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롱꽃(하얀색)
한글 띄어쓰기는 누구나 쉬이 쓸 수 있는 완성형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 여겨집니다. 모든 사람들이 틀리지 않게 쓸 수 있는 더 통합적인 형태로 어군화별 띄어쓰기가 되어야 합니다. 한글은 아직도 국어학자들의 까다로운 언어이론적인 천착과 고수에 의해 족쇄가 채워져 있습니다. 이론에 의한 현실의 왜곡이라고나 할까요? 현실적으로 거의 대다수의 한국인들이 띄어쓰기의 오류를 범하고 있습니다. 현행 띄어쓰기는 의미와 용법의 적확성에만 치중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상아탑 안의 이론이 대중에게 일방적으로 포고되어 사용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중에게 일종의 과부하 상태를 초래합니다. 복잡한 경우로 분류하여 그 사용을 권고해도 대중은 의미전달에 주력할 뿐이지 정확한 사용에는 관심이 적습니다. 아무리 훌륭하게 체계화된 언어사용규정도 대중의 씀씀이에 의해 좌우되도록 되어 있습니다. 대중이 그 말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 말은 죽고 맙니다. 하물며 대중이 익히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고 까다로운 규정은 자연스런 말의 사용을 저해하고 불편을 낳게 마련입니다. 맞춤법도 그렇습니다. '삭월세'의 경우에 대체말인 '사글세'라는 말은 정체불명에 가깝습니다. '삭월세'라는 낱말은 월세에 해당하는 말이므로 '삭월세'라는 말이 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사글세'라는 말은 일반대중에게는 '삭아서 없어질 세'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장마비'의 경우에 대체말인 '장맛비'라는 말도 역시 그렇습니다. '장맛비'라는 말은 '장맛이 나는 짠 비'라는 말에 가깝습니다. 한국어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발명적 특성을 가진 언어입니다. 따라서 그 발명의 우수성에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인공적인 부작용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한 언어의 생성 및 사용상의 원리를 꼼꼼히 인공적으로 규정한들, 일반대중이 어려워하고 사용을 하지 않으면 그 원리적인 규정은 역사의 흐름에 밀려 사장되고 말 것입니다. 한 언어를 지배하고 존속시키는 이는 그 언어를 일평생 연구하고 천착하여 용법과 용례를 학문적으로 체계화한 언어학자들만이 아니라, 그들이 보기에 단순하고 오류투성이 용법을 구사하고 있는 일반대중들입니다. 언어는 학식도 아니고 규정에 얽매이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한글의 띄어쓰기와 맞춤법은 일반대중이 구사하는 것에 가장 근접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무리 막강한 독재적 집단도 그 나라말을 바꿀 수는 없는 것처럼 한글의 주인은 한국의 일반 대중이기 때문입니다. 그 점은 한국어가 살아 꿈틀거리며 존재하는 한 변함없는사실입니다. 사회의 주인인 대중이 쓰는 말은 대중에게 맡겨져야 합니다. 그 이후의 현상을 연구의 범주 내에서 탐구하고 이론화 하는 것이 학자들의 몫인 것입니다. 한국어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으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그 표기법이 안정화의 길을 걸어온지도 얼마되지 않습니다. 아직도 표기법이 확고히 안정적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맞춤법이 엎치락 뒤치락 해온 것 또한 사실입니다. 전국민에게 본격적으로 통일적 사용이 이루어진 기간이 그리 오래지 않았기 때문일 겁니다. 일제강점기와 40년대, 심지어 50년대에서 60년대에 이르기 까지도 일반대중이나 작가들에게 현실적인 사용면에서 통일된 표기법이 골고루 전파되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이제 겨우 언어사용면에서 안정화의 단계에 이르렀으나 국어학자들이 규정한 표기법과 일반대중이 사용하는 표기법 사이에는 극복이 안되는 간격이 엄존하고 있습니다. 결국, 맞춤법의 경우에는 대중이 어떤 단어를 사용할 때 어원에 대한 감을 느낀다면 어원을 살리는 방향으로, 대중이 어원에 대한 감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단어는 소리나는 대로 적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띄어쓰기의 규정은 대중이 익히기에 너무 까다롭고 번잡합니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 수 있습니다. 대중이 쉽게 맞춰 쓸 수 있도록 어절별로 과감한 통합이 이루어져야 하는 게 역사적인 필연이라 생각합니다. 일례로 한글을 배우는 외국인들은 한글의 받침과 그로 인한 표기와 음가의 차이 때문에 골치를 앓습니다. 심지어 한가위나 설명절 때에 외국인들에게 표기와 음가의 차이가 생기는 단어를 써서 맞추게 하는 퀴즈 프로그램들도 등장합니다. 그 프로그램은 외국인들이 피치 못할 만큼 불편한 사용오류를 행하게 하므로써 한국의 일반대중의 웃음을 자아내려는 의도에서 제작 되었을 겁니다. 그러한 의도는 스스로의 우매함을 외국인들의 사용오류를 통해 희화화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희화화의 대상은 한글을 사용하는 한국인들입니다. 그 책임이 국어학자들에게 가중되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이 가는 사실입니다. 그러니, 언어의 사용권을 대중에게 돌려 줍시다. 대중은 번잡하고 까다로운 것에 호응할 시간적인 여유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들은 생활인들이며 생활에 편리한 말을 사용하고자 하며 그런 말을 위주로 사용합니다. 대중은 이론가가 아니라 실생활에 충실한 사용자들이기 때문입니다. 대중만이 한 민족의 말의 주인입니다. 아울러, 한국사회의 지도층, 즉 여론주도층은 그들의 보기에 능력이 뒤져서 보잘 것 없고 평범하여 소박한 일반국민이 국가의 엄연한 주인이며 지도층 자신들은 국민이 주는 봉록[세금]을 받고 있으며 절대다수 국민의 현상황과 미래지향적 이론을 설정하고 실천을 권고하는 참모이자 공복[국민의 하인]이라는 사실을 지금처럼 잊고 살면 안 됩니다. 유교적인 2분법적인 계층의식이 21세기의 초입인 현재에도 부지불식간에 사회지도층에 만연해 있음은 온 국민이 한 사람처럼 느끼고 깨닫는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국이 아직도 유교적인 인치사회에 속함은 현대적이며 세계적인 사고방식으로 보았을 때 확연합니다. 외국인들이 느끼는 한국사회도 별반 차이 없이 그러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모든 정경사문과 그 개발 및 확정이론은 절대다수인 국민에게 촛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모든 것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기 때문일 겁니다. 물론 국민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끄는사전 설득력도 필수적인 것입니다. 일반국민이 띄어쓰기에 약한 것은 일반국민의 탓은 아닙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도 그런 오류를 일상적으로 범하는 것은 우연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아니라 국어학자들 아니면 국어교육자들에게 많은 책임이 있습니다. 세계화의 시대에 영어의 공용화가 논의 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 한글의 간편하며 올바른 사용은 국어학 종사자들이 벗어 버릴 수 없는 방어용 갑옷과 같은 막중한 책임으로 다가옵니다. -추가예정: 받침을 발음 위주의 원칙으로 표기하는 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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