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득력 더해가는 '삼국의 대륙존재설'
일반적으로 고대의 사서에는 자연의 특이 현상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자연스럽지 않은 자연의 변화가 인간과 사회의 운명과 직결된다는 고대인들의 믿음 때문이다. 기록된 자연 현상 중에서도 특히 천문현상은 매우 중요한 가치가 있다. 사서의 기록은 위정자나 집필자의 주관에 의해 선별되고 변조되며 후대에 갈수록 윤색될 수 있다. 그러나 천문현상은 큰 틀에서 뉴턴의 자연법칙에 의해 일어나기 때문에 사서에 기록된 내용을 정확하게 검증하는 것이 어려운 일이 아니다. 후대에 가더라도 변조가 불가능하고 설사 조작이 있었다고 해도 현재의 과학기술로는 얼마든지 찾아낼 수 있다. 그러므로 갑자기 발견되는 사료들은 천문현상 기록을 토대로 사료의 진위여부를 가려주기도 한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천문기록의 의문〉
1994년, 고대사에 대한 열기가 높아지고 있는 가운데 매우 놀라운 연구 논문이 발표되었다.
서울대학교 박 창범 교수와 경희대학교의 라 대일 교수는 「삼국시대 천문현상기록의 독자관측사실 검증」에서 『삼국사기』에 나온 일식의 기록을 통해 3국의 천문현상을 관측한 위치(수도로 비정)를 추정하였다. 그 결과 기록된 일식의 관측 위치는 놀랍게도 한반도가 아니라 중국 대륙 안이었다.
박창범 교수는 비록 후대에 쓰인 것이지만 고려의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나온 천문기록을 근거로 삼국의 수도가 어디인가를 비정할 수 있는, 즉 관측자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조사했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시대에 일어난 일식이 67회, 혜성출현이 65회, 유성과 운석의 낙하가 42회, 행성의 이상 현상이 40회, 오로라 출현 12회로 총 226회의 천체현상이 기록되어 있다.
연구에 사용된 일식 기록은 서기전 54년에서 서기 201년까지의 초기신라 일식 16회, 787년 이후의 후기신라 일식 9회, 백제 전 기간의 일식 20회와 고구려의 일식 8회였다. 결론은 삼국이 서기 200년 이후에 수준 높은 천체관측을 했으며 기원전부터 천체관측은 삼국이 독자적으로 수행했다는 것이다.
개개의 일식도를 보면 어느 한 일식은 식(蝕)의 정도 차이가 있지만 광범위한 지역에서 관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혁거세 4년(BC 54년)의 일식은 식분이 서울과 동경에서 0.7, 시안에서 0.8, 상하이에서 0.9, 방글라데시의 데카에서는 1.0(개기식)이다. 그러나 특정국가가 기록으로 남긴 모든 일식은 어느 지역에서든 잘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자면 신라에서 141년에 측정된 일식은 한반도와 그 이동에서는 볼 수 없다. 또한 신라 166년의 일식은 장안 이서에서는 볼 수 없다.
따라서 특정 국가가 관측한 일식의 식분도를 모두 합하여 평균하면 평균식분이 최대인 지역을 찾을 수 있고 이것을 통해 최적 관측지 즉 천문관측 현상을 관측하였던 관측자의 위치를 알 수 있다. 고대 천문현상의 관측은 그 국가의 수도 근방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므로 '관측자의 위치'는 그 국가의 수도가 어디 있었는지는 물론 그 당시의 강역이 어디인지를 찾아낼 수 있다.
그런데 삼국의 일식을 관측한 위치는 기존에 알려진 것과는 너무나 달랐다. 백제에서 기록된 20개의 일식 관측지는 요서 지역(발해만)이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기원전 201년 이전 신라의 일식 16개에 의한 관측자의 위치는 양자강 유역이었고 787년 이후 신라에서 기록된 일식 9개의 관측자 위치는 한반도 남쪽이라는 점이다. 신라의 일식기록이 201년을 마지막으로 787년에 다시 등장할 때까지 무려 580여 년의 공백기간이 있는데 이 기록이 엄밀하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즉, 일식기록만으로 따진다면 신라는 중국 본토 지역에서 한반도로 일정 시기에 넘어왔다고 추정할 수도 있게 된다.
문제는 신라의 경우 초기 신라의 관측자 위치가 잘못되었을 확률은 매우 낮다는 점이다. 관측자가 한반도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중국의 것을 차용했을 확률은 겨우 0.24퍼센트였다. 결론적으로 삼국의 일식 기록이 중국의 기록을 차용한 것일 확률은 0.026퍼센트였다.
고구려의 관측자 위치는 신라나 백제보다 매우 북쪽으로 치우쳐 있는데 고구려가 광대한 영토의 여러 곳에서 천체를 관측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여하튼 박 교수의 논문에서 다룬 천문현상 연구에 의한 삼국의 관측자 위치는 우리의 고대사에서 규명할 부분이 매우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원래 『삼국사기』의 천문기록에 대해 과거의 학자들이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다. 일본학자들의 견해도 기원 5세기까지는 중국의 기록을 그대로 차용했거나 꾸며내었으며 7세기 중반 이후에야 비로소 삼국이 독자적으로 천문관측을 시작했다고 보았다.
이와 같은 근거는 『백제본기』에 의할 경우 개국 이래 문자로 사실을 기록한 것이 없다가 375년에 이르러 박사 고흥(高興)이 서기(書記)를 만들었다고 적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한자를 수용하기 이전에는 기록이 없었다는 뜻인데, 『삼국사기』에 백제가 기록한 이 공백기의 일식기록으로 태백주현(224) 등이 기록되어 있다.
천문현상기록이 구전으로 전래되어 오다가 한문을 수용하면서 이를 글로 적었다는 가설도 가능하기는 하지만 과거의 천문현상은 현상이 일어나는 바로 그 시점이 중요하지 지나간 과거의 천문현상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당시의 시점에서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 과거의 천문현상이 수백 년을 걸쳐 구전으로 내려온다는 것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떨어지므로 중국에서 차용했다는 것이 무난한 해석이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과학은 『삼국사기』의 기록이 삼국에서 독자적으로 천문현상을 관측했다는 것을 분명히 알려준다. 중국에서 천문기록을 차용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삼국에서 독자적으로 천문현상을 관측한 것이 현재까지 전달될 수 있는 단 한 가지의 가능성은 무엇인가? 한문이 수용되기 이전에 한민족의 기록문자가 존재했다는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기 전에도 옛글이 있었다는 기록이 매우 신빙성 있게 느껴짐을 알 수 있다 (「고조선에 신지글자 있었다」, 국정브리핑, 2004.05.29 참조).
〈백제의 요서영유(설)〉
고구려, 백제, 신라로 이루어지는 삼국시대를 거론할 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삼국지』 〈위지동이전〉과 한국 측의 정사로 볼 수 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초기 기록이 너무나 다르다는 점이다. 특히 백제만을 따로 분리한다면 『삼국지』 〈위지동이전〉에서는 3세기 중엽까지 백제는 마한 54국의 하나라고 하는데 반해 『삼국사기』에서는 온조왕대에 이미 고부(古阜) 지방까지 확보한 것으로 되어 있다. 더구나 『삼국사기』에서는 고이왕대에 이미 6좌평과 16관등제라는 잘 짜여진 국가조직을 갖춘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삼국지』 〈위지동이전〉은 국가체제 내에 많은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데 학자들을 놀라게 하는 것은 백제가 한반도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중국 요서 지방에 있었다는 기록 때문이다. 학자들을 더욱 당황하게 만드는 것은 이런 자료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전혀 거론되지 않았음에도 중국 측의 정사에는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우선 대한민국 정설로 볼 수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에 나타난 백제의 요서영유(설)을 살펴본다.
『송서(488년)』 :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었다. 그 후 고려가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는 요서를 차지했다. 백제가 통치한 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한다(요서지역에 설치되었다는 진평군에 대한 기록이 너무 불명확해 학계에서는 오래 전부터 많은 논란이 일고 있다. 진평군과 백제군의 위치는 중국 〈복단대학역사지리연구소〉에서 간행한 『중국역사지명사전』을 보면 진평군은 468년에 지금의 복건성 복주시에 설치되었으나, 471년에 진안군으로 이름을 고친 것으로 나타나 있다).
『남제서(南齊書, 537년 이전)』 : 백제는 변진(弁辰)의 나라로 진대(晉代)에 일어나 번작(蕃爵)을 받았다. 스스로 백제군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
『양직공도(梁職貢圖, 526 539년)』 : 백제는 예부터 내려오는 동이의 마한에 속한다. 진(晉)말에 구려(駒麗)가 요동을 차지하니 낙랑 역시 요서 진평현을 차지했다.
『양서(梁書, 629 639년)』 : 백제란 조상이 동이다. 동이는 세 한국이 있으니 첫째 마한, 둘째 진한, 셋째는 변한이다. 변한과 진한은 각각 열 두 나라가 있고 마한은 54국이나 된다. 그 중에 큰 나라는 인가가 만여 호가 되고 작은 나라는 수천 호가 되어 모두 합치면 도합 10여만 호가 되는데 백제란 그 중의 하나이다. 그것이 후대에 점점 강성해져 모든 조그마한 나라들을 병합했다.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에 있었다. 진(晉)대에 구려(句麗)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고 스스로 백제군(百濟郡)을 다스렸다.
『남사(南史, 627 649년)』 : 그 나라는 본래 구려(句麗)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여리에 있었다. 진대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遼西)와 진평(晉平)의 두 군(郡)의 땅을 차지하여 스스로 백제군을 두었다.
『통전(通典, 801년)』 : 처음 백가(百家)로서 바다를 건넜다하여 백제라 한다. 진대에 구려가 이미 요동을 차지하니 백제 역시 요서와 진평의 두 군을 차지했다(현재의 유성(柳城)과 북평(北平) 사이)
『송서』에 실린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기록은 주로 백제의 대 중국 외교 자료에 의해 편찬되었으므로 이들 기록이 5세기 후반 경 백제와 중국의 외교관계에서 비롯된 사실을 반영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송서』의 내용은 모두 당대의 외교기록인데 요서영유 기록만은 전대의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사건 기록으로 학자들은 이와 같은 기록이 있었던 이유로 당시의 시대적 필연성이 있었기 때문으로 추정한다. 『송서』에서 주목되는 내용은 고구려가 요동을 점령하자 고구려와 상대되는 백제가 요서지방을 차지하고 이곳을 진평군 진평현이라 하였다는 대목이다.
반면에 『남제서』의 경우 전반부분의 일부가 결실되어 있는데 유원재(兪元載)는 '스스로 백제군을 고려 동북에 두었다'라는 내용이라고 발표했다. 『남제서』는 『송서』와 같은 내용이지만 진평군 진평현이 백제군으로 바뀌어 있다. 그러므로 이들 두 개의 사서는 당대의 변화된 인식의 일면을 기록한 것으로 생각된다.
『양직공도』에는 백제의 사신도(使臣圖)와 함께 백제에 대한 기록이 전해지는데 백제의 원류, 요서영유, 대중관계, 문화관계의 기사를 담았다. 특히 백제의 원류기사를 마한으로부터 구했으며 백제가 아닌 낙랑이 요서지역을 차지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학자들을 곤혹스럽게 하는 것은 백제의 요서영유에 대한 기록은 남조계 사서에만 전해지고 당사국인 백제와 북조의 사료에는 전혀 없다는 것이다. 백제가 중국 본토에 위치하고 있었다면 당시의 동북아시아사상 중요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당사국인 북조계 사서에는 나타나지 않고 남조계의 사서에만 기록되어 있다는 것은 남조와 북조에서의 인식이 달랐기 때문으로 판단된다. 문제는 백제의 사료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삼국유사』, 『삼국사기』가 워낙 후대에 저술된 것이므로 요서영유(설)에 대해 일연과 김부식이 여러 가지 이유로 누락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남제서』〈백제전〉과 『자치통감』에 의하면 488년과 490년에 백제가 북위와 전쟁을 벌여 크게 승리했다는 기록이 있다. 488년의 전쟁은 『남제서』의 앞 부분이 멸실되어 잘 알 수 없지만 490년의 전쟁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 해(490)에 위군이 다시 수십만의 기병들로 백제의 지경을 공격했다. 백제 모대(동성왕)는 장군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 4명으로 하여금 위군을 습격하여 크게 격파했다. 495년 백제의 동성왕은 남제에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경오년에 험윤이 저희들의 죄를 뉘우치지 않고 침범해 오므로 사법명 등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적을 요격하여 크게 이겼고 그들을 베어 적의 시체가 들판을 덮었습니다.'
북위가 백제의 지경을 공격함으로서 시작된 이 전쟁도 한반도에 있는 백제가 중국으로 원정군을 보내 전투를 벌였다고는 볼 수 없다. 490년 전쟁에서 북위는 수십만의 기병을 동원했다고 했는데 당시 북위가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공격하려면 이들을 운송시킬 대함선이 필요하다. 해로를 통해 한반도에 있는 백제를 공격하지 않았다면 북위가 강성한 고구려(장수왕 시대)의 영토를 통하여 백제로 들어가야 하는데 이 역시 고구려가 순순히 허락했을 리는 없는 일이다. 적어도 수십만 명이 통과하려면 고구려와 북위가 상당한 조약을 맺거나 혈전을 치렀어야 하며 이럴 경우 북위에서 기록하지 않았을 리 없다는 주장이다.
또한 백제의 동성왕은 이 전투에서 공로를 세운 장군들을 광양태수, 청하태수, 광릉태수, 성양태수로 봉해달라고 남제에 청했다. 동성왕이 부하 장군들의 임명을 요청한 영토들은 남제가 북위에게 빼앗겼던 땅으로 광양은 오늘날 북경 부근 대흥현 또는 밀운현, 청하는 북위 때에 하남성 상현 부근, 광릉은 광소성 회음현 동남 지역, 성양은 강소성 또는 하남성 신양현 부근으로 추정한다.
이것은 백제가 중국 일부 지역에 거점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백제와 북위간에 전투가 벌어졌던 지역인 산동반도는 요서영유(설)의 지역과는 다른데 백제가 언제부터 산동에 거점을 잡고 있었는지는 명백하지 않다. 일부 학자들은 요서지역에 진출했던 백제 세력이 고구려와 전진의 연합에 의해 공격당하자 남쪽으로 내려간 것으로 추정한다. 중국의 역사책 『신당서』와 『구당서』에서는 백제의 서쪽 경계를 월주, 즉 지금의 절강성 소흥시 부근이라고 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백제의 국경이 한반도만이 아니라 중국 해안지방까지 뻗쳐 있었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최치원전〉에도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고구려 백제가 강성할 때 군사가 백만 명이나 되어 남으로는 오, 월을 침략하고 북으로는 연, 제, 노국 들을 괴롭혀 중국의 큰 우환거리였다.'
이상과 같은 사료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요서영유(설)에 대해서는 긍정설과 부정설이 있다. 제3의 의견은 백제가 아니라 마한, 부여, 낙랑 등 다른 세력이 주체인데 백제로 기록되었다는 견해이다.
백제의 요서영유를 긍정하는 견해를 제시한 사람은 실학자 신경준으로부터 임수도, 정겸(丁謙) 등의 중국인과 신채호 , 정인보, 이민수, 일본인 이노우에 히데오(井上秀雄) 등으로 이어지며 그 위치를 요서, 산동, 강소, 절강(遼西, 山東, 江蘇, 浙江) 등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추정하였다. 북조가 백제의 요서영유(설)을 누락시킨 것은 북조의 사관들이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 김상기는 백제가 고구려의 요동진출에 대항하기 위해 근초고왕 말기에 요서지방을 점령했다는 견해를 제기했다. 요서영유(설)에 긍정적인 사람들은 대체로 중국 측의 자료를 그대로 수용해야 한다는 견해를 갖고 있다.
반면에 백제의 요서영유(설)을 부정하는 입장은 실학자인 한진서를 비롯하여 주로 일본의 연구자들로부터 나온다. 이들은 중국 측 사료에서 백제가 요서지방을 영유했다는 시기인 진말(晉末)에는 모용씨가 요서지방을 점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중국과 백제의 지리적 관계를 볼 때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3의 의견으로 요서영유의 주체는 백제가 아니라 낙랑이라는 주장도 있다. 또한 부여 또는 마한과 관련된 세력으로 파악하기도 한다.
백제의 요서영유가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설(說)'로 다루는 것은 현재까지 우리나라에서 인정되는 정사와 너무나도 다르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 그대로 인정할 경우 삼국의 역사를 재편해야 하는 상황도 피할 수 없으므로 현 단계에서 '설'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의 요서영유(설)은 비록 (설)이기는 하지만 우리나라의 정론이라고 볼 수 있는 〈국사편찬위원회〉에서 정식으로 다루었으므로 어느 정도 공인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교육부의 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도 백제가 중국대륙에 진출했다고 적었다.
'백제는 발전 과정에서 요서, 산동 지방에까지 진출하여 대외적 영향력을 과시하였으며,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로는 중국의 남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다.'
〈대륙 백제〉
백제의 '요서 영유(설)'은 한반도 백제 세력에 의해 중국 내의 일정 지역을 확보했다는 것을 의미하지만 근래 이도학 박사는 한반도 세력에 의한 백제가 아니라 또 다른 백제 세력이 중국 내에 존재했다는 파격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이도학 박사는 『자치통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기록을 문제의 핵심으로 제기했다.
『자치통감』 : 처음에 부여는 녹산(鹿山)에 거처했는데. 백제의 침략을 받아 부락이 쇠산(衰散)해져서 서쪽으로 연(燕)나라 근처로 옮겼으나 방비를 하지 않았다.
기원후 346년의 일을 기록한 글이다. 여기서 부여의 발상지인 녹산은 송화강 유역을 가리키는데 한반도 서남안에 백제가 존재했다는 상식에 비추어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고구려보다 더 북쪽에 있는 송화강의 부여국을 어떻게 백제가 공격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백제가 군을 동원하여 고구려 지역을 아무런 견제 없이 무사히 통과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불가능한 일로 볼 수 있다. 결론을 말한다면 백제는 연나라와 국경을 접하고 있어야 하며 중국 본토에 위치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를 정인보 등은 4세기 초에 있어서 백제의 해상발전을 요서 진출의 한 근거로 보았다. 그러나 송화강 유역은 만주 내륙이므로 해상진출과는 어울리지도, 관련되지도 않는다. 그러므로 백제가 아니라 고구려나 물길을 의미하는 오기(誤記)로 본다고 지적해 놓았다.
여하튼 부여는 고구려(또는 물길)의 침략을 받은 후 서쪽으로 연(燕)나라 가까이에서 고립무원의 상태로 있다가 346년 전연(前燕)의 모용황의 1만 7000명의 침략을 받아 국왕 현(玄) 이하 5만여 명의 백성이 포로로 잡히고 말았다. 비록 전연왕이 현에게 '진동장군(鎭東將軍)'의 작위를 주면서 사위를 삼는 등 회유책을 쓰기도 했으나 이후 부여는 전연과 전진에게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이를 두고 당시에 부여가 완전히 멸망한 것으로 보기도 하지만 부여의 영토는 추후 강력한 제국인 고구려에 병합되므로 고구려에 병합되기 전까지 어떤 형태로든 부여가 존재했다고 추정하기도 한다.
다음 기록들도 백제의 위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송서』 : 백제국은 본래 고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1000리에 있었다.
『후한서』 : 가을에 궁(宮)이 드디어 마한(백제)과 예맥의 군사 수천 기(騎)를 이끌고 현도를 포위했다.
위의 기록 역시 우리가 배운 고대사의 상식으로 보면 해석이 되지 않는다. 한반도 남단의 백제가 어떻게 중국 대륙 요동의 동쪽 땅에 있게 되는지, 또 백제군사가 어떻게 만주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예맥의 군사와 함께 움직일 수 있었는지 말이다.
앞에서 인용한 기록들은 모두 중국 만주 땅에 백제라는 또 다른 나라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자료로 볼 수도 있다. 주목할만한 것은 『삼국사기』에도 대륙 백제에 대한 흔적이 희미하게나마 남아 있다는 점이다. 고구려 대무신왕이 비류수 상류를 지나 부여를 공격하기 2년 전인 기원후 19년, '백제 주민 1천여 호가 귀순하여 찾아왔다'라는 글이 있다. 한국전통문화학교의 이도학 박사는 이 기록이 만주지역의 백제 존재에 대한 국내 측의 가장 확실한 증거라고 꼽았다.
그러나 이때만 해도 대륙 백제는 고구려의 속국 정도로 추정한다. 「광개토왕릉비문」에 '백잔(백제), 신라는 예부터 고구려의 속민이었다'는 구절을 두고 일부 학계에서는 과장된 문구라고 해석하기도 했지만, 실제 만주의 백제는 이런 상태에 놓여 있었다고 보면 전후 상황이 쉽게 이해되기 때문이다.
백제의 중국 지역 존재설은 중국 송나라 시대인 13-14세기에 제작된 『중국역사도설』〈우적도(禹迹圖)〉와 이를 기본으로 한 『송본지리지장도』〈우적도(禹迹圖)〉로도 증명된다는 주장도 있다. 이 지도에는 현재의 중국 영토에 관련되는 지명들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는데 특히 〈리민족사연구회〉의 오재성은 『송본지리지장도』는 송나라가 진한(秦漢)의 역사를 계승한다는 의미로 지나(支那, 秦漢 = Chin Han, 이하 중국이라 적음)의 역사를 밝히는 역사부도로 볼 수 있으므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주장했다.
〈우적도(禹迹圖)〉에서 제일 주목되는 것은 삼국시대에 거론되는 지명들이 적혀 있다는 것이다. 고구려 지명인 북평(北平), 태원(太原)은 물론 진번(珍播, 眞番)과 주애(朱崖) 사이에 동이의 유적인 치우천황(蚩尤天皇)의 무덤이 있는 동평(東平)과 조선의 기자무덤이 있는 몽성(蒙城) 등이 나타난다.
특히 백제의 지명으로 사서에 나온 황산(黃山), 평원(平原), 대산(大山), 제성(諸城), 백마(白馬), 동명(東明), 정성(項城), 주류성(周留城), 동성(桐城), 독산(獨山), 덕안(德安) 등은 한반도에서는 존재하지 않지만 현 중국 반도의 동쪽 지역 즉 현재의 중국 요동지역에서 발견된다.
『삼국사기』〈개로왕전(蓋鹵王傳)〉의 대토목공사에 관한 내용도 〈우적도〉에 의하면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① 연와로 성을 쌓고 화려한 궁궐을 지었다.
② 도리하(郁里河)에서 돌을 가져다 아버지의 뼈를 장사지냈다.
③ 하수(河水(한수(漢水), 한강(漢江))를 따라 사성(蛇城)에서 숭산(崇山)의 북쪽까지 제방을 쌓았다.
이들 기록에 나오는 지명은 중국의 황하(黃河)지역에 존재한다. 황하에는 제방이 있으며 숭산이라는 지명도 있고 제방의 서북쪽에 백제 지명인 청하(淸河)가 있고 그 북쪽에 석문(石門), 광양(廣陽)이 있고 동쪽에 성양(城陽)이 있으며 숭산의 북쪽에는 백제가 요서에 설치했다는 진평2군(晉平二郡)이 있다.
〈우적도〉가 한국 학자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것은 한민족과 연관이 많은 요(遼, 현재의 중화민국 지도에서는 좌권(左權)으로 적혀 있음)의 위치 때문이다. 현재는 요하의 동쪽을 요동이라 하고 서쪽을 요서라고 하는데 〈우적도(禹迹圖)〉를 참조하면 요동 요서는 요수(遼水)가 기점이 아니라 요(遼, 좌권)가 기점이 된다(백제의 요서영유(설)의 요서는 이 기록에 의할 경우 요의 동쪽에 있음).
〈우적도(禹迹圖)〉에 의하면 적어도 『삼국지』의 〈위지동이전〉과 『후한서』에 기록되어 있는 삼국들의 위치를 추정할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고구려는 현재 만주지역을 포함한 광대한 아시아 동북부를 차지하고 그 아래 지역인 현재 중국 본토의 동부에 백제가 있었고 그 아래에 신라가 있었던 것이 된다.
특히 『남제서』에는 백제의 동성왕 시대에 산동반도 지방에 7개 군에 태수를 두었으며 임승국은 동성왕의 능이 산동의 청도서북(靑島西北(百支莢王之墓))에 있다고 발표했다. 그는 백제가 중국 지역을 통치한 연한을 통산하면 약 400년에 가깝다고 적었다.
백제의 주민 구성을 보면 한강 하류 지역인 마한 세력권으로 포함하여 지배집단을 이루게 되는 북방 유이민들이 정착하기 이전, 이 지역 선주민 세력은 대개 한족(韓族)계통으로 볼 수 있다.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환제부터 영제 말기(147 189)에 이르면서 한예(韓濊)가 강성해져 낙랑군이나 그 지배 하에 있는 현의 힘으로는 이들을 제어할 수 없게 되자 많은 백성들이 한국(韓國)으로 흘러 들어갔다. 건안 연간(196 219)에 공손강은 둔유현(屯有縣) 이남의 거친 땅을 쪼개 대방군으로 만들고, 공손모(公孫摸) 등을 보내어 유민(流民)들을 결집시켜 군사를 일으켜 한예를 토벌했다. 이 이후로 왜(倭)와 한은 드디어 대방군에 소속되었다.'
이들 한예들이 주로 백제의 피지배층으로 보이며 백제 지배층을 구성했던 세력들은 각각 다른 지역에서 시차를 두고 남하하여 한강유역 각지에 정착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백제 주민 구성에 신라, 고구려, 왜, 중국인들이 섞여 있게 된 것은 4세기 전반 중국의 군현이 축출된 이후 급변하던 삼국간의 정세에서 많은 중국계 인물들이 백제에 흡수되었을 가능성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라의 경우도 중국영유의 여지를 갖고 있다. 안호상은 신라의 국역이 만주의 삼개성(三個城)과 중화(中華)의 구개주(九個州)였다고 적었다. 장보고의 신라방(新羅坊)이 중국에 있었다는 것을 확대하여 신라방이 아니라 신라가 영유하는 지역이 중국에 있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오재성은 신라가 중국 본토에 영토를 갖고 있었다는 주장은 『삼국사기』로도 어렴풋이 유추할 수 있다고 적었다. 307년부터 통치자의 호칭을 '왕'으로 했던 신라와 503년 간((干)에서 신라국왕으로 불렀던 신라가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신구당서』는 은산, 신성, 고대인성의 고구려 동쪽에 있는 신라가 있고 고구려 남쪽과 백제 동쪽에 있는 신라가 있다고 기록했다. 이 설에 의하면 『삼국사기』는 고구려 백제에서 분리된 사로신라(斯盧新羅)와 한반도에서 간(干)에서 신라왕이 된 신라가 있었다는 것이지만 더 이상 상술하지 않는다.
『삼국지』의 〈위지동이전〉과 『후한서』의 기록도 인정하고 송대의 〈우적도(禹迹圖)〉도 인정하면서 현재 중국에 있는 지명도 참고한다면 삼국의 위치가 현재까지 인정되는 역사와 전혀 달라지게 된다. 한반도를 무대로 구성한 고구려 신라 백제 특히 백제의 역사는 한 마디로 엉망이 된다는 뜻이다.
〈비류백제와 온조백제〉
중국에 백제가 있었다는 것을 사실로 인정한다면 4세기 중반에 만주 지역에서 확인되는 백제와 한반도 중부지역에 있던 백제국은 어떠한 관계였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
이에 대해 이도학 박사는 명쾌하게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우선 백제 건국사에는 두 사람의 시조에 관한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시조인 주몽왕의 둘째 아들인 온조가 형인 비류와 함께 남하하여 백제를 건국하였다고 전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백제 시조는 온조의 형인 비류인데 그는 북부여왕 해부루(解扶婁)의 서손인 구태의 아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삼국사기』는 백제 건국세력이 부여계 또는 고구려계라는 서로 다른 전승을 기록하고 있다. 반면 중국 역사서들은 백제 건국자가 부여계 구태의 후손이라고 말한다.
『주서』 : 백제는 부여의 별종이다. 구태라는 사람이 있어 처음 대방(帶方)의 옛 땅에 나라를 세웠다…해마다 4번 그 시조인 구태의 사당에 제사를 지낸다.
『수서』 : 동명(東明)의 후손으로 구태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어질고 신망이 돈독했다….
『한원』 : 구태의 제사를 받드는데 부여의 후예임을 계승하였다….
한국과 중국 측 기록을 종합해보면 백제를 건국한 온조와 비류 형제는 부여계이고 구태라는 인물도 부여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삼국사기』에서도 '(백제의) 세계(世系)는 고구려와 함께 부여에서 나온 까닭에 부여로 씨를 삼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여하간 백제 왕실은 부여계인 온조계와 비류계로 나뉜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는데 이와 같은 배경으로는 ① 백제 개로왕이 북위(北魏)에 보낸 글에 '우리는 고구려와 함께 근원이 부여에서 나왔다.'고 밝히고 있고 ② 백제가 나중에 국호를 「남부여」로 개칭했으며 ③ 백제의 역대 왕들이 부여의 건국시조인 동명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왔다는 점 등이 제시되기 때문이다.
지금도 동명왕 사당인 「동명묘」는 하남 위례성인 몽촌토성의 정동쪽에 위치한 숭산(현재 이름은 검단산, 경기도 하남시 소재)에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도학 박사는 한강 유역에 등장하는 세력이 온조계이며, 만주 쪽 백제는 비류계 세력으로 추정한다. 문제는 다같이 부여의 후예인 비류계와 온조계가 '어떻게 결합했느냐'인데 이 문제는 다음과 같이 추정한다.
'만주지역의 비류계 백제는 강성한 전연의 계속되는 압박과 고구려의 강한 구속 정책에 의해 거점유지가 어려워짐에 따라 한반도로 남하했다. 그 결과 동일한 계통인 양 지배층은 대결을 피한 채 더욱 강화된 국가체를 형성했는데 이 과정에서 백제 건국설화상 형(兄)으로 전해진 비류계 세력이 주도권을 장악해 왕실교체를 이루었다고 볼 수 있다'
만주지역 백제세력의 한강유역 정착은 고고학적으로도 뒷받침된다. 충남대 박순발 교수는 '서울의 석촌동 백제 고분군 지역의 기단식 석실 적석총(이른바 계단식 피라미드형 무덤)은 이 지역의 이전 시기 고분들과는 판이한 만주 지역의 고분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4세기 후반에 느닷없이 나타났다.'고 밝혔다. 말하자면 앞 시기의 묘제형식을 계승, 발전시킨 양식이 아닌 새로운 묘제 양식을 지닌 세력이 돌발적으로 출현했다는 것이다.
박창범 교수의 천문기록 연구에 따른 백제 신라의 위치 비정은 앞에서 설명한 대륙백제(신라도 포함)설을 지지해주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백제의 최적 관측지가 발해만 유역이라는 사실은 백제의 요동영유(설) 등을 감안할 때 이해할 수도 있으나 신라의 경우는 이해하기 힘들다는 견해를 보인다. 물론 신라 최적 일식 위치가 양자강 유역이라는 결과와 관련해, 가야의 허 황후가 양자강 유역의 허씨 집성촌과 관련이 있다는 설과 후대에 신라방이 설치된 곳이 양자강 하구 근처이므로 신라와 양자강 유역을 연결해볼 수 있다는 견해도 제기되었음을 덧붙인다.
기록이 많지 않은 고대사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것은 현재적 한계이다. 여하튼 우리 고대사를 과학으로 풀어 보면 앞으로 그 미스터리가 더욱 많이 규명될 것으로 생각된다.
이종호(mystery123@korea.com · 과학저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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