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Z에서 Philia(백창석군)에게
잘 읽어 보아라.
사람이 궁핍해지면 시인이 되고 소설가가 된다더니 네가 그 모습인가?
아니, 둘 다 그 모습인가? ‘궁핍한 시대의 시인'이 한국에 아직도 남아 있던가?
내게 글을 쓸 때 고뇌에 젖어 드는지? 하여튼 살아 숨 쉬고 있다는 토큰으로 알고 읽으니 너무 의식하지는 마라. 그 곳은 지금 캄캄한 어둠이 도시를 에두르려다 불야성에 밀려 저만치 사람이 적은 곳에 드문드문 서성거리고 있겠지.
요즘도 거리에서 돌아와서 코 풀면 새까만 물감이 생기는 게 꼭 신문지에 코 푼 거 같고 하얀 셔츠깃이 까매지겠지? 여기서는 외출 나갔다 들어오면 마음에 저마다 오롯이 이이쁜 꽃들이 송이송이 담겨 있거나 이이쁜 장난감처럼 지어진 집이며 요트들(그중에 적당히 작고 앙증맞은 것은 관지 소유로 주고 싶네.)이 마음을 선점하여 배경으로 깔려 있는 바다며 초원이며 구릉에 바람처럼 스며들어 있지. 고국땅에서 뒤질세라 열심히 숨을 쉬고 있을 너를 생각하니 내 심장의 반쪽이 안스러움에 갑갑해지며 다른 반쪽은 갑자기 측은지심에 넘치는 자선가가 된 듯하다. 자네를 당장이라도 데려오고 싶다.
어쨌거나 단순하게 생각하면 산다는 게 그냥 살아 숨 쉬는 현상이나, 화평에 젖어 마음 붙여 살 수 있는 곳이 제2의 고향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사람들이 뭐 그리 할 일이 많다고 사지를 버둥거리며 매사에 경쟁하며 사는지,
남자와 여자는 무슨 할 짓이 없어서 엉뚱한 조건의 사랑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사는지,
정치하는 인간들은 왜 얼굴에 개코를 달고 있는지
너는 왜 그러고 있는지
나는 또 왜 이 마지막 천국에 살면서도 그곳 걱정으로 이런 수심에 싸여 있는지
불의 운명을 타고 난 사람들은 왜 그곳에서 궁한지
왜 푸른 하늘은 태양을 사모하는지
아! 멀리서 생떽쥐베리의 야간 비행소리가 들려온다.
그는 지금 이 호젓한 별밤에 어린 왕자와 무슨 이야기를 도란도란 나누고 있을까?
이곳의 집은 바람이 불면 방문이 삐걱거리고 덜컹거리거나 갈데없는 혼령들의 노크소리 비스무레한 퉁퉁거리는 소리가 계속 들려온다. 그리고 바람이 불면 지붕 어디쯤에선가 바람이 좁은 구멍을 스치는 휘파람 같은 소리며 늘 초목을 쓰는 소리와 함께 들린다. 아침에 일어나 비염의 무명커튼을 열어젖히고 바다(South Pacific)와 랭기토토섬(오클랜드항만 앞에 저만치 떠 있는 섬)을 바라보면 가슴이 시원해진다. 새벽마다 열리는 가슴! 자연이 자아와 다정한 하나가 되고 둘도 없는 벗이 되어주는 이유랄까? 아니 이유라는 말은 자연이란 말과 어울리기에는 너무 인공적이다. 그래서 이제 인공의 가리개를 벗어 던지는 의미에서 시 한 수 적어 부친다.
버클랜즈 비치(Bucklands Beach)
어느날
휘피리를 불며 jazz를 들으며
칼날반도인 버클랜즈 비치에 갔었네
바람과 운무가 하늘에 닿아
세상이 뿌옇게 하나가 된 날
늘 황금빛으로 찬란했던
브라운스 아일랜드도 제 빛을 감추고
가만히 떠있었고
생각에 잠겨
인적 없는 그 바닷가를 거닐다가
문득
마음 같은 돌을 만났네.
그 옛날
신비스런 노자(老子)의 머리 위에
떠있었을 듯한
구름의 기운과 형상이 거기에 스미어있는
그 옛날
비파의 탄주소리와
느렷이 세계와 사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노자의 음성과
우리가 늘 꿈꾸었던 이상향과
알 수 없는
그 옛날 서독을 마치고 정원의 꽃밭을 가꾸던
삶을 거의 다 살아온 어느 노인의 머리 우에
떠있었을 구름이
여기 이곳의 바닷가에 돌이 되어
파도와 갈매기 소리를 벗 삼아 가만이 놓여있네
무심(無心)과 거룩 사이에서
무념(無念)
무심(無心)
......
--------------------------------------------
*무심:썰물 / 거룩:갈매기소리 / 무념:밀물 /
버클랜드 반도는 오클랜드 센츄럴 시티에서 동남방으로 15km(?) 정도 떨어져 있는 칼날처럼 바다 쪽으로 길게 나와 있는 반도인데 골프장이 있고 그 끝에 전망대가 있고 그 바로 앞바다에 Browns Island라는 조그만 섬이 있는데 항상 누런 잔디가 있어서 햇살을 받으면 여지없이 황금빛으로 찬란하다. 마치 제주도의 중산간 초지에 있는 봉우리 돋운 기생화산을 그대로 바다에 풍덩한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아마 제주도 삼신 할머니가 효도관광차 오셨다가 벌써 다녀가신 모양이다. 그 할머니는 뭔가 땅덩어리나 뭐 그런 천연물들을 즐겨 던지는 게 습관이니까. 거기 비치에 놀러 갔다가 노자의 머릿구름이 스며 있는 돌을 만났으니 이 아니 반가운가?
그리고 버클랜즈 반도 끝과 브라운스 아일랜드가 한 화폭에 담긴 듯이 , 내가 사는 집의 안방(sea-view room)에서 보아 랭기토토섬과 마주한 이쪽 육지의 맨 오른쪽 끝자락에 아슴히붙어 있는 듯이 멀리 있으니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이만 마친다.
밥 거르지 말고 건강하기를
멀리 남반구 뉴질랜드에서
'엘리엇 킴 작품방 > 편지글(서한집)'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박선후님께 -한글 띄어쓰기에 관하여 (0) | 2007.10.15 |
---|---|
댓글-1 (0) | 2007.07.03 |
뉴질랜드에서 백창석군에게 보내는 역류의 편지 (0) | 2007.07.01 |
달마문학에 남긴 글 (0) | 2007.06.30 |
변경숙님께 부치는 이메일 (0) | 2007.06.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