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조선의 제후국 흉노(곰족.편두.동복.투르크족의 수장)의 역사
흉노족의 국가형태는 연제?호연(呼衍)?수복(須卜)?난(蘭)?구림(丘林) 등의 씨족으로 이루어진 노 부족을 지배층으로 하는 부족 연합체였으며, 선우의 지위는 연제씨족에게 세습되었고, 알씨(閼氏)라고 불린 황후는 원칙적으로 여타의 4씨족에서 나왔다.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부족의 족장은 1년에 세 번, 선우의 본거지에 모여 무속적(巫俗的)인 제천행사를 거행하였고, 동시에 국사를 의론하였다. 유목과 수렵생활로 양?말 등의 가축을 방목하고, 하영지(夏營地)와 동영지(冬營地) 사이를 이동하며 천막식 원형(圓形)가옥에 거주하였다. 또한 P.K.코즐로프 일행이 노인울라(Noinula)에서 발굴한 귀족분묘는 기원 전후의 것인 듯한데 그 곳에서 스키타이-시베리아계의 문물뿐만 아니라, 견직물?칠기?옥기 등의 중국제품, 이란계의 동식물 무늬와 인물상을 수놓은 모직물 등이 출토되어 흉노의 지배층에 대한 중국?서방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 흉노의 기원과 시조에 대해서 한단고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백과사전]김일제(金日?, 기원전 134년-기원전 86년)는 한나라의 흉노족 출신 관료이다. 자(字)는 옹숙(翁叔)으로, 본래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였다. 한 무제(漢武帝)로부터 김씨 성을 받았다.
곽거병(?去病)의 흉노 정벌 때, 한나라에 포로로 끌려와 말 기르는 일을 맡던 중, 무제의 눈에 띄어 마감(馬監)으로 임명되었고, 이어 시중(侍中), 부마도위(附馬都衛), 광록대부(光祿大夫)에 올랐다. 키가 8척 2촌, 용모는 위엄이 있었다. 무제의 두터운 신임이 있었음에도 신중하여 과실이 없었고, 망하라(莽何羅)의 무제 암살 시도를 막아 그 공으로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이어 투후(?侯)에 봉해졌다.
흉노족을 배신한 김일제 세력은 이미 한나라의 충성스런 신하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이에 흉노족과 김일지 세력들은 원한관계일 수 밖에 없었으며, 왕망과 손잡고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개국한 김알지세력은 흉노족을 멸망시키고자 고구려에 원군을 요청하나 고구려는 거부했다.
흉노 편을 든 고구려, 동족을 몰살시키려던 왕망과 김일제 흉노세력
김수로.김알지.김유신 등 신라.가야의 김씨왕족들은 흉노족 감일제의 후예들로 김일제후손과 친척이던 김왕망세력과 손잡고 전한을 무너뜨리고 신나라를 개국하여 동족이던 흉노족을 몰살시키려고 했다.이에 신나라 왕망이 고구려에 원병를 요청하는데, 고구려는 거부한다. 왜 그랬을까? 그것은 단군의 후예로써 피를 나눈 동족이기 때문이였다.
중국 고대문헌에는 청동기문명의 주역은 예맥족이며, 이들이 부여와 고구려의 조상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한웅족과 곰족이 융합한 단군족을 예맥족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고, 부여.고구려의 선조들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혈통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부여와 고구려가 단군조선을 계승한 적통국가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자료]한국사는 북만주 지역에 존속했던 예맥족계(濊貊族系)의 국가로 인정받는 부여(夫餘)에서 동부여가 나오고, 동부여에서 고구려의 지배층이 된 주몽집단(계루부, 桂婁部)이 나왔다고 추정한다. 고구려의 기원과 성립과정에 대한 기록은 문헌마다 약간씩 차이는 있으나, 주몽(동명)의 건국내용(남하 및 정착)에 관해서는 대동 소이하다(‘광개토태왕비’에 추모(鄒牟)로 되어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흉노와 동이에 속하는 예맥(부여)의 국경이 서로 맞닿아 있는 데도 두 나라가 교전한 기록이 단 한군데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흉노는 유목 생활을 하면서 기후나 식량공급에 문제가 생기면 곧장 약탈에 나섰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서로 이웃한 종족간에 충돌이 없었다는 점은 다소 이상할 수밖에 없다.
부여와 흉노처럼 고구려와 흉노의 관계 또한 특별했음을 유추할 수 있는 사건이 있다. 왕망이 중국 전한(前漢) 왕조를 파하고 신(新, 8∼23)을 세운 후 흉노를 정복하겠다며 고구려에 병력을 요청하자 고구려는 이에 응하기는커녕 거꾸로 요하(遼河)를 넘어 신(新)을 공격해 요서태수 전담을 전사시키고 지속적으로 왕망의 영토를 유린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왕망은 흉노의 일족인 휴도왕의 후손으로 중국을 멸망시키고 신(新)을 세웠으므로 흉노도 자신의 세력 밑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흉노는 동·서 흉노로 갈라졌는데, 여기서는 동흉노로 볼 수 있다. 왕망은 동흉노가 그의 지배를 거부하자 흉노의 다른 일파이자 고구려의 별종인 소수맥으로 하여금 동흉노를 공격하도록 명령했는데, 소수맥은 동흉노를 공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망을 공격한 것이다.
한편 신라 김씨의 시조인 김알지가 흉노 휴도왕의 후손이라는 것이 문무왕의 능비문에도 적혀 있다. 여기에는 김알지가 흉노의 후예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내용이 적혀 있는데, 이에 대해서는 ‘고구려와 흉노의 친연성에 관한 연구’(‘백산학보’ 제67호)를 참조하기 바란다.
남만주 및 시라무렌(Siramuren) 유역에서 목축, 수렵 및 조방경작(粗放耕作)을 하던 선비(鮮卑)는 고구려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 민족이다. 선비는 동호가 흉노에게 격파된 후 선비와 오환으로 분리된 다음 북중국을 통일하여 최초의 왕조를 건설한 북방 기마민족이다. 선비가 건립한 왕조는 전연, 후연, 남연, 남량, 북위, 동위, 서위, 북제, 북주 등이며 선비의 문화가 당대까지 존재했던 점 등을 미루어보아 선비가 중국 역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중국에서는 북방 기마민족이 할거하며 중원을 지배하던 시대를 5호16국(五胡十六國)시대라 부른다. 이러한 선비가 고구려와 특별한 유연 관계가 있는 것이다.
역사에서 선비와 고구려의 특별한 관계는 여러 차례 발견된다. 우선 고구려 유리왕 11년(기원전 9년)에 고구려가 선비를 격파하고 속국으로 삼은 일이 있다. 또 후한 광무제가 요동태수 채동으로 하여금 고구려가 부용(附庸)세력화하여 지배하고 있던 선비족 일부를 책동, 고구려로부터 이탈하게 한 일도 있다(48년). 이에 고구려는 모본왕 2년(49년) 후한제국이 대흉노 소극정책에 따라 북쪽방어선을 화북 산서선으로 후퇴시킨 것을 틈타 후한 영역 깊숙한 북평 어양 상곡 태원 등지를 공격하는 등 적극적 공세를 펼쳤다. 이에 당황한 후한은 고구려에게 철수의 대가로 상당한 물질적 급부를 제공하는 동시에, 선비족 일부를 책동하여 고구려로부터 이탈하도록 사주한다.
고구려의 태조 대왕은 더 이상의 선비족 이탈을 막기 위해 동왕 3년(55)에 ‘축요서십성(築遼西十城)’이라는 군사적 대응 조치를 취하였고 동왕 69년(121)에는 선비세력과 합세, 한제국의 요동거점을 공격하여 고구려의 군사행동 폭을 확대시켰다.
선비(鮮卑)는 고구려의 부용세력
부용(附庸)이란 원래 소국(小國) 그 자체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대국(大國)에 복속되어 있는 상황을 나타내기도 한다. 로마제국이 당시 해방 노예가 그들의 옛 주인인 자유민을 보호자(patronus)로 삼는 대신 노역 및 군역에 봉사하는 부용민(clientes) 제도를 제국의 피정복지 통치방식으로 채용했는데, 고구려와 선비의 관계도 이러한 보호-종속관계라는 것이다.
고구려의 지배집단은 전쟁을 주체적인 생존방식으로 인식하고 군사역량을 제고하는 데 주력하여 전사국가(戰士國家)화했다.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주변세력에 대한 군사적 팽창정책을 관철시켜 나가면서 내부적인 통합으로 정치사회적 중앙집권화정책을 견지해갔던 것이다.
고구려는 이런 내외 정비를 통해 후대에 들어서 ‘전제적 군사국가’에서 탈피, 동북아시아 일대에서 독자적 생존권을 확보한 하나의 제국(empire)을 성립한다. 고구려가 선비 등 흉노(흉노가 동서 및 남북으로 나뉘기 전의 흉노를 의미)에서 파생된 유목국들을 자신이 의도하는 작전에 수시로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고구려와 피정복민이 부용 관계였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말갈 선비 거란 지두우(地豆于) 같은 이종족(異種族)에게 그들 본래의 공동체적 질서와 생산양식을 보장해주는 대가로 세금을 받고, 특히 노역과 군역을 확보했다. 이를 공납적 수취관계(貢納的收取關係)에 기반한 속민제도(屬民制度) 또는 이종노예제(異種奴隸制)라고도 한다.
고구려제국은 복속된 기마민족들을 유효 적절하게 구사하였으므로 새롭게 탄생한 한족의 국가 수·당에게 큰 위협이 되었다. 수·당이 고구려와 혈투를 벌인 것은 고구려가 중국의 북방에 산재한 흉노의 후예들과 연합하여 자신들을 공격할 경우 치명상을 입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수·당은 고구려와의 전투를 한-흉노간 전투로 인식했다고 볼 수 있다.
수나라 문제가 30만명을 동원하고도 참패했음에도 그의 아들 양제가 또 다시 고구려 침공에 매달린 것은 고구려가 거란과 말갈족을 지배하고 있는 동북아의 패자이기 때문이었다. 특히 양제가 고구려 침공을 결심하게 된 것은 607년 양제가 돌궐 가한의 막사를 방문했을 때 때마침 고구려 사자와 마주친 후 고구려와 돌궐이 연합하여 수나라를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므로 고구려와 부용세력 간의 연합을 방해하는 것이 양제로서는 급선무였다. 마침 고구려의 남하를 경계한 백제와 신라가 원조를 요청하는 등 침공 명분까지 만들어주자 수나라는 고구려에 대해 총력전을 펼친 것이다.
그러나 수나라는 고구려와 말갈 연합 세력에게 패퇴했고 당 태종의 공격 또한 무위로 돌아갔다. 이후 역사는 당나라가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를 멸망시키나 통일신라와의 항쟁에서 패배해 한반도의 주도권을 신라에 넘겨주었음을 보여준다.
고구려 왕을 흉노의 선우로 인정
중국인들은 ‘북방 소수민족 세력의 궐기’였던 5호16국이 중국을 통치했다는 사실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중국인이 아니라고 여기는 북방 기마민족이 중국을 통치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중국 동북방에 위치한 기마민족 고구려는 흉노가 동북아시아를 지배했을 때는 흉노에 속했으나, 점차 독자적인 제국으로 발전해 흉노가 멸망한 후에는 동북아의 패자로 군림했다. 이 같은 사실은 고구려가 5호16국을 건설한 주도 세력인 선비 등을 부용세력화하여 속국으로 취급하면서 북방 기마민족의 맹주 중에서도 맹주 역할을 했다는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런데 중국의 한 사료가 이러한 정황을 확인해주고 있다.
중국 중원이 오·촉·위 삼각 관계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을 때 ‘삼국지’의 주역인 오나라 황제 손권은 동천왕 7년(234), 당시 요동반도를 장악하면서 오나라와 고구려에 대해 적대적 태도를 보인 공손연을 협공하자며 사굉(謝宏)과 진순(陳恂)을 고구려에 파견한 일이 있다. 이때 손권은 고구려 동천왕을 흉노의 수장을 의미하는 ‘선우(單于)’라 부르면서 의복과 보물을 함께 보냈다. 이화여자대학교 신형식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당시 상황은 다음과 같다.
233년 오(吳)의 손권이 사신 진단, 장위, 두덕 등을 공손연에게 보냈다. 그러나 공손연이 이들을 죽이려 하자 진단과 황강 등이 달아나 고구려의 동천왕에게 가서 자기들은 원래 손권의 밀명을 받아 고구려로 오던 중에 풍랑으로 요동해안에 표류해 공손연의 관헌들에게 문서와 방물을 모두 빼앗기고 간신히 살아서 고구려로 들어왔다고 했다. 동천왕은 이들의 간계를 모르고 그들을 오나라로 돌려보내면서 예물을 보냈다. 이에 오의 손권이 234년 사자 사굉, 중서, 진순을 고구려에 보내 동천왕을 선우에 책봉하고 예물을 보낸 것이다(책봉이란 정식 수교(修交)의 외교적 관례로 주종 상하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는다).
‘삼국지’의 원문은 다음과 같다.
견사자사굉(遣使者謝宏) 중서진순(中書陳恂)
배궁위선우(拜宮爲單于) 가사의복진보(加賜衣服珍寶)
그러나 손권의 정략은 실패했다. 동천왕은 236년 오나라 사신의 목을 베어 위(魏)로 보냈으며 238년 위의 태위 사마선왕이 요동지역의 공손연을 공격할 때 구원병 수천 명을 보내 지원했다. 그러나 동천왕 16년(242), 고구려의 지원으로 요동의 공손연이 멸망했음에도 위가 요동지역 전체를 차지하자 동천왕은 요동 서안평을 공격하여 점령했다. 그러자 246년 위의 관구검이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동천왕은 보병과 기병 2만으로 비류수에서 이들을 맞아 격파한다. 그러나 관구검을 격파한 동천왕이 여세를 몰아 개마무사로 무장된 철기병 5000명으로 관구검을 계속 공략했다가 크게 패하여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는 수모를 겪으며 고구려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된다.
고구려는 변방 소수세력 아니었다
고구려가 아시아의 동북방에서 세계를 주름잡던 기마민족의 후예라는 사실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또 오나라 손권이 동천왕을 선우로 인정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위상과 특성을 설정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흉노가 중국과 끊임없이 혈투를 벌여 흥망성쇠를 겪는 동안 고구려는 중국과 당당히 맞서 싸우거나 친선 사절을 교환하는 등 평화를 유지하면서 제국의 위상을 지켜나갔다.
중국의 천자를 자임하는 손권이 고구려 왕을 선우라 칭하며 협력하자고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고구려의 위상이 흉노의 수장급이란 것을 의미한다. 중국의 손권이 이미 인정하였듯, 고구려는 중국에 종속된 변방 소수세력이 아니었다. 즉 중국이 고구려사를 중국의 변방사로 끼워넣으려는 시도에 원천적인 문제점이 있음을 바로 중국인이 기록한 사료가 제시한 셈이다.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category_id=KL&qid=2eFBk&q=%C8%E4%B3%EB+%B0%F8%BC%D5%BF%AC&srchid=NKS2eFBk
스키타이-스키타이는 아시아의 유목민으로 BC 8∼BC 7세기에 동방에서 서쪽으로 진출, 볼가강가에 출현하여 원주민 킴메르인을 내쫓고, 남러시아 초원에 강대한 스키타이국가를 건설했다. 그리고 BC 4세기에는 돈강 동쪽에서 온 사르마트인의 공격을 받아, 북카프카스의 쿠반지방을 포기하고 본거지를 서쪽으로 옮겼다. 스키타이의 세력권은 크림반도와 드네프르강·돈강 하류지역 등 흑해 북쪽 기슭 일대를 포함하여, 서쪽으로는 다뉴브강 남부, 동쪽으로는 카프카스지방을 넘어 소아시아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BC 3세기 중엽에는 사르마트의 압박을 받아 세력을 잃었다.
훈(흉노) 제국-기원전 760년경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언덕에서 출발하여 거대제국을 건설하고 천여 년에 걸쳐 세계를 지배하며 서구문명의 초석을 마련한 대로마제국, 어느 국가나 어느 기업도 이처럼 강대하면서도 장기간 존속한 조직은 인류역사상 그 전에도 없었고 그 후에도 없었다.
이제 로마제국은 이전의 영토확장 만을 추구하던 공격적인 로마공화국이 아니었다. 사실 수백 년 동안 로마인들이 두려워할 만한 나라는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근동지방의 페르시아 제국과 북쪽에 게르만족이 있었으나 군사적인 위협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른바 태평성대의 시절이고 제국은 영원할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맑은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모이더니 성을 향해 몰려왔다.잠시 후 구름은 비를 뿌리는 대신에 화살을 쏟아냈다. 그 뒤에 흙먼지가 일었고 말발굽소리가 들린 이후에야 보초병들의 고함이 뒤를 따라 왔다. "너희는 도대체 누구냐" "우리는 신의 징벌자로 왔다"
작은 키에 떡 벌어진 체구, 큰 머리통, 노랗고 거무튀튀한 피부 그리고 찢어진 눈, 처음 그들을 본 로마사람들은 그들이 괴물인줄 알았다. 그들은 말을 탄 채 밥을 먹었고 그곳에서 용변을 보았으며 거기에서 잠도 잤다. 희한한 등자위에 서서 활을 쏘았으며 한 사람의 기병이 여러 마리의 말을 몰고 달렸다. 신화 속에서나 등장하는 반인반마半人半馬의 괴물조차도 그들만큼 사람과 말이 한 몸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들이 훈족이었다. 제사용 청동가마솥인 &039;동복&039;을 말에 싣고 다니는 훈족은 검은 머리에 키가 작고 편두풍습을 가진 몽골리언들이였다. 편두풍습과 동복은 김해.경주지역 김알지.김수로세력의 고분에서도 발굴됨으로써 신라.가야 김씨왕족이 흉노족임을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주었다.
훈족의 아틸라
로마인들에 의해 묘사된 훈족의 왕, 아틸라는 검은 머리에 키가 작았으며, 왕관을 쓰지 않을 만큼 권위적이지 않고 부하들과 밥을 같이 먹고 동고동락하는 소박하고 검소한 사람이였다. 서구인들 스스로가 기록한 문서 중에는 아틸라를 무척 수수하고 소박하며 인자한 사람이라는 관찰이 많이 있다. 아틸라를 살해하려는 음모자가 발각되었을 때였다. 아틸라는 그를 용서하는 대신에 금자루를 목에 걸고 동로마제국의 황제를 알현하도록 지시하였다. 살해하는 대가로 동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금을 받기로 했던 것이다.적국의 왕과 내통하여 자신을 시해하려했던 부하를 살려줄 수 있는 사람이 아틸라였다
아틸라는 로마와의 전쟁에서 승리할 만큼 리더쉽과 전략전술이 뛰어 났으며, 아틸라에 참패한 로마는 영토를 훈족에게 이양할 만큼 전쟁에 능했다. 기동성이 뛰어난 기마민족의 훈족과 무거운 갑옷을 두른 로마군대와의 전쟁에서 당연히 기동성과 로마군단의 조직력을 무너뜨리는 훈족의 다양한 전술은 승리의 원천이였다. 즉, 질서유지를 위한 기본적인 조직시스템을 살리되, 리더들의 군림과 권위를 내세우기위한 지나친 통제와 간섭을 지양하고, 각자의 적극적인 기동성과 자율성을 보장하면 승리한다는 이치가 그것이다. 이러한 기마술의 기동성은 이후 몽골족에 의해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유럽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고대 북방 유라시아 한국인들(동이족=맥궁)
1. 스키타이(황금문화) ==> 2.흉노(훈)족 ==> 3.몽골족
▶훈족은 곰을 평화의 토템으로 숭배했었습니다!
유목생활을 하던 북방동이족으로서 훈족은 곰족의 후예임을 알 수 있습니다.
* 훈족은 머리모양을 길쭉하게 만드는 편두풍습을 가지고 있었다.그리스.이집트.인더스.로마 문명의 뿌리가 되는 슈메르 초기 유적지인 아모리 유적지에서 출토된 몽골리언 슈메르인들의 유골형태에서도 증명되었듯이 편두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아메리카 인디언들도 편두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이 편두풍습은 시기적으로 신시 배달국.단군조선.부여의 중심지역이였던 송화강지역에서 시작되었음이 고고학적으로 밝혀졌으며, 중국문헌에서도 조선의 오래된 풍습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편두풍습은 단군조선의 왕족과 귀족들이 두뇌를 좋게 하기위해 태어나자 마자 머리모양을 길게 만들었다. 이러한 두상은 가야인들의 무덤에서 출토된 유골에서도 증명되었다.
신라 김씨왕족의 조상들인 소호금천씨의 뿌리를 찾아서
일제 식민사관과 중국 동북공정론자들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기때문에 정사로 인정하지 않는 한단고기는 우리 민족사와 인류사에 대해 소상히 기록하고 있다. 고고학적으로 증명해 버리면 끝나는 문제다. 한단고기에 신라 김씨왕족의 조상들인 흉노족의 기원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본래 황금문화가 특징인 흉노족은 아시아 초원지역에서 발원한 스키타이족의 후손들이나, 서진하여 그리스까지 공략한 유라시아 초원의 최초 유목민족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 스키타이족의 조상들의 땅인 초원지역인 내몽골 지역에 살고 있는데, 중국 한족들은 "소란스런 오랑캐"로 비하하는 의미로 &039;흉노&039;로 부른 것 같다. 그러니까 흉노라고 부르는 우리 스스로가 중국 한족들의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셈이다. 흉노족 스스로 자신들을 무엇이라 불렀는지가 중요하다. 흉노족 스스로 자신들을 부른 이름을 불러 주어야 흉노족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 스키타이 원족에 해당하는 흉노족이 사는 내몽골 약수에 단군조선의 신하였던 색정이 유배가서 결국 족장이 된 모양이다.그래서 한단고기에서는 색정을 흉노의 시조로 기록하고 있다. 마치 4대 단군 오사구의 동생 오사달이, 훗날 몽골제국의 푸른늑대를 상징하는 몽고리(몽골)의 족장이 된 것 처럼 말이다.
따라서 신라.가야의 김수로.김알지.김유신 등 흉노족 김알제 후손들은 혈통자체가 스키타이족이 아니라, 고대 만주에서 산동지역으로 이동하여 대문구 문명으로 중원문화를 꽃피운 소호금천씨의 후손들인데, 이들 소호금천씨족의 일부가 중국 북부지역으로 이동정착하여 스키타이족들과 피를 섞여 결국 흉노족이 된 것 같다. 김유신 비문을 보면 김유신은 소호금천씨 후손이라고 기록하고 있는 점이 이를 증명하고, 중국 산해경에 [소호금천씨의 나라는 동해밖에 있다]고 했으니 동해밖이면 중국방향기준이니 서해밖으로써 한반도를 의미한다. 한반도를 고대한자사전에는 한반도.한국.동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한반도(중남부 지역) 땅이 군자불사지국.동방예의지국이라고도 기록하고 있다.
고로 소호금천씨는 한반도 사람들인데, 만주를 걸쳐 중국 산동지역으로 건너갔다는 의미가 된다.
결국 따지고 보면 중국 한족이 흉노라고 부른 종족도 유목생활을 하던 우리 북방 동이족이다. 흉노족도 단군조선의 풍습과 동일했다. 내몽골지역이면 단군3조선 중 번한에 속한다 하겠다. 한단고기에도 흉노족이 번한의 제후국이 되겠다고 공물을 바친 기록이 있다.
중요한 역사적 사실은 유목생활을 하고 알타이산의 풍부한 황금을 이용하여 뛰어난 황금문화를 이루었던 스키타이(흉노=훈)족은 유라시아 초원지역을 지배했던 최초의 북방 동이족이며, 그 후손들인 흉노(훈족)또한 중국은 물론이고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단군조선-부여를 계승한 고구려에 대해서는 함부로 하지 못하고 단군조선을 계승한 적통국가임을 인정해 주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오나라 손권이 고구려왕에 보낸 편지에 고구려를 "흉노의 선우"라고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중요한 건 한반도-만주-일본-중국-유라시아 흩어져 있는 단군민족을 한국연방으로 대통합시키는 일이다. 따라서 지역과 민족을 분열시키고 미국의 개가 되어 동족을 대적하는 반민족 친일숭미 반민족 진보개혁세력들은 일거에 반드시 청산해야할 한민족 통합의 걸림돌들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윤복현)
신라 김씨왕족과 선비족 당나라와의 혈통적인 친연성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당나라는 선비족이 세운 나라다. 흉노족인 신라 김씨왕족이 선비족인 당나라와 함께 만주와 한반도의 토착민들로서 동이족의 본류라고 할 수 있는 고구려.백제를 공멸시키고, 경주왕릉에 세워진 중앙아시아의 투르크인들의 석상들이 세워진 친연성을 혈통적으로 알 수 있는 배경에는 신라 김씨왕족이 혈통적으로 고구려.백제인들보다는 흉노족이라고 할 수 있는 선비족에 훨씬 더 친연성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선비족은 사실상 반은 흉노족이였다. 위진 남북조 시대의 선비족의 나라인 북위를 가르킴, 후한서에서는 기원 후 85~91년 사이, 鮮卑는 後漢조정의 부탁을 받고 南흉노, 丁零(정령: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유역에 살던 유목민족 국가)과 함께 北흉노 토벌에 나서 北흉노를 패퇴시켰다. 이때 10여만 落(락:한 가구를 뜻함)의 北흉노인들이 선비족으로 귀속됐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10여만 落이라면 매 落마다 5인 정도로 계산해도 50~60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구다. 이 인구는 당시 선비족의 인구보다 10만정도 많은 인구다. 즉 선비족의 반은 흉노족이었다는 결론이다.
김왕망과 함께 전한을 무너뜨리고 개국한 신나라가 10년후 멸망하자 한나라의 멸족이 두려워 산동을 걸쳐 해양루트를 따라 한반도 남부 김해.경주지역으로 들어온 흉노족 김일제 후손들(가야.신라 왕족)은 만주와 한반도의 토착민들(동이족)로 구성된 고구려.백제인들의 무덤양식(고구려.백제:한반도 남방식 고인돌양식의 적석총/신라 김씨왕족:유라시아 유목민의 적석목곽분)이나 문화자체(신라는 고조선의 옛 부족 중의 하나인 흉노의 갈래이다. 신라 김씨왕족은 초기에는 스키타이 황금문화이고, 같은 혈족인 고구려.백제,일본은 부여계 어족이며 부여계 문화다)가 차이가 난다.
일례로 신라의 금관은 백제의 그것과 약간 다르다. 나갈 출자 문양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흉노의 스키타이 문명의 상징이다. 사슴뿔 문양인 것이다.신라 김씨왕족의 무덤인 황남대총의 유물들이 증명하듯 상이하게 중앙 아시아적인 요소가 강하였으며, 신라 김씨왕족의 경우 중앙 아시아 투르크인들과 활발한 교역을 하였다. 그러한 고고학적 증거자료는 경주 김씨왕족의 무덤들에서 출토된 유물들과 투르크인들의 석상들이 증명한다.
사진자료처럼 투르크인들은 대부분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나, 얼굴의 흰색깔과 모양은 백인들이다, 즉 황인종과 백인종의 혼혈족이다. 이들 투르크족들을 지배한 종족이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던 흉노족이다.
중국과 유럽을 위협한 단군조선의 제후국-흉노사
흉노족의 역사는 매우 장구하여 그 시작은 기원전 9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험윤이란 이름으로 중국을 위협하였다. 이들의 활약은 시경(詩經)에 ‘우리가 집을 잃게 된 이유도, 우리가 잠시도 한가로이 쉴 수 없게 된 원인도 험윤 때문이다’란 글귀가 실릴 정도로 중국인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흉노의 중심부는 현재 중국 내몽골 자치구에 있는 오르혼-셀렝가 강변과 고대 투르크인들이 신성한 지역으로 여기던 외투겐 평원의 카라품 사막과 오르도스 지역 사이였다.
기원전 4세기가 되자, 흉노는 역사에 그 이름이 강렬하게 부각된다. 흉노는 연(燕)을 크게 위협하였고, 특히 진(秦)의 중심부와 인접한 관계로 흉노와 진은 번번이 충돌하였다. 중원의 왕조들은 제각기 장성을 쌓아 흉노의 침공을 막아보려 했으나 그들 간의 내전으로 큰 효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기원전 221년,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549년간에 걸친 춘추-전국시대를 마감하고 역사상 최초로 중국을 통일하자 흉노와 중원간의 관계는 급변하였다. 시황제는 기원전 215년, 장군 몽염에게 30만의 대군을 주어 흉노를 공격했고 이 공세에 밀린 흉노는 오르도스를 버리고 고비 사막 이북으로 일시 후퇴하였다. 흉노를 몰아낸 시황제는 그들의 침공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해 전국 시대 각 나라들이 쌓았던 장성들을 새로이 보수하여 유명한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축조하였다.
그러나 시황제의 사후, 진승과 오광의 난을 필두로 하여 중국 각지는 반란의 소용돌이에 휩싸였고 때문에 흉노 문제에 소홀히 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흉노의 지배자인 두만선우(頭曼單于: 선우의 정식 명칭은 텡그리 쿠투 선우. 하늘의 아들 선우란 뜻)는 후궁의 아들을 총애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장자인 모돈(冒頓: 묵특, 또는 묵돌이라고도 표기함. 몽골식 원명은 바토르)이 반발하였다. 부자간의 권력 다툼에서 두만은 모돈에게 살해되고 모돈은 흉노의 선우가 되었다.
모돈 선우는 국가를 정비하고 내정을 튼튼히 한 다음, 주변 부족들의 정복에 나서 동몽골과 만주 서부에서 강국으로 군림하던 동호(東胡)를 멸망시키고 예니세이 강과 바이칼 호 주변에 거주하던 정령족(丁零族)을 정복하였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다시 서쪽으로 진격하여 천산 산맥과 감숙 지방에 할거하던 월지족(月氏族)을 격파해 멀리 중앙아시아로 쫓아내었다. 남침도 병행하여 시황제에게 상실하였던 하남의 오르도스 지방도 회복하고, 중국 북부의 도시들도 탈취하였다. 이때 흉노의 강병은 30만이 넘었으며 당시 중국은 항우와 유방의 내전으로 인해 흉노에 맞서 싸울 수 없었다.
기원전 201~199년 사이에 벌어진 모돈 선우와 한고조 유방 간의 전쟁은 모돈의 일방적인 승리로 종결되었다. 특히 기원전 200년의 백등산 전투에서 모돈 선우는 흉노 대군과 항복한 한의 군대까지 합쳐 무려 40만 대군으로 한고조의 30만 대군을 7일 간이나 포위하였다.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한군은 8만 명의 사상자가 나왔고, 결국 한고조는 모돈 선우에게 매년 조공으로 곡물과 비단을 바치고 한의 공주를 모돈 선우에게 출가시킨다는 실로 굴욕적인 조건으로 항복하였다.
모돈 선우의 정복 전쟁은 더욱 확장되어 투르키스탄 북부의 월지와 오손을 복속시킴으로써 아시아 초원 지대의 거의 모든 민족이 흉노에 통일되었다. 흉노 제국의 경계는 동으로 한반도 북부, 북으로 바이칼 호와 이르티시 강, 서로는 아랄 해, 남으로는 중국의 위수와 티벳 고원, 그리고 카라코람 산맥을 잇는 거대한 영토를 이루게 되었다.
60년 간 계속된 흉노와 한의 종속 관계는 한무제의 즉위로 막을 내리게 되었다. 기원전 133년, 한무제는 마읍에 10만의 병사를 매복시켜 흉노의 군신 선우를 유인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이어 두 대국은 곧바로 전쟁에 돌입했다.
흉노와 한의 전쟁은 43년간이나 이어졌다. 하남지전(河南之戰), 하서지전(河西之戰), 막남지전(漠南之戰), 막북지전(漠北之戰)이란 명칭까지 붙여지며 곳곳에서 벌어지는 극한 양상의 전쟁은 결국 양자의 파멸로 끝나고 말았다. 경제와 문제가 물려준 한의 국력은 대흉노전을 위해 모두 소모되었으며, 한무제는 군비의 각출에 혈안이 되었다. 이때 소금이나 쇠로 된 쟁기, 밥그릇에까지 세금을 매기려는 극악무도한 재정수탈정책이 등장했다. 이 염철론은 이후 국가전매제도의 효시 및 경전이 되었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악화되자 왠만한 범죄도 돈만 내면 해결될 정도로 한의 사회적 기강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기원전 87년 한무제가 죽을 당시, 한의 인구는 초기의 4천만에서 2천만으로 감소해 있었다. 결국 무리한 대흉노전으로 인해 한은 멸망의 길을 밟게 되었다.
흉노의 사정도 만만치 않았다. 한과의 쉴 세 없는 전쟁으로 수많은 전사자가 발생하고 20만 명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한으로 끌려갔으며 흉노의 돈줄이 되어주던 중앙아시아의 도시 국가들이 한의 지배하에 들어감에 따라 흉노의 경제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뿐만 아니라 흉노의 약점을 본 복속민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흉노에게 반란을 일으킨 복속민들은 바이칼호 주변의 정령족, 시라무렌 강변의 선비(흉노에게 멸망된 동호의 후손), 실크로드 북쪽의 오손 등이었다.
흉노제국에 불어닥친 불운은 멈출 줄을 몰랐다. 오손을 정벌하러 간 원정군은 엄청난 눈보라에 휩싸여 전투도 하기 전에 스스로 자멸하는 낭패를 보았고, 더욱이 기원전 68년에는 최악의 자연재해가 발생하여 백성과 가축 중 6~7할이 사망하는 극한상황까지 발생했다. 주변 속국들의 이탈과 거듭되는 자연 재해는 점차 흉노의 내부갈등을 불러 일으켰다. 이 내부갈등은 기원전 60년 허려권거선우의 죽음을 기점으로 도기, 호게, 차려, 오차, 호한야 등 5명의 선우가 난립하는 내란 상태로 확대되어 끝없는 혼란으로 이어졌다. 기원전 56년에 네 선우가 차례로 패망하고 호한야 선우가 겨우 혼돈을 수습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도기의 사촌 동생인 서쪽의 휴순왕이 자립하여 규진선우가 되고, 호한야의 형인 동쪽의 좌현왕 호도오사가 독립하여 질지 선우라 칭했다. 기원전 54년부터는 질지의 세력이 점차 강성해져 규진을 격파한 뒤, 호한야를 공격하였다. 질지의 공격을 받은 호한야는 복속민들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도망가 한의 선제에게 항복하고 그의 신하가 되었다. 그 대가로 호한야는 중국 북서쪽 오원군의 변경 지대를 통치하였다. 이로써 기원전 55년경 흉노의 세력은 완전히 양분되어 더욱 약화되었고, 중국에 대한 공격력을 완전히 상실하고 말았다.
이때 질지의 돌파구는 서쪽이었다. 우선 호한야를 물리치고 선우 왕정을 차지한 질지는, 기원전 51년 서진을 계속하여 실크로드의 오갈과 신장 위구르 지방의 견곤을 합병하였다. 이어 오손의 침공 위협에 시달리던 추강과 카자흐스탄 남부의 강거를 복속시킨 뒤, 오손을 공략하고 아랄 해에 이르는 광대한 영역을 정복하였다. 기원전 41년, 새로운 흉노 제국의 수도를 추강과 탈라스 강변 사이의 견곤에 건설하고, 성을 쌓아 방어에 임했다. 이로써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인도, 동서 유럽을 잇는 투르키스탄 지역에 투르크계 인종들이 본격적으로 정착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 나아가서 페르가나, 박트리아 지역까지 흉노에 속하였고, 질지는 남서 경계가 멀리 아나톨리아 반도까지 연결되는 파르티아 왕국까지 공략 준비를 하였다.
그러나 질지 선우의 웅대한 꿈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 광대한 정복지에 대한 효과적인 통치 체제가 채 정비되기 전에, 한의 집요한 공격을 받았다. 강거와 오손의 지배권을 탈취한 한은 기원전 36년, 강거에 있던 질지 선우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다. 흉노와 다른 복속 국가에서 차출한 한의 군사 7만은 탈라스 강변의 흉노 도성을 에워싸고 치열한 격전을 벌였다. 결국 도성이 완전히 파괴되고, 질지를 비롯한 흉노 지배층 1518인이 살해되었고, 다른 흉노족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질지 선우의 죽음으로 새로운 거주지를 찾아 분산되었던 흉노족은, 더욱 서진하여 중앙아시아에서 자리를 잡고 소그디아나 동부와 드네프르 강변, 아랄 해 동부 초원 지대에서 국가를 형성하여 주변 유목민들을 병합하고, 서기 1세기에서 2세기 후반까지 동쪽에서 이동해온 북흉노 무리들을 흡수함으로써 강대한 세력을 이루었다.
약 2세기 동안 주변 국가들과 큰 마찰 없이 평화로운 삶을 누리던 흉노족은 자연 기후의 변화와 생태계의 고갈, 그리고 350년 경 북중국에서 쫓겨나 이동해온 동족 우아르 흉노족(에프탈 족)의 압력으로 중앙아시아에서 더 서진해 유럽으로 들어갔다.
유럽에 훈족이 처음 나타난 시기는 서기 374년으로 이때부터 흉노족은 훈족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훈족은 374년, 사령관 발라미르의 인솔하에 남러시아와 카프카스 일대에서 강력한 세력을 떨치던 알란족을 정복하였고, 같은 해 지금의 우크라이나를 차지하고 있던 동고트 왕국을 공격하였다. 당시 동고트 국왕이던 아르마나리크는 자결하였고 훈족은 후리문트를 왕으로 임명하여 동고트를 다스리게 하였다. 이로써 동고트족은 80년 동안 훈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동아시아의 최강대국 한을 위협하던 훈족의 놀라운 기동성과 뛰어난 기마 전술은 서쪽의 유럽 땅에서도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훈족은 드네프르 강에서 서고트 군을 격퇴시켰고, 이에 서고트 왕 아타나리크는 375년에 잔존 세력과 함께 로마 제국에 보호를 구하여 돈 강을 건너 지금의 불가리아 지방으로 이주하였다. 훈족의 계속된 공격과 막강한 군사력은 당시 어떠한 게르만계 민족도 대항할 수 없었고, 이로 인해 무수한 게르만계 민족들은 공포심을 집어먹고 자기들의 영토에서 도망쳐 로마 제국 영내로 이주해 왔으니 이것이 역사상 게르만족의 대이동이라 불린 민족 대이동의 효시가 된 것이다.
이보다 먼저 로마 제국은 사실상 분열되어 있었고, 서고트족의 침입이 이를 더욱 촉진시켜 395년에 로마 제국은 드디어 동서로 나뉘어졌다. 훈족의 등장과 동유럽에서의 급격한 정복 전쟁은 유럽인들에게 극도의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다. 라틴 어나 그리스 어 문헌에 나타나는 훈족에 대한 과장된 묘사와 적개심이 이를 잘 반영해 준다.
진격을 거듭한 훈족은 정복지에서 차출된 고트족, 알란족, 게르만계의 타이팔리족으로 구성된 군대를 앞세우고 378년 봄에 투나 강을 건너 로마군의 저항 없이 트라키아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로마의 영토에 첫발은 내디딘 훈족의 예비 부대는 정찰 전위 부대에 불과하였다. 같은 시기 훈의 또다른 부대는 헝가리 초원 지대에 대한 기습을 감행하고 있었다.
이즈음 훈족의 공격에 위협을 느낀 동유럽의 여러 민족들이 서서히 로마 영내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오스트리아 경작지에 거주하던 마르코만니족과 쿠아드족, 이란계 유목민인 사르마티아족, 트란실바니아의 서고트족들이 각각 다른 경로로 381년 로마 영내로 침입해 들어갔다. 다른 한편에서는 게르만계 종족들과 이란계 바쉬타르나족이 헝가리 서부에서 알프스 산맥을 따라 남하해와 이탈리아를 위협하였다.
훈족이 본격적인 로마 침공을 시작한 것은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사망하고 동서 로마가 분열되는 395년 봄이었다. 두 전선에 걸쳐 공격을 개시한 훈족은 발칸 반도에서 트라키아 쪽으로, 또 다른 주력 부대는 카프카스에서 아나톨리아 고원 쪽으로 동로마를 압박해 들어갔다. 특히 아나톨리아원정은 돈 강 유역에 본부를 둔 훈 제국의 동부 군단이 주력이었으며 바시크와 쿠르시크라는 두 사령관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 원정은 군대의 규모나 주변국의 정세 재편에 미치는 영향으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물론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에게 극도의 긴장과 두려움을 안겨주었다.
훈족의 정예 부대는 에르주룸 지역에서 출발하여 카라수와 유프라테스 계곡을 지나 멜리테네(현재의 말라티아)와 킬리키아(현재의 추쿠로바)까지 진격했다. 그 곳에서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인 에데사(현 우르파)와 안타키아 성채를 한동안 점령한 후 시리아로 남하하여 티로스(현 수르)를 공략하였다. 그리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훈의 군대는 395년 가을 다시 북으로 방향을 선회하여 중앙 아나톨리아에 도착하여 카이세리와 앙카라 평원의 카파도키아와 갈라티아를 유린하고, 그 곳에서 아제르바이잔-바쿠의 길을 따라 북쪽의 본거지로 귀환했다. 398년에도 훈족의 군대가 재차 아나톨리아 원정을 감행했으나 동로마 황제 아르카디우스 1세는 아무런 대항도 하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훈족의 군대가 자국 영토를 유린하는 것을 방관해야만 했다.
급속히 진행된 훈족의 아나톨리아 원정과 그에 따른 파괴와 살상은, 특히 그 지역의 동방 기독교 교회 성직자들에 의해 집필된 훈족에 대한 부정적인 설화와 무용담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한편, 4백년 경 서부 진영에서 훈족의 원정은 사령관 울딘이 지휘하고 있었다. 발라미르의 자손인 울딘은 후일 아틸라의 시대까지 지속되는 훈족의 대외 정책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그의 정책의 기본은 동로마, 즉 비잔틴 제국을 위협하면서 서로마와는 친선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이는 동서 로마 관계를 차단시켜 훈에 위협적인 정치 세력의 등장을 막고, 보다 강력한 동로마를 효과적으로 견제하는 것을 제 1 목표로 삼았기 때문이었다. 또, 서로마를 협공하는 주변 민족들이 훈과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훈은 서로마와 연합하여 그들을 공략하고자 했다.
동유럽에 산재해 있던 다양한 민족들을 압박하던 울딘이 투나 강변에 대군을 이끌고 나타나자 제 2의 민족 이동이 시작되었다. 반달족과 훈족의 공격을 받아 서진한 서고트가 이탈리아 변경으로 몰려들었다. 반달족 출신 로마 장군 스틸리코는 402년 4월, 알라리크가 이끄는 서고트군을 힘겹게 패퇴시킴으로써 로마를 방어했으나, 계속되는 주변 민족들의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었다. 마침내 동고트의 라다가이수스 장군은 훈족에 쫓겨난 반달, 수에비, 쿠아드, 부르군트 등 여러 게르만계 민족들을 연합하여 로마에 대한 공략을 개시하였다. 이탈리아 전역이 유린당하고, 스틸리코 장군마저 파비아 전투에서 패하자 훈족이 개입하였다.
로마군과 울딘이 지휘하는 훈의 군대가 406년 가을 플로렌스 남부의 파에술레 전투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라다가이수스를 처형함으로써 서로마는 위기에서 극적으로 구출되었다. 이로써 훈족의 위세가 온 유럽에 진동하였다. 반달족, 알란족, 수에비족, 사르마티아족들은 훈족의 위협을 피해 라인 강을 넘어 갈리아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훈의 서부 유럽 경영은 이제 정치적, 군사적 장애 요소가 제거된 상태여서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울딘은 훈의 서부 지역을 통치한 왕이었다. 그는 404~405년, 그리고 409년에 투나 강을 건너 강 남부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함으로써, 비잔틴에 대한 훈의 위협을 계속하였다. 또 그리스 문헌에 따르면 울딘은 훈과의 평화 협상을 위해 파견된 트라키아 총독에게 태양이 뜨는 곳에서 태양이 지는 곳까지 모든 영토를 정복할 것임을 선언하면서 훈 제국의 힘을 과시하였다.
410넌 울딘의 사망으로 훈 제국의 통치는 카라톤에 위임되었다. 그는 412년에서 422년까지 약 10년 간 훈의 동부 지역 경영에 적극적이었다. 422년은 훈 제국의 역사에서 새로운 시대의 시작과 같은 해였다. 이 해에 훈 왕가의 네 형제인 루가, 문주크, 아이바르스, 옥타르가 서로 권력을 두고 쟁패하여 루가가 왕권을 획득하였다. 그리고 문주크가 사망함으로써 다른 두 형제는 각각 지역의 엘리그(Elig, 번왕)에 봉해졌다.
울딘의 정책을 계승한 루가는, 422년 비잔틴이 훈의 내분과 복속 민족의 반란을 획책하며 발칸 원정을 시도하자, 비잔틴군을 패퇴시켜 연간 금 350 리브레(1Libre= 약 450g)의 공납을 부과했다. 423년에는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408~450)가 네 살의 나이로 등극한 서로마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에 대항해 로마 침공을 개시했다. 동로마의 육해군이 이탈리아로 진격해 오자 서로마는 훈족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루가는 6만의 기병을 이끌고 직접 이탈리아 전선에 참가하였다. 이 때, 로마 원로원은 어린 황제를 폐하고 요하네스를 새 황제로 추대했다.
당시 35세이던 서로마의 장군 아에티우스는 서로마에서의 전쟁을 피해 재빨리 루가의 진영에 가담했다. 훈의 침공에 비잔틴 군대는 승산 없는 전쟁을 회피하고 퇴각함으로써, 로마의 폐허 대신 과중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다. 아에티우스는 432년에도 아프리카의 반달 왕 게이세릭과 전쟁을 벌인 그의 정적 보니파시우스의 공격을 피해 훈 제국에 망명하기도 했다. 이 같은 사실은 루가의 강력한 통치력과 함께 훈 제국이 로마의 내정과 대외 정책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었음을 반증해 주고 있다.
434년 봄, 루가는 사망하였고 아틸라와 블레다가 통치권을 계승하였다. 훈 제국의 왕으로 등극할 당시 40세였던 아틸라는, 부친인 문주크가 일찍 사망함으로써 숙부인 루가에게 양육되었다. 그와 함께 수많은 정복 전쟁에 참가하면서 주변의 여러 종족과 국가에 대한 정황을 파악할 기회를 가졌으며, 통치자로서의 덕목과 국가 경영에 관한 경륜을 쌓을 수 있었다.
결국 아틸라는 그의 형 블레다와 함께 훈 제국의 통치권을 계승했다. 블레다는 낭만적이고 예술을 즐겼고, 군의 작전과 대외 관계 수립 등 통치권은 아틸라에 의해 행사되었다. 숙부인 아이바르스와 옥타르는 각각 동부 지역과 서부 지역의 번왕으로써 전왕 루가 시대의 지위를 계속 누렸다. 블레다는 아틸라의 협조자로서 11년 간 제국의 경영에 참가하다 445년경에 사망하였는데, 세간에는 아틸라의 암살이라는 설이 떠돌았다.
434년 봄,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파견된 비잔틴 사절단이 훈 국경에 도착했을 때, 왕인 루가는 사망했으므로 아틸라가 그들을 맞았다. 아틸라는 비잔틴 영토의 마르구스 성채 맞은편에 있는 투나 북안의 콘스탄티아 성벽에서 비잔틴 사절을 말 위에서 사절단을 맞으며, 평화를 위한 훈의 요구 조건을 단호하게 전달하였다. 첫째, 비잔틴은 훈의 복속민들과의 접촉과 연대를 일체 중단할 것. 둘째, 훈에서 비잔틴으로 도망간 자들을 즉각 돌려보낼 것. 셋째, 양국의 무역 거래는 지정된 국경 마을에서만 행할 것. 넷째, 비잔틴의 훈에 대한 연간 공납액을 2배로 올려 금 700리브레 (약 315kg)으로 할 것 등이다. 이것은 콘스탄티아 평화 조약이라 불리웠다.
테오도시우스 2세는 조건 없이 평화 협정을 수락했으며, 협정 이행의 첫 단계로 도망자들을 훈에 인계하였다. 아틸라는 그들을 비잔틴 영내에 있는 트라키아의 카르수스에서 처형함으로써, 비잔틴을 비롯한 주변 국가들에게 그의 권위와 위세를 각인시켰다.
그 후 아틸라는 제국 동부 지역을 원정하여, 435년 볼가 강변의 샤라구르 족의 반란을 분쇄하였다. 이즈음 동부 지역 중심지는 드네프르 강에, 서부 지역 중심지는 투나 지역에 있었다.
훈 제국에 편입된 영토는 발칸 반도와 카프카스에서 발트 해안까지, 우랄 산맥에서 알프스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포괄하였으며, 예속된 종족의 수는 45개에 이르렀다. 복속민들은 단지 정치적 통합체로서 훈의 일원이었을 뿐 고유의 언어와 풍속을 유지하였으며, 종족이나 민족, 국가 단위로 동족의 부족장이나 총독, 왕의 통치를 받았다. 5세기 중엽까지 훈 제국 내에서는 비교적 정치적 안정이 지속되었다.
이 때, 서로마는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말미암아 수많은 민족이 서로마 영내를 지나가며 유린과 약탈을 일삼았고, 도탄에 빠진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켜 나라가 곤경에 처했다. 이에 로마는 재차 아에티우스를 파견해 훈에 원병을 요청했다. 2년간에 걸친 농민 반란은 아에티우스와 아틸라가 보낸 원병의 도움으로 겨우 반란 주모자를 처형하고 소란을 평정하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부르군트족의 군디카르 왕이 벨기에 지역을 침공하여 훈의 서부 지역을 위협하였다. 훈의 서부 지역 왕인 옥타르의 지휘 아래 네케르 강변에서 벌어진 훈과 부르군트족간의 대전투에서 군디카르 왕을 포함하여 2만 명의 부르군트 병사가 전멸함으로써 훈의 군대가 승리하였다. 이 전쟁은 중세 독일의 유명한 서사시 ‘니벨룽겐의 노래’의 주제가 되었다. 게르만족의 주력이 훈에 의해 패퇴된 전투 결과, 부르군트, 바야부르, 프랑크, 롱고바르드족 같은 많은 민족들이 새롭게 훈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었다.
440년 이후 아틸라의 비잔틴 공격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는 테오도시우스 2세가 콘스탄티아 협정을 철저히 준수하지 않고 훈으로부터의 도망자 송환을 거부한 것에 연유하였다. 테오도시우스는 훈의 포로 중 고트족 출신 아르네기실후스를 송환하지 않고 오히려 장군으로 임명해 훈 접경의 트라키아에 파견함으로써 훈을 자극하였다. 또, 국경 시장에서의 거래 원칙도 그리스 상인들에 의해 종종 위반되었다. 특히 마르고스 주교가 콘스탄티아 근교의 있는 훈의 무덤을 도굴하는 사건이 발생해 비잔틴에 대한 훈족의 악감정은 극에 달했다.
이 때, 북아프리카의 반달족 왕 게이세릭은 지중해 진출을 방해하는 비잔틴에 대항해 아틸라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아틸라가 지휘하는 훈 군대는 마르고스의 점령을 시작으로 1차 발칸 원정에 나서 지금의 베오그라드인 싱기두눔과 나이수스를 점령했으며 트라키아에서 서로마의 중재로 진격을 멈추고 비잔틴과 다시 협정을 맺었다.
서로마의 실권자 아에티우스는 테오도시우스의 평화 협정 준수를 확실히 약속하고, 그에 대한 보장으로 자신의 아들 카르필리오를 인질로 훈 궁정에 보냈다. 아에티우스의 제안을 수락한 아틸라는 투나 강변에 산재한 비잔틴 성채들을 접수하고, 훈에 대한 공격 거점이 될 수 있는 발칸 반도의 요새들을 완전히 파괴해 버렸다.
445년, 형 블레다의 사망으로 아틸라는 명실공히 권력의 정상에 오르게 되었다. 서아시아에서 중부 유럽에 이르는 지역을 군사적으로 완전히 장악함으로써 동서 로마를 비롯해 그에 대항할 세력은 없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이 훈과의 협정을 또다시 어기자 아틸라는 447년, 제 2차 발칸 원정을 시도했다. 아틸라가 이끄는 훈의 대군은 두 방향에서 비잔틴 영내를 공격해 사르디카, 필리포폴리스, 마르키아노폴리스, 아르카디오폴리스 등을 함락시키고 각 도시들을 약탈했다. 훈군은 계속해서 테살리아의 테르모필레까지 진군하여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하기 위해 아티라(현 이스탄불 외곽 부육 체크메제)에 포진하였다.
사태가 긴박하게 돌아가자, 테오도시우스는 정무관 아나톨리우스를 아틸라에게 보내 휴전협상을 제의하였다. ‘아나톨리우스 협정’으로 알려진 이 휴전 조건은 투나 남쪽 5일 거리 공간에 비잔틴 군대를 주둔시키지 말 것이며, 양국 무역 시장은 훈의 변경 도시인 나이수스에 설치할 것, 비잔틴은 전쟁 배상금으로 훈에게 금 6천 리브레(약 2천 7백kg)를 지불하고, 그동안 바쳐오던 연공을 세 배로 늘려 금 2천 1백 리브레(약 945kg)으로 할 것 등을 명시하고 있다.
비잔틴의 재정 상태로는 이렇게 막대한 전쟁 배상금과 연공을 지불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테오도시우스는 아틸라 암살 음모를 획책하였으나 정보가 누설되어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이 때 아틸라의 관심은 동로마(비잔틴)보다는 내분에 휩싸여 약화되고 있는 서로마에 더 쏠려 있었다. 서로마에 대한 아틸라의 군사적 원조는 439년을 마지막으로 중단되었다. 서로마는 훈에 대한 공납을 충실히 이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사령관 아에티우스를 중심으로 훈과의 결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에 아틸라는 신중하게 접근하면서 군사력 증강에 매진했다. 448년, 2년간 계속된 군비 증강과 정치적 안정이 일단락 되자, 드디어 서로마에 대한 외교적 공세를 취했다. 우선 아틸라는 발렌티아누스 3세(425~455)황제의 여동생이자 한때 자신과의 혼인이 결정되어 약혼 반지를 보낸 바 있는 호노리아를 아내로 받아들이겠다고 통보했다. 그리고 결혼 선물의 지참금으로 갈리아(지금의 프랑스) 지방을 달라고 요구했다.
발렌티아누스와 아에티우스가 아틸라의 요구를 거절하자 아틸라는 이를 서로마 침공의 명분으로 삼았다. 451년 초, 헝가리 중앙에서 서쪽으로 원정을 개시한 훈군은 8~10만의 규모였다. 훈군과 동일한 규모의 게르만과 슬라브 복속민 군대가 합류하여 그 규모가 20여 만으로 불어났다. 20여 만의 훈 연합군이 451년 3월 중순경 세 방향에서 라인 강을 건너 갈리아 지방에 진입할 무렵, 이탈리아에서도 아에티우스가 지휘하는 로마군이 훈에 적대적인 부르군트와 서고트, 프랑크족을 규합하여 훈과 동일한 규모의 대군을 형성하여 갈리아를 지나 북상하였다.
마침내 훈군이 4월 7일 메티스와 두로코토룸을 정복하고 파리 근교의 아우엘리아눔(현 오를레앙)에서 그 곳에 진주하던 아에티우스와 맞부딪쳤다. 그러나 서로마와 훈, 서방 세계의 2대 강국의 결전은 451년 6월 20일 카탈라우눔에서 벌어졌다. 하루 종일 계속된 치열한 접전 끝에, 쌍방 모두 16만 5천명이란 전사자를 남기고 승자도 패자도 없이 끝났다.
유럽의 역사가들은 19세기 이래 로마군이 궤멸되지 않고 훈이 퇴각한 이 전투를 로마의 승리로 묘사해 왔다. 그러나 또 다른 연구 결과, 전쟁 당일 밤 로마군의 지휘 계통이 붕괴되어 아에티우스 자신이 훈 진영에 포위, 고립되었다가 겨우 탈출한 사실이 밝혀졌고, 로마군에 소속되어있던 프랑크군과 테오도리크 왕이 전사한 서고트군도 극심한 피해를 입고 퇴각하였다. 결과적으로 훈의 서로마 침공은 로마 제국의 병참 기지 역할을 했던 갈리아를 폐허로 만들어 서로마의 후방 보급로를 차단해 버렸다. 이 전쟁 후 명장 아에티우스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도 전쟁의 승패와 관련하여 매우 시사적이다.
아틸라의 훈군은 갈리아를 떠난 지 20여 일만에 수도인 판노니아의 세게드로 귀환했다. 그리고 1년 후에 또다시 대규모의 이탈리아 원정을 감행하였다. 교황 레오 1세의 시종관이었던 프로스페르티로의 기록에 의하면, 무저항의 진격을 계속한 아틸라의 공세에 방어력을 상실한 아에티우스는 황제 발렌티아누스에게 이탈리아를 떠나 피신할 것을 권고하였다고 한다.
452년 봄, 아틸라는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오늘날의 베네치아 평원에 도착했다. 아퀼레이아 성을 함락시키고 또 다시 남쪽으로 진군하여 아에밀리아 지역을 정복하고 당시 서로마 제국의 수도였던 라벤나 근교에 이르렀다. 공포에 질린 민중의 소요와 적의 공격에 다급해진 서로마 황실은 교황과 원로원의 화평 건의를 받아들여 긴급히 사절단을 파견했다.
교황 레오 1세로 이루어진 사절단은 452년 7월 중순경 민시오강과 포강이 만나는 강변에 진주해 있던 아틸라를 방문해 협상을 했다. 교황은 서로마 황제와 기독교 세계를 대표하여 로마의 파괴를 자제해 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아틸라는 5년 전 콘스탄티노플 근교까지 진격하여 비잔틴 수도 점령을 눈앞에 두고도 철수했던 전례를 상기시키면서, 문화 보호 차원에서 로마를 초토화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아틸라는 로마 교황의 방문을 이미 서로마가 비잔틴 제국처럼 자신의 통치하에 놓이게 된 것으로 여겼던 것이다. 이는 프리스쿠스가 448년 훈의 수도를 방문한 서로마 사신 로물루스의 전언을 기록한 대목에서 명백히 드러나는데, 아틸라는 다음의 공격 대상이 사산조 페르시아 제국임을 밝힘으로써 동서 로마가 이미 자신의 통치하에 있음을 암시하였다. 그러나 그의 세계 제국은 꿈은 실현되지 않았다.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온 아틸라는 게르만 제후의 딸인 에리카(일디코, 힐디코)와 결혼식을 치루던 날 밤 갑작스럽게 사망하고 말았다.
아틸라의 명성과 그에 대한 두려움은 전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이탈리아, 갈리아, 게르만, 영국, 스칸디나비아에서 그를 소재로 한 수많은 소설과 전설, 그림, 연극, 오페라, 조각 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20세기 후반 새로운 아틸라 연구는 그가 중세의 폐쇄된 기독교 사회에 의해 철저한 야만인, 약탈자로 폄하되고 있는 것에 반하여 훌륭한 덕목과 통치력, 뛰어난 국제 감각과 탁월한 지휘관의 재능을 가졌던 당대의 위대한 정치 지도자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아틸라의 사후 훈 제국은 왕위 계승을 둘러싼 내분으로 인해 급격히 약화되었다. 아틸라의 아들인 엘락 왕자는 반란을 일으킨 게르만 연합군과 판노니아에서 벌인 전투에서 전사했으며 뎅기지크는 비잔틴 제국과의 싸움에서 목숨을 잃었다. 이르네크는 훈족이 유럽에 정착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고 전쟁에 지친 훈족을 이끌고 흑해 서안으로 이주해갔다.
이르네크의 영도하에 훈족은 당시 남러시아 평원에서 모습을 보이다가, 발칸 반도와 중부 유럽에 정착하여 국가를 건설한 불가르족과 마자르족(헝가리)족과 합류하여 그들에게 많은 정치, 군사, 문화적인 영향을 주었다. 이 때문에 마자르인들을 인솔하여 헝가리 땅에 정착해 왕국을 세운 족장 아라파드는 자신을 아틸라의 후손이라 주장했으며 현재도 헝가리 인들은 아틸라를 위대한 군주로 평가하고 있다.
참조문헌:
터키사 <대한교과서 주식회사>
유라시아 대륙에 피어난 야망의 바람 <민속원>
훈족의 왕 아틸라 <가람기획>
사진자료처럼 투르크인들은 대부분 검은 머리를 가지고 있으나, 얼굴은 백인들처럼 희다, 즉 황인종과 백인종의 혼혈족이다. 이들 투르크족들을 지배한 종족이 단군조선의 제후국이였던 흉노족이다.
[자료]단군조선의 제후국 흉노에 종속된 투르크족
투르크인들은 현재 중앙아시아, 시베리아, 서아시아, 유럽 일부에 살며 터키어를 주요 언어로 하는 민족이다. 기원은 아직 확실하지 않지만 초원지대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민족으로 생각된다.
기원전 3세기경 중국의 사서에는, 바이칼호 남쪽에 있으며 흉노에 종속된 집단으로서 ‘정령’으로 기술되어있다. 그후 ‘철륵’, ‘칙륵’ 등의 한자음을 단 집단의 존재가 나타난다. 6세기 경에는 돌궐족이 알타이산맥을 중심으로 북아시아,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대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내분으로 인해 동서로 분열된 후 몽고고원의 셀렌가강 부근에서 터키계 위구르족이 대두하면서 멸망의 길을 걷는다.
9세기에는 위구르족도 북방에서 남하한 키르기스족에 의해 붕괴되고 중앙아시아로 이동하여 오아시스지대에서 정주생활을 한다. 위구르의 서방 이동에 따라 그 때까지도 서서히 진행되어오던 중앙아시아의 투르크화가 결정적인 것으로 되었으며, 그 결과 중앙아시아는 투르키스탄(투르크인의 땅이라는 뜻)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와 거의 동시에 중앙아시아에는 상인에 의해 이슬람교가 전해져 많은 터키인들이 받아들이게 되었고 투르키스탄의 이슬람화도 진행되었다. 오늘날 중국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가 된 동투르키스탄의 주요 주민들은 후후 카라 키타이, 몽골의 지배를 거친 위구르인이다.
중앙아시아의 벨라사군을 중심으로한 지역에는 투르크족 최초의 이슬람 왕조인 카라한왕조(840~1212)가 성립했다. 이로써 중앙아시아의 터키화와 이슬람화는 더욱 결정적인 것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0세기 말부터 11세기까지 투르크인이 대규모로 중앙아시아의 초원에서부터 서쪽으로 이동한 것은 이슬람세계의 역사뿐 아니라 세계사의 흐름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중앙아시아는 ‘투르크인의 땅’이라는 뜻으로 투르키스탄이라고 불리고 있었는데 투르크인은 그 활동의 장을 더더욱 서쪽으로 넓혀나갔다.
서방에 이주한 투르크인 가운데 가장 강력했던 것은 셀주크라는 수장에 의해 인솔되었던 일족이었다. 1055년 셀주크의 손자 투그릴이 대군을 이끌고 바그다드에 쳐들어와 압바스 왕조의 칼리프를 지배했다. 그는 오랜 역사를 가진 땅과 주민을 지배하기 위해서 칼리프의 권위를 빌어 칼리프로부터 ‘술탄’이라는 칭호를 받아 이슬람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 술탄이란 ‘권위를 지닌 자’라는 뜻으로 이후 투르크의 군주는 이 칭호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이란, 이라크를 중심으로 하는 서아시아일대에 셀주크투르크제국이 성립되었다. 압바스왕조 칼리프는 술탄의 보호 아래 바그다드와 그 주변의 얼마 안되는 지역만을 지배하게 되었다.
아나톨리아에는 1071년 만지케르트전투에서 비잔틴군이 패배한 결과 중앙아시아로부터 많은 투르크계민족이 이주를 개시했다. 또 비잔틴군의 용병으로 참가한, 북쪽에서 흑해를 돌아온 것으로 추측되는 투르크인도 정주생활에 들어감으로써 피폐했던 아나톨리아는 급속히 투르크화되었다.
몽고의 서방원정으로 셀주크왕조가 쇠퇴하자 투르크인들의 지방세력은 자립하여 각지에 군주국을 세웠다. 그 가운데 가장 서쪽에 위치하여 비잔틴제국과 국경을 접하고 있던 오스만왕조가 기독교국가인 비잔틴제국으로의 영토확장 가능성을 이용하여 발칸반도로 영토를 확대하는데 성공했다. 이 힘을 배경으로 아나톨리아의 투르크 군주국을 병합한 오스만투르크는 한때 티무르에게 패배하여 단절되기도 했지만 다시 부흥하였고,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비잔틴제국을 멸망시켰다.(1453) 이어 오스만투르크는 마물루크왕조를 멸망시키고 시리아와 이집트를 정복했으며, 칼리프의 지위까지 손에 넣고(술탄-칼리프제의 성립) 아시아?아프리카?유럽 세 대륙에 걸친 대제국을 완성하였다.
그후 이슬람세계는 16세기에 들어 이란 지방의 시아파 사파비조(1501~1732)와, 티무르의 후손 바부르가 인도에 건국한 무굴제국(1526~1856), 이스탄불의 오스만제국(1281~1924)으로 크게 3분되었다.
슐레이만 1세(재위 1520~66) 치하에 극성기에 달한 오스만제국은 아시아?아프리카?유럽 3대륙에 걸친 영토를 확보했으며, 그 군대는 한때 빈까지 육박하였다. (1529) 또한 국내에서는 군사적 봉건제에 입각한 국가체제를 확립하고, 법류. 학예. 공예 등 각 분야에 걸쳐 눈부신 발전을 이룩하였으나, 17세기 이후로는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였다. 출처 http://cafe.daum.net/minhamsa/8683/138
투르크족 위구르 역사 (번역자료)
◎번역 및 편집 : 김용은(ad313@softhome.net)
http://myhome.hananet.net/~ad313)
1. 들어가는 말
신장에 첫발을 내 딛은지 어느덧 5년(1996년)이라는 세월이 지났다. 이 문서는 5년 전 마음의 부담감을 안고서 신장을 방문하고서 다녀와서야 그곳에 관해서 알아야겠다는 일념으로 인터넷의 자료들을 검색하던 중 오스트리아 대학의 아시아 연구실에서 정리한 위구르의 역사를 번역한 것을 지금(2001년 8월)에 와서야 정리해서 자료를 공개하는 것이다.
5년 전이나 지금이나 중앙 아시아의 역사에 관해서 서적이나 관련 글들을 한국에서 발견하는 것이 쉽지가 않다. 더군다나 위구르 종족(투르크 종족 중 위구르 종족)에 관한 것은 발견하기가 굉장히 어렵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는 그곳을 향한 끊임없는 발길들이 그곳의 역사, 정치, 경제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갖게 하고 그러한 관심들이 위구르에 관한 소식들을 정보화하고 있는 것 같다.
현재 위구르 역사에 관한 한글 문서들이 여러 개 있지만 이 자료가 비교적 간결하고 체계적으로 정리가 잘 되어 있기에 편집하여 공개한다. 역사나 위구르 종족에 대해 전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용어상의 문제나 각주에서 미숙한 부분이 있으리라 본다. 또 특별히 위구르 종족에 관한, 투르크인들의 역사에 관한 자료들이 빈약하고 사람마다 역사적 사실을 다르게 기술하고 있기에 여기의 역사기술 내용과 다른 곳의 내용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여기에 소개하는 자료는 돌궐, 훈, 흉노로 대표되는 광범위한 종족의 명칭도 사용하지만 구체적으로 위구르 종족의 명칭을 가급적 모든 역사의 사건에 사용하고 있다. 이것은 위구르 종족에 초점을 마춘 역사 요약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이 자료가 다른 자료들과 구별되는 장점을 가질 순 있겠다. 하지만 위구르 종족을 부각시키는 인용과 관점을 가지고 다루었기 때문에 객관적이지 않을 수 있다.
중국 역사와 관련이 많기 때문에 중간 중간에 중국의 역사의 자료들을 삽입하여 편집하였다. 미흡하지만 아무쪼록 위구르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2. 위구르 역사를 읽기 전에
1) 중국이 불렀던 흉노(匈奴)와 훈족의 관계
훈족이란 중앙아시아의 스텝지대(地帶)에 거주하였던 투르크계(系)의 유목 기마민족이다.
중국 고대사에 나오는 흉노(匈奴)와도 관계가 있다고 보나, 한(漢)나라에 쫓겨 서쪽으로 간 흉노의 일부가 곧 훈족이라는 설에는 이론(異論)이 있다. 역사적으로 훈족을 흉노의 후예로 보는 까닭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과 군사 전술, 문화의 유사성, 흉노와 훈 두 이름의 유사성등에 기인하며, 흉노의 이름에서 '흉'이라고 불리는 종족을 중국에서 멸시의 의미에서 '노'(奴)를 붙인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흉노족이란 대체 어떤 민족인가? 잠시나마 흉노족에 대해 알아보고 훈족의 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하자.
흉노족의 기원에 대해서 한단고기에는 이렇게 기록한다.
“서기전 2177(-.-;;) 난하, 황하 북쪽 땅의 욕살(지방관리) 색정이란 사람을 약수로 유배했는데 이 사람이 흉노족의 조상이 됐다.”
어쨋든 흉노의 인종에 관해서는 투르크계(系)?몽골계(系)?아리아계(系) 등의 설이 있는데, 특히 투르크계설(系說)이 유력하다. 최근 흉노는 예니세이강 유역에 모여 살던 고대민족과 인종적 관련이 있다는 설이 제기되었으나, 이것도 확실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국가형태는 연제?호연(呼衍)?수복(須卜)?난(蘭)?구림(丘林) 등의 씨족으로 이루어진 흉노 부족을 지배층으로 하는 부족 연합체였으며, 선우의 지위는 연제씨족에게 세습되었고, 알씨(閼氏)라고 불린 황후는 원칙적으로 여타의 4씨족에서 나왔다. 국가를 구성하는 여러 부족의 족장은 1년에 세 번, 선우의 본거지에 모여 무속적(巫俗的)인 제사를 거행하였고, 동시에 국사를 의론하였다. 유목과 수렵생활로 양?말 등의 가축을 방목하고, 하영지(夏營地)와 동영지(冬營地) 사이를 이동하며 천막식 원형(圓形)가옥에 거주하였다. 또한 P.K.코즐로프 일행이 노인울라(Noinula)에서 발굴한 귀족분묘는 기원 전후의 것인 듯한데 그 곳에서 스키트-시베리아계의 문물뿐만 아니라, 견직물?칠기?옥기 등의 중국제품, 이란계의 동식물 무늬와 인물상을 수놓은 모직물 등이 출토되어 흉노의 지배층에 대한 중국?서방문화의 영향을 엿볼 수 있다.1)
흉노족은 BC 3세기 말부터 AD 1세기 말까지 몽골고원?만리장성 지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기마민족(遊牧騎馬民族) 및 그들이 형성한 국가의 명칭. 주대(周代)에 중국의 북변을 위협하였던 험윤?훈육 등의 후예라고 하지만 확증은 없다. 진(秦)의 시황제(始皇帝)가 중국을 통일하였을 무렵(BC 221) 흉노 연제(攣:虛連題) 씨족의 족장(族長) 두만(頭曼)은 몽골고원의 제족연합(諸族聯合)에 일단 성공하였으나, 그 아들 묵돌[冒頓:?~BC 174]은 아버지를 살해하고 스스로 선우[單于:북아시아의 유목국가의 군주를 가한(可汗)이라고 칭하기 이전에 사용한 칭호]2)라 칭하였다. 묵돌은 남만주의 동호(東湖), 북방의 정령(丁令), 예니세이강(江) 상류의 키르기스를 정복하고, 서방의 월지[月氏]를 격파하여,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국가를 세우고, 이어 산시성[山西省] 북부에 침입하였다. 한(漢)나라의 유방(劉邦)은 북진하여 이를 요격(邀擊)하였으나, 다퉁[大同] 부근에서 포위되어 간신히 탈출한 다음, 한황실(漢皇室)의 딸을 선우에게 주어 처를 삼게 하고, 매년 많은 견직물?술?쌀 등을 흉노에게 보낼 것을 조건으로 화의(和議)를 맺었다(BC 198). 그 뒤 흉노는 오손(烏孫)이나 동(東)투르키스탄의 오아시스 제국(諸國)을 지배하였는데, 그 결과 흉노의 지배권은 동(東)은 러허[熱河]에서부터 서는 동(東)투르키스탄까지, 북은 예니세이강(江) 상류에서부터 남은 오르도스까지에 이르게 되었다. 흉노의 주요한 경제적 기지는 동(東)투르키스탄에 있었고, 군수기지는 내(內)몽골?오르도스에 있었으며, 전자(前者)로부터는 그 물산(物産)과 교통?통상보호세(保護稅)를 거두었고, 후자에서는 스키트?시베리아계(系)의 청동기, 특히 무기류(이른바 綏遠 또는 오르도스 靑銅器)를 제작하였다. 이리하여 흉노는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나, 한나라 무제(武帝:재위 BC 141~BC 87)는 자주 흉노에게 원정군을 보냄과 동시에 이를 동서로부터 협격(狹擊)하고자 장건(張騫)을 월지에 파견하였다(BC 139~BC 126). 이와 같은 무제의 정책으로 흉노는 외(外)몽골로 도피하고, 동투르키스탄은 한나라의 세력하에 들어갔으며, 또 정령?선비(鮮卑) 등의 예속제족(隸屬諸族)이 독립하였다. 더욱이 흉노는 내분이 일어 5명의 선우가 난립하였고, 이어서 질지선우와 그 아우인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東匈奴)가 대립하기에 이르렀다(BC 54). 호한야는 한나라에 항복, 그 원조하에 들었으므로 질지선우는 한나라와 호한야의 연합이 두려워 서쪽 키르기스 초원으로 옮겼으나, 한나라의 원정군에게 패하여 살해되었다(BC 36). 그 뒤 흉노는 호한야를 중심으로 다시 부흥, 한나라와의 관계도 호한야가 왕소군(王昭君:한나라 元帝의 後宮)을 아내로 맞이하는 등 일시 소강상태를 맞이하였다. 그러나 재차 내분이 일어나고, 제2대 호한야선우가 후한(後漢)에 투항함으로써 호한야가 이끄는 남(南)흉노와 북(北)흉노로 분열하였다. 남흉노는 간쑤[甘肅]?산시[陝西]?산시[山西] 등에 나뉘어 살며, 중국 북변?서북변의 방위를 담당하였으나, 서진(西晉)에서 내분이 일어난 것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5호16국 중, 한(漢:前趙)?북량(北凉)?하(夏)를 세위, 점차 중국화(中國化)하기 시작하였다. 북흉노는 때로 중국에 침입하기도 하였으나, 선비의 공격을 받아 선우가 살해되고, 후한?남흉노 연합군이 그 본거지를 공격하게 되자 대패하였고, 그 결과 몽골고원에서 흉노가 세운 국가는 와해되었다.
흉노 제국이 AD155년 멸망된 후, 남은 세력들은 천산 산맥과 알타이 산맥을 넘어 서진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카자흐스탄과 남 시베리아에 이르러 이 지역의 원주민을 장악하고 새롭게 세력을 구축하였다. 이후에 흉노족은 서진을 게속하여 우랄 산맥에 도달하게 되고, 이곳에서 게르만계 고트족과 만나게 된다. 이들과의 접촉은 흉노족의 우랄화를 낳게 된다.
훈족은 4세기 중엽 알란국 정복을 시작으로 374년 볼가지역에 등장했다. 훈 제국은 기마를 이용한 기동력과 전술로 동 고트를 공격 374년에 붕괴시켰고, 375년 서 고트의 왕을 불가리아 지역으로 몰아내었다. 이로 인해 게르만족의 대 이동이 시작된다. 훈족에 밀린 서고트는 395년 로마에 유입, 로마제국은 동서로마로 급격히 분리되었고, 고트족 이외에 많은 동유럽의 부족들이 로마 제국내로 유입되어 로마의 큰 위협세력이 되었다.
이후 훈족의 울드즈는 400년경 투나강 유역을 공격함으로써 서고트는 다시 이탈리아 변경으로 쫓겨났다. 바로 이때 훈족의 명성이 절정에 달하게 되는데, 훈족에 밀린 동고트와 반달족등의 게르만족이 로마를 공격하였을 때, 훈족은 로마와 연합으로 이들을 제압하게 된다. 이때, 훈 제국의 영토는 아랄 해 동부지역에서 동유럽, 발칸반도에 이르렀다.
4세기 말의 루아왕 때에는 오늘날의 헝가리 ?트란실바니아 일대를 지배했고, 다음의 아틸라왕 때에는 전성기를 이루었다.
아틸라는 5세기 전반의 민족 대 이동기에 지금의 헝가리인 트란실바니아를 본거(本據)로 하여 주변의 게르만 부족과 동고트족을 굴복시켜 동쪽은 카스피해에서 서쪽은 라인강에 이르는 지역를 지배하는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동로마를 위협하여 조공(朝貢)을 바치도록 하였으며, 갈리아에 침입하여 오를레앙을 공격하였다(451). 이에 대하여 서로마는 서고트 및 프랑크와 동맹군을 편성하여 맞아 싸우려고 하였으므로 아틸라는 철군을 개시, 돌아오는 도중 마우리아쿠스(샬롱쉬르마른의 남쪽)의 벌판에서 연합동맹군에게 패하여(카탈라우눔 전투), 서유럽의 정복을 단념하고 본국으로 돌아왔다. 이듬해 북 이탈리아에 침입, 로마에 육박하였으나, 로마교황 레오 l세의 설득을 받아들여 철군하였다. 그러나 그 후에도 아틸라는 이탈리아 침입을 꾀하는 등 훈족의 위협은 계속되었으나, 453년 갑작스런 죽음으로 무적의 대제국(大帝國)도 급격히 분열 ?쇠퇴하여 훈족은 다뉴브강 하류지방으로 후퇴, 타민족과 혼혈 ?동화되어 소멸되었다.
그후 아틸라의 뒤를 이은 이르네크는 훈족을 이끌고 남부러시아로 이주하였다. 후에 이들 훈족들에 의해 헝가리와 불가리아 탄생하게 된다.
2) 타브가츠(북위)
타브가츠, 곧 위진 남북조 시대3)의 북위(北魏)는 화북지방의 16국 중 선비족(鮮卑族)4)이 중국 화북지역을 통일. 북조(北朝) 최초의 왕조(386~534). 후위(後魏)라고도 한다. 3세기 중엽 내몽골의 바옌타라[巴彦塔拉] 지방에서 세력을 넓혔으나, 4세기 초 이들의 세력을 이용하여 북쪽 변방을 지키려는 서진(西晉)으로부터 산시성[山西省] 북부의 땅을 얻음으로써, 그곳에서 세력을 신장하였다.
315년 군장(君長)인 탁발 의로(拓跋盧)는 서진의 관작을 받고 대왕(代王)으로 봉해졌다. 탁발 십익건(拓跋什翼) 때 전진(前秦)의 부견(符堅)과의 싸움에 패하여 정권이 와해되었지만, 탁발 규(拓跋珪:후의 道武帝)는부견이 비수 전투에서 패한 기회를 이용하여 나라를 재건하고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위(魏)라고 하였다(386). 이어 내몽골 여러 부족을 평정하고 후연(後燕)을 격파, 허베이[河北] 평야에 진출하여 도읍를 평성(平城), 즉 지금의 산시성[山西省] 다퉁[大同]에 정하였다(398).
위는 중국 고래의 전통에 의한 국가 체제를 채용하기로 정하고, 화북지방을 평정하기 위하여 몽골에서 데려온 여러 유목 부족을 해산시켜 부민(部民)을 군현(郡縣)의 호적에 편입하게 하였다. 그리고 훈공이 있는 부족 중의 유력자에게는 관작을 수여하고 한족(漢族)의 명문(名門)과 똑같이 고급관리로 채용하여 귀족제의 기초를 이룩하였다. 남조(南朝)의 송(宋)을 공략하여 허난[河南]지방의 땅을 빼앗았고, 태무제(太武帝) 때 하(夏), 북연(北燕), 북량(北凉)을 멸망시킴으로써 5호 16국(五胡十六國)의 난을 종식시켜, 439년 마침내 북위는 강북지역 통일을 완성하였다. 그뒤 선비족의 한화(漢化)가 촉진되었는데, 특히 효문제(孝文帝)가 즉위하자 도읍을 뤄양[洛陽]으로 옮겨(494), 호복(胡服), 호어(胡語)를 금하고 호성(胡姓)을 한인(漢人)처럼 단성(單姓)으로 고치게 하였으며, 황족인 탁발씨도 원씨(元氏)로 개성(改姓)하였다. 효문제는 한화정책과 함께 봉록제(俸祿制), 삼장제(三長制), 균전법(均田法)등을 창시하여 북위의 국력과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북방민족 고유의 소박상무(素朴尙武)의 기풍이 쇠퇴하고, 사치스럽고 문약(文弱)한 경향이 일어났다. 그리고 나이 어린 효명제(孝明帝)를 섭정한 영태후(靈太后)가 지나치게 불교를 존숭하여, 사탑(寺塔) 건축에 국비(國費)를 낭비함으로써 국정을 어지럽게 하였다. 524년에는 북진(北鎭) 병사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 난을 진압할 때 큰 공을 세운 북방 민족의 무장(武將) 세력인 우문태(宇文泰)와 고환의 대립이 격심해졌으며, 따라서 양자는 각각 북위의 종실을 천자로 옹립하여 534년 북위는 서위(西魏)와 동위(東魏)로 분열되었는데, 동위는 550년 고환의 아들 양(洋)에게 빼앗겨 북제(北齊)가 되었으며, 서위는 556년 우문태의 아들 우문각(宇文覺)에게 빼앗겨 북주(北周)가 되었다.
3)돌궐제국
돌궐제국은 스텝의 여러 민족들 중에서 최초로 자신들의 문자기록을 남긴 민족으로 평가된다. 몽골리아 북부 오르혼강 유역에서 발견된 튀르크어 비문은 당시의 상황에 대한 여러가지 역사적 자료를 제공해 준다.
돌궐족 자신과 스텝의 서쪽 국가들에 의해 쓰여진 튀르크라는 말은 6세기말 비잔틴 역사가 아가티아스의 비잔틴문서와 아랍시인 나비가트 알 주브야니의 아랍문서에서 처음 나타난다. 돌궐이라는 명칭은 중국인이 튀르크족을 북방 오랑캐라는 경멸적인 의미로 만든 조어이다.
돌궐제국은 흉노의 일파로 여겨지고 본거지는 알타이산맥의 외트켄산으로 알려져 있다. 이 부족은 원래 직업은 철공업이었고 처음에는 연연5)의 복속국이었으나 후에는 연연을 뒤엎고 제국을 건설했다. 이들이 바로 스? 민족사상 처음으로 도시를 건설한 부족이다.
돌궐제국은 부민 혹은 투멘이라고도 하는 고대 튀르크6)의 지도자에 의해 545년 경에 건설되었다. 그는 552년 서위와 연합하여 연연을 멸망시킴으로써 스?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553년 부민의 사망후 그의 두 아들이 동돌궐과 서돌궐로 나누어 지배하였다.
583년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패배하게 되었고, 돌궐은 수나라에 의해 동서돌궐이 이용당하기 시작했다. 612년 수나라의 고구려 침략실패로 멸망하자 잠시 부흥하는 듯 했지만 곧이어 등장한 당나라에 의해 반 세기 동안 지배를 받게 되었다.
683년 쿠툴루그 일테리쉬에 의해 돌궐제국은 당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하여 제의돌궐제국인 후돌궐을 세웠다. 일테리쉬는 10년간 스?통치를 지속하다 각종 유목민족의 내분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들었다. 결국 742년 바스밀부족이 위구르를 카를룰부족과 세력을 합하여 어린 나이에 카간이 된 돌궐의 마지막 왕 텡그리를 제거함으로써 돌궐제국은 공식적으로 끝이 났다.
그 후 바스밀과 카를룩, 그리고 위구르 사이의 세력다툼에서 위구르의 일테베르가 정권을 장악하여 자신을 카간으로 선포함으로써 위구르제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4)탈라스 전투
탈라스 전투는 대규모의 전쟁은 아니었다. 고선지가 거느린 군대는 3만명 가량이었고 사라센 군대나 돌궐족 군대도 큰 군대는 아니었을 것이다. 당 사람들이 그 싸움을 그렇게 중요하게 여긴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고선지는 그 패전으로 문책을 받지 않았다 (그는 뒤에 안록산의 군대와 싸우다가 의심을 받아 처형되었다).
그러나 탈라스 전투가 역사에 미친 영향은 크다. 먼저 그 싸움에서의 패배는 중국의 서역 경영에 치명적이었고 곧 일어난「안사지란」으로 당(唐)이 전성기에서 곧바로 쇠퇴기로 접어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서역은 중국의 영향에서 완전히 벗어났고 명(明)이 신강성 동부에 잠시 진출했던 것을 빼놓으면 18세기 중엽에 청(靑)이 진출할 때까지 중국은 서역에 발을 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서역이 사라센의 세력 안에 들어감으로써 서역은 이슬람교 권역이 되었다. 서역은 원래 불교가 성하던 곳이었는데, 이슬람 세력의 모진 박해를 받아 불교는 급속히 쇠퇴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라센제국은 동방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원래 아라비아에서 나온터라 사라센제국의 눈길은 자연스럽게 지중해지역으로 끌렸다. 그러나 718년에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다 실패했고, 732년에 투르 싸움에서 사르르 마르텔에게 패배해서 사라센제국은 유럽으로의 진출이 좌절되었다. 서역에서 뜻밖의 성공을 거두자 사라센제국의 무게 중심이 상당히 동쪽으로 움직이게 되었던 것이다. 수도가 지중해에 가까운 다마스커스에서 동쪽의 바그다드로 바뀐 것은 상징적이다.
문화적 영향이 더 크다. 사라센에게 붙잡힌 당의 주민들과 병사들 가운데는 기술자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슬람세계에 중국의 문명이 많이 전파되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제지기술이었으니 막 피어나던 이슬람 문화는 그 기술에서 큰 도움을 얻게된다. 제지기술은 유럽에 전해지면서 인쇄술의 발전을 가져왔다.
탈라스 계곡의 싸움은 소규모 전투였지만 큰 사건이었다. 그것의 영향은 1천년이나 지난 지금도 신강성의 너른 땅에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위구르의 역사
1. 개요
위구르인7)들은 신강 혹은 신장(Xin Jiag) 위구르 자치구라고 알려진 동 투르키스탄(Eastern Turkystan)의 원주민이다.
가장 최근의 중국 인구 조사에 따르면 위구르 자치구엔 위구르인이 720만이 있다고 한다.8) 또한 서 투르키스탄(West turkystan)이라고 알려진 곳에는 50만의 위구르인들이 산다.9)
또 약 7만 5천명의 위구르인들은 파키스탄과 아프카니스탄, 사우디 아라비아, 터키, 유럽과 미국에 살고 있다.10)
중국 관계당국은 위구르인들이 훈족의 직계 후손이라고 말한다.11) 위구르라는 이름은 한(漢) 왕조(BC206~AD202)12) 위(魏)왕조(AD256~289)13) 당(唐) 왕조(AD618~906)14) 송(宋)왕조(AD906~960)15)의 역사에서 언급된다.16)17)
고대의 그리스, 이란 그리고 중국은 자신들의 부족으로 위구르족을 넣었는데 BC300년부터 동쪽 지역의 황하강 서쪽 기슭과 서쪽 지역의 동투르키스탄의 광대한 지역의 부족들을 그리고 북방지역의 몽골의 스텝지역에 있는 부족들과 함께 위구르를 그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18)
2. 초기 역사
기원전 210년 이후 위구르 종족은 중앙 아시아에 세워졌던 훈 제국(BC220~AD386)19), 타브가츠(Tabgach:북위)제국(AD386~554)20) , Kok-Turk(돌궐:AD552~744)21)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22)
기원후 670년, 688년, 692년 북쪽과 북방 중앙 아시아에 있는 요세들을 정복하려고 중국이 군사정복을 할 때 위구르23), 돌궐과 Shato 종족이 티벳 군대와 연합하였다.
중앙 아시아의 Kok-Turk(돌궐)제국의 몰락 이후 위구르는 744년 오르콘 강의 기슭에 카라발가순을 수도로 삼고 최초로 나라를 세웠다.
이 위구르제국을 기초한 자는 쿠툴룩 쿨 카간24)이였다. 747년에 위구르는 다른 투르크 씨족과 다른 가문들, 연합 군주국을 평정했던 쿠툴룩 쿨 카간의 아들 대에 번영하였다. 그리고 북에서는 바이칼 호수까지 동에서는 간수 그리고 남서쪽으로는 인도까지 그 통치 범위를 넓혔다. 25)
위구르가 통일되고 강성해졌을 때 공교롭게도 중국 현종 황제의 당 왕조의(AD712~756)가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다. 751년에 중국 군대는 아랍, 티벳, 위구르에 의해 탈라스 강의 전투에서 대패했다. 같은 해에 중국은 남방에서의 난차오26)에 침략했으나 역시 이들의 저지로 엄청난 손실을 입게?다. 그리고 안록산이 이끄는 중국 군대도 북방에서 거란에게 패했다. 이 중국의 손실은 엄청난 파국의 서곡에 불과했다 주후 755년에 앞에 언급한 충직한 부하 안록산이 반역했다.(안사의 난)
위구르는 수종과 성종의 후계자가 찾아와서 중국에 군대를 파견해 도와달라고 하는 상황에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주후 757년에 위구르 군대는 장안과 낙양 둘 다를 탈환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다. 위구르는 당 왕조가 진 빚의 약점을 잡았고 엄청난 약탈을 했다. 중국 황제는 위구르에 매년 조공으로 비단 2만 필을 바치는 것을 승낙했고 그의 공주의 하나와 결혼하게 되었다. 주후 744년~804년의 기간동안 위구르 카툰(비(妃))이 된 중국의 공주는 모두 3명이었는데 이 때가 그 첫 번째였다.27)
759년 모윤구 카간이 죽자 그의 아들 부구 카간이 더욱 나라를 발전시켰다. 그의 통치기간동안 위구르의 기세는 극치에 달했다. 그들은 829년 이전의 중국 사료에 빈번히 기록된 것처럼 중국 비단과 위구르인의 말과의 무역교류를 강압적으로 체결했다. 28)
779년 부구카간은 그의 첫째 사촌과 그의 수장(首將) 바가타르칸에 의해 살해되었다. 부그 카간의 소그드인 연합국과 고문들은 779년 현종 황제의 죽음과 그 파급으로 인한 정국 침체를 틈타 자국들의 이익과 중국침략에 착수하기 위해서 부구카간을 필요로 했고 부구카간도 이것에 동의를 했다. 그러나 그의 큰조카 바가 타르칸은 그 계획에 반대했다. 그리고 그는 부구카간에게 대항하며 바뀌는 대세를 보았다. 그는 부구카간을 살해하고 왕좌에 올랐다 바가 타르간은 중국이 위구르가 지배할 수 있는 무대라는 것을 믿었다. 그러나 그는 위구르인들이 만약(비록 광대하고 인구가 조밀하지만)중국을 지배하게 되면 자신들의 문화적인 정체성을 지속시킬 것이라고는 확신하지 못했다.
789년 바가카간의 사후에 특별히 790년에 쿨룽 빌지 카간이 이후에 위구르의 전성기를 지나가고 있었다.
795년 위구르 정부의 법률은 다른 부족에 의해 통과되었다. 이 새로운 가문아래 위구르는 보다 더 종교에 관심을 쏟게 되었고 완화해졌고 이전의 세대들의 위구르를 정체성 있는 문화로 발전시키는 배아역할을 했다.
이 부족의 가장 주요한 통치자는 쿠틀룩 빌게 카간이었다. 그의 통치 전과 통치의 양 기간 동안에 군사적인 수훈을 세운 그는 카라발가순의 비문29)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그는 보다 많은 힘을 위구르 제국에 축적하는 것에는 성공하지 못했다.30)
805년 쿠틀룩 빌게 카간의 죽음과 함게 위구르 정부를 와해시키려는 세력들은 점차 늘어만 갔다. 전쟁이 북방의 이웃들, 강력한 키르키즈등과 함께 주변국에서 일어났다. 자신의 궁에서도 마찬가지로 음모가 왕족의 권세를 약화시켰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른 요인들도 가세했는데 위구르 정부 경제의 의존도가 높은 목축은 혹독한 겨울의 추위로 많은 가축의 손실을 냈다. 840년 키르키즈에 반역자들이 찾아갔고 약화된 정부를 공격했고 카간을 살해하고 수도를 점령했다.
위구르의 정치적 역사의 첫 번째 부분은 거의 한 세기 동안 중국 제국을 방어해준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는 실제로 우호적인 관계는 아니었다. 중국에게 있어서 오랑케를 막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 역사의 첫 부분에서처럼 그 이후에 위구르는 결코 이 때처럼 중국에 호의를 베푼 적은 없었다.
그 첫 위구르 제국의 몰락 이후 위구르인들의 한 집단이 간수에 있는 황하강의 서부 뚝에 이주해갔다. 또 다른 집단은 동 투르키스탄의 칸 텡크리31)에 또는 천산산맥의 남반부의 via Yetti su로 이주했다. 셋째집단과 가장 큰 집단은 그들의 선조들이 지금까지 살고 있는 칸 텡그리 북방32)에 이주했다.33)
3. 간수 위구르 왕국(The Kanchu Uygur Kingdom)
850년에 오늘날 중국의 간수 지방에 세워진 간수 위구르 왕국은 막강한 세력을 가진적은 없었으나 중국인들은 911년에 위구르와 티벳의 사절이 중국의 수도를 방문해을 때 간수 위구르 왕을 중국 황실이 칭송한 것을 본적이 있기에 간수 위구르 왕국을 지극히 존중한다. 이 왕국은 1228년에 서부 서하(西河)의 탕구트족34)에 흡수되었다.35)
이 위구르인들의 몇 천은 아직까지 황색 위구르 또는 유구르(Yugur)라는 이름으로 간수에 살고 있고 그들의 모국어와 그들의 조상들의 라마 불교의 황색분파를 지켜나가고 있다.
4. 카라코야 위구르 왕국(THe Karakhoja Uygur Kingdom)
동투르키스탄의 칸 텡그리(천산)의 북방에 살고 있는 위구르인들은 846년에 투르판의 현존하고 있는 도시 가까이에 카라코얀 위구르 왕국을 창건했다.36)
중국은 그들의 사절로 카라코야에 있는 981년에 황 옌 더(whang yen de)를 보낼 정도로 이 왕국을 견지했다.37) 황 옌 더는 삼년동안 카라코야에 정주했다.
5. 카라카니드 위구르 왕국
(The Kafakhanid Uygur Kingdom)
칸 텡그리의 남방부에 살고 있는 위구르인들은 카를룩같은 다른 투르크 종족, 투르기쉬(Turgish)와 바스밀 종족의 원조로 840년에 카쉬카르를 수도로 카라카니드 위구르 왕국을 창건했다.38)
934년 사축 부그라 칸의 통치 기간동안 카라카니드는 이슬람을 신봉했다. 이들 동투르키스탄지방에 두 위구르 왕국(이슬람교도인 카라카니드와 불교도인 카라코야)이 정착했다.
1397년에 이 이슬람과 불교도 위구르 왕국은 하나의 나라로 합병되었다. 그리고 1759년까지 독립국가로 남아있었다. 39)
6. 만주(淸)침략
만주40)족은 중국에 거대한 제국(淸)을 형성했다. 1759년에 동투르키스탄의 위구르를 침략했고 1826년까지 지배했다. 이 기간 동안 위구르는 그들의 독립을 얻기 위해 만주의 통치에 대항해 42회의 탈환운동을 일으켰다. 41) 1863년의 마지막 운동에서 위구르인들은 그들의 조국으로부터 청을 축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864년에 독립 왕국을 다시 세웠다. 이 왕국은 오토만 제국, 러시아 그리고 대영제국에 의해 인정되었다. 42) 그러나 동투르키스탄을 향한 재정 러시아의 팽창을 우려하던 대영제국은 동 투르키스탄을 지배하려던 청을 설득했고 청이 동 투르키스탄을 침략하도록 영국은행이 자금을 댔다. 43)
1876년 동투르키스탄을 침공한 청은 그 땅을 새로운 영토 또는 새 영지라는 의미의 신강(新疆)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1884년 11월 18일에 만주 청의 영토로 합병되었다. 44)
1911년 국가주의자 중국인들은 만주 세력을 점복하였다. 그리고 공화국을 세웠다.
위구르인들은 외세의 지배로부터 자유롭게 되기를 원했고 이 기간 동안에 중국 국가주의자들의 통치에 대항하여 몇 몇의 독립운들들을 계획했다. 1933년에 두 번째 운동이 있었다. 1944년 위구르인들은 동투르키스탄 공화국으로 새로이 독립하는데 성공했다.45) 그러나 이 독립된 공화국들은 소비에트 연방의 군사적인 중재와 정치적인 음모에 의해 점복되었다. 이 기간동안 소비에트 연방이 위구르의 독립운동을 방해한 것은 이미 증명된 것이다.
1949년에 국가주의 중국인들이 중국 공산당에게 패배했다. 후에 위구르는 중국 공산당의 지배 아래에 들어갔다.
위구르 문명(Uygur Civilization)
19세기 말엽 그리고 20세기의 몇 십 년 동안 과학적으로 동 투르키스탄의 실크로드에 걸친 지역에서 고고학적인 탐사는 수많은 위구르 동굴 사원들과 수도원의 폐허들 그리고 벽하들, 조각상, 프레스코, 귀중한 필사본들, 문서들과 서적들이 있는 곳을 발견하게 했다. 대영제국, 스웨덴, 러시아, 독일, 프랑스, 일본, 그리고 미국의 이 탐사대들은 그곳에서 발견된 유물들에 놀랐고 그에 대한 상세한 연구 보고서는 바로 전세계의 관심을 샀다. 스웨덴의 센 헤딘, 대영제국의 아우렐 스타인, 독일의 그루덴 베델 그리고 알버트 본 레콥, 프랑스의 폴 펠리어트, 미국의 랑돈 와르너, 일본의 코운트 오타니에 의해 발굴되간 풍요로운 위구르 문화적 자취들은 베를린, 런던, 파리, 도쿄, 레닌그라드 박물관에서 볼 수 있고 심지어 뉴델리의 중앙 아시아 골동품 박물관에서도 볼 수 있다.46) 동투르키스탄에서 발굴된 필사본들과 문서들과 고서들은 위구르가 매우 높은 문명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47)
위구르 문자(Uygur Script)
수세기를 통하여 위구르인들은 세가지의 문자를 사용했다. 그들이 6,7세기 돌궐족들과 함께 연합했을 때, 그들은 사실 돌궐족이 고안해낸 오르콘 문자를 사용했다. 48) 후에 위구르 인들은 이 문자를 버리고 위구르 문자로 알려진 그들의 고유한 문자를 받아들였다.49) 이 문자는 위구르인들 뿐만 아니라 다른 투르크족, 몽골, 초기 중국을 지배하던 만주족들도 거의 800년 동안 사용한 것이다.50) 몽골인들은 자신들의 고유한 문자를 기지고 있지 못했기 때에 위구르 문자는 징기스칸의 제국 때에 모든 서신의 용도로 받아들여졌다.51) 위구르인은 또한 어떠한 문화와도 뒤지지 않는 몽골을 형성하는데 기여했다. 52)구르인들은 몽골 황실과 중국관리, 로마사절, 오늘의 이스탄불과 바그다드, 테브라즈의 철학자들과 그 군대의 상급자들의 교사로 활동했다 후에 이슬람을 종교로 받아들인 후에 위구르는 아랍문자를 사용했다.53) 그러나 아라비아 문자는 11세기에만 일반화되었다.
위구르 문학(Uygur Literature)
위구르의 초기의 문학작품은 대부분이 불교와 마니교의 종교적인 서적들이었다. 반면에 실크로드의 고고학 탐사의 기간동안에는 몇몇의 설화와 운문 그리고 음소론적인 작품들이 발굴되었다. 이 책들의 몇몇은 독일어, 영어, 러시아어, 터키어로 번역되었다. 54) 이슬람교도를 수용한 후에도 위구르는 중앙 아시아에서 그들의 문화적인 우월성을 보존해 나갔다.
이 기간동안에 위구르 철학자들의 수 백 명이 이 시대에 출현했고 명성이 있었다. 이 시기에 수작들이 수 백 권 쓰여졌는데 이 중 백 삼십 권의 작품들이 후에 발견되었다. 이 작품들 가운데서도 또한 이 시대에 쓰여진 위구르 철학자 유스푸 하집의 책 쿠타트쿠 빌리크(Kutatku billik)55), 무하메드 카쉬카르의 디바니 루가티트 투르크(Divani lugatit turk)56)는 그 당시의 투르크인들의 방언들의 자료를 현재까지 전해주고 있다. 또한 방언간의 차이점, 사회적인 교육, 그들의 관습, 또한 그들이 살았던 지역에 관한 정보들을 말해주고 있다. 백과사전에 가까운 사전을 만든 작가는 이 책을 완성하기 전에 사람들이 사는 곳(투르크 종족)을 유랑하였고 모든 자료들을 연구했고 문학적인 것을 바탕으로 하는 어감을 사용했다. 디바니 루가티트 투루크는 오늘날 투르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의 하나이다.
종교
아마도 중앙 아시아의 투르크 사람들의 대부분은 이슬람이 있기 전에 위구르인들은 샤머니즘, 마니교 같은 종교를 믿었다. 불교는 6세기에 동 투르키스탄에 들어왔다. 그건 투르크 사람들 사이에 빠르게 퍼졌다. 그러나 그것을 중앙 아시아에 그틀을 세운 것은 위구르인들이었다. 위구르인들에 의해 건축된 밍오이 또는 천불상으로 알려진 유명한 수도원의 폐허는 지금까지도 광저우 위구르인들 혹은 황색 위구르인들이 사는 쿠차, 투르판 그리고 툰황에서 지금도 볼 수 있다.
위구르의 왕 쿨 빌게 카간(AD678~712)이 동 투르키스탄의 베이라는 도시에 불자들의 수도원을 짓도록 하였다.57) 쿠차라는 도시에는 50개 이상의 사원과 서원이 있었고 빈자들을 돕기 위한 복지 프로그램도 있었다. 58) 호텐이라는 도시에는 작은 사원들을 빼고도 14개의 대규모의 사원이 있었다.59)
762년에 위구르 왕 부구카간이 중국을 여행했을 때 그는 몇 명의 마니교 사제들을 만났다. 그들은 자신들의 종교로 그를 감화시키는데 성공했고 이 사제의 4명은 카라발가숨에 그와 함께 돌아왔다. 조금 후에 부구 카간은 국교로 마니교를 책정했다.60) 이것은 정치적인 이유로 사용되었다. 그는 바로 특징적인 소그드인 종교를 받아들이므로 불교도였던 중국의 문화적인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려고 했던 것이다. 61)
위구르인들은 934년에 사투므 브그라 칸의 통치기간 동안에 이슬람교를 받아들였다. 그는 중앙 아시아에서 이슬람교를 수용한 첫번째 투르크족 통치자였다. 이 시기에 사원을 대신해서 모스크가 세워졌다. 대부분 300여개의 모스크가 카쉬카르에만 세워졌다. 그것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12세기에 세워진 안쯔나(Anzna) 모스크, 15세기에 세워진 이드카(Id kah)모스크 그리고 18세기에 세워진 압박호자 모스크(Appak Khoja Mosque)이다.62) 또 카쉬카르에는 또한 18개의 큰 마드라사스(Madasas:교육기관)가 있다. 또 2천명을 상회하는 학생들이 해마다 이 학교에 입회한다. 가장 평이한 시설인 이 학교(마드라사스)는 위구르 아이들의 읽기, 쓰기, 이슬람적인 주제들 만을 가르치는 것은 아니다. 점술, 산술, 기하학, 윤리학, 천문학, 의학 그리고 노업과 유사한 과목들을 배운다, 메수디(Mesudi) 도서관은 15세기에 지어졌고 거의 20만원의 책들이 서장되어 있다. 63)
위구르 경제
위구르 사람들은 다른 투르크족 사람들보다 더 초기부터 정착하는 생활 방식을 수용했다. 위구르인들은 3세기 이전에 경작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위구르인들은 7세기에 보다 더 발달된 형태로 농업에 종사했다. 그들은 밀, 옥수수, 기장, 감자, 참깨, 땅콩, 포도, 멜론, 목화 등을 재배했다. 이 밭은 위구르인들에 의해 축조된 카레즈(지하수로)로 먼 거리까지 물을 대어 관계했다. 이 카레즈는 오늘날 투르판 도시 근방에서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면은 상업적인 가치가 있는 지방 상품을 하나이다. 목화로 만들어진 면과 제품들은 그 지역의 이익증대에 기여한다.
다른 상업적인 가치가 있는 제품들은 카펫이다. 호텐, 카쉬카르 그리고 투르판에 있는 도시들에는 카펫트 수공 센터가 있다.
위구르 의학
위구르인들은 다양한 의학적 지식과 경험을 가지고 있다. 송 왕조(AD906~960)의 사료에 보면 위구르인 의원들이 나타난다. 난토는 중국을 여행했고 중국에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종류의 의학 지식을 전달했다. 64)
또 고고학적인 탐사에서 놀라운 정도로 정밀한 인체의 스케치를 발견했다.
중국 의학의 권위자인 리 시즌(Li Shizen.,1518-1593)에 이해 집대성된 의학개론에 위구르 의술에 사용된 103가지의 다른 약초들이 기록되 있다. 타타르의 학자 라쉬트 라메티 아라트(Rashit Rahmeti Arat)는 Zur Heilkunde der Uighuren(위구르인들의 의학의 실제)라는 제목의 두권의 가치있는 책을 동투르키스탄에서 발견된 위구르 문서에 기초해서 1930년과 1932년에 독일에서 출판했다. 그 책에서 아라트는 위구르 의학과 의학적인 치료법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주고 있다. 그가 발견하고 연구한 문헌들에는 침술의 설명과 함께 매우 중요한 인체의 스케치가 있었다. 몇 몇 서구의 학자들은 그러한 침술은 중국에도 없는 것이라고 탄성을 자아냈다. 그것은 중앙 아시아인의 원조 의술이며 위구르인들의 완벽한 기술인 것이다.65) 전통적인 위구르 의술은 기록 시대를 넘어서 2,700년 이상으로 소급된다. 그것은 오늘날의 동 투르키스탄에서 여전히 실시되고 있는 의술이다.
건축, 예술, 음악, 인쇄술
건축과 예술, 음악, 그리고 인쇄 와 같은 분야에서 위구르인들은 또한 뛰어났다. 동투르키 스탄을 여행했던 학자들과 고고학자들과 중국의 사절은 종종 위구르의 높은 도시문명에 수준에 높은 평가를 해왔다.
일례로 AD981~984년 사이에 카라코자 위구르 왕국 에 중국 대사로 있었던 중국의 왕 옌 더(Wang Yen(Yan) De)는 그의 기억들을 따라 적은 것을 보면 “나는 내가 위구르 왕국에서 발견해온 광대한 도시문명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 왕국의 도처에 지어지는 사원, 수도원, 담의 그림들, 조각상, 누각, 정원, 주택들 그리고 궁전의 아름다움은 다 묘사할 수 없을 정도다. 위구르인들은 금, 은, 꽃병, 도자기류의 세공에 매우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다. 몇 몇은 신이 이 사람들에게만 이러한 재능을 부어줬다고 말할 정도다.“라고 적고 있다.66)
알버트 그루엔베델
“투르판은 한점의 의심도 없이 잊혀진 아시아의 비상한 관심을 갖게하는 도시다. 그 도시의 크기는 주목할 만 하다. 내적으로 거룩한 도시이고 사원들과 궁전들로만 이루어진 도시이며 지금도 존재하는 성벽들의 가장 넓은 곳이 7천 400피트이다. 층 층으로 된 몇 백 개의 사원들과 웅장한 아치형의 건물들이 넓은 지역을 덮고 있다.”67)
프레디날드 드 샤슈어
“중앙 아시아의 보존된 언어와 기록 문명을 보존한 이들이 바로 위구르인들이다.”68)
알버트 본 레콥
“중앙 아시아에서 위구르인들의 언어와 문자는 다른 종족들의 도시문명을 더 풍족하게 하는데 기여했다. 그 당시의 유럽과 비교되는 위구르인들은 보다 진보된 문명을 가지고 있었다. 동투르키스탄에서 발견된 문헌들은 위구르 농부들이 계약서와 법률 전문용어를 기록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얼마나 많은 유럽의 농부들이 그 시대에 그럴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그 당시의 위구르 문명의 정도가 어떠했는가를 보여준다.”69)
라즐로 라소니
“위구르인들은 쿠텐베르크 몇 세기 이전에 책을 인쇄할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70)
볼프람 에버허드
“중세시대에 중국 시가, 문학, 극장, 음악 그리고 그림은 위구르인들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 ”71)
러시아 학자 판투소브는 위구르인들이 그들 스스로의 악기를 만들었다고 적고 있는데 그들은 62가지의 서로 다른 종류의 악기들을 가지고 있었고 모든 위구르인들의 집에 두타(dutar)라고 불리우는 악기를 사용하곤 했다고 적고 있다. 72)
중앙 아시아를 일 천년 동안 호령하던 이 위구르의 힘과 명성과 문명은 동투르키스탄에 만주(청)의 침략 이후 그리고 민족주의자들의 통치기간과 특별히 중국의 공산당의 통치기간동안 급속도로 기울어갔다. -끝-
1) 두산세계 대백과사전
2) 이 비슷한 시기에 중국의 진시왕은 자신을 ‘황제’라고 칭하였다.
3) 삼국시대 때 위나라에서는 사마 의(司馬懿)가 중심이 되어 촉(촉한)을 격퇴하였기 때문에 마침내 사마씨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으며, 그의 아들 사마 소(司馬昭)는 263년 촉한을 멸망시킨 공적으로 진왕(晉王)에 봉해졌으며, 265년에는 그의 아들 사마 염(司馬炎)이 위제(魏帝)를 강압하여 제위를 양위받고 진(晉)나라(서진)를 세웠다. 이 사람이 서진(西晉)의 무제(武帝)이다. 무제는 280년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재차 중국을 통일했으나 내분과 혼란이 계속되자 후한이래 피 지배계급이던 흉노, 선비, 갈, 저, 강(북방 민족)에 의해 화북지방에서 16국을 세웠다.(5호 16국)
4) 선비족이라고 하지만 사실상은 반은 흉노족이다. 위진 남북조 시대의 선비족의 나라인 북위를 가르킴, 후한서에서는 기원 후 85~91년 사이, 鮮卑는 後漢조정의 부탁을 받고 南흉노, 丁零(정령: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유역에 살던 유목민족 국가)과 함께 北흉노 토벌에 나서 北흉노를 패퇴시켰다. 이때 10여만 落(락:한 가구를 뜻함)의 北흉노인들이 선비족으로 귀속됐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10여만 落이라면 매 落마다 5인 정도로 계산해도 50~60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구다. 이 인구는 당시 선비족의 인구보다 10만정도 많은 인구다. 즉 선비족의 반은 흉노족이었다는 결론이다.
5) 연연(記記): 북흉노제국(155년)을 멸망시키는데 중국과 연합했던 몽골계의 선비족이 몽골리아 지역에서 흉노의 역할을 담당하지 못함으로해서 몽골리아 지역은 흉노이후 약 250여년 동안 비어 있게 되었다. 이 오랜 침묵을 깨고 나온 강력한 유목민족제국이 400년 경의 연연이다. 역사에는 우연이라고도 불려지는 제국이다. 그들에 관한 기록이 거의 없는 관계로 그들의 역사를 자세하게 알기는 어렵다. 연연은 400년경 사륜이라는 지휘관이 나타나 한북지방의 고차를 멸망시키고 제국을 건설하였다고 전해진다. 북위는 429년 이후 오손과 고차등과 동맹을 맺어 연연과 싸웠다. 448년 열반과의 동맹은 연연에 커다란 타격을 주어 429년 연연의 통치자 달단이 사망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에도 연연은 계속해서 북위에게 위협적인 존재였었다.
6) 투르크 종족: Huns, Kazars, Sabirs, Saragurs, Kuturgurs, Barsils, Kok-Turks, Seljuk Turks.
7) 위구르 종족의 표기는 UIGHUR, UYGUR, UIGUR, UIGHUIR, UIGUIR, WEIWUER이다
8) Beijing Review, 24.12.1990
9) Kommunizim Tugi, 12.1.1989, Almaty
10) Estimates of the Eastern Turkestan Refugee Committee in Istanbul.
11) I. Kafesoglu, Turk Dunyasi El Kitabi, Ankara, 1976, p. 725.
12) 유방(劉邦)이 세운 나라
13) 삼국(三國)의 하나 조비(曺丕)가 세웠으며 지금의 황하(黃河) 지역의 각 성(省)과 호북(湖北), 안휘(安徽), 강소(江蘇) 북부, 요령(?寧) 중부 일대에 있었음
14) 수(隨)의 뒤를 이어 오늘날의 서안(西安)인 (長安)을 수도로 하여 이연(李淵)이 세운 나라
15) 조광윤이 후주(後周))의 선위(禪位)를 받아 세운 왕조
16) Jack Cheng, Sinkiang Story, New York, 1977, p. 96.
17) 위구르라는 명칭은 북위시대에는 고차, 수대는 위흘, 당대는 회흘?회골, 송?원대에는 외오아라 불렸다. 투르크는 언어학적으로 '연맹?군집(uy+gur)'의 의미로 해석된다.
18) Riza Nur, Turk Tarihi, Istanbul 1972, p. 57; Kommunizim Tugi,13.12.1973; Kafesoglu, Ibid. p. 706-707, A. Caferoglu, Eski Turk Sozlugu, Istanbul 1968, p. 8.
19) 중국 사서에는 흉노(匈奴)라고 기입하고 있다. 한서 권94 열전(列傳)제64 흉노전(匈奴傳)에서는 동한(東漢) 시대의 역사가인 반고(班固)는 자신의 역사서에서 흉노족의 잔악함을 묘사하여 "오랑캐들은 매우 탐욕스럽게 사람과 재물을 약탈하는데, 그들의 얼굴은 비록 사람 같으나 성질은 흉악하여 마치 짐승 같다(人面獸心)"라고 기록하였다. 본시 한족(漢族)들이 흉노족들을 멸시하여 쓰던 말이었으나, 후에는 「성질이 잔인(殘忍)하고 흉악(凶惡)한 짐승 같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게 되었다.
20) 위구르 역사를 읽기전 항목에서 설명했지만 다시 언급하면 위진 남북조 시대의 선비족의 나라인 북위를 가르킴, 후한서에서는 기원 후 85~91년 사이, 鮮卑는 後漢조정의 부탁을 받고 南흉노, 丁零(정령: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유역에 살던 유목민족 국가)과 함께 北흉노 토벌에 나서 北흉노를 패퇴시켰다. 이때 10여만 落(락:한 가구를 뜻함)의 北흉노인들이 선비족으로 귀속됐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10여만 落이라면 매 落마다 5인 정도로 계산해도 50~60만명에 이르는 막대한 인구다. 이 인구는 당시 선비족의 인구보다 10만정도 많은 인구다. 즉 선비족의 반은 흉노족이었다는 결론이다.
21) 돌궐제국
22) Lazlo Rasonyi, Tarihte Turkuk, Ankara 1971, pp. 105, 107.
23) 위구르 종족은 돌궐에 속해 있었지만 여기에서는 따로 언급하고 있다.
24) 카간: 왕, 통지자의 의미
25) Collin Mackarras, The Uighur Empire, Canberra 1968, p. 6
26) 타이족은 7C-8C에 중국 남부, 지금의 운남지방에 대리(大理)국을 세웠다. 그 후 10C-11C에 타이 족은 남조(난짜오)왕국이라는 작은 나라를 세우고 AD 750년 이후에 따리(Tail)에 수도를 정했다. 그러나 북쪽에 있던 한족의 세력이 확대되고 내부적 압박도 가중되면서 타이 족의 본격적인 이주가 시작되었다. 원래의 운남지방에 남아있는 타이 족은 장족의 뿌리가 되었고 나머지 타이 족의 일부가 서쪽으로 이동하여 지금의 라오스지역, 라오민족의 뿌리가 되었고 다른 일부는 미얀마 북부의 샨족의 뿌리가 되었다, 그리고 일부가 짜오프라야 강변의 짜오프라야 계곡에 정착하여 수코타이 왕조의 뿌리가 되었다. 당시 이 곳을 지배하고 있던 크메르인들은 새로 이주하여온 타이인을 싸얌(Siam)인이라고 불렀다.
27) 9. Collin Mackarras, The Uighur Empire, Canberra 1968, p. 11
28) 11. Ibid., p. 11
29) 두산세계대백과사전: 몽골 북부의 오르콘강(江) 상류 좌안(左岸)에 있는 위구르제국의 수도 유적에 있는 비문이다. 이 수도의 명칭은 오르두 발리크였다. 카라발가순이란 몽골어(語)로 ?흑도(黑都)?였으나 변하여 ?폐도(廢都)?를 의미한다. 도성 전체의 면적은 분명치 않지만 그 안에 동서 약 510 m, 남북 약 400 m의 궁전이 있었다. 북아시아의 유목민족이 처음으로 세운 도시이다. 마니교 사원터와 관개용수로도 발견되었으며, 1890년 보의가한(保義可汗:재위 808~821)의 기공비(紀功碑)도 나왔다. 이것이 카라발가순 비인데, 한문 ?투르크문 ?소그드문의 3서체로 씌어 있어 유목 위구르 사회속에 서방문화?중국문화를 채택하여 정착문화화한 웨이우얼의 모습과 국제적인 상인인 소그드인의 문화가 깊이 침투된 것을 나타내고 있다. 이 외에도 시네우스 비문:제2대 갈륵가한(葛勒可汗:재위 747~759)의 기공비(紀功碑). 시네우스호 부근에서 발견되었다.
30) 9. Collin Mackarras, The Uighur Empire, Canberra 1968, p. 9
31) 키르키즈스와 카작의 국경지역 고지대., 이들은 카를 루크족의 땅으로 들어간 뒤의 카라한 왕조의 건설에 관계했다고 생각된다.
32) 동부 텐산산맥의 북정(北庭), 언기(焉耆), 고창(高昌)일대를 장악하였으며, 그곳을 거점으로 위구르 왕국을 건설해 동투르키스탄을 점령했다. 이 텐산북록(天山北麓) 초원과 투르판 농경지를 중심으로 하는 <텐산 위구르 왕국(서위구르 왕국)>의 내부에서 언어와 주민의 구성에서 튀르크 문화가 진전되어 종래의 한문화(漢文化)가 아리아계 문화와 혼합된 정착 위구르 문화가 형성 되었다.
33) 14. Kafesoglu, op. cit., p. 726.
34) 6세기 무렵부터 14세기경까지 중국 북서부를 중심으로 활약한 민족. 티베트계 강족(羌族)의 일족으로, 여러 부족으로 나뉘어 7세기 초부터 토번(吐蕃:티베트)과 칭하이[靑海] 지방의 강국 토욕혼(吐谷渾) 사이에 있는 지역에 거주하였다.
35) 14. Kafesoglu, op. cit., p. 727.
36) 16. Riza Nur, op. cit., p. 358.
37) Von Gabain, Das Leben in uighurischen Koenigreich von Qoco, Wiesbaden 1973, p. 19.
38) 18. Riza Nur, op. cit., p. 348.
39) 20. Fan Wen Lan, A Short History of China, Shanghai 1947, p. 279.
40) 퉁구스족 중에서도 청조(淸朝)를 세우고 그 지배층이 된 남방(南方) 퉁구스족에 속한다. 역사상 나타나 있는 숙신(肅愼) ?읍루(獵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등은 만주족의 전신(前身) 또는 같은 계통의 종족이다. 형질(形質)은 몽골로이드계로서 키는 비교적 작고 단두형(短頭型)이 특징이다. 만주라는 명칭은 문수보살(文殊菩薩)의 문수의 음(音)이 전화한 만주(曼珠→滿住)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41) 21. M.E. Bugra, Chinese Policy, Istanbul 1954, p. 25
42) 22. I.Y Alptekin, Dogu Turkistan Davasi, Istanbul 1973, pp. 126, 127, 128
43) 23. Owen Lattimore, Pivot of Asia, Boston 1950, p. 32
44) 23. Owen Lattimore, Pivot of Asia, Boston 1950, p. 50
45) 25. I.Y Alptekin, op. cit., pp. 154, 175
46) 26. Owen Lattimore, op. cit., p. 223.
47) 27. Albert von Lecoq, Turan, Berlin 1918, p. 452
48) Emel Esin, Islamiyetten Onceki Turk Tarihi, Istanbul 1978, p. 117
49) Ibid.
50) Ibid.
51) 31. Lazlo Rasonyi, op. cit., p 112
52) Ibid.
53) Ibid.
54) 34. Bradford D. Kelleher, Along the Ancient Silk Road, New York 1982.
55)"유쑵 하쓰 아집"은 13,290줄로 쓰여진 "쿠?구 빌릭(아는 것은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이라는 "다쓰탄(시로 쓰여진 큰 책)"을 쓴다. "유쑵 하쓰 아집"은 이 다쓰탄에서 아는 것이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준다는 이론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는 또, 나라를 다스리는 법과 관습을 아주 정확하면서도 작은 부분까지 세밀하게 기록했다.
56) 위대한 학자 "메흐뭍 케쉬케르"는 "위구르 돌궐"어와 "아랍어"를 비교한 값으로 따질 수 없는 작품인 "돌궐어 대 사전(Divani lugatit turk)"을 편찬한다. 이 작품에는 그 당시의 세계지도가 각종 자료들과 함께 그려져 있다. 이 지도에 한국, 일본 등의 나라가 정확하게 나타나 있다.
57) 36. Ismet Parmaksiz, Genel Tarih, Ankara 1976, p. 33
58) Denis Sinor, Inner Asia, Bloomington 1969, p. 330
59) Peter Hopkirk, Foreign Devils on the Silk Road, London, 1980, p. 25
60) Collin Mackarras, op. cit., p. 7
61) Ibid, p. 8
62) 41. S.M. Kashgarli, Akademi Mecmuasi, Istanbul, Oct. 1985, No. 4
63) Al Abudi, Shark-ul Vasta, 12.8.1983
64) Shuyl Unver, Uygurlarda Tababet, Istanbul 1936. pp. 4,5,6.
65) Yakup Bugra, Tercuman, 6.6.1984
66) Bahaeddin Ogel, Turk Kulturunun Gelisme Caglari, Istanbul 1988, p. 206
67) Along the Ancient Silk Routes: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April 3 - June 20, 1982.
68) Caferoglu, op. cit. p. 1
69) Suheyl Unver, op. cit., pp. 4-6
70) Lazlo Rasonyi,, op. cit., pp. 105-107.
71) Wolfram Eberhard, Cin Tarihi, Istanbul 1947, p. 116.
72) G. Sadvakasov, Uygur Edebiyatining Kiska Tarihi, Almaty, 1983, p. 7.
'한일관계 > 동북아민족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국인엔 특별한 DNA가 있다 (0) | 2011.01.06 |
---|---|
<한국인의 DNA를 찾아서>대륙 호령한 기마민족…‘노마드의 피’ (0) | 2011.01.06 |
꿈의 프로젝트 ''한일 해저터널'' 공사현장을 가다 (0) | 2008.11.13 |
'독도는 신라땅' 표기 日고지도 발견 (0) | 2008.11.13 |
동해를 건너간 신라인들 (0) | 2008.11.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