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대표적인 축제는 널리 알려져 있듯이 동맹(東盟)이다. 먼저 중국인들이 동맹을 보고 들어서 기록한 [삼국지] 〈고구려〉조에서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보자.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데 나라의 큰 행사로 치러진다. 이를 동맹이라고 부른다. 이런 공식모임에는 모두들 비단에 수놓은 의복과 금과 은으로 치장을 하고 나온다. (중략) 그 나라의 동쪽에 수혈(隧穴)이란 큰 굴이 있다. 10월 국중대회(國中大會) 때 이곳에서 수신을 맞이하여 나라의 동쪽 강 위에 모시고 가서 제사를 지내는데, 나무로 만든 수신상을 신의 좌석에 모신다.'
동맹은 하늘과 수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국가적 행사였다. 동맹행사의 핵심은 동굴에서 나무로 만든 신상에다 수신을 접신시키고 강가에 마련된 신의 좌석에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일이다. 나무로 만든 수신(木隧神)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삼한(三韓)에서는 큰 나무를 세우고 귀신을 섬겼는데 이를 소도(蘇塗)라고 했다. 오늘날도 나무로 만든 새 형상을 장대 끝에 올려놓은 솟대(神竿)를 세우는 풍습이 있다.
『동명왕편』에 추모왕이 큰 나무 아래에서 유화부인이 보낸 새(鳥)로부터 씨앗을 받았다는데 이것이 신목(神木)신앙의 한 예로 볼 수 있다. 만주에서는 신목을 세워놓고 이를 소모(索莫)라 부른다고 한다. 이것은 추모(鄒牟)왕에서 연유된 명칭인 듯하다. 그렇다면 추모왕은 주몽이라는 활 잘 쏘는 사람이란 명칭 외에도 새 모양의 신이 내려앉은 신목에 대한 신앙을 나타내는 명칭이라고 볼 수 있다. 추모왕 즉 신목을 통해 하늘과 땅이 만나는 것이지만, 반대로 천신과 지신이 만나 신목의 생명의 낳은 것이기도 하다. 즉, 동맹행사는 해모수와 유화가 만나고 추모왕이 탄생하는 고구려 건국이야기의 재현인 셈이다.
혹자는 이 의식을 하늘의 해신(日神)과 물의 신(水神)이 만나 혼례의식을 치르는 것으로 이해하며, 이때에 동맹제가 극점에 달한다고 본다. 또한 동맹제를 수확제로 보고 한해의 풍성한 수확에 감사하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함을 상징하는 일신과 수신의 결합 의식을 통해 내년의 풍요를 빌었던 축제로 보기도 한다.
부여의 영고(迎鼓), 동예의 무천(舞天), 한(韓)의 5월제와 10월제 등은 동맹과 같은 성격을 지닌 행사였다. 그런데 영고는 북을 맞이한다는 뜻이고, 무천은 춤추며 하늘 굿을 한다는 의미다. 북은 신령을 맞이할 때 무(巫)가 즐겨 사용하는 악기다. 북을 울리며 춤을 주며 그들이 기대한 것은 신령과의 만남(接神)이었다. 즉, 동맹 등은 당시 동방사회에서 벌어지는 나라 굿이었고, 집단 신들림 행사였던 것이다. 『삼국지』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노래와 춤을 좋아하여, 나라 안의 촌락마다 밤이 되면 남녀가 떼지어 모여서 서로 노래하며 유희를 즐긴다고 했다. 동맹행사는 그러한 춤과 노래가 벌어지는 가장 큰 한마당이라고 하겠다.
고구려에서 동맹은 수도에서만 행해진 것은 아니다. 동맹은 고구려에서 행한 가장 큰 제의일 뿐이다. 동맹에는 고구려 5부중 왕권을 장악하고 있는 계루부 사람들과 다른 부의 대가들을 비롯한 고위층들이 주로 참석했을 것이다. 하지만, 왕을 배출하지는 못하는 소노부는 그들만의 조상묘(宗廟)와 신성한 별(靈星-농사를 주관하는 별)과 토지신(社稷)에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즉, 소노부에서도 작은 동맹 행사를 치른 것이다. 동맹은 당시 동방사회에서 작은 집단들마다 각기 수행한 제의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것일 뿐이다. 물론 그러한 굿들도 고구려의 중앙 통제력이 강화되면서 마을 굿에 모시는 신의 위상들에도 차이를 가져오게 되어 마을 굿에서 천신이나 시조신을 모시지는 못했을 것이다.
동맹에 사람들이 전부 금,은,비단으로 치장하고 참석했다는 것은 동맹제의 참석자격이 귀족들로 제한되었음을 의미하기 보다는 고구려인들이 동맹을 중하게 여겨 최고의 치장을 하고 나왔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마치 브라질의 리우카니발처럼 많은 이들이 즐거운 축제에 참석하는 모습을 상상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사람이 모이게 되는 자리에서는 국가적 과제에 대한 정치적 논의가 벌어질 수 있었다. 부여의 영고(迎鼓)에서는 형옥(刑獄)을 집행하고 가벼운 죄인을 풀어준다고 했다. 동맹에서도 죄 지은 자를 벌하거나 사면해주는 일 외에도 군사행동, 대외관계, 조세수취, 공공사업 등에 관한 것을 점검하고 논의했을 것이다. 10월이란 시점이 한해의 수확에 감사하고 내년의 일을 점검하는 시기인 만큼 국가적 대소사가 이때 논의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동맹의 주관자인 왕은 제의를 마친 후, 행사에 모인 여러 귀족들, 부족의 대가들을 상대로 정치행사를 진행했을 것이다. 258년 탁발선비(拓拔鮮卑)족의 제천행사에서는 모든 부족장들이 와서 제사를 도왔는데 유독 백부(白部)의 대인이 참석을 하지 않자, 탁발선비족 왕은 그를 죽여 버렸다. 국가적 행사에 불참한다는 것은 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반란의 의미로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동맹에 불참한 귀족이나 부족의 대가들에 대해서는 엄중한 처벌이 가해졌을 것이다. 동맹은 왕권의 신성함을 재확인시키는 의식인 동시에 국가의 단합을 촉구하고 귀족들이 충성을 확인 받아 왕권을 강화하는 행사인 셈이다. 따라서 국가적 관심하에 지속될 수 있었다.
제천행사는 중국도 있지만, 중국의 제천행사는 의례적인 면이 발달하여 행사를 주관하는 천자만의 권위를 확인시켜주는 행사였다. 참석한 사람이 함께 즐기는 행사가 아니라, 경건함 의식에 짓눌린 행사였다. 인간과 함께한 신은 죽고, 천자에게 천명을 내리는 비인격적인 신만이 남은 것이 중국의 제천행사였다.
반면 동맹은 북방 유목족의 행사처럼 함께 즐기고 떠들고 흥청거리는 행사였다. 오랜만에 각 부족들이 모여 공동의 일을 논의하는 행사였으며, 남녀의 만남의 장이었다. 『북사(北史)』등의 기록에서는 고구려의 남녀들이 밤늦도록 노래하고 놀다가 서로 사랑하면 바로 결혼한다고 했다. 그 장이 동맹이었을 것이다. 동맹은 또한 오락과 예술의 마당이었으며, 물건을 교환하는 시장이기도 했다. 몽고의 마유주 축제, 마두금 축제처럼 사람들이 북적 거리는 마당이었다. 또한 몽고의 나담축제나 그리스의 올림프스 제전처럼 씨름, 활쏘기를 비롯한 경기도 열렸을 것이다.
『삼국사기』〈온달〉열전에는 고구려에서는 매년 봄 3월 3일날 낙랑 언덕에 모여 사냥을 하고, 그 날 잡은 산돼지, 사슴으로 천신과 산천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그 날이 되면 왕이 직접 사냥을 하고, 여러 신하들과 병사들이 모두 따라 나섰으며, 이때 가장 많이 사냥을 한 사람인 온달을 왕이 직접 만났다고 했다. 『북사』,『수서』등에는 봄 가을로 사냥대회가 열리며 왕이 직접 참석한다고 하니 가을에도 이와 같은 행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혹 가을의 사냥대회가 동맹행사와 같은 것일 가능성도 있다.
이러한 행사외에도 해마다 연초에는 왕이 직접 신하들과 함께 패수(浿水)가에 사람들이 모여 놀이를 하는 것을 구경하는 행사도 있었다. 동맹을 제외하고도 잦은 축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구려 사람들이 밤마다 노래하고 춤추었다는 중국인의 견문은 이 같이 축제와 놀이와 함께 살았던 당시 고구려인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