그들의 의견과 행동 속에 있는 모순점을 밝혀내려 애썼다. 그의 작업은 2가지 흔들리지 않는 전제를 깔고 있었다. 첫째, 결코 그릇된 일을 하지 않고 그릇된 일에는 간접적으로라도 가담하지 않겠다는 원칙, 둘째, 무엇이 좋고 옳은지를 참으로 아는 사람은 그 누구도 이 원칙을 거스르는 행동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신념이다(→ 선과 악, 옳고 그름). 소크라테스는 여러 경우에 서로 다른 정권 아래서도 첫째 원칙을 흔들리지 않고 지킨다는 것을 실제로 보여주었다. 아테네에서 민주주의가 무너진 뒤 이른바 30인의 참주가 돈을 탐내어 죄없는 시민을 잡아들이라고 소크라테스에게 명령하자, 그는 위험을 무릅쓰고 단호하게 명령에 불복종했다. 또 민주주의 시절에 그는 먼저 정치가로서 능력을 따져보지도 않은 채 말 잘하는 연설가의 웅변에 귀기울이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가 어디서나 폭로하려고 애쓴 가장 기본적인 모순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른 사람에게 좋고 훌륭하고 아름다운 것을 자신에게는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경멸당하고 비난당하는 것을 자신에게는 좋다고 생각한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모든 견해 덕분에 그는 많은 사람의 열렬한 존경을 받았지만, 그와 그의 지지자들이 공개적으로 행동의 모순을 증명한 정치 지도자들에게 큰 분노를 샀다. 소크라테스는 30인 참주정치 아래서는 무사히 살아 남았지만 민주주의가 회복되자 불경죄와 젊은이들을 타락시켰다는 죄로 고발당했으며 결국 사형선고를 받았다. 소크라테스가 죽은 뒤 그의 영향은 그리스와 로마의 철학 대부분에 걸쳐 지배적인 것이 되었다. 많은 지지자들이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글로 씀으로써 그의 철학방법을 보존하려고 노력했다. 제자들은 여러 학파나 교파를 세웠다. 이중 어떤 파는 소크라테스 사상의 이론적 측면을 강조했고, 다른 파는 참된 철학자란 물질적 욕구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했다.
소크라테스의 가장 중요한 제자는 아테네의 귀족가문 출신인 플라톤이었다. 플라톤은 젊은시절에 소크라테스의 열렬한 숭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항상 개인의 태도에 관심을 기울인 스승과는 달리 정치제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어린시절 플라톤은 아테네 대중이 야망에 찬 정치가들의 찬란한 계획에 현혹되어 무모한 정복에 가담했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완전히 패배하는 사건을 목격했다. 이 재난의 결과 민주주의가 무너졌을 때 플라톤은 처음에는 30인의 참주에게 큰 기대를 걸었다. 특히 그들의 지도자인 크리티아스는 플라톤의 가까운 친척이었다. 그러나 곧 참주정권보다는 그동안 멸시한 민주주의가 더 낫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과두정치가 무너지고 회복된 민주주의가 BC 399년 새 법전을 채택했을 때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처형에도 불구하고 다시 큰 기대를 품었다. 그러나 몇 해 지나지 않아 플라톤은 "철학자가 통치자가 되거나 통치자가 철학자가 되지 않으면 정치사정은 더 나아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플라톤은 철학자들을 교육하는 기관인 아카데메이아를 세웠다. 그뒤 여러 해 동안 그는 몇몇 대화편 외에도 대작 〈국가 Politeia〉를 써서 이상국가의 윤곽을 그렸다. 사회에서 모든 혼란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감정과 욕망이기 때문에 이성의 지배만을 받고 충성스러운 전사계급이 뒷받침하는 엘리트가 국가를 통치해야 한다. 두 통치계급은 개인재산을 가져서는 안 되며 극도로 검소하게 살아야 한다. 후기의 정치 저작인 〈정치가 Politicus〉와 〈법률 Nomoi〉에서는 오직 신만이 〈국가〉의 철인통치자들이 지닌 절대권력을 위탁받을 수 있음을 밝히려 했다. 삶이 일반법규로 지배하기에는 너무 다양하기 때문에 모든 법은 어쩔 수 없이 불완전하지만, 인간 통치자들은 엄격한 법의 통제를 받아야 한다.
플라톤이 이론철학에 가장 많이 이바지한 것은 이데아론이었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방법을 사용하여 이데아론을 이끌어냈다. 소크라테스는 대화 상대자들에게 우리가 어떤 사물이나 행동이 좋다거나 아름답다거나 경건하다거나 용감하다고 말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이냐고 자주 물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이러한 진술을 할 때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플라톤은 때때로 소크라테스가 어떤 사람이 어떤 것을 '좋다'고 할 때 자기 앞에 보고 있는 에이도스 또는 이데아, 즉 상(像)이 무엇인지 물었다고 묘사했다. 그러나 분명한 대답은 없다. 그리고 질문의 의도는 대화상대자가 그러한 진술을 할 때 분명하게 정의할 수 없는 무언가를 어떤 방식으로든 본다는 사실을 알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들은 감각세계를 넘어선 다른 세계에서 오는 것처럼 보이며 플라톤은 이 세계를 이데아계라고 불렀다. 사람들이 감각으로 지각하는 모든 사물은 영원한 이데아의 매우 불완전한 모사인 것으로 보인다. 이 이데아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것은 선(善)의 이데아이다. 선의 이데아는 "존재와 인식을 넘어서" 있지만 존재와 인식의 기초이기도 하다. 이 맥락에서 '존재'란 존재 자체를 의미하지 않고, 어떤 사람, 어떤 사자, 어떤 집 등 성질이나 모양으로 정의되는 특정한 어떤 것을 의미한다. 인식은 이 현세의 모양에 대한 지각에서 출발하지만 더 높은 이데아의 영역으로 올라간다. 〈국가〉의 제7권에 나오는 유명한 동굴 이야기에서 플라톤은 보통 사람을 동굴에 앉아 벽을 바라보는 사람에 비유했는데 이 사람은 자기 등 뒤에 있는 진짜 사물의 그림자만 보고 있다고 했다(→ 동굴의 신화). 그리고 플라톤은 철학자를 밝은 곳으로 나와 이데아의 진짜 세계를 본 사람에 비유했다. 그 사람이 동굴로 돌아가면 밖에서 본 빛 때문에 눈이 멀어 그림자를 이전보다 잘 분간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실재를 아는 유일한 사람이다.
플라톤의 가장 위대한 제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펠라에 있는 마케도니아 왕실에서 훗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될 왕자의 교사로 일했다. 알렉산드로스가 왕이 된 뒤 아테네로 돌아와 자신의 학원을 열었는데, 이 학원의 학생들은 페리파토스(逍遙)라고 알려졌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사람들이 감각으로 지각하는 개별 사물들이 불완전하게 모사할 뿐인 초월적 이데아들의 영역이 따로 존재한다고 가정할 필요가 없다고 선언했다. 지각된 사물들의 세계가 진짜 세계이고, 사물에 대한 인식체계를 세우기 위해서는 그 사물들의 특정 유형이나 집단에 관해 어떤 점이 일반적으로 참이라고 말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분석론 후서 Analytica posteriora〉의 마지막 몇 장을 살펴보면 어떻게 아리스토텔레스가 플라톤의 초월적 이데아를 그것과 대응하면서도 인간정신이 개별 사물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대체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목적론 또는 합목적성 이론에서 플라톤의 이데아론의 중요한 요소를 보존했다. 그는 모든 생명체가 불완전한 상태에서 더 완전한 상태로 발달하며 그뒤에는 자손을 낳으면서 다시 쇠퇴하고 결국 죽는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모든 개체가 똑같은 정도의 상대적 완전성에 도달하지는 않는다. 많은 개체는 그 정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기 전에 죽고, 다른 개체는 그 도중에 여러 가지 방식으로 성장이 늦어지거나 불구가 되거나 상처를 입는다. 그러므로 인간이 가능한 한 가장 완전한 상태에 도달하는 데 필요한 최선의 조건이 무엇인지를 알아내는 일은 인간에게 극히 중요하다. 그렇다면 인간이 어떠한 종류의 완전성에 도달할 수 있는가가 첫번째 질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질문에 대답하면서 인간은 뛰어난 사회적 동물이므로 개인으로서는 인간 자체에 가능한 완전성들 가운데 불과 몇몇에만 도달할 수 있다고 말했다. 몇몇 개인은 특수한 종류의 활동을 하기에 매우 뛰어난 재주와 성향을 타고 난다. 그들은 이 성향을 따를 수만 있다면 행복할 것이고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여를 할 것이다. 또 어떤 개인은 다양한 기능에 남보다 쉽게 적응할 수 있고, 따라서 한 활동에서 다른 활동으로 옮겨다니면서 행복해질 수 있다. 이러한 사정은 다른 동물이 가질 수 없는 인류의 엄청나게 큰 장점이다. 왜냐하면 이 장점 덕분에 인류는 모든 종류의 환경에 적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개인도 인류 전체에 가능한 모든 완전성을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에 의해 이 장점은 상쇄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은 경험관찰에 철저히 기초한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그는 학생들에게 법과 정치제도가 어떻게 작용했고 어느 지점에서 그 창시자들이 잘못 이해했는지를 알기 위해 모든 유명한 도시와 국가의 법·정치제도에 관한 자료를 수집하라고 권유했다. 훗날 아리스토텔레스는 독단적 철학자로 여겨졌고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여기는데, 그 이유는 그의 탐구결과들이 절대적 권위를 가진 것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그는 위대한 경험주의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죽은 뒤 제자들이 그의 연구를 이어나갔다. 다음 60여 년 동안 페리파토스 학파는 문학사와 물리과학이라는 2가지의 서로 다른 방향으로 퍼져나갔다. 그뒤 이 학파는 잠시 쇠퇴했으나, AD 1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강의 원고가 다시 발견된 후 그의 저작을 주석하는 큰 학파가 생겨났으며, 이 학파는 중세 철학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 헬레니즘로마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사후의 시대는 그리스 도시국가들이 붕괴한 것이 특징이었다. 이 도시국가들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을 계승한 헬레니즘 시대의 왕들이 벌인 권력 다툼의 저당물이 되었다. 이 어지럽고 불안한 환경에서 2개의 독단적 철학체계, 즉 스토아 철학과 에피쿠로스 철학이 생겨났다.
스토아 철학체계는 키티온의 제논이 만들었다. 그는 상인으로서 아테네로 가다가 바다에서 재산을 잃어버렸다. 견유(犬儒)학파의 크라테스는 제논을 위로하면서 물질 재산이란 인간의 행복에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쳤다. 제논은 아테네에 머물면서 자신의 철학을 세우고 가다듬은 뒤 스토아 포이킬레(여기서 스토아주의라는 이름이 나옴)라는 공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제논은 인간 행복의 기초는 (자기 자신과) '합일하여' 사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훗날 정식으로 "자연과 합일하여 사는 것"이라고 바뀌었다. 인간에게 유일한 선은 덕을 가지는 것이며, 부나 가난, 건강이나 병, 삶이나 죽음 등 다른 모든 것은 아무 관계도 없다. 모든 덕은 올바른 인식에만 기초한다. 즉 자제는 올바른 선택에 대한 인식, 인내는 무엇을 참아야 하는지에 대한 인식, 정의는 '분배'에 대한 올바른 인식에 기초한다. 모든 악의 원인인 정념은 무엇이 참으로 좋은지를 잘못 판단한 결과이다. 세계는 신의 로고스(본래의 뜻은 '말' 또는 '이야기'임)가 지배한다. 이 로고스가 세계를 완벽하고 질서있게 유지한다. 인간은 이 질서에서 벗어나거나 이 질서에 저항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질서를 교란할 수는 없고 자신을 해칠 뿐이다.
제논과 같은 시대의 에피쿠로스는 제논에 반대한 사람으로 여겨지는데, 이는 여러 면에서 타당하다. 스토아 학파가 쾌락과 고통은 인간의 행복에 전혀 중요하지 않다고 가르친 반면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행복한 생활의 본질로 삼았다. 스토아 학파는 신의 섭리가 있다고 믿었으나 에피쿠로스는 신들이 인간에 대해서는 조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고 가르쳤다. 두 철학은 이처럼 대조적이지만 몇 가지 중요한 면에서는 똑같다. 비록 에피쿠로스는 쾌락을 좋은 생활의 기준으로 삼았지만 결코 방탕한 생활과 주색잡기를 옹호하지는 않았다. 그가 생활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주장한 것은 소박한 쾌락이었다.
로마 시인 루크레티우스 카루스(BC 95경~55)는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De rerum natura〉라는 시에서 에피쿠로스가 인류를 모든 종교적 두려움에서 해방시킨 사람이라고 찬양했다. 에피쿠로스 자신도 이러한 해방이 자기 철학의 1가지 목적임을 인정했다. 그러나 비록 그가 신들은 너무나 탁월하므로 번거롭게 유한한 생명체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을 것이라고 가르쳤지만, 인간은 신들을 완전한 존재로 바라보는 일이 중요하고 그래야만 완전성에 접근할 수 있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에피쿠로스주의가 방탕한 생활을 정당화한다고 오해하기 시작한 것은 로마 시대에 들어와서였다.
회의주의와 그밖의 학파
엘리스의 피론이 창시한 회의주의 학파는 아무도 어떤 것을 확실하게 알 수 없으며, 자기가 감각으로 지각한 것이 환상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도 없다고 주장했다. 피론은 자기 생각의 실천적 결론을 철저히 수행했다. 심지어 그는 거리를 걸을 때 마차나 그밖의 장애물을 주의하지 않았기 때문에 충실한 제자들이 항상 따라다니며 그가 다치지 않게 했다고 한다. 피론을 지지한 후기 인물인 섹스토스 엠피리코스(AD 2~3세기)는 〈독단론에 맞서 Pros dogmatikous〉라는 대작을 써 이전 철학자들의 글을 광범위하게 인용했는데, 그 덕분에 사라져버렸을지도 모를 많은 글이 보존되었다. 데이비드 흄과 이마누엘 칸트는 고대철학에 관한 대부분의 지식을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의 저서에서 얻었다. BC 4세기에 생긴 아테네의 모든 철학 학파와 분파는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교도적 성격을 이유로 AD 529년 폐쇄 명령을 내린 고대 말기까지 계속 남아 있었다. 약 1,000년에 걸친 이 기간에 늘어난 새 학파는 신피타고라스주의와 신플라톤주의뿐이었다. 그중에서 신플라톤주의가 철학의 역사에는 훨씬 더 중요했다. 신플라톤주의는 주로 플로티노스의 연구에서 나온다. 플로티노스는 저서를 발표하지 않았지만, 그의 철학은 제자 포르피리오스가 그의 글을 정리하여 묶어 내놓은 〈엔네아데스 Enneads〉를 통해 알려져 있다. 비록 신플라톤주의는 플라톤을 연구함으로써 나온 것이지만 당시의 종교적·신비적 경향과 일치하는 본질적으로 새로운 철학이다. 플로티노스는 존재에 여러 층이 있다고 가정했다. 그중 가장 높은 층은 일자(一者) 또는 선(善)의 층이며 이 두 층은 동일하지만 인간의 언어로 묘사할 수는 없다.
신플라톤주의의 이후 역사는 극도로 복잡하다. 포르피리오스는 플로티노스 철학의 윤리적 요소를 강조했지만 그의 제자 시리아 칼키스의 이암블리코스(330경 죽음)는 신플라톤주의를 신피타고라스주의와 혼합함으로써 존재의 층 또는 일자로부터 유출단계를 늘렸으며, 그결과 전통 그리스 신들을 자기체계 안에 통합할 수 있었다. 이 학파의 또 하나의 분파는 아이데시오스가 소아시아 서쪽에 있는 페르가몬에서 세웠다. 아이데시오스는 오르페우스교 같은 고대 그리스 신비종교들을 다시 일으키려고 힘썼다. 유스티니아누스가 529년 아테네에 있는 모든 철학 학파를 폐쇄한 뒤에도 이교 철학은 계속 남아 그리스도교 철학과 신학의 발달에 영향을 끼쳤지만 점차 소멸했다.
중세철학
중세철학은 중세, 즉 4~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부터 15세기 르네상스 시대까지 서양에서 일어난 철학적 사변을 가리킨다. 이 시기에 철학은 계속 그리스도교 사상 특히 신학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고 주요철학자들은 성직자였다.
■ 중세 초기 철학
중세 초기는 12세기까지 이어졌으며 이 시기에 로마 제국이 무너지고 새로운 그리스도교 문화가 서유럽에 점차 정착했다. 이 어지럽고 어두운 시대에 철학을 키운 사람은 아우구스티누스(354~430)·보이티우스(480경~525경) 등 후기 로마 사상가와 안셀무스(1033~1109) 같은 수사였다.
이 시대의 철학은 신플라톤주의자들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그들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철학 방법과 이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들 때문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감각 세계 너머에 진리의 영원한 정신적 영역이 있으며, 이 영역은 인간정신의 대상이고 인간의 모든 노력의 목표라고 굳게 믿었다. 그는 이 진리를 그리스도교의 신과 동일시했다. 인간은 감각을 통해서가 아니라 자기 정신의 내부로 향하고 이 정신을 뛰어넘어 진리를 보여주는 지성의 빛으로 나아감으로써 진리와 미의 이신적 세계와 만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이 두 실체, 즉 육체와 영혼의 복합체이며 그중 영혼이 훨씬 더 우월하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본성에서 육체를 배제해서는 안 되며 죽은 뒤 육체의 부활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보증한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Confessions〉(400경)과 〈삼위일체론 De Trinitate〉(400~416)에는 인식·지각·기억·사랑 등에 대한 날카로운 심리학적 분석이 가득 차 있다. 〈신국론 De civitate Dei〉(413~426)에서 인간 역사의 전체 이야기는 인류가 신의 구원을 받아 결국 창조주 안에서 안식하는 진보적 움직임으로 나타나 있다.
보이티우스와 교부들
보이티우스는 포르피리오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철학 저작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이 번역서들과 이에 대한 그의 주석서들은 중세 사상가들에게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의 기초를 전해 주었다. 또 이 책들은 보편자(1개 이상의 특정 사물에 적용할 수 있는 명사)의 성격 등 중요한 철학문제를 제기했다(→ 개체). 그의 〈철학의 위안 De consolatione philosophiae〉(525경)는 인식과 실재에 관한 플라톤의 견해를 담고 있으며, 섭리, 신의 예지, 우연, 운명, 인간의 행복 등도 생생하게 논의하고 있다.
그리스 철학이 중세로 흘러들어가는 또 하나의 흐름은 그리스 교부들, 특히 오리게네스(185경~254경), 니사의 그레고리우스(335경~394경), 위(僞)디오니시오스(500경), 막시무스(Maximus the Confessor:580경~662)였다(→ 교부철학). 아일랜드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에리게나라고 불린 요한네스 스코투스는 9세기에 이 그리스 신학자들의 몇몇 글을 라틴어로 옮겼으며, 신플라톤주의 노선에 따라 형성된 그리스도교 사상을 종합한 방대한 저서 〈자연의 구분에 관하여 De divisione naturae〉(862~866)를 썼다. 그에 따르면 신은 본질적으로 알 수 없고 명명할 수 없는 제일의 단일체이며 이 단일체로부터 다수의 창조물이 흘러나온다.
10세기 카롤링거 왕조가 무너진 뒤 서유럽에서 지적 사변은 점점 쇠퇴했다. 11세기에 오토 1세가 신성 로마 제국을 세웠고, 세속의 학식과 철학을 신앙에 해로운 것으로 불신한 페트루스 다미아누스 같은 개혁가들이 베네딕투스 수도원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었다. 한편 다른 수사들은 변증법과 철학에 민감한 관심을 보였다. 그중 한 사람인 안셀무스는 이탈리아인으로서 프랑스 베크 수도원의 대원장이 되었고 그뒤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었다. 안셀무스는 아우구스티누스와 마찬가지로 진리를 탐구하기 위해 신앙과 이성을 모두 사용했다. 그의 견해에 따르면 신앙이 먼저지만 이성이 반드시 뒤따르면서 사람들이 믿는 것에 이유를 제공한다. 수사들이 성서의 권위에 조금도 의존하지 않고 이성으로 모든 것을 증명하는, 신에 관한 모범적 명상록을 써달라고 요청함에 따라 그는 〈독백론 Monologium〉(1077)을 썼는데, 이 속에는 신플라톤주의 사상에 근거해서 쓴, 신의 존재에 대한 3가지 증명이 들어 있다. 그는 다수의 선한 것은 최고로 선한 것 또는 신에서 생겨나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아벨라르
시토 수도회 수사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두스(1090~1153) 같은 수사들은 신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속의 학식과 철학을 사용하는 것을 의심스러워했다. 베르나르두스는 당시의 몇몇 사람들이 변증법에 지나치게 빠진다고 불평했다. 그는 신비주의적 사랑에 관한 교리를 전개했는데, 이 교리의 영향은 여러 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파리의 생빅토르 대수도원 수사들도 신비주의적 명상을 육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자유학예와 철학을 명상의 보조수단으로 장려했다.
열렬한 논리학자 피에르 아벨라르(1079~1142)는 후기 스콜라 철학의 방법에 기여한 신학의 방법을 개척했다. 〈긍정과 부정 Sic et non〉(1115~17)에서 그는 신학문제에 관한 정확한 해답을 얻기 위해 서로 반대하는 양쪽의 가장 권위있는 견해들을 모두 인용하고 있다. 보편자 문제에 관해 그는 개체만이 실재한다고 생각했다. 즉 보편자는 사실상 정신적 개념이지만, 보편자가 의미를 가지는 까닭은 오로지 개체를 지시하기 때문이다. 보편자는 개체들의 공통적 종(種)을 의미하며 이 공통적 종은 신이 개체들을 신의 똑같은 관념에 따라 창조한 결과이다.
■ 스콜라 철학으로의 이행
12세기에는 그뒤 서양철학의 전역사에 영향을 끼친 문화혁명이 일어났다. 자유학예를 기초로 삼아 문법과 라틴어 고전을 강조한 낡은 교육양식은 논리학·변증법·과학분야 등을 강조한 새로운 방법으로 바뀌었다. 철학에서는 플라톤주의가 쇠퇴하고 아리스토텔레스주의에 대한 관심이 점점 늘어났다. 이러한 변화는 12세기 후반과 13세기초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들이 라틴어로 번역됨으로써 일어났다. 그리스·아랍과 유대교에서 유래한 많은 저작이 당시 라틴어로 번역되어 서유럽에 '지식 폭발'을 일으켰다.
아랍어를 라틴어로 번역한 책 가운데에는 이븐 시나(980~1037)의 글도 있었다. 그는 중세 스콜라 철학자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끼친 이슬람 철학자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형이상학을 존재로서의 존재(ens qua ens)에 관한 학문으로 보았다는 해석, '존재'·'본질'·'실존' 등 많은 형이상학 용어에 대한 분석, 신 존재에 대한 증명 등은 그리스도교 집단들도 찬성하건 반대하건 자주 인용했다. 아랍 철학자 아베로에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작에 관해 주석한 글도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그리스도교 교사들은 흔히 아베로에스를 그리스도교의 최대의 적으로 여기고 공격했다. 왜냐하면 그는 우주가 영원하고 모든 인간이 똑같은 지성을 공유한다고 주장했는데, 이 교리는 개체의 불멸을 주장하는 그리스도교 교리와 모순되었기 때문이다.
스콜라 철학에 영향을 끼친 또 하나의 사상은 중세 유대교 사상이었다. 스페인계 유대인 이븐 가비롤〈생명의 샘 Fons vitae〉(1050경)에서 신의 단일성과 단순성을 강조했다. 모든 창조물은 형상과 질료로 구성되어 있다. 이때 질료는 감각세계의 거친 물질적 질료일 수도 있고, 천사와 인간 영혼의 정신적 질료일 수도 있다. 모제스 벤 마이몬이라고도 불린 마이모니데스〈혼란에 빠진 자들을 위한 길잡이 Dalālat alhā⁾rῑn〉(1190경)에서 이성과 신앙은 모두 신에게서 나오므로 둘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으며, 겉으로 보이는 모순은 성서나 철학자들 중 어느 한쪽을 잘못 해석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서양 학자들이 이 새로운 사상 학파들을 융합하고 있는 동안 스콜라 철학의 중심이 된 대학들이 세워지고 있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파리대학교(1150~70 창설)와 옥스퍼드대학교(1168 창설)이다. 스콜라 철학이란 이 대학 교수들의 신학적·철학적 가르침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단일한 하나의 스콜라 철학 교리란 없다. 스콜라 철학자들은 각각 자기 나름의 교리를 전개했으며 이 교리는 종종 동료 교수의 교리와 일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스콜라 철학자들의 시대
옥스퍼드대학교의 초대 총장인 로버트 그로스테스테(1168경~1253)는 과학적 방법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연에서 일어나는 개별 사건들을 관찰함으로써 이 사건들을 설명하는 일반법칙, 이른바 '실험적 보편원리'로 나아간다. 실험작업은 한 이론의 경험적 귀결을 검사함으로써 그 이론을 검증하거나 반증한다. 그로스테스테의 제자 로저 베이컨(1220경~92경)은 인간은 추론과 경험을 통해 지식을 얻고 경험이 없으면 그 지식을 확신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베이컨은 모든 과학을 포괄하고 신학에 의해 조직된 보편적 지혜를 만들어내려고 애썼다. 또 교황의 지도 아래 모든 사람을 연합할 수 있는 단일한 전세계적 사회 또는 '그리스도교 공화국' 건설을 제안했다.
- 오베르뉴의 기욤
파리대학교에서 오베르뉴의 기욤(1180경~1249)은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이교사상과 이슬람교 사상의 위협에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세계가 영원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이 그리스도교의 창조관을 위배한다고 반대했으며, 신과 창조에 관한 견해 때문에 이븐 시나의 개념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세계를 영원히 필연적으로 창조하는 이븐 시나의 신은 세계를 자유롭게 직접 창조하는 그리스도교의 신 개념과 반대였다.
프란체스코 수도회 수사 보나벤투라(1217경~74)도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에 대한 아랍인 주석가들이 점점 인기를 얻는 것에 경계심을 나타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자연 과학자로 존경했지만 형이상학자로서는 플라톤과 플로티노스를 더 좋아했고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를 최고로 여겼다. 보나벤투라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동료들에 대해 가한 가장 큰 비판은 그들이 신적 이데아들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점이었다. 그결과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이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이데아들에 따라 세계를 창조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보나벤투라는 철학과 신학을 실제로 구분하는 데 반대했다. 철학은 신앙의 안내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철학은 신을 보는 데서 절정에 이르는 높은 수준의 인식으로 나아가는 한 단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보나벤투라의 〈신을 향한 영혼의 여행 Itinerarium mentis in Deum〉(1259)은 신에 이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길을 따르고 있다. 이 길은 외부세계에서 정신의 내부세계로 나아가고 그 다음에는 정신을 뛰어넘어 일시적인 것에서 영원한 것으로 나아간다. 이 여행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신의 도덕적·지적 조명의 도움을 받는다.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매우 박식하고 지적 호기심이 많은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인 알베르투스 마그누스(1200경~80)는 새로 번역된 그리스-아랍의 과학과 철학 문헌의 참된 가치를 깨달았다. 그는 이 문헌을 같은 시대의 사람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했고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해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 체계 속에서 빠져 있는 것을 보완하기 위해 독창적인 책을 쓰려고 했다. 마그누스 덕분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는 13세기에 크게 번성했다.
마그누스의 제자 토마스 아퀴나스(1224/25~74)는 스승과 마찬가지로 고대 철학자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와 최근의 아랍과 유대 사상가들을 높이 평가했다. 그에 따르면 이성과 신앙은 똑같은 신적 원천에서 나온 것이므로 서로 모순될 수 없다. 당시 보수적인 신학자와 철학자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의심하고 있었다. 아퀴나스는 그들이 의심하는 까닭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아랍인 주석가들에 의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이 그리스도교 신학에 대해 가치있음을 당시 사람들에게 설득하기 위해 주석서들을 썼다. 아퀴나스의 철학 견해는 그의 신학 저작들, 특히 〈신학 대전 Summa theologiae〉(1265/66~73)·〈이교도에 대한 반론 Summa contra gentiles〉(1258~64) 속에 매우 잘 나타나 있다. 이 저작들 속에서 그는 철학과 신학의 영역과 방법을 구분했다. 철학자는 감각이 제공한 자료를 가지고 시작하여 사물의 제일원인을 찾는다. 신학자의 탐구주제는 신성한 성서 속에 계시되는 있는 신이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이보다는 못하지만 플라톤주의가 그리스도교를 위해 유용한 도구임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는 이 사상들로부터 빌려온 모든 것을 변형하고 심화시켰다. 예를 들어 그는 부동의 원동자(原動者)가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을 받아들였으나, 그가 도달한 제일원동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것과 매우 달랐다. 그 원동자는 사실상 유대교와 그리스도교의 신이었다. 아퀴나스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당시의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조화시킴으로써 그 교리의 명예를 떨어뜨린 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가 그리스도교의 믿음과 충돌할 때마다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수정하고 교정했다.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주의와 그리스도교를 억지로 조화시키지 않고 철학원리, 특히 존재개념을 새롭게 이해함으로써 둘 사이의 조화를 이룩했다. 그는 존재를 현실태로 생각했다. 그에게 신은 순수존재 또는 현실태이다. 창조물은 그 본질에 따라 존재에 관여한다. 예를 들어 인간은 자신의 인간성이나 본질이 허용하는 정도로만 존재 또는 현실태에 관여한다. 신과 창조물 사이의 기본적 차이는 창조물이 본질과 실존의 실제적 혼합에 의해 구성되지만 신의 본질은 바로 신의 실존이라는 점이다.
■ 중세 후기 철학
중세 후기에도 이전의 철학하는 방식들이 계속되었고 특정의 사상학파들로 형성되었다. 도미니쿠스 수도회에서는 토마스주의(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과 철학)를 항상 엄격하게 신봉하지는 않았지만 토마스주의가 공식 가르침이 되었다. 프란체스코 수도회는 중세 후기 내내 토마스주의와 경쟁한 새로운 양식의 신학과 철학을 개발했다.
요한네스 둔스 스코투스(1265경~1308)는 철학이 인간의 지식욕을 채우기에 충분하고 적합하다는 이성주의자의 주장에 반대했다. 둔스 스코투스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순수 철학자는 인간의 타락과 은총·구원의 필요성을 모르기 때문에 인간의 조건을 진정하게 이해할 수 없다. 둔스 스코투스가 보기에 우주의 제일원동자로서 신이 존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증명은 그의 철학의 뚜렷한 한계였다. 둔스 스코투스에게는 제일원동자나 존재 자체라는 개념보다 무한한 존재라는 개념이 신에 대한 인간의 가장 완전한 개념이었다.
14세기 후반에는 토마스주의와 스코투스주의를 '낡은 방식'의 철학이라고 불렀고, 반면 오컴(1285경~1347) 등이 시작한 철학을 '현대 방식'이라 여겼다. 오컴은 그리스-철학의 숙명론에 맞서 신이 자유롭고 전능하며 창조물은 우연적이라는 그리스도교 교리를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보기에 신의 자유는 창조의 긍정적 모형으로서 신의 이데아가 있다는 점과 양립할 수 없었다. 그는 둔스 스코투스와 반대로 신은 창조할 때 미리 생각해둔 이데아를 사용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우주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했다. 그결과 창조물들은 공통적인 본성이나 본질이 없다. 실재는 없고 개별 사물만 있을 뿐이다.
오컴은 신의 절대적 자유를 철학적·신학적 설명의 원리로 자주 사용했다. 자연의 질서는 신이 자유롭게 창조했기 때문에 지금과 다른 것이 될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 지금 불은 열을 내지만 차가운 것이 될 수도 있었다. 또 도덕 질서도 다른 것이 될 수 있었다. 신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인간에 대한 미움을 가치있는 것으로 만들 수도 있었다. 진리에 이르는 데 인간 이성의 힘을 지나치게 신뢰하지 않는 것이 오컴의 특징이었다. 그에 따르면 철학은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 신의 존재를 확립할 때처럼 개연적 논증으로 만족해야 할 때가 자주 있다. 신앙만이 이 문제와 그밖의 중요한 문제에 확실성을 제공한다. 오컴이 내놓은 또 하나의 원리는 가설의 수를 불필요하게 늘려서는 안 된다는 원리이다. 이 사유의 경제성 원리는 '오컴의 면도날'이라 불린다.
-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독일 도미니쿠스 수도회 수사 마이스터 에크하르트(1260경~1327/28)는 그리스도교와 신플라톤주의 양쪽에서 영감을 받은 사변적 신비주의를 발달시켜 아리스토텔레스주의로부터 벗어나는 경향을 보여주었다. 에크하르트는 영혼이 신에게 상승하는 과정을 신플라톤주의의 용어로 묘사했다. 즉 영혼은 육체에서 자신을 점점 순화함으로써 존재와 인식을 초월하여 결국 일자에 흡수된다. 그때 영혼은 최상의 지점 또는 '아성'(牙城)에서 신과 통일된다. 신 자신은 존재와 인식을 초월해 있다.
쿠사의 니콜라우스(1401~64)도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보다 신플라톤주의자를 더 좋아했다. 그에 따르면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정신이 신에게 올라가는 데 장애물이 된다. 왜냐하면 이 철학의 가장 중요한 규칙은 대립물의 양립가능성을 부정하는 모순율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은 '대립물의 일치'이다. 신은 무한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완전하게 통일하여 포괄한다. 신은 극대이면서 동시에 극소이다.
이와 같이 중세 말기에 이르자 매우 창조적인 정신을 가진 몇몇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주의를 버리고 더 새로운 사유양식에 기울고 있었다. 다양하게 해석된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은 여전히 대학에서 강의되고 있었지만 그 생명력과 창조성을 잃어버렸다. 그리스도교 철학자들은 다시 한 번 신플라톤주의에서 영감을 얻고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의 플라톤주의는 중세의 플라톤주의와 직결된 것이었다.
근대철학
■ 르네상스와 근대 초기
유럽의 르네상스는 동양에서 3가지 기계 발명품이 들어온 직후 일어났다. 첫째, 화약은 봉건체제의 요새를 폭파하는 데 사용되었으며 그결과 교회의 지배를 위협한 민족주의라는 새 정신의 촉진제가 되었다. 둘째, 인쇄술은 학문을 널리 퍼뜨리고 세속화했으며 교회 상류층의 지식 독점을 줄였고,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철학·고전을 복원했다. 셋째, 나침반은 서반구를 개방한 신대륙 탐험여행을 일으켰으며 육체적 모험의 새로운 정신과 자연의 구조에 대한 새로운 과학적 관심을 상징했다.
- 정치이론·인문주의·자연철학
르네상스가 교회의 군림, 권위, 스콜라 철학, 아리스토텔레스 등에 대해 반기를 들기 시작하자, 시민사회·인간·자연에 초점을 맞춘 문제들에 대한 관심이 갑자기 높아졌다. 이 3가지 관심은 르네상스 철학의 유력한 3갈래, 즉 정치이론·인문주의·자연철학으로 정확히 재현되었다. 교회의 권위가 무너지고 민족적·국제적 문제가 새롭게 관심의 초점이 되자 유럽에서는 정치철학이 성장했다. 이탈리아의 니콜로 마키아벨리〈군주론 Il principe〉(1512~13)과 그밖의 저서에서 '국가이성'을 도덕성보다 높이 평가하는 듯한 시각으로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기법을 연구했다. 마키아벨리의 연구 동기는 이탈리아를 완전히 통일하려는 애국적 희망과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낮은 도덕 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고대 로마의 덕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는 신념이었다. 17세기 영국에서 토머스 홉스는 문명에 앞선 '자연상태'에서 삶은 "힘들고 잔인하며 수명이 짧고", "모든 사람이 다른 모든 사람에게 적대한다"는 생각을 내놓았다(→ 법철학). 홉스에 따르면 그래서 사람들은 전반적 보호와 법적 통치제도의 대가로 모든 사적 권리를 한 사람의 주권자에게 양도하는 '사회계약'에 동의했다.
17세기에 번성하고 종교적으로 관대한 상업국인 네덜란드에서는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위대한 법학자 휘호 그로티우스(1583~1645)에게 교역권과 해상의 자유로운 출입을 변호하는 글을 써달라고 의뢰했다. 그결과 나온 그의 논문 2편은 국제법을 처음으로 성문화한 뜻깊은 것이었다. 이 논문의 독창성은 그로티우스가 '자연법' 개념의 원천과 타당성을 선구적으로 연구했다는 사실에 있다. '자연법' 사상은 자연적 정의와 도덕적 책임에 관한 절대적 신조들이 본래 인간의 이성 속에 있으므로, 이것은 주권국가의 횡포에 의해서도 바뀔 수 없으며 오히려 막강한 정치권력의 자의적 행사에 맞서는 억제책으로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인문주의는 과학에 대한 의심과 종교에 대한 무관심에서 생겨났다. 인문주의가 인간의 개인적 책임과 하나의 예술작품으로서 자신을 창조할 가능성을 강조한 것은 대부분 여러 주요고전 원문들을 재발견한 결과였다. 이 고전 원문들은 중세 학문의 흐름을 뒤바꾸는 데 이바지했다. 플라톤에 대한 열광은 메디치 가문이 지배한 피렌체와 그 주변에서 부활했다. 도덕에 대한 플라톤의 설명은 르네상스 교육의 요구에 들어맞았으며 관료와 신사에 대한 르네상스의 이상을 새롭게 뒷받침했다. 또 플라톤은 수학의 철학적 중요성을 강조했고 수와 정확한 계산으로 자연의 비밀을 발견하려는 피타고라스의 시도를 다시 보여주었다. 플라톤주의의 이 측면은 인문주의에서 르네상스 과학의 영역으로 넘쳐 흘러들었다.
현대세계에서 철학은 어떻게 해서든지 자신을 좁게 정의하여 종교·과학과 구분하려 했다. 그러나 이렇게 초점을 좁힌 것은 철학의 역사에서 매우 최근에야 이루어졌으며 그 시기는 적어도 18세기 이후였다. 피타고라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 등 초창기의 그리스 철학자들은 물리세계에 대한 이론가들이었지만 철학과 자연과학을 구분하지 않았다. 르네상스는 이 폭넓은 생각을 유지했다. 갈릴레오와 데카르트는 수학자·물리학자인 동시에 철학자였다. 그리고 물리학은 적어도 아이작 뉴턴 경이 1727년 죽을 때까지는 '자연철학'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중세까지 우주는 위계적·유기적이며 신이 정한 것이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우주는 다원적이고 기계 같으며 수학적 질서를 가진 것이었다. 중세에 학자들은 의도, 목적, 신의 의향 등의 견지에서 생각했고, 르네상스 시대 학자들은 힘, 기계적 동인, 물리적 원인 등의 견지에서 생각했다. 이 모든 점은 15세기말에 이르면 뚜렷이 나타났다. 피렌체의 위대한 예술가·과학자·인문주의자이자 역학의 천재인 레오나르도 다 빈치〈노트 Notebooks〉 속에는 다음의 3가지 명제가 있다. 첫째, 경험은 누구든 좋은 글을 쓴 사람의 정부(情婦)였으므로 나는 경험을 나의 정부로 삼아 모든 문제에서 그것에 호소한다. 둘째, 도구과학 또는 역학은 가장 고귀하고 다른 어떤 과학보다 더 쓸모있으며, 움직이는 모든 활기찬 물체는 이 과학을 바탕으로 작용한다. 셋째, 수리과학이나 수리과학에 기초한 과학 중 어떤 것도 적용할 수 없는 곳에는 확실성이 없다. 이 3가지 명제를 통해 표현된 것은 첫째로 경험론의 원리, 둘째로 기계론적 과학의 옹호, 셋째로 수학적 설명에 대한 신앙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과학과 철학은 바로 이 3가지 정식을 기초로 삼았다.
16세기 중엽 벨기에 의사인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는 해부절개와 그 소묘를 위해 새로운 도구를 발명했고, 인체의 혈관계·신경계·근육조직계를 밝혔다(→ 해부학). 이러한 절차는 경험적 방법, 생리학 실험, 정확하고 숙련된 감각적 관찰 등의 장점을 증명하는 듯이 보였으며, 그 덕분에 베살리우스의 증명은 귀납절차의 고전이 되었다. 조금 뒤 이탈리아 물리학자 갈릴레오는 인체의 구조에 대한 이러한 베살리우스의 연구방식을 이용하여 지구와 별의 움직임을 파악하려 했다. 갈릴레오의 연구에서 르네상스 과학의 매우 독창적인 경향들이 모두 무르익었다. 이러한 경향은 알렉산드리아 수학의 부활, 실험에서 렌즈와 망원경 같은 새로운 도구의 사용, 수학이론을 틀림없이 응용할 수 있는 기초를 가진 물리학에서 확실성의 추구, 운동하는 물질이 수학적 단순성을 가진 모형과 일치하기 때문에 과학에서 절대적 확실성을 추구하는 일은 정당하다는 기본적 신념 등이었다.
- 경험론과 합리론의 등장
베살리우스의 엄밀한 관찰기법과 갈릴레오의 수학이론에 대한 의존 사이의 과학적 대조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철학과 르네 데카르트의 철학 사이의 대조로 다시 나타났다. 경험론합리론 사이의 이 대조는 17~18세기의 철학논쟁을 지배했다. 르네상스 경험론의 탁월한 주창자인 프랜시스 베이컨 경(1561~1626)은 철학이 자연과학을 굳건한 토대 위에 재건해야 할 새로운 추론기법이라고 생각했다. 〈신 오르가논 Novum Organum〉(1620)에서 "철학의 참된 작업은 지성을 구체적인 것에 대한 새로운 조사에 응용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철학의 특징에 대한 그의 핵심 주장은 철학이 바로 이런 조사를 위한 기법이라는 점이었다.
베이컨은 사실에 대한 깊은 의식과 관찰의 우선성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법칙과 일반명제를 이끌어냈다. 또 형상에 대한 그의 견해는 매우 비플라톤적인 것이었다. 그에 따르면 형상은 본질이 아니라 영원한 기하학적·역학적 구조였다. 그러나 철학의 역사에서 그가 계속 자리를 차지하는 까닭은 경험을 타당한 인식의 유일한 원천으로 철저하게 옹호했기 때문이다.
영국의 정치철학자 토머스 홉스(1588~1679)는 철학의 방법에 대한 베이컨의 관심과 운동하는 물질에 대한 갈릴레오의 흥미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철학적 노력은 같은 시대의 이 두 인물보다 더 폭넓고 완벽했다. 그는 근대 초기의 가장 체계적인 철학들 가운데 하나를 만들었으며, 기계론적 유물론의 교의에 따라 자연·인간·시민사회를 매우 일관성있게 기술했다. 홉스는 규약주의의 관점에서 언어를 설명하여 마치 베이컨이 특수자를 지나치게 강조한 것과 같은 양식으로 보편자(일반개념 또는 공통개념)의 실재성을 부인하는 유명론(唯名論)의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더욱이 홉스는 모든 인식의 기원이 감각인상이고 모든 감각은 외부의 물체가 감각기관에 작용함으로써 생긴다고 생각했다.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철학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인물이었다. 그는 과거의 영향들을 결합하여 놀라울 정도로 독창적이면서도 당시 과학의 경향에 맞는 사상을 종합했다. 그뒤 모든 역사가는 마음 속으로 그를 현대 철학정신의 창시자로 꼽는다. 데카르트의 종합 속에는 과거부터 신에 관한 안셀무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의 학설, 아우구스티누스의 의지론, 로마인들의 스토아 철학에 대한 깊은 공감, 고대 회의론자들인 피론과 섹스토스 엠피리코스에게서 간접적으로 얻은 회의적 방법 등이 스며들었다. 그러나 데카르트는 위대한 수학자이기도 했다. 그는 해석기하학을 창시했고, 많은 물리학적·해부학적 실험을 했으며, 갈릴레오의 연구를 잘 알고 깊이 존경했다.
데카르트는 베이컨처럼 감각과 개연성이 아니라 절대적 확실성 원리를 자연과학의 기초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러므로 그의 형이상학은 본질면에서 3가지 원리로 구성되었다. 첫째, 의심할 여지가 없는지에 대한 시험을 거치지 않은 모든 생각을 배제하기 위해 완벽하고 체계적인 회의 절차를 채택한다(회의주의). 둘째, 명석판명하지 않고 모순이 없지 않은 어떤 관념도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수리주의). 셋째, 모든 인식을 자기의식의 확실성이라는 기반 위에 세우고,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가 의심하여 흔들 수 없는 유일한 본유관념이 된다(주관주의). 데카르트는 자아를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에서 완전한 신이 존재한다고 연역했다. 그리고 완전한 존재는 틀리거나 속일 수 없다는 사실에서 신이 인간의 마음 속에 불어넣은 물질세계에 대한 관념들도 틀림없이 참이라고 추론했다. 이와 같이 자연세계에 관해 확실한 인식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은 신의 완전성과 신의 선물인 명석판명한 관념이 보증했다.
대륙 합리론의 전통은 2명의 철학자, 즉 네덜란드 유대인 베네딕트 데 스피노자(1632~77)와 같은 시대의 박학한 라이프치히 학자 고트프리트 빌헬름 라이프니츠(1646~1716)가 이어받았다. 스피노자는 철학이 삶의 지혜를 얻고 인간의 완성을 이루기 위한 개인적·도덕적 탐구라는 견해를 내놓았다. 이러한 탐구를 수행하면서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의 기본 도구 중 많은 것을 빌려 썼는데, 특히 에우클레이데스(유클리드)의 〈기하학 원본 Stoicheia〉에 나온 기하학적 본보기를 사용하여 철학 지식을 연역체계로 바꾸려는 수학적 방법을 빌려 썼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우리는 '신에 대한 지적 사랑'을 통해 우주를 전체로서 인식할 때 철학이 찾는 지혜를 얻을 수 있다고 했다.
라이프니츠는 수학자·법학자로서 미적분을 창안하고 마인츠 법전을 편찬했다. 또 근대 초기에 가장 독창적인 철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논리철학에서는 훌륭한 개혁가였고 형이상학에서는 스피노자와 데카르트의 합리론에 이어 제3의 대안을 제시했다. 라이프니츠는 논리학을 수학적 계산법으로 보았다. 그는 처음으로 '이성의 진리'와 '사실의 진리'를 구별했고, 논리학과 수학에 나오는 모든 가능세계에서 타당한 '필연적' 명제와 과학에 나오는 특정 존재조건에 대해서만 타당한 '우연적'(또는 경험적) 명제를 구분했다. 그러나 라이프니츠의 가장 중요한 의의는 데카르트·스피노자와 공유한 극단적 합리론에 있다. 〈이성에 기초한 자연과 은총의 원리 Principes de la nature et de la grâce fondés en raison〉(1714)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참된 추론은 필연적 진리 또는 영원한 진리에 의존하며, 이러한 진리는 관념들의 의심할 수 없는 연관과 틀림없는 결론을 확립해준다".
또한 아이작 뉴턴〈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 Philosophiae Naturalis Principia Mathematica〉(1687)는 수학을 자연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데 기초한 최초의 위대한 물리학적 종합이었다. 이성이 권위와 자율성을 지닌다는 기본적인 생각은 근본적으로 뉴턴 연구의 귀결이었으며, 18세기에 모든 철학작업을 지배했다.
- 전통적 영국 경험론
계몽주의 철학자들은 자연의 실재에서 정신의 구조에 대한 설명으로 관심을 돌리고 그 정신의 장치들을 경험적으로 설명하면서, 르네상스의 초점이었던 단순한 수학적 인식요소보다는 감각적 인식요소에 의존했다. 이른바 영국 경험론 학파는 칸트 시대 이전까지 계몽주의 철학을 이끌어나갔으며 사물보다는 관념, 본유적·필연적 원리보다는 경험을 기반으로 철학을 연구했다.
로크〈인간 오성론 Essay Concerning Human Understanding〉(1690)은 진리의 새로운 기준을 제안함으로써 근대 철학 연구의 새로운 방향을 결정적으로 뚜렷이 보여주었다. 이 책의 본래 의도는 "인간 인식의 기원, 확실성, 범위를 탐구하는 것"이었으며, 여기에는 다음의 3가지 과제가 포함되어 있었다. 첫째 인간 관념의 기원을 찾아내는 것, 둘째는 이 관념의 확실성과 증거로서의 가치를 밝히는 것, 셋째는 덜 확실한 모든 인식의 권리를 검토하는 것이다. 르네상스의 일반 관례에 따라 로크는 '관념'을 "인간이 사유할 때 지성의 대상이 되는 모든 것"으로 정의했다. 그러나 데카르트와 모든 합리론 학파에게 관념의 확실성은 그 자명성, 즉 그 명석성과 판명성의 함수였던 반면 로크에게 관념의 타당성은 분명히 그 관념이 생기는 양상과 방식에 달려 있었다.
〈인간 오성론〉에서 로크는 기초적 감각의 벽돌들을 가지고 인간이 개념적으로 경험하는 전세계를 만들어내려 했다. 그의 인식론의 기본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인간 관념의 궁극적 원천은 감각이고, 모든 정신작용은 단순한 감각자료를 결합하고 혼합하여 복잡한 개념적 도구를 만드는 것이다(→ 감각 여건). 로크는 굳기·형태·연장(延長)·운동·정지 등 대상 자체의 실제 특성인 '제1성질'과 색·맛·냄새 등 정신이 대상에 의해 어떻게 영향을 받는가에 따라 나타나는 내적 결과일 뿐인 '제2성질'을 구분했다.
로크를 계승한 조지 버클리(1685~1753)가 극복하려 애쓴 것은 바로 이러한 제1성질과 제2성질의 이원론이었다. 버클리는 궁극적으로 제1성질이 제2성질로 환원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그의 경험론은 추상적 관념을 거부하기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그는 일반 개념이란 마음이 꾸며낸 허구일 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상과 우리 마음 속에 들어 있는 감각 인상을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을 거부했다. 그리고 과학은 물질이라는 개념이 없어도 잘될 수 있다고 논증했다. 자연은 인간이 감각으로 지각하는 것일 뿐이며, 이 말은 감각자료를 '실체에 붙어 있는 성질'이라기보다 '마음의 대상'으로 볼 수 있음을 의미한다.
회의론자 데이비드 (1711~76)도 인식의 기원을 감각인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로크가 마음의 능력에 믿을 만한 질서가 있다고 보고 버클리가 어떤 정신적 능력을 나타내는 심성 자체를 인정한 반면 흄은 집요한 분석을 통해 외부세계뿐 아니라 마음에도 우연성이 있음을 발견했다. 그에 따르면 지각경험의 모든 통일성은 '마음의 연합능력'에서 나온다. '관념들의 연합'은 사실이지만 이 연합이 만들어내는 유사성·인접성·인과성 등의 관계는 본질적 타당성을 지니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관계는 설명할 수 없는 '정신적 습관'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모든 인식이 기초로 삼는 인과원리는 사물들 사이의 필연적 연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그 사물들이 항상 연결되는 우연적 사건일 뿐이다.
- 그밖의 계몽주의 운동
영국 경험론 학파가 18세기에 탄생한 유일한 철학 유형은 결코 아니었다. 지적·철학적 표현면에서 계몽주의의 본류에서 갈라진 경향들이 많이 생겨났다. 라마르크의 기사인 장 바티스트, 조르주 퀴비에, 뷔퐁 백작인 조르주 루이 르클레르 등은 동물 분류체계를 완성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콩도르세 후작인 안 로베르 자크 튀르고와 몽테스키외, 이탈리아의 잠바티스타 비코, 영국의 애덤 스미스 등은 역사학·경제학·사회학·법률학이 과학으로서 출발하는 모습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흄, 제러미 벤담, 영국의 도덕철학자들은 윤리학을 전문적 철학 연구분야로 만들고 있었다. 샤프츠버리 백작 3세인 앤소니 애슐리, 에드먼드 버크, 요한 고트셰트, 알렉산더 바움가르텐 등은 체계적 미학의 기초를 놓고 있었다. 그러나 인식론 외에 계몽주의가 크게 기여한 분야는 사회·정치 철학이었다. 로크의 〈시민정부론 Two Treatises of Civil Government〉(1690)과 장 자크 루소〈사회계약론 Du contrat social〉(1762)은 그 시대의 더욱 새로운 정치적 요구들을 바탕으로 정치 결사를 정당화했다. 로크와 루소에게서 모든 근대 자유주의의 싹, 즉 대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 시민의 자유, 인간의 근본적 존엄 등에 대한 신념을 볼 수 있다.
18세기는 민주주의 혁명의 시대였다. 정치문제는 자유와 불평등의 문제였으며, 정치이론은 양도할 수 없는 자연권의 관점으로 표현되었다. 로크의 정치이론은 왕의 신성한 권리와 주권자의 절대권력을 분명하게 거부했다(→ 왕권신수설). 그는 모든 사람이 자유와 평등의 자연권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이 본래 살고 있는 자연상태는 무언가 불편한 점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했듯이 "단지 살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살기 위해서" 서로 뭉쳐 사회를 만들었다. 정치권력은 결코 그 궁극목적인 공익과 무관하게 행사되어서는 안 된다. 루소의 경우에도 사회계약이라는 협약이 사람들 사이에서 성립하는 모든 합법적 권위의 기초를 이루었다. 그러나 개인의 모든 권리가 일반 의지에 예속되는 만큼 자연상태의 자유는 시민사회의 자유에 종속되어야 한다. 루소에 따르면 국가는 하나의 도덕적 인격체로서 그 생명은 구성원들의 결합이고, 그 법은 일반의지의 행위이며 그 목적은 시민의 자유와 평등이다. 정부가 국민의 권력을 찬탈할 때 시민은 저항할 의무가 있다.
- 이성에 대한 칸트의 비판적 고찰
쾨니히스베르크대학 교수 이마누엘 칸트는 계몽주의 철학의 진정한 절정을 뚜렷이 보여준다. 칸트의 실질적인 위대한 업적은 인식에서 감각적 요소와 선천적 요소를 관련시킴으로써 라이프니츠의 극단적 합리론과 흄의 극단적 경험론 사이의 불화를 해소한 것이었다. 칸트는 또 철학의 새로운 정의, 철학의 방법에 대한 새로운 견해, 철학 서술의 새로운 구조적 모형 등을 제시했다.
칸트의 견해에 따르면 철학의 유일한 과제는 이성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일이다. 철학은 "모든 인식과 인간 이성의 본질적 목적 사이의 관계를 다루는 학문이다". 그리고 철학의 진정한 목표는 건설적(순수이성에서 생기는 모든 인식의 체계를 묘사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비판적(한계를 잊은 이성의 망상을 폭로하는 것)이다. 철학자는 인간인식의 원천·범위·타당성과 이성의 궁극적 한계를 결정할 수 있어야 하고 이 과제를 수행하는 데는 특별한 철학방법이 필요하다.
칸트의 방법은 선천적으로 판단하는 이성의 능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이성이 경험없이도 무엇을 성취할 수 있는지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 방법의 기초는 인간의 인식이 대상에 일치해야 한다는 가정이 아니라 대상이 인간의 인식기구에 일치해야 한다는 가정이었다. 그렇다면 문제는 그 인식기구의 정확한 성질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 문제와 그밖의 문제에 대답하려는 시도가 칸트의 〈순수이성비판 Kritik der reinen Vernunft〉(1781)의 과제였다. 그러나 칸트의 위대한 목적은 이성을 어느 한 영역만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각 영역에서 고찰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이성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는 일은 사유(과학)에서는 〈순수이성비판〉, 의지(윤리학)에서는 〈실천이성비판 Kritik der praktischen Vernunft〉(1788), 감성(미학)에서는 〈판단력 비판 Kritik der Urteilskraft〉(1790)이 각각 다룬다.
■ 19세기
정치적으로 19세기는 나폴레옹의 통령정부로 시작하여 빅토리아 여왕의 60주년 기념식으로 끝났다. 그러나 철학적 중요성을 가진 것은 그 사이에 일어난 지적·사회적 변화들이다. 19세기초의 낭만주의 운동은 감성을 받들고 이성에 반대한 문예 반란이었다. 산업혁명은 사회에 엄청난 불행을 낳았고 개혁을 요구하는 외침을 불러일으켰다. 1848년 파리·독일·빈에서 일어난 혁명은 계급의 분화를 상징했으며 유럽인의 의식 속에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라는 개념을 심었다. 마지막으로 다윈은 생물과학에 격동을 일으켰고 생물학적 진화관념을 도입했다.
독일 관념론
19세기초의 뚜렷한 특징은 철학에서 형이상학 정신의 부활이었다. 독일 관념론은 라이프니츠와 스피노자의 사변적 주장을 최고수준으로 되살렸다. 이러한 전환은 주로 철학이 종교와 새로 동맹을 맺은 결과였다. 이 종교적 제휴의 결과 철학적 관심은 칸트의 〈순수이성 비판〉(이 책에서 그는 자연과학을 설명하려 했고 형이상학에서 확실한 인식을 얻을 가능성을 부인했음)에서 〈실천이성 비판〉(이 책에서는 도덕적 자아의 본성을 탐구했음)과 〈판단력 비판〉(이 책에서는 전체로서 우주의 합목적성을 제안했음)으로 옮겨갔다. 절대적 관념론은 다음의 3가지 전제를 기초로 삼았다. 첫째, 철학의 주요사항은 인간의 자아와 자기의식이다. 둘째, 세계는 전체로서 정신적이며 사실상 우주 자아와 비슷한 것이다. 셋째, 자아와 세계에서 지성보다는 의지와 도덕성이 더 중요하다.
요한 피히테(1762~1814)는 인간의 자기의식이 1차적인 형이상학적 사실이고, 이 사실을 통해 철학자는 '절대자'인 우주의 총체성으로 나아가는 길을 발견한다고 보았다. 철학의 유일한 과제는 '의식의 명료화'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기의식의 최고단계는 철학자가 성취한다. 왜냐하면 철학자만이 '마음' 또는 '정신'을 실재의 중심원리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1770~1831)은 이러한 사유노선을 더 밀고 나갔다. 칸트가 이성을 정신이 세계에 부과하는 형식으로 본 데 반해 헤겔은 이성을 세계 자체를 구성하는 것, 즉 정신이 부과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정신이 발견하는 어떤 것으로 보았다. 피히테가 의식을 정신에서 현실로 투영했다면 헤겔은 이성을 투영했다. 그결과로 나온 헤겔의 주장인 "이성적인 것은 현실적인 것이다"와 "진리는 전체이다" 등은 이전의 철학자들이 논리학과 형이상학, 주관과 객관, 사유와 존재 사이에 설정한 통상적 구분을 희미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절대자 또는 전체는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것이며 정지해 있지 않고 시간적으로 중요한 발전을 거친다. 헤겔은 이 진화를 '변증법적 과정'이라고 불렀다. 헤겔은 이 과정을 강조함으로써 이성 자체가 영원하지 않고 '역사적'임을 지적했고 인간 사회의 변화하는 역사 상황에 새로운 의미와 관계를 부여했다. 그리하여 헤겔은 철학이 이전에 지니지 못한 문화적 차원을 철학의 과제에 추가했다. 헤겔의 견해에 따르면 철학자의 사명은 의식을 통해 절대자에 접근하고, 절대자를 인간생활의 모든 영역에서 자신을 표현하고 발전시키는 정신으로 인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투쟁이 정신적 존재의 본질이고 자기 확대가 그 존재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 지성과 문화의 다양한 분야, 즉 심리학·사회정치학·미학·종교·철학 등은 세계정신이 펼쳐지는 단계들이 된다.
실증주의와 사회이론
프랑스의 오귀스트 콩트(1798~1857)는 위대한 철학적 과학사인 〈실증철학 강의 Cours de philosophie positive〉(6권, 1830~42)를 썼다. 콩트는 자기 철학을 '실증주의'라 불렀는데, 이 이름은 과학에서 받아들이는 방법으로 도출되지 않은 어떤 '인식'에 대해서도 타당성을 부인하는 좁은 과학철학을 의미했다. 콩트는 과학철학에서 반(反)종교적·반형이상학적 경향을 일으켰는데, 이 경향은 20세기로 이어졌다.
19세기 중엽 영국에서 경험론 전통을 대표하는 주요 인물은 존 스튜어트 (1806~73)이었다. 밀의 인식론은 모호한 형이상학에 대한 불신, 인식에서 선천적 요소의 거부, 모든 형태의 직관주의에 대한 단호한 반대 등을 보여주었다. 밀의 중요성은 인식론보다는 윤리학과 정치이론에 있었다. 그의 사회이론은 산업혁명의 해악에 맞서 싸운 시도였다. 〈공리주의 Utilitarianism〉(1861)에 표현되어 있는 그의 윤리학은 사회 구성원의 최대 행복을 산출하고 개인의 도덕적 자아를 발달시키는 것이 사회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다른 저작들에서 밀은 '다수의 횡포'에 대항하여 개인의 자유를 옹호하고 사상과 토론의 완전한 자유를 지지하는 논증을 제시했다. 대의 민주주의 원리를 전형적으로 변호했고 계급지향적 입법이나 특수한 이해관계를 옹호하는 입법의 위험을 지적했다. 밀의 자유주의 이념을 근본적으로 견제하는 이론을 독일의 혁명적 정치경제학자인 카를 마르크스(1818~83)가 제시했다. 마르크스는 헤겔에게서 이어받은 소외개념(헤겔은 이 개념을 형이상학적 의미로 씀)을 사용하여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산물을 누리지 못하는 소외현상, 인간의 노동을 단순한 상품으로 형편없이 취급하는 현상, 이윤을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타나는 인간의 비인간화 현상 등을 지적했다. 유명한 〈공산당 선언 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1848)에서 마르크스는 기존 질서의 폭력적 전복을 요구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모든 역사는 착취하는 소수의 부르주아지와 밑바닥에 있는 다수의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벌어지는 투쟁이다. 마르크스는 공산당을 세워 권력의 장악과 정의롭고 민주적인 사회주의 사회의 수립을 지향하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의식을 일깨우자고 역설했다(→ 계급투쟁).
마르크스의 혁명 열정은 서양에서 그의 철학적 명성을 위축하는 경향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의 몇가지 철학적 생각은 여전히 살아 있다. 이러한 생각으로는 사회가 사회 변화를 일으키는 반대세력들의 유동적인 균형체(변증법)라는 생각, 엄밀한 경제결정론과 혁명 계획 사이에는 아무런 갈등도 없다는 생각, 관념은 그것이 생겨나는 사회질서의 성격에 의존한다는 생각 등이다.
- 독자적 비합리주의 운동
19세기말에는 많은 독자적 철학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헤겔의 영향이 영국에 퍼져 T.H. 그린, F.H. 브래들리, 버나드 보즌켓 등이 새로운 헤겔 르네상스를 일으켰다. 미국에서는 관념론에 대한 강력한 반발이 일어나 찰스 샌더스 퍼스와 윌리엄 제임스의 주도로 실증주의 운동이 시작되었다. 퍼스는 철저한 논리학자였으며, 모든 연구의 기능은 의심을 뿌리뽑는 것이고 한 개념의 의미는 그것이 지닌다고 말할 수 있는 실천적 귀결이라고 생각했다. 제임스는 〈믿으려는 의지 Will to Believe, The〉(1897)와 그밖의 저서에서 퍼스의 실용주의적 의미론을 실용주의적 진리론으로 변형했다.
그러나 이 시대의 철학이 지닌 독특한 색깔은 비합리적인 것에 대한 강조였다. 헤겔의 영향력은 서로 다른 두 방향에서 도전을 받았다. 덴마크의 그리스도교 사상가 쇠렌 키에르케고르(1813~55)는 헤겔 체계의 논리적 주장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시대 사람인 아르투르 쇼펜하우어(1788~1860)는 비합리적인 것이 참으로 실재하는 것이라고 강조함으로써 헤겔에 맞섰다. 키에르케고르, 쇼펜하우어,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 등은 19세기를 위해 인간 본성에 대한 새로운 비합리적 관점을 마련했다.
키에르케고르는 헤겔주의가 인간의 실존과 이 실존의 주체적·생동적·정서적 성격을 전혀 모른 채 무심하게 객관적·추상적으로 이론을 세우고 체계를 구성한 완벽한 본보기라고 비꼬았다. 인간의 본질은 사유가 아니라 그의 정서생활의 실존 조건, 즉 불안과 절망 속에 담겨 있다. 키에르케고르의 3가지 저서 〈공포와 전율 Frygt og baeven〉(1843)·〈불안의 개념 Begrebet angest〉(1844)·〈죽음에 이르는 병 Sygdommen til doden〉(1849)의 제목은 그가 이전의 철학적 관심과는 아주 달리 의식상태를 집중적으로 연구했음을 보여준다. 쇼펜하우어는 과학 자체만으로는 현상 뒤의 진짜 세계를 꿰뚫어볼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이 진짜 세계는 강력하고 맹목적이며 분투하고 보편적인 우주 의지가 지배하며 이 우주 의지는 인간 본능의 변덕, 성적 충동, 모든 동물 행동의 거친 불확실성 등에서 나타난다. 이성적 과정이나 지적 명료함보다는 투쟁, 갈등, 불분명한 충동 등이 인간과 궁극적 실재의 참된 접촉이다. 독일의 문헌학교수 프리드리히 니체는 많은 저서를 남겼지만 체계적이지 못한 작가였으며, 철학자의 과제는 낡은 가치를 파괴하고 새로운 이상을 만들며 이 이상을 통해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는 쇼펜하우어와 마찬가지로 정신은 삶과 권력에 봉사하는 데서 본능이 사용하는 도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몽상은 진리만큼이나 인간에게 꼭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니체는 원한·죄의식·불쾌감·자기경멸 같은 상태를 분석하는 데 많은 시간을 보냈다.
■ 20세기
19세기의 철학은 주로 대학 밖에 있는 사람들이 만들었다. 그러나 오늘날 학교 밖에서 일류 철학자를 찾아보기란 어렵다. 국립철학학회, 좁은 범위의 전문 잡지 등 전문화를 매개하는 요인들이 점점 더 중요해졌다. 철학자들은 전문용어를 채택하고 전문문제를 다루며 광범위한 대중을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글을 쓴다. 철학적 마르크스주의와 몇몇 개별 철학자를 제외하면 현대 철학의 주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논리 실증주의와 언어분석을 2가지 주요분야로 가지고 있는 분석철학이고, 둘째, 실존주의와 현상학을 2가지 주요분야로 가지고 있는 대륙철학이다.
앙리 베르그송(1859~1941), 존 듀이(1859~1952), 앨프레드 노스 화이트헤드(1861~1947)는 쉽게 분류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그들은 20세기 전반의 가장 중요한 3명의 사변 철학자로 불렸다. 프랑스인 베르그송과 미국인 듀이는 다윈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두 사람 모두 정신은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는 도구로서 진화했고, 따라서 인간의 정신기능은 주로 행동의 공리적 요인이라고 주장했다. 베르그송과 영국인 화이트헤드는 제각기 현실은 강처럼 흐르는 것이며 궁극적 실재는 유동적·역동적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상 이 3명의 철학자는 철학이 특별히 서로 다른 일을 한다고 보았다. 철학관으로 볼 때 베르그송은 직관적이었고 화이트헤드는 사변적이었으며 듀이는 실용주의적이었다. 베르그송은 전혀 다른 2가지 인식방식을 구분했다. 하나는 과학의 인식방식인 분석의 방법이고, 또 하나는 사람들이 대상과 인격 속으로 몰입하여 그것들과 하나가 되는 지적 공감인 직관의 방법이다. 베르그송에 따르면 형이상학의 모든 기본 진리는 철학적 직관에 의해 파악된다. 이러한 직관을 통해 사람들은 자신의 깊은 자아를 인식할 뿐 아니라 세계의 신비한 창조 요인인 생명의 정신도 인식한다. 화이트헤드에 따르면 철학은 1차적으로 형이상학이며 "우리 경험의 모든 요소를 해석할 수 있도록 일반 관념들의 정합적·논리적·필연적 체계를 짜는" 시도이다. 그러므로 화이트헤드의 철학은 아주 폭넓고 일반적인 이해력을 바탕으로 세계를 조망하려는 시도였으며, 이러한 이해력은 그의 위대한 3부작 〈과학과 근대세계 Science and the Modern World〉(1925)·〈과정과 실재 Process and Reality〉(1929)·〈관념의 모험 Adventures of Ideas〉(1933)이 지향한 목표였다.
듀이는 미국에서 오랫동안 윤리학·형이상학·방법론 분야를 지배했다. 그는 모든 지식 형태의 통일성과 상호연관을 강조했을 뿐 아니라 윤리적·정치적 판단에 대해서도 과학적 판단과 똑같이 주장의 근거를 찾을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철학은 전문적인 자부심이 아니라 인간에게 필요한 것을 지향해야 한다. 듀이는 의식적인 지적 개입을 통해 바람직한 사회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민주공동체의 목표를 밀고나가기 위한 계몽된 대중행동의 지침으로 사회문제에서 새로운 '실험주의'를 제안했다.
19세기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기본틀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1924)의 철학적 주장에 의해 보강되어 동유럽 사회주의 나라에서 모든 철학활동의 출발점으로 쓰였다. 사회세계가 대립물의 성장소멸을 통해 진보한다는 마르크스의 변증법적 견해에 대해 레닌은 물질적 사물과 그들의 관계체계가 정신과 독립적으로 존재하고 자연법칙은 객관적이라는 생각을 덧붙였다(→ 유물론). 또 레닌의 많은 사상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굳히기 위한 폭력전술과 공산당의 역할 등 매우 실천적인 문제들에 이바지했다. 마르크스와 레닌은 모두 이론은 항상 계급이해를 표현하며 철학의 주된 과제는 프롤레타리아의 지적 무기를 단련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철학은 이데올로기와 뗄래야 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현대 분석철학의 한 가지인 논리실증주의는 데이비드 흄과 〈수학원리 Principia Mathematica〉(3권, 1910~13)의 저자인 버트런드 러셀과 화이트헤드의 새 논리학에서 함께 영감을 받았다. 이 학파에 따르면 철학은 과학적이어야 하고 내용보다는 기능을 추구해야 한다. 또한 철학은 복잡한 세계상이 아니라 명료한 사유를 만들어내야 한다. 이것은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이 〈논리철학 논고 Tractatus Logico-Philosophicus〉(1922)에서 다음과 같이 잘 표현했다. "철학의 목표는 사유의 논리적 명료화이다. 철학은 이론이 아니라 활동이다. 철학 연구는 본질적으로 해명으로 이루어진다. 철학의 결과는 많은 '철학 명제'가 아니라 명제를 명료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렇게 철학을 순수활동으로 강조했음에도 불구하고 논리실증주의는 다음과 같은 일련의 혁명적 명제도 제시했다. 첫째, 모든 유의미한 논술은 논리학과 수학의 형식적 문장과, 특수과학의 사실적 명제 중 하나로 이루어져 있다. 둘째, 사실적이라고 주장하는 모든 언표는 어떻게 그 언표를 검증할 수 있는지를 밝힐 수 있을 때에만 의미를 지닌다. 셋째, 형이상학적 언표는 무의미하다. 넷째, 도덕적·미학적·종교적 가치에 관한 모든 진술은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고 무의미하다.
논리실증주의가 형이상학과 가치에 관한 언표의 유의미성을 근본적으로 부인하자 처음에는 일종의 철학적 스캔들이 일어났다. 그동안 러셀과 그의 제자 비트겐슈타인(오스트리아에서 영국으로 이민)도 영국에서 비슷한 학설을 제시했다. 나치가 오스트리아를 침략하고 빈 학파의 많은 철학자가 미국으로 건너간 뒤 이 철학은 영미세계에 크게 영향을 끼쳤다.
일상언어분석은 주로 20세기 전반의 2명의 철학자인, G.E. 무어(1873~1958)와 비트겐슈타인의 산물이었다. 무어는 다른 사람들의 주장을 검토하는 일, 즉 같은 시대 사람들의 잘못을 비판적으로 분석하는 일을 철학적으로 대중화했다. 그가 관심을 기울인 주제는 윤리학과 인식론이었다. 그의 사상은 항상 실재론적·상식적이었으며, 매우 정확하고 자세하게 적용된 분석방법을 철학에 도입했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견해는 처음에는 러셀과 매우 비슷했다. 그러나 그뒤 수학과 논리학의 기초에 대해 점점 더 의심하게 되면서 그의 관심은 논리학과 인공언어체계에서 일상 자연언어에 대한 비판적 고찰로 바뀌었다. 이 변화는 주로 〈철학 탐구 Philosophical Investigations〉에 기록되었다. 이 책은 그가 죽은 뒤 1953년에 나와 언어분석의 성서가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만일 철학의 초점을 세계가 아니라 언어사용의 메커니즘에 맞추면 철학 활동을 괴롭혀온 대부분의 어려운 문제가 풀릴 것이라고 보고, "모든 철학은 언어비평이다"라고 주장했다.
- 유럽 철학
1950, 1960년대의 유럽 대륙철학은 현상학과 실존주의로 구분할 수 있지만 이 구분이 엄밀한 것은 아니다. 마르틴 하이데거, 장 폴 사르트르(1905~80), 모리스 메를로 퐁티 같은 사상가들은 두 사조에 모두 관여했다. 철학자로 전향한 독일 수학자 에트문트 후설(1859~1939)은 현상학의 아버지였다. 그의 주된 업적은 일찍이 개발한 현상학적 방법과 후기의 글에서 나타나는 생활세계라는 개념이었다. 후설의 현상학적 방법은 경험의 직접성을 강조하며 경험을 존재나 인과적 영향에 대한 모든 가정에서 떼어내어 그 실제적인 내재적 구조를 드러내는 것이다(→ 현상학적 환원). 왜냐하면 바로 이 구조가 경험의 본질을 이루기 때문이다. 현상학은 철학자의 관심을 형이상학적 이론이나 과학적 가정의 때가 묻지 않은 의식의 순수자료에 제한한다.
후설을 지지한 가장 두드러진 사람은 존재론적 실존주의자 마르틴 하이데거(1889~1976)였는데, 1927년에 그의 유명한 〈존재와 시간 Sein und Zeit〉이 나왔다. 하이데거는 세계 내의 존재·불안·심려·죽음을 향한 존재 등 인간의 실존에 대한 놀랄 만큼 독창적인 연구에서 현상학적 방법의 영향을 뚜렷이 보여주었다. 하이데거는 모든 탐구과정에서 철학이 경험적 학문이 아니라 경험의 구조에 대한 매우 자명한 통찰이라는 현상학 원리를 끝까지 지켰다.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에 뿌리를 둔 유럽 대륙의 실존주의는 2가지 주제, 즉 존재의 분석과 인간 선택의 중심성에 대한 연구를 지향한다.
독일의 카를 야스퍼스(1883~1969)에 따르면 철학함이란 개인이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이 되어가는 내면활동이다. 또 철학함은 존재의 계시이며, 인간이 무엇이고 무엇이 될 수 있는지에 대답하려는 시도이다. 이 활동은 과학의 활동과 전혀 다른 순수 사유활동이며 이 활동의 내면성을 통해 인간은 존재의 가장 깊은 차원들을 깨닫게 된다. 야스퍼스에 따르면 철학은 '실존의 해명'에 전념하며, 인간의 실존이 인간의 조건을 규정하는 '한계' 상황들, 즉 갈등·범죄·고통·죽음 등에 대한 경험 속에 가장 깊이있게 드러나 있음을 깨달을 때 이러한 해명은 이루어진다.
프랑스의 철학자이며 극작가인 장 폴 사르트르도 인간의 존재와 무(無)의 위협 앞에 선 인간의 불안에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이 존재의 본질이 인간의 자유, 즉 스스로 결정하는 의무와 선택의 자유라고 보고, 그래서 '잘못된 신념'을 향한 인간의 성향을 기술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낸다. 이 성향은 인간이 자신의 책임을 부인하고, 벗어날 수 없는 자유의 진리에서 도피하려는 비뚤어진 시도에서 잘 나타난다.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은 인간이 의식적 결정행위를 통해 장소·과거·환경·동료·죽음 등 자신의 한계를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자유행위 속에서만 인간의 실존은 진정한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의지).
- 결론
20세기 중엽 이래 철학활동은 언어·상징체계·의사소통 등의 문제에 큰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철학은 주로 상징체계와 언어의 특성을 통해 자신의 문제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단순히 분석철학의 전유물이 아니다. 듀이는 사회적 의사소통에 관심이 있었다. 화이트헤드는 상징체계에 관한 짧은 책을 썼다. 하이데거는 존재를 밝히기 위해 시가와 어원학에 관심을 기울였다. 독일의 신칸트주의자 에른스트 카시러는 '상징 형식의 철학'을 만들었으며 야스퍼스는 인간의 말과 몸짓 속에 나타나 있는 의미를 해독하려고 애썼다. 여러 철학이론들이 통합할 전망은 별로 없어 보인다. 과학적 기질과 형이상학적 기질은 여전히 정반대의 길을 걷고 있으며, 실존주의의 주관성과 논리실증주의의 객관성은 아직도 서로 경멸하면서 정반대의 주장을 하고 있다. 이와 같이 현대의 철학계에는 다양성과 분열이 여전히 버티고 서 있다.
Macropaedia| 金性煥 참조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