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킴 작품방/수상록·에쎄이

엘리엇 킴 수상록: 사람에 대하여-수정 중

imaginerNZ 2007. 5. 2. 04:06

8. 사람에 대하여 -엘리엇 M  킴

 

  사람들의 얼굴을 보면 그 이목구비가 뭇 짐승들보다 더 기이하다. 털이 아름다움의 표상인 다른 짐승들이 보기에 현세인은 거의 벗겨져 듬성한 털에 민달팽이처럼 징그럽게 매끈한 피부를 덮어쓰고 있다. 그들은 알몸을 드러낸 애벌레처럼 징그럽도록 섬뜩하게 변한 돌연변이이고 게다가 뒷다리로 일어서서 배를 드러내고 비척거리며 걷는다. 그 모습은 우스꽝스럽고 기묘하다. 어쩌다 사람들은 곰처럼 앞발을 들어올려, 걷게 되었을까? 왜 무언가를 자꾸만 앞발로 집어 들었을까? 사람은 그 두 앞발로 서서히 뇌를 부풀리고 자연을 마음대로 휘젓고 다니며 잔혹한 정복욕의 역사를 만물의 영장의 자부심이라 바꿔 불렀다. 사람만 돌발적으로 진화하지 않았다면 지구는 한결 더 조용하고 평화스러웠을 것이다. 문명이 배출하는 자연의 추악인 쓰레기나 자연음향의 질서를 깨뜨리는 소란스런 소음이나 각각의 종에 맞게 살아가는데 불필요한 감정의 찌끼 같은 것은 더더우기 없었을 것이다. 지금은 거대한 공룡들이 살았던 시대보다도 몇 백 몇 천 몇 만 배 더 난잡하고 더럽고 소란스럽고 때로 무자비하고 때로는 사악한 핏물로 강이 넘친다. 피를 본 사람이 핏빛 노을을 얘기한다. 사람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면 광적이고 도발적으로 즐기거나 아예 눈을 감을 태세가 되어 있다.

 

  게다가 그들은 서로 외국인이 되어 알 수 없는 `말`들을 지껄인다. 받침의 끊어 맺듯 하는 소리가 인상적인 한국어를 듣는 순간, 갑자기 내 귀가 기계처럼 느껴지며 `반 + 응`한다. 일단 말을 들으면 무언가 뒤처리가 따라야 한다. 심지어 늙은 선사(禪師)의 화두도 반응이 따라야 한다. 생각하든 받아 말하든 움직이든 해야 한다.(물론 화두의 경우 무언의 미소도 일종의 반응이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계속 무슨 말을 듣게 된다. 어떤 말[중국어]은 쟁반 위에서 구슬놀이 하듯이 쩡, 뚱, 라이, 쯔... 어쩌고 저쩌고 하고, 어떤 말[일본어]은 마음을 감춘 채 때로 칼을 갈다 때로 부드러운 천으로 문지르듯이 쓰네, 데쓰, 스까, 가마, 히루... 어쩌고 저쩌고 하고, 어떤 말[프랑스]은 노래 부르듯 아름답고, 유라시아의 서북쪽 말들[게르만/노르만어]은 듣기에 춥고 거칠고 딱딱하다. 또 어떤 말[동남아어]은 입에 사탕을 물고 얘기하는 것 같고 어떤 말[스페인/이탈리아어]은 막힘 없이 좌르르 흘러내린다.

 

   사람들은 식당에서 음식을 먹으며 말을 한다. 그것은 짐승이 호흡을 하면서 먹이를 먹고  나직이 으르렁거리는 것과 같다. 그들은 이따금 포효하는 듯 한바탕 웃기도 한다. 만약 그 옆에 강보에 싸인 갓난 아기가 있다면 깜짝 놀라 두려움에 까무라칠지도 모른다. 어쩌다 사람 많은 음식점이나 주점에 들어서면 그 순간 사람들의 시끌벅적한 소리에 숨이 멎을 것 같다. 왜 사람들은 공공장소에서 사람들의 목청을 규제하는 법을 만들지 않는 것일까? 그들은 음식에다 여러 가지 발효액을 곁들인다. 그 일시망각의 발효액을 마시며 대대로 공작(工作)해 온 온갖 더미에 둘러싸여 그 복잡성과 시름을 잊고 돌연 원시적인 마음으로 세월의 물살에 가꾸고 다듬어져 변형된 춤과 노래를 하고 웃고 떠든다. 동굴 속이나 화톳불 앞에서 추던 원무와 기원의 합창소리가 그들의 마음 속에 메아리 치고 그것이 밖으로 배출되는 순간에 갑자기 긴 세월을 건너뛰고 변질되어 기하급수적으로 분열하면서 무수한 전염성 세균처럼 공간에 퍼지고 사람들은 그 정신의 폭죽을 `흥겨운 분위기`라고 부른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들 중에 일부는 갈대줄기처럼 속이 빈 종이대롱에 말린 잘게 썬 잎을 태워 그 연기를 마시고 토해 내기를 반복한다. 그것은 때로 찾는 사람을 흥분시키고 때로 마음을 안정시킨다. 그들은 이동하는 원시인처럼 어김없이 불씨를 지필 조그만 나무개비나 부싯돌을 가지고 다닌다.

 

   그들은 동물처럼 사랑을 나누고 아이를 낳고 키운다. 그들은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는 주장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다만 살아 생전에 육체의 행복과 육체를 떠난다고 생각되는 사후에 혼령이 평안하기를 바랄 뿐이다. 정신의 바탕은 육신이며 그것의 기본적인 필요에 의해 정신이 서서히 형성되어 육신을 통제하고 그 욕구를 수렴하는 제왕이 되었음을 내심 인정하고 싶지 않으나 직업적인 정신술사들은 인정할 것을 요구하고 세뇌하고 어떤 획일적이고 불변인 질서를 사람의 모임 중앙에 원시의 화톳불 대신 율법으로 심으려 한다. 더구나 그들 중 일부는 사람의 정신에 생숨을 불어넣어 인간의 형상을 한 모습을 그려냈다[필자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반감이전혀 없고 성서를 가끔 곰곰이 읽는다]. 애초에 신이 만든 생명은 유인원이거나 단세포동물이라고 하면 안 되는 것일까?  바깥 우주공간에서 어쩌다 날아온 타 외계인에게는 신의 형상에 대해 뭐라고 설명해야 하며 그들의 눈에는 사람의 신이 한낱 우상으로 비치지는 않을까?  그들이 숭배하는 대상은 그들과 다른 형상일까?

 

   애초에 초식동물이었던 사람들은 차차 다른 짐승을 도살하여 그 고기를 먹게 되었다. 나물을 길러 뜯어먹고 나무를 키워 열매를 따먹게 되었다. 그들은 문명초기에 결과를 얻기 위해 춘하추동의 기후를 이용할 줄 알게 된 것이다. 오늘날에는 가축들을 대량집단으로 대대로 키워 상식하고, 그 짐승들의 종족을 보호하기 위한 본능에 의해 분비되는 체액을 섭취하며 그 가죽을 무두질하여 입거나 여기저기 깔거나 덧댄다. 육식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교의 승과 동양의 일부 종교의 수도자와 채식주의자들이다. 채식을 하는 사람들이 영양결핍을 경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육식을 하는 사람들보다 장수한다. 식물체 안에는 인간이 필요로 하는 거의 모든 영양소가 함유되어 있다. 인간의 조상이 채식만 했던 시절을 인체 속의 구절양장의 소화기관으로 주무르며 회고해 보라. 일부 사람들은 조개와 새우와 물고기와 달팽이와 도살한 고기와 그 젖을 들이키며 애완동물의 학대와 도살을 비난한다. 그들이 외치는 열량의 일부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어떤 동물까지가 사람의 친구이며 그 이외의 어떤 동물들이 사람의 일상적인 음식의 재료인가? 어렸을 적 보았던, 도살장에 끌려가며 눈물을 흘리는 소는 식품재료가 흘리는 분에 넘치는 눈물일까?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먹이사슬의 위계에 상관없이 생명의 상실, 특히 박탈을 몸부림치며 피하려 한다. 죽임을 당할 때 몸부림치지 않는 생목숨은 없다. 그대가 먹는 맛있게 조리된 고기 한 조각 한 조각마다 애처로운 몸부림의 기억이 서려 있다.

 

   먹이의 사슬에서 자유로운 생명은 없다. 그 사슬의 범위 내에서 인위적으로 형성된 심대한 불균형도 먹이사슬은 용인한다. 그러나 그 인위적 불균형의 물욕이 이 세상을 지평으로 두르고 있는 대자연의 사슬을 파괴하려는 의도와 동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모든 결과는 받은 것은 반드시 받은 대로 돌려주는 윤회적 자연의 몫이 될 것이다. 도처에서 대자연은 깊은 밤중에 괴괴하니 신음하고 있다. 노르웨이 근처 북해와 세계 각 곳의 해저에 매장되어 있는 거대한 메탄가스 분출의 악몽, 해양의 이상 징후들, 남극 상공에서 커지고 있는 오존층의 거대구멍들, 기온의 상승, 대자연의 거대구성체들(공기,물,흙,숲)의 온갖 오염의 증세들이 점점 뚜렷해지고 있다.

 

   이 세상에서 사람이나 기타 생명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이 모든 환경을 떠받치고 그 안에서 활동하는 생명들을 대대로 키우고 가꾸어 주는 대자연의 어머니품이다.  말없이 인내하던 자연의 단 한 번의 한숨, 즉 기후의 일시적인 변화는 모든 생명을 말라 시들거나 얼릴 수 있다. 자연의 토대는 변함이 없이 단 한 번의 일시적인 기후변화만으로도 모든 생물의 사멸이 실현되기에 족하다. 기후는 원상회복력을 내재적으로 지니고 있다. 자연의 물리적 토대는 기후변화에는 개의치 않아 무상하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의 존속은 인간의 몫이고 대자연은 아주 오랜만에 깊은 한숨을 이따금 내쉴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