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는 위서인가?
일본서기는 720년에 편찬된 일본 최초의 관찬(官撰) 사서이며, 천지의 생성 및 일본 건국신화를 담고 있는 신대(神代)에서 시작하여, 지통천황(持統天皇)의 사망년도(697년)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정리한 통사(通史)이다. 7세기 이전의 일본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므로, 고사기(古事記)와 더불어 일본 고대사 연구의 핵심적인 사료라고 할 수 있다.
고대사회에서 사서를 편찬하는 것은, 특히 자신의 역사를 정리하는 것은 우선 국가의 기원을 밝히고 또한 왕실의 지배력을 정당화하고 호족들이 왕권에 복속한 유래를 설명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백제의 기술로 창건된 일본 최초의 사찰 원흥사 복원도. |
일본서기는 바로 그러한 목적에 충실한 사서라고 할 수 있다. 야마토 왕권의 지배력이 미치는 공간이 형성되는 과정을 비롯하여, 하늘(고천원)에서 태양신의 자손이 내려와(천손강림) 그 공간을 지배하게 된 연원과 그 정당성, 그리고 여러 호족들이 왕권에 예속된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왕권이 일본서기가 편찬되는 단계까지 연속되어 왔다고 하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호족들이 왕권에 예속되는 과정이 때로는 신들의 탄생으로 설명되기도 하고 때로는 무력을 통한 정벌과정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최종적으로는 호족들은 왕권에 예속된 존재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역으로 일본서기의 내용은 호족들이 자신들의 지위와 직능을 세습하는 역사적인 근거로 이용되기도 한다.
일본서기에 대한 이해는 기본적으로 앞에서 말한 고대 사회의 필요성이라는 관점에서 출발해야 한다. 신화와 전설, 설화 그리고 좀더 사실성을 가진 기록들도 모두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일 뿐이었다. 어떤 경우에는 사실을 왜곡하면서까지도 편찬의 목적에 부응하고자 하였다.
일본서기를 보는 이중시각
이러한 일본서기에 대한 우리나라 학계의 인식은 단지 그것이 일본 고대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 사서로 바라보는 데 그치지 않는다. 그 이유는 일본서기에 많은 한반도관계 기사가 기록되어 있으며, 그 기록의 내용이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구성하고 있는 내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야마토왕권(大和王權)이 4세기 중반부터 6세기 중반까지 한반도 남부를 지배하였다고 하는 일본학계의 해묵은 주장이 바로 이 사서의 내용을 근거로 성립된 것이다.
그런 까닭에 일각에서는 일본서기를 후대에 조작된 사서로 비판하기도 하였고, 터무니없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야기책으로 매도하는 경우조차 있었다. 동시에 일본서기 자체에 대한 연구는 물론이고, 그 속에 인용되어 있는 한반도관계기사에 대한 연구도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서기의 어떤 내용에 대해서는 무비판적으로 역사적인 사실로 단정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예를 들어 백제의 성왕이 일본열도에 불교를 전한 이야기, 왕인 박사가 유교 경전을 전했다는 이야기, 오경박사가 유교 경전에 관한 지식을 전했다는 이야기 등은 아무런 비판 없이 사실로 받아들인다. 한 마디로 일본서기를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는 이중적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불리한 내용이 있다는 점에서는 위서일지도 모른다고 하고, 우리들에게 유리한 내용은 주저 없이 역사적인 사실로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로는 신라왕인가?
그러나 일본서기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위서라거나 조작된 사서로 쉽사리 단정해 버리기에는 우리 고대사 연구에 필요한 많은 자료들을 포함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와 비교했을 때, 고대사회의 면모를 알 수 있는 내용들도 훨씬 풍부하게 담고 있다. 삼국사기가 12세기 중엽이라는 시점에서 고대사회를 재정리한 2차적인 사서인데 대하여, 일본서기는 8세기 초에 이른바 고대인들이 자신들의 역사를 정리한 것이다. 그래서 대상이 되는 시대로부터 훨씬 가까운 시기에 성립되었으므로, 고대사회의 면모를 보다 충실히 기록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일본서기가 위서인지의 여부를 따지기 위해서는 다른 사료와의 정합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좋은 예가 되는 것이 바로 성왕의 죽음에 대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기록이다. 일본서기의 기록이 없었다면, 성왕이 관산성에서 어떻게 죽었는지를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삼국사기 기록이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일본서기가 일거에 해결해 주고 있다. 그 외에도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는 동일한 전승을 각각 다른 시각에서 기록한 예들이 적지 않다. 관련된 자료들을 인용해 보자.
나해(奈解) 이사금(尼師今)의 아들인 우로(于老)는 역사상 저명한 인물이었다. 삼국사기의 기록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조분왕(助賁王) 4년 7월에 왜인이 침입해 왔는데, 우로가 사도(沙道)에서 추격하여 싸웠고, 바람을 따라 불을 놓아서 적의 전함을 불태우니 적이 모두 물에 빠져 죽었다. 17년에 서벌한으로 승진하여 겸하여 군사의 일도 맡았다. 첨해왕(沾解王) 7년에는 왜국의 사신 갈나고(葛那古)가 객관에 와 있었는데, 우로가 대접을 맡았다.
사신과 희롱하여 말하기를 “조만간 너희 왕을 소금 만드는 노예로 삼고, 왕비는 밥 짓는 여자로 삼겠다”고 하였다. 왜왕이 이 말을 듣고 노하여 장군 우도주군을 보내 우리를 치니, 대왕이 유촌(柚村)으로 나가 있게 되었다. 우로가 말하기를 “지금 이 환난은 내가 말을 조심하지 않은 데서 생긴 것이니, 내가 당해내겠다”고 하고 왜군에게 가서 말하였다. “전일의 말은 희롱이었을 뿐이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이렇게까지 할 줄을 생각하였겠는가.” 왜인이 대답하지 않고 잡아서, 나무를 쌓아 그 위에 얹어놓고 불태워 죽인 다음 돌아갔다. 미추왕 때 왜국의 대신이 와서 문안하였는데, 우로의 아내가 국왕에게 청하여 사사로이 왜국 사신에게 음식을 대접하였다. 그가 몹시 취하자, 장사를 시켜 마당에 끌어내 불태워 전일의 원한을 갚았다. 왜인이 분하여 금성을 공격해 왔으나 이기지 못하여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치술령 정상에서 본 울산 방면. 망부석 설화의 무대. |
우로에 관한 기록은 일본서기에도 실려 있다. 신공황후가 바다를 건너 신라로 쳐들어가자,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宇流助富利智干)이 마중을 와서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신은 이제부터 일본국에 있는 신의 아들에게 내관가(內官家)로서 끊임없이 조공하겠습니다”고 하였다.
또 다른 자료에서는 신라왕을 사로잡아 해변에 이르러, 왕의 무릎 힘줄을 빼고 돌 위에 엎드리게 하였다. 이윽고 목 잘라 죽이고 모래 속에 묻었다. 한 사람을 남겨 사신으로 삼았다. 그런데 나중에 신라왕의 처가 남편의 시신이 묻힌 곳을 몰라서 홀로 사신을 유혹하였다. 이에 사신을 속여서 말하기를 “당신이 왕의 시신이 묻힌 곳을 알려준다면, 반드시 두터이 보답할 것이다. 또한 내가 당신의 처가 되겠다”고 하였다. 이에 사신이 유혹하는 말을 믿고, 몰래 시신이 묻힌 곳을 알려주었다. 곧 왕의 처와 국인(國人)들이 함께 사신을 죽였다. 또한 왕의 시신을 파내어 다른 곳에 장례지냈다. 이때 재의 시신을 왕의 묘 아래 묻고 왕의 관을 들어 그 위에 내려놓으면서 “존귀하고 비천한 차례가 진실로 이와 같다”고 하였다.
이에 천황이 듣고 거듭 화를 내고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멸하고자 하였다. 군선이 바다를 가득 메우며 도달하자, 이때 신라의 국인들이 모두 두려워하여 어쩔 줄을 몰랐다. 곧 서로 모여 의논하여 왕의 처를 죽이고 죄를 빌었다고 한다.
일본서기에 보이는 신라왕 우류조부리지간은 우로(于老)라는 이름과 서벌한을 뜻하는 조부리지간을 합한 용어임을 알 수 있다. 우로를 신라왕이라고 한 것이나, 우로가 일본국의 내관가가 되겠다고 한 것 등은 모두 일본서기의 일본 중심적인 태도에 기인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박제상의 다른 이름 ‘모말’
우로의 처를 국인들이 죽였다는 내용도 전적으로 신뢰하기 어렵다. 이처럼 부분적으로는 두 개의 전승이 다른 면도 있지만, 전체적인 줄거리에서는 우로가 왜인에게 죽임을 당하고 그 처가 복수를 하였다는 점에서 일치하고 있다. 신라왕이라고 한 것도 그 아들이 나중에 흘해이사금으로 즉위하므로 우로가 왕에 준하는 대우를 받았을 것으로 생각한다면, 터무니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우로가 조분이사금 15년에 서불한(舒弗邯)이 되었고 죽을 당시에도 서불한 즉 각간(角干)이었던 점을 생각한다면 일본서기의 기록도 상당히 정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제상에 관한 기록 역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동시에 보인다. 망부석 설화로도 잘 알려진 박제상의 이야기는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박제상은 미사흔을 구출하기 위하여 왜로 들어가 마치 신라를 배반하여 온 것처럼 하였으나 왜왕이 의심하였다. 백제인으로서 그 전에 왜에 들어간 자가 신라가 고구려와 더불어 왜를 도모하려고 한다고 참소하였으므로, 왜가 드디어 군사를 보내 신라 국경 밖에서 순회 정찰케 하였다. 마침 고구려가 쳐들어와서 왜의 순라군을 사로잡고 죽였으므로, 왜왕은 이에 백제인의 말을 사실로 여겼다.
또한 신라왕이 미사흔과 제상의 가족을 옥에 가두었다는 말을 듣고 재상을 정말 신라를 배신한 자로 여겼다. 이에 왜는 군사를 내어 신라를 치려고 하였고 박제상과 미사흔을 장수로 임명하고 한편 향도로 삼아 신라로 향했다. 이 틈에 미사흔은 먼저 신라로 탈출하고 박제상은 사로잡혀 죽임을 당했다.
한편 일본서기에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있다. 신공 5년에 신라왕이 모마리질지(毛麻利叱智) 등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그런데 전에 인질로 온 미질허지벌한(微叱許智伐旱)을 돌려보내려는 뜻이 있었다. 그래서 허지벌한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거짓말을 하게 하였다. “사신으로 온 모마리질지 등이 신에게 말하기를, ‘우리 왕이 그대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음을 빌미로 삼아 처자를 모두 노비로 삼았다’고 합니다. 바라건대 잠시 본국으로 돌아가 허실을 알고자 청합니다”고 하였다. 이에 황후가 허락하였다. 그래서 왜군이 신라 해안으로 나아갔는데, 이때 모마리질지 등이 배를 나누어 미질한기를 신라로 도망가게 하였다. 그리고는 허수아비를 만들어 미질허지의 침상에 넣어두고 아픈 것처럼 꾸몄다. 나중에 속은 것을 알고 불태워죽였다. 그리고는 신라로 나아가 초라성을 함락시키고 돌아왔다고 한다.
삼국사기에서 박제상은 모말(毛末)이라고도 한다고 하였으므로 모마리질지는 바로 그 이명을 기록한 것이다. 또 미사흔은 미해(美海)라고도 하므로 미질허(未叱許) 역시 미사흔의 이름을 달리 표기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박제상의 말을 믿고 왜가 군사를 내어 신라에 온 것이나, 그 기회를 이용하여 미사흔이 탈출한 것, 그리고 박제상이 불에 타 죽은 것까지 전체적인 줄거리는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서기 쪽의 인명이 시대적으로 앞서는 표기방식으로 생각된다.
이처럼 삼국사기와 일본서기 기사 중에는 높은 정합성을 가진 사료들이 적지 않다. 삼국사기가 완성된 것이 1145년인 것을 생각하면, 720년에 완성된 일본서기에 전하는 성왕의 죽음, 우로, 박제상에 관한 기록은 독자적인 전승에 바탕을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일본서기의 기록이 없다면, 성왕의 죽음에 대한 전말을 정확히 알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박우로나 박제상에 대한 전승도 확정된 사실이라고 하기 어렵다.
복어에 독 있다고 버리나?
결국 일본서기라는 사료도 그 자체로서 완전한 위서이거나 반대로 완전한 사료도 아니다. 다른 사서의 기록과 정밀하게 비교함으로써 그 속에서 역사적인 사실을 추출해야 할 일반적인 성격의 사료 중 하나일 뿐이다. 일본을 중심으로 인식의 편향이 심한 것은 사실이지만, 다른 나라의 사서들 또한 그런 결점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동일한 사실을 전하는 전승에서 나타나는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의 차이야말로 우리가 일본서기를 읽을 때 염두에 두어야 할 굴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가야의 멸망과정에 대한 구체적인 기록이나 백제왕실의 계보에 대한 기록, 다양한 백제인명 및 관직에 대한 기록은 한국 고대사의 연구에 필수불가결한 자료이다. 그리고 성왕이 불교를 전하였다거나 왕인이나 오경박사에 대한 기록도 일본서기에만 존재하는 것이다.
일본서기가 없었다면 백제가 많은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었다는 내용은 결코 우리에게 알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일본서기의 편향성을 주의하면서 한반도에 관련된 기사들을 검토한다면, 절대적으로 부족한 우리의 고대사 연구에 필요한 사료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복어에 독이 들어있다고 해서 우리가 복어를 버리는 건 아니지 않는가.
이근우 부경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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