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스티나님께,
바쁘실 터인데 과찬의 메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보았을 때
별다른 수도를 하거나 어떤 학문을 깊이 있게 천착한 적이 없는 평범한 사람입니다.
길에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 중에 한 사람일 뿐입니다.
아직 직접 뵙지도 못 했는데, 제가 번민에 찬 중얼거림을 님께 불쑥 보내서
마음의 짐을 지워 드린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미안함과 걱정이 앞섭니다.
'낯설음(섦)'의 감정을 어려서부터 지속적으로 품다 보니 이 나이 들어서도 그런가 봅니다^^.
이야기할 사람이 없다는 상황 속에서는
개체로서의 인간인 한은 독립성과 고립감이 함께 깊어가는 듯합니다.
꽃이 오랫동안 몽울 지고 나서 깨어나며 피어나듯이
인간도 삶이라는 오랜 망설임 끝에 깨달음에 달한다는 느낌을 가졌던 적이 있습니다.
이 점에 대해서 분명하다고 제가 느끼는 바는
어떤 사람이 생후에 문학을 하든 예술을 하든
이 세상에 태어나면서부터
살아생전에 망각하거나 지워버릴 수 없는
무엇인가를 지니고 태어난다는 점입니다.
그것은 전생에 이미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것이 생후에 만들어지지 않는 것임은 분명합니다.
심지어 목숨은 태워버릴 수 있으되 그 무엇(something)은 태워버릴 수 없습니다.
그것-무엇이라는 것-은 어김없는 타고난 천성의 명운입니다.
그가 생래로 아니 생 이전에 주어진 그 길- 남들이 쉬이 가지 않는 길-을 가지 않고
보통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적인 삶을 남들처럼 살게 된다면
적어도 회한에 찬 삶을 마감하거나
제대로 된 폐인이 될 거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그 확률은 극단적으로 높습니다.
그러한 사례를 어린 시절에 아주 가까운 이에게서 보고 느끼고 깨달았습니다.
바로 제 큰 형님이 그리 살다 가셨으니까요.
사실은 저도 뉴질랜드에서 돌아온 이후부터 최근에 이르기까지
점점 더 가속적으로 그런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물론 주위의 정황도 발단이 되거나 영향을 끼쳤을 수도 있지만
그 사람의 마음 다잡기나 계획성과 추진력 그리고 무엇보다도 절제력이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에는
저도 공감합니다.
문제는 예술지향성이 현실과는 거리를 두고 가까이 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일 겁니다.
저는 원래부터 사회적인 공명심에는 '아예'라고 할 수 있을만큼 거의 무관심한 편이었고
더우기 가장 예민한 청소년기에 세상을 너무 일찍 깨달았던 어떤 계기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마음 속으로 공교육을 무시하거나 심지어 멸시했고
왜 어른들은 희망과 자유정신에 가득 차고 넘치는 청소년들에게
판에 박힌 주입식 교육을 시키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교육이라기보다 '판에 박힌 길들이기'의 과정이었습니다.
어떤 면에서 지나치게 틀에 박힌 사회화의 과정은 비인간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양의 공자왈 맹자왈 식 입신양명의 재래식 교육이 잿빛구름으로 이땅 전체를 뒤덮고 있는 느낌에
마음이 암울했던 적도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판검사가 되라, 의사가 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으며 자라나는 동료학생들을 보고
저는 어떤 거대한 모순의 벽을 혼자 곱씹는 또다른 '불량선인'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게 제 학창시절이었죠^^.
그 시절과 대학 입학 직후에 저는
세계문학전집, 서양철학대전집, 동양사상서들, 한국문학전집, 그리고 아동문학전집(계몽사)과
기타 이런 저런 책들을 읽으며 보냈습니다.
이 세상에 책은 셀 수 없을 만큼 많으나
그 시절에 제가 읽었던 책들은 아버지가 소장하고 계셨던 정신의 근간이 되는 서적들이었는데
그 혜택을 집안사람들 모르게 나홀로 은밀히 누렸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가에 꽂혀 있는 책뚜껑의 윗부분에 켜켜히 앉아 있던 먼지밭을 혼자서 손가락으로 조용히 쓸어닦을 때,
저는 정신에 먼동처럼 터오게 될 오래 전 성현들의 가르침에 대한 벅찬 예감 속에
말 할 수 없는 고독과 환희를 동시에 경작하며 사람이 된 소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제 눈망울은 그 때 아마도 뻐꿈히 뜬 황소의 그것이었을 겁니다.
말이 길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에 또 제 심정을 전하고 싶은데 들어 주시는 게 가능하실런지요?
이러다 연재식 스토리가 될 수도 있겠습니다^^!
오늘도 어느덧 하루해가 뉘엿뉘엿 졌군요.
아까 도심의 빌딩들 너머로 지고 있는 해를 하염없이 바라보았습니다.
해가 없으면 콘크리트화된 도시풍경이 황량함 그 자체일 거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오늘 저녁 잠시나마 반나절 동안 그리워했던 가족들과 오늘하루에 관한 체험의 대화 나누시며 행복한 저녁 보내시기 바랍니다.
-Justina님께 from 엘리엇 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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