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한일관계사

[그때 그 일본인들] -한길사 출판

imaginerNZ 2008. 11. 13. 04:12

그들의 위인…우리에겐?

한겨레 | 기사입력 2006.08.18 16:06



[한겨레] 요코하마 베이스타스라는 일본 프로야구단이 있다. 이 야구단은 한국 남해의 갯장어와 동해의 고등어를 먹고 태어났다. 그 연원을 따지자면 그렇다는 이야기다.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의 전신인 다이요 웨일즈는 다이요어업(현 마루하 그룹)이 소유한 야구 구단이었다. 다이요어업의 창업자는 한국 연안 어업으로 일세를 풍미한 나카베 이쿠지로(1866-1946)다. 생선중개상이었던 그는 특유의 수완을 발휘해 한반도 연안어업을 완전히 장악했다. 울산 방어진은 그가 다스리는 성(城)이 됐고, 곳곳에서 벌인 마구잡이 어업으로 동해와 남해가 순식간에 황폐해질 정도였다.

일본인이 보기에 나카베는 시대의 풍운아이자 창의적인 기업가다. 가난한 집안을 일으키고자 세태를 잘 파악해 시장을 개척했고, 스스로 각종 어업기구들을 개발하는 선견지명까지 갖고 있었다. 한국인이 보기에 나카베는 일제 강점기를 등에 업은 식민주의자일 뿐이다. 토착 연안어민을 사실상 노예화시켰다. 일본 근해였다면 불가능했을 난획으로 한반도 인근 수산자원의 씨를 말렸다.

일본 프로야구사에 한국이 있고, 한국 어민의 현실에 일본이 있다. 이렇게 일본인의 유전자엔 한국이, 한국인의 유전자엔 일본이 새겨져 있다. 두 나라의 현대사는 서로를 떼어놓고 이해할 수 없다. 함께 섞고 맞들려야 두 나라의 현대사를 제대로 볼 수 있다. < 그때 그 일본인들 > 은 한국사에 영향을 끼친 일본인의 생애를 통해 다시 일본을 성찰하는 독특하고도 흥미로운 책이다.

나카베 이쿠지로를 비롯해 모두 72명의 일본인이 이 책에 등장한다. 메이지 시대부터 1980년대에 이르는 한일 관계사에 굵직하고도 독특한 족적을 남긴 사람들이다. 서로 다른 필자들이 각 인물의 생애를 짚었다. 이토 히로부미(1841-1909), 후쿠자와 유키치(1835-1901) 등 한국인들이 익히 알고 있는 인물들도 있지만, 대부분은 '국사 교육'의 체계에서 좀체 등장하지 않았던 사람들이다.

오이 겐타로(1843-1922)가 대표적이다. 그는 김옥균을 수반으로 하는 독립당 정권을 조선에 세워 (일본을 포함한 열강으로부터) 독립된 나라가 한반도에서 탄생할 수 있도록 도우려 했다. 대한제국같은 허약한 '사대당'으로는 독립이 불가능하니, 실력을 갖춘 공화정을 조선에 수립하려는 뜻이었다.

한-일 유전자 뒤섞이게 한 인물들

그 목적을 위해 그가 수립한 계획이 기괴하다. 오이 겐타로는 민씨 세력의 주요 인물을 암살하면 조선 내부의 독립당 세력이 봉기할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일본 자유당의 소수 정예를 뽑아 조선으로 밀항하려다 실패했다. 그는 민씨 일가 암살공작이 성공해 조선 내부에서 자유주의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잡으면, 그 영향을 받은 일본에서 뒤이어 민권혁명이 일어날 것이라고 판단했다.

일종의 미국식 연방제를 꿈꾸며 '대등한 한일합방'을 주창했던 다루이 도키치(1850-1922), 기독교를 통한 아시아의 진보적 동화를 주장한 에비나 단조(1856-1937) 등도 흥미롭다. 근대 일본의 '진보주의자'들이 어떤 눈으로 조선을 바라봤는지를 살피는 한국인의 심사는 복잡할 수밖에 없다. 일본 진보주의자들 역시 조선을 개화·개혁의 대상이나 일본 혁명의 수단으로 봤던 것이다.

정한론을 주창한 사이고 다카모리(1827-1877)로부터 사이토 마코토(1858-1936), 우가키 가즈시게(1868-1956), 미나미 지로(1874-1955) 등 역대 조선총독들을 살피는 재미도 빼놓을 수 없지만, 불거져 나온 발톱같은 그들의 존재보다는 알게 모르게 현대 한국의 형성에 영향을 준 사상가·지식인들의 발자취를 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가나자와 쇼자부로(1872-1967), 오구라 신페이(1882-1944) 등은 근대 한국어학의 씨앗을 뿌린 인물이다. 한국어와 일본어의 뿌리가 같다거나 두 언어의 동화 가능성을 집중 연구했다는 점에서 '식민 학문'의 근원이기도 하다. 아키바 다카시(1888-1954), 무라야마 지준(1891-1968),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 아사카와 다쿠미(1891-1931) 등을 빼놓고 한국 민속학과 문예론을 이야기할 수 없다. 조선 경제사에 봉건제도가 결여돼있다고 분석한 후쿠다 도쿠조(1874-1930)는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는 식민지근대화론-내재적발전론 논쟁의 시원을 이룬다. 이들 모두는 해방 이후 한국 학자들이 필생을 걸고 극복하려 했던 대상이기도 하다.

광복 후 극복해야만 했던 대상들

평화운동과 민중운동의 큰 어른으로 추앙되는 함석헌의 뒤에는 기독교 평화주의를 주창했던 우치무라 간조(1861-1930)가 있고, 조선이 낳은 세계적 무용가로 칭송되는 최승희의 뒤에는 서구무용으로부터 일본식 무용의 새 길을 개척했던 이시이 바쿠(1886-1962)가 있다. 야마자키 게사야(1877-1954), 후세 다쓰지(1880-1953), 후루야 사다오(1889-1976) 등 일제강점기 한국독립운동가를 지지했던 인권변호사들의 족적이 여전히 감동적이고, 박열과 함께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가네코 후미코(1903-1926)의 이야기도 새롭다.

그러나 혁명가와 사상가의 이야기보다 더 감동적으로 한일 관계사를 웅변하는 인물이 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 이후까지 목포의 '공생원'에서 한국의 고아를 보살핀 다우치 지즈코(1912-1968)가 주인공이다. 한국인 윤치호와 결혼한 그는 해방 직후 친일파를 살해하려는 사람들에게 위협당했고, 한국전쟁 때는 북한군에 의해 인민재판을 받았으며, 연합군의 점령 뒤에는 공산분자라는 이유로 체포됐다. 그때마다 죽음의 문턱에 섰고, 그때마다 마을 사람들이 그를 지켰다. 전쟁 와중에 남편을 잃은 뒤에도 끝까지 한국에 남아 아이들을 돌보았던 그는 1968년 위암으로 죽었다.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한국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국민장을 받았고, 일본 정부로부터도 란쥬호쇼(사회사업 공로자에게 주는 기장)를 받았다. 다우치 지즈코는 박애의 정신으로 한국과 일본을 동시에 끌어안았다. 그가 사랑했던 것은 이념과 민족이 아니라 인간이었다. 현재의 한일 관계가 간절히 바라는 것은 제2, 제3의 다우치 지즈코다.

이 책은 근현대 일본인들을 섭렵하면서 현대 일본사 및 일본사상사를 엿보는 기회를 제공하는 등 여러 미덕을 갖추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도 있다. 일본인 필자들이 일본어로 쓴 책이었던 탓에 각 인물을 더 접하려는 이들에게 소개하는 참고문헌이 대부분 일본 서적이다. 한국 독자들로선 관련 국내도서 목록에 갈증을 느낄듯 하다. 전후 시대를 대표하는 일본인 대부분이 '평화주의자'이거나 '양심적 지식인'인 것도 옥의 티다. 지금 일본에는 고이즈미 총리를 비롯한 2000년대판 '정한론자'들이 있다. 한국 독자들로선 곳곳에서 맹활약중인 일본 우익 인사들이 더 궁금하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사진 한길사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