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킴 작품방/수필집(미셀러니)

수필집 -자아를 찾아서(Self-Finding Journey)

imaginerNZ 2007. 5. 29. 03:46
 

자아를 찾아서(Self-Finding Journey)


번잡한 현대인의 일상 속에 자아의 절해고도를 찾아 떠나는 이상하고 은밀한 여행이 오랜 망설임 끝에 이 순간에 드디어 시작되었다. 그 여정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최초의 여정으로 결국은 어디엔가 솟아 있을 천연의 *홀승골에 마음의 성(城)을 비롯이 올리려는 시도에서 시작된다.

  

-1-

문득 한 밤중에 소스라치듯 잠에서 깨어났다. 모든 빛의 부재, 어둠 안에 둥지에 깃든 새처럼 보이지 않는 시선을 열고 가만이 앉아 있다. 내가 대면하거나 느끼는 것은 지금 아무 것도 없다. 사위는 고요하고 뭇 생명은 어둠의 베일 속에 가리워져 혼곤히 잠들어 있다. 마치 내가 먹이를 찾지 못한 눈불을 켠 한 마리 야생동물이 된 듯한 느낌이 속깊이에서 솟아난다. 뭔가를 짚으려는 듯 의도의 덫이 열리고 채워진다. 담배를 한 대 피워 물고 허공에 보이지 않는 연기의 춤을 토해 낸다. 연기는 숨의 기운이 다하는 곳에서 자유로이 어두운 허공을 유영하리라. 영혼을 몇 번 더 토해 내는 흡연의 바알간 끝이 문질러 꺼지고 다시 어둠으로 돌아간다. 밤새 무상의 바다에 잠긴다. 과거에서 훌쩍 뛰쳐나온 장닭이 여명 속에 몇 번을 울고 있다.


-2-

삶이란 무엇일까 ? 삶은 그 속에 빠져들면 마치 수영을 배우지 못한 아이처럼 허우적거리며 판단력을 상실하게 된다. 그 연못은 허우적거릴수록 소리 없는 늪처럼 더욱 깊어진다. 삶은 어떤 면에서 인간을 영원한 어린아이이게 한다. 삶에 빠져 있으면 일상에 중독된 사람들은 동전의 양면인 생활의 분주함과 원시적, 본능적 자유를 희구하는 상실감을 함께 느끼며 그 둘 사이에 외로운 운명의 그림자를 드리우며 영원할 듯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삶에 빠져 있으면 생활의 복잡다단한 세부들이 다투듯 마음의 시야에 바짝 다가왔다 사라지고 또 다가왔다 사라지곤 한다. 열심히 일상에 몰두하며 얻는 성취감의 고치(cocoon)는 권력과 부와 명예나 혹은 안정된 자족적 생활 등으로 채워지고 진정한 성취의 길은 어두운 안개 속으로 사라지고 망각은 스스로 지워진다. 개체의 겸손한 자족감 속에서 우리에게 남겨진 기대감은 무엇일까? 개체는 개체만을 지향해야 하는 것일까? 우리에게는 아가페적인 사랑이나 인의(仁義)의 길을 따라가야 하는 책무가 원천적으로 주어진 것일까? 아니면 신의 자손으로 세계를 선(善)으로 영위하려는 역사에 동참하는데 주력해야 할까?  아니면 도(道)를 체득하기 위해 오로지 일심의 지향성으로 정진해야 하는가?  아무 것도 응대하지 않는 이 세계에서 사람들은 다양한 경험의 바람을 맞으며 무언가를 바라보거나 따라 가거나 거대한 윤회의 한 고리에 매달려 *장석하고 있다.

개체적 삶의 길은 어디에나 널려 있다. 한국의 어느 시인은 시간과 공간의 교차점에 서서`길은 결국 아무데나 있고 길은 결국 아무데도 없다.`고 읊었다. 일체지향의 천리길은 결국 갑자기 확 트인 누리의 벌판에 다다라 정신의 물리화학적 작용의 토대로부터 벗어나 왕양한 마음의 자유를 깨닫는 것일까 ?

 어쨌든 우리 마음의 달팽이관은 어느 휴지의 순간에 혹은 불현듯 평형회복의 공감각적 신호를 우리에게 모르스부호처럼 단속적으로 발신하고 있다. 수신은 우리 각자의 몫이다.          


-3-

껍질을 벗어버린 달팽이가 거리로 나선다. 거리는 항상 그렇고 그렇다. 공간의 문란함 속에서 시간의 때가 묻어난다. 신호음이 없는 횡단보도가에 무언가를 예비하듯 기도처럼 장님이 한 사람 서 있다. 그는 번민 없는 무시선으로 보통사람보다 몇 배나 되는 마음의 넉넉함과 고즈넉함을 지니고 있는 표정이다. 인파를 타고 사람들의 의미 없는 시선을 스치며 횡단보도를 건넌다. 머리에 눈이 내린 할머니가 허리를 굽힌 채 지팡이를 짚고 힘에 겨운 듯 발자욱을 찍고 있다. 아마 먼 귀에 흐릿한 각막을 지녔으리라. 그 할머니의 말라 오그라드는 신경세포다발이 떠오른다. 어느 집에선가 아가가 엄마 앞에서 첫 걸음마를 떼고 있다. 멀리 교회의 첨탑이 보인다. 오늘 저녁도 노을 속에 어느 산사의 젊은 학승이 범종을 울릴 것이다.


-4-

아무런 약속도 없이 어느 길모퉁이 카페로 들어선다. 몇몇 사람이 저희들끼리 소근대고 있다. 그들의 뜬눈에 생활의 풍경이 카메라의 렌즈처럼 찍혀 있다. 로봇처럼 여급이 다가와 `주문을 뭘로 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 나는 갑자기 말을 잃고 그저 멍하니 그 여자를 바라본다. 동공 앞에서 빛이 회전하고 의식과 무의식이 교차한다. 그 여자가 뭐라고 중얼거리는 듯하다. 그 여자는 돌아서 가다 힐끗 쳐다본다. 그 여자도 나처럼 낯선 경험에 익숙치 못한가 보다. 또 한 번 세상은 나에게 낯설고 나는 그저 멍하게 앉아 있다. 시들은 태양아래 색맹의 시야 너머 창 밖 가로수의 숯빛 나뭇잎은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다. 마음의 바닥이 돌처럼 굳어 있다. 시간과 공간이 앞에서 증발한다.  바탕 없는 순간이 무한정지한다. 


-5- 

늘 그랬듯이 걸음 한 자욱 한 자욱은 삶으로만 향한다. 나는 시간의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 배가 고파서 어느 술집으로 들어간다. 주인아줌마가 다가와 `당신은 어떻게 사세요?`라고 묻지 않는다. 그저 익숙하게 조용히 서있다. 정신의 심지를 켜줄 아이템을 고른다. 유라시아 대륙의 한 구석에 앉아 이제 술을 마신다. 건너 좌석에 앉은 20대 여자가 일행의 잔등 너머 문득 동그란 시선을 던지고 그 두 눈의 동공에 여과 없이 찍힌 나를 멀리서 바라본다.  겹친 우연이 인연을 낳고 현대생활은 우연의 복잡성을 낳고 우연은 기하급수적으로 인연을 낳는다. 마침내 우연은 핵폭발을 감행한다. 또 다른 질서를 잉태하면서 거대한 질서의 한 귀퉁이가 무너져 내린다. 시간은 흐르고 나는 남겨지기보다 떠날 것을 결행한다. 나는 순간순간을 징검다리처럼 밟으며 반발력 없이 삶을 향해 가고 있다. 걷다 돌아서서 그리움을 향해 돌이 되었다 마법이 풀린다.


-6-

오늘은 되도록 사람이 없는 자연 속으로 떠난다. 첫 눈에 띄는 목적지의 창구로 가서 표를 끊는다. 표에는 `천국행`이라고 쓰여 있다. 버스는 출발하고 차창 밖으로 세상이 거꾸로 달려가고 있다. 전에도 천국에 가본 기억이 있다. 기계 위에 앉아 전자력이 횡행하는 문명의 이기, 그 유일한 효능이 실현되고 있음을 감지한다. 나는 흔들리는 신체의 동체역학을 기억의 전의식(前意識)에 서서히 의탁한다. 육지에서 배를 탄 기분에 오랜만에 어머니잠에 품긴다. 육지보다 높은 바다가 보이는 어느 허름하고 때묻은 여사에 들었다. 어두운 밤은 언제나 마지막에 찾아온다. 완결하게 타는 태양보다 완만하게 차고 기우는 달이 좋아라 투명인간처럼 은은하게 쳐다본다. 밤바다 위에 뜬 달에 묻힌다. 아득한 잠결에 광막한 시베리아의 자작나무 숲에서 달을 향해 짖는 늑대의 희미하게 긴, 누대(累代)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내일도 변함없이 첫 햇살이 저어기 장백산맥 너머 광개토의 누리를 비추리라.


-7-

탁자와 침대와 음식을 위해 사각의 지폐를 빤히 바라보다 그 위력을 실감한다.

돈이 되지 않는 글과 글이 되지 않는 돈을 섞으면 돈이 되는 글이 나온다. 기타의 글들이 세상에 넘치고 있다. 돈을 번 작가는 一者를 난삽한 영감의 소산이라 하고 二者를 자본주의 사회에 충실한 체험이라 하고 三者를 읽기 쉬우면서 속 깊은 감동이라고 할 것이다. 四者는 초고속시대에 배가 고파 술집에는 가지 않거나 그런 체험이 없거나 그런 과거를 어느새 쓰라린 추억으로 안고 있을 것이다. 글은 앞서거나 뒤서지 않는다. 백지는 바탕 없는 순간의 한 영역이다. 윤회의 바위를 재주의 정으로 쪼아서 재촉할 수는 없다. 이 말을 부인한다.

한 권의 책이 팔린다면 그 결과로 몇 분의 일의 다른 책과 연명을 위한 한 두 공기의 밥을 얻거나 또는 정신의 심지를 켜줄 술 한두 잔을 걸치게 될 것이다.


석수장이


이름 난 돌챙이가

윤회의 바위를

재주의 정으로 쪼고 있다.

재촉,

재촉,

재촉...


8. 사람에 대하여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그 이목구비가 뭇 짐승들보다 더 기이하다. 털이 아름다움의 표상인 다른 짐승들이 보기에 현세인은 거의 벗겨져 듬성한 털에 민달팽이처럼 징그럽게 매끈한 피부를 덮어쓰고 있다. 그들은 알몸을 드러낸 애벌레처럼 징그럽도록 섬뜩하게 변한 돌연변이이고 게다가 뒷다리로 일어서서 배를 드러내고 비척거리며 걷는다. 그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기묘하다. 어쩌다 사람들은 곰처럼 앞발을 들어올려, 걷게 되었을까? 왜 무언가를 자꾸만 앞발로 집어 들었을까? 사람은 그 두 앞발로 서서히 뇌를 부풀리고 자연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며 잔혹한 정복욕의 역사를 만물의 영장의 자부심이라 바꿔 불렀다. 사람만 돌발적으로 진화하지 않았다면 지구는 한결 더 조용하고 평화스러웠을 것이다. 문명이 배출하는 자연의 추악인 쓰레기나 자연음향의 질서를 깨뜨리는 소란스런 소음이나 각각의 종에 맞게 살아가는데 불필요한 감정의 찌끼 같은 것은 더더우기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거대한 공룡들이 살았던 시대보다도 몇 백 몇 천 몇 만 배 더 난잡하고 더럽고 소란스럽고 때로 무자비하고 때로는 사악한 핏물로 강이 넘친다. 피를 본 사람이 핏빛 노을을 얘기한다.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면 광적이고 도발적으로 즐기거나 아예 눈을 감을 태세가 되어 있다.

  게다가 그들은 서로 외국인이 되어 알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인다. 받침의 끊어 맺듯 하는 소리가 인상적인 한국어를 듣는 순간, 갑자기 내 귀가 기계처럼 느껴지며 `반 + 응`한다. 일단 말을 들으면 무언가 뒤처리가 따라야 한다. 심지어 늙은 선사(禪師)의 화두도 반응이 따라야 한다. 생각하든 받아 말하든 움직이든 해야 한다. (물론 불교선에서 화두의 경우 무언의 미소도 일종의 반응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계속 무슨 말을 듣게 된다. 어떤 말은 쟁반 위에서 구슬놀이 하듯이 쩡, 뚱, 라이, 쯔... 어쩌고저쩌고 하고, 어떤 말은 마음을 감춘 채 때로 칼을 갈다 때로 부드러운 천으로 문지르듯이 쓰네, 데쓰, 스까, 가마, 히루... 어쩌고저쩌고 하고, 어떤 말은 노래 부르듯 아름답고, 유라시아의 서북쪽 말들은 듣기에 춥고 거칠고 딱딱하다. 또 어떤 말은 입에 사탕을 물고 얘기하는 것 같고 어떤 말은 막힘없이 좌르르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며 말을 한다. 그것은 짐승이 호흡을 하면서 먹이를 먹고  나직이 으르렁거리는 것과 같다. 그들은 이따금 포효하는 듯 한바탕 웃기도 한다. 만약 그 옆에 강보에 싸인 갓난 아기가 있다면 깜짝 놀라 두려움에 까무라칠지도 모른다.

  어쩌다 사람 많은 음식점이나 주점에 들어서면 그 순간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에 숨이 멎을 것 같다. 왜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의 목청을 규제하는 법을 만들지 않는 것일까? 그들은 음식에다 여러 가지 발효액을 곁들인다. 그 일시망각의 발효액을 마시며 대대로 공작(工作)해 온 온갖 더미에 둘러싸여 그 복잡성과 시름을 잊고 돌연 원시적인 마음으로 세월의 물살에 가꾸고 다듬어져 변형된 춤과 노래를 하고 웃고 떠든다. 동굴 속이나 화톳불 앞에서 추던 원무와 기원의 합창소리가 그들의 마음속에 메아리 치고 그것이 밖으로 배출되는 순간에 갑자기 긴 세월을 건너뛰고 변질되어 기하급수적으로 분열하면서 무수한 전염성 세균처럼 공간에 퍼지고 사람들은 그 정신의 폭죽을 `흥겨운 분위기`라고 부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 중에 일부는 갈대줄기처럼 속이 빈 종이대롱에 말린 잘게 썬 잎을 태워 그 연기를 마시고 토해 내기를 반복한다. 그것은 때로 찾는 사람을 흥분시키고 때로 마음을 안정시킨다. 그들은 이동하는 원시인처럼 어김없이 불씨를 지필 조그만 나무개비나 부싯돌을 가지고 다닌다.

  그들은 동물처럼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아 키운다. 그들은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주장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다만 살아생전에 육체의 행복과 육체를 떠난다고 생각되는 사후에 혼령이 평안하기를 바랄 뿐이다. 정신의 바탕은 육신이며 그것의 기본적인 필요에 의해 정신이 서서히 형성되어 육신을 통제하고 그 욕구를 수렴하는 제왕이 되었음을 내심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직업적인 정신술사들은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세뇌하고 어떤 획일적이고 불변인 질서를 사람의 모임 중앙에 원시의 화톳불 대신 율법으로 심으려 한다. 더구나 그들 중 일부는 사람의 정신에 생숨을 불어넣어 인간의 형상을 한 모습을 그려냈다. 애초에 신이 만든 생명은 유인원이거나 단세포동물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일까?  바깥 우주공간에서 어쩌다 날아온 타 외계인에게는 신의 형상에 대해 뭐라고 설명해야 하며 그들의 눈에는 사람의 신이 한낱 우상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그들이 숭배하는 대상은 그들과 다른 형상일까?

  애초에 초식동물이었던 사람들은 차차 다른 짐승을 도살하여 그 고기를 먹게 되었다. 곡물과 나물을 길러 뜯어먹고 나무를 키워 열매를 따먹게 되었다. 그들은 문명초기에 결과를 얻기 위해 춘하추동의 기후를 이용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가축들을 대량집단으로 대대로 키워 상식하고, 그 짐승들의 종족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에 의해 분비되는 체액을 섭취하며 그 가죽을 무두질하여 입거나 여기저기 깔거나 덧댄다.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교의 승과 동양의 일부 종교의 수도자와 동서양의 채식주의자들이다.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영양결핍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육식을 하는 사람들보다 장수한다. 식물체 안에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영양소가 함유되어 있다. 인간의 조상이 채식만 했던 시절을 인체 속의 구절양장의 소화기관으로 주무르며 회고해 보라. 일부 사람들은 조개와 새우와 물고기와 달팽이와 도살한 고기와 그 젖을 들이키며 애완동물의 학대와 도살을 비난한다. 그들이 외치는 열량의 일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어떤 동물까지가 사람의 친구이며 그 이외의 어떤 동물들이 사람의 일상적인 음식의 재료인가? 필자가 어렸을 적 보았던, 도살장에 끌려가며 눈물을 흘리는 소는 식품재료가 흘리는 분에 넘치는 눈물일까?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먹이사슬의 위계에 상관없이 생명의 상실, 특히 박탈을 몸부림치며 피하려 한다. 죽임을 당할 때 몸부림치지 않는 생목숨은 없다. 그대가 먹는 맛있게 조리된 고기 한 조각 한 조각마다 애처로운 몸부림의 기억이 서려 있다.

 먹이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생명은 없다. 그 사슬의 범위 내에서 인위적으로 형성된 심대한 불균형도 먹이사슬은 용인한다. 그러나 그 인위적 불균형의 물욕이 이 세상을 지평으로 두르고 있는 대자연의 사슬을 파괴하려는 의도와 동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모든 결과는 받은 것은 반드시 받은 대로 돌려주는 윤회적 자연의 몫이 될 것이다. 도처에서 대자연은 깊은 밤중에 괴괴하니 신음하고 있다. 노르웨이 근처 북해의 해저에 매장되어 있는 거대한 메탄가스의 분출의 꿈, 해양의 이상 징후들, 남극 상공의 오존층의 거대구멍, 기온의 상승, 대자연의 거대구성체들(공기, 물, 흙, 숲)의 온갖 오염의 증세들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나 기타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모든 환경을 떠받치고 그 안에서 활동하는 생명들을 대대로 키우고 가꾸어 주는 대자연의 어머니품이다.    말없이 인내하던 자연의 단 한 번의 한숨, 즉 기후의 일시적인 변화는 모든 생명을 말라 시들거나 얼릴 수 있다. 자연의 토대는 변함이 없이 단 한 번의 일시적인 기후변화만으로도 모든 생물의 사멸이 실현되기에 족하다. 기후는 원상회복력을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다. 자연의 물리적 토대는 기후변화에는 개의치 않아 무상하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의 존속은 인간의 몫이고 대자연은 아주 오랜만에 한 숨을 이따금 내쉴 뿐이다.


9. 낯선 세계

세계의 시야가 트이기 전, 어느 잠결의 어리목에 어렴풋한 영혼이 시간과 공간의 관념을 상실하고 모호한 현실 속에서 목판에 새기듯 무엇인가를 읊조린다.

  육신의 피로에 젖어 시도 때도 없이 쓰러지듯 잠이 들고 어느덧 잠결에 눈을 뜨기 직전, 몽롱하고 아득한 의식 속에서 아득한 느낌에 다가오는 것. 적멸의 어둠 속에 뿌연 구름의 노래-낯선 나, 온통 낯선 기억, (                                등등).  느린 번개의 절규처럼 눈을 뜨면 나는 전혀 낯선 세상과 마주하게 된다. 사용하던 펜, 밖을 바라보던 창문과 가르마를 탄 커튼, 무시로 마시던 녹차의 김을 피우는 연꽃무늬 찻잔, 변함없이 제자리에서 일정한 형체와 거기 깃든 무늬들, 부모형제자매와 처자식들의 맴도는 서정, 동일한 이목구비의 타자들과 그 속 심사들, 체감의 극한과 극열의 사이 일정한 범위에 출몰하는 날씨와 기후들, 논과 밭, 들녘과 숲, 강과 산, 바다와 하늘, 그 사이 어느 변두리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과 도시들, 이 세상의 어느 한 구석에서 바라보며 듣는 해와 달과 별들의 괴괴한 저음의 합창, 공간 속에 구현되는 최저음의 무한미분인 빛의 살과 뼈... 

  늘 과거 속의 꿈의 기억은 현재의 시공 속에 녹아내리고 있고 어느 날 홀연히 그 바탕질마저 녹아 버린다. 녹을 것이 더 이상 없어지고 현재가 꿈인 듯 생시인 듯 파도처럼 연이어 밀려오고 밀려오며 기억의 자취 없이 아득히 영원조로 사라지고 마침내 현재는 증발한다. 남겨진 낯섦, 마음에 익었던 모든 주위의 것들이 제각기 무언가를 향해 기도하듯 외면한다. 모든 감각의 끝이 아연함에 물들고 지향과 작용을 상실한 ‘나`에게 그것들은 그저 각각의 기호로만 남아 있다. ‘일’은 더 이상 일어서지 않는 불구가 된다. 곤충이나 뭇 생명의 음향이나 자연의 소리들은 그저 기호의 무형질로 그 불가분의 일부일 뿐이다. 그 소리들은 아무 것도 의미하거나 표상하지 않는다.

  언젠가 ‘나’는 멸할 것이고 그 때 ‘나’는 현재에 녹아 잊혀진 기호로 사라질 것이다. 영원이나 신이나 영혼이나 진리는 어리숙하고, 유약한 정신은 그것들을 애써 느끼고 말하려 한다. 아이들은 철이 들기 시작하고 인간의 생물사를 익히며 무엇인가를 강변하기 시작한다.

자기중심적인 인간의 교육을 받고 자라면서 세계와 자연은 그들에게 영원히 낯선 타자가 되어 간다. 그 철듦이 어린 눈동자에 아련히 고인 눈물의 막을 거두고 각박한 각막을 드러낸다. 그리움의 작은 샘물은 영원히 메마르고 만다. 그 각박한 각막은 일과 일 사이에 가끔 메마른 우물을 들여다보며 어렴풋이 과거에 일렁이던 물기운을 떠올린다.

  어느 예술의 전당에서 상형과 음향이 낯설음에 흔들리듯 그리움에 넘친다.  


10.괭이

  먹이가 섞인 쓰레기 더미를 뒤지는 집 없는 괭이들은 그 위에 부른 배를 깔고 앉아 졸거나 무엇인가를 빤히 바라보거나 무언가에 겨워 소리 없이 거동한다. 그것들은 잠결에도 솔깃한 귀에 투시안으로 세계의 유일한 출구를 향하듯 마음의 심지를 뻣뻣이 세우고 있다. 괭이들은 이 세계의 낯설음을 생생하게 체험하고 있다. 낯선 먹이를 먹고 낯선 잠을 자며 낯선 것들을 스치고 바라보며 그 몸짓과 동작과 음향과 눈빛으로 세계의 낯설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그 낯선 동체에 애정을 느낀 사람들이 괭이를 키우며 사람의 ‘자아’와 그 괭이 사이에 영원한 평행의 느낌-서로에게 낯설음과 서로의 외로움-을 사랑하고 있다. 그 두 평행의 사이에 있는 공간은 늘 낯설음으로 채워진다. 그들은 동시에 사람의 ‘자아’와 괭이와 낯설음의 지평, 그 삼중주, 그 영원한 삼행선의 평행을 또한 은연중에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자아’와 괭이 사이의 좁은 듯이 함께 낯선 그 공간의 체감을 사랑하며, 때로 더 나아가 괭이의 직감의 선과 낯선 그 무엇 사이의 아득히 넓은 낯선 공간을 사랑하려 한다. 그러나 그 공간은 깊이 침범되지 않는 진공으로 남아 있다. 괭이들이 결코 개화하지 않는 잠결의 몽우리 끝에 정중동으로 부스스 일어나 소리 없이 오가는 거동을 바라본다. 그것들은 낯선 잠결에서 깨어나 무언가를 털어 내듯 일어서서 이곳의 낯설음을 떠나 또 다른 저곳의 아득한 낯설음 속을 기웃거리거나 서서히 들어서서 몇 발자욱을 가다 못내 다시 돌아서 온다. 그것들은 보다 좁은 낯선 공간에서 광막한 낯선 공간의 경계를 망설이듯 어슬렁거리고 있다. 괭이들은 사람에 비해 냉정하리만치 낯설음에 대해 직관적이나 사람의 ‘자아’는 신경의 감응성이 진화하여, 많이 자란 나무에 잔가지가 많듯이 그 끝이 세심하고 과민하여 유약한 방사의 지향성을 내재하고 있다. 그 점에 대해 괭이들은 무관심의 침묵을 지키고 있고 그 주인은 ‘그리움’의 흔들의자에 의탁하여 괭이의 침묵 너머를 아연히 바라보며 괭이의 눈빛을 닮아간다.

 여전히, 모눈매를 한 괭이와 그에 대응하는 사람과 모든 살아 있는 심장들에게 세계와 그 안팎은 아연히 낯설고 이 세계에는 스승이 없다. 

 

11. 단 한 분의 큰 스승이 이 마음 속에, 만인의 가슴 속에 들어 있음을 느끼고는 있었으나 아직까지 미처 깨닫지 못했음에 이제 어렴풋하면서도 서서히 이 하느린 발걸음에도 느끼고 깨닫기 시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