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동북아민족사

부여의 제천의식 -영고

imaginerNZ 2008. 7. 4. 04:54

부여의 제천의식 -영고

 

기원전 훨씬 전인 부여시대 사람들은 희고 밝은 옷을 즐겨입고 외출 할때는 금은보화로 치장하고, 가죽신을 신었다. 영고라는 제사를 지내며 일주일 밤낮 가무를 즐겼다. 그때부터 우리는 백의민족, 신바람 민족이라고 불렸다.
 
집단적인 농경의례의 성격을 가진 것으로 수확제·추수감사제라고 할 수 있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부여조에 "은(殷)나라 정월에 하늘에 대해 제사하는데, 이때 형벌과 옥사를 중단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以殷正月祭天國中大會連日飮食歌舞名曰迎鼓於是時斷刑獄解囚徒)고 했다. 〈후한서〉에도 같은 내용이 전해지는데 그 시기를 납월(臘月)이라 했다. 이는 12월의 다른 명칭으로 은정월과 같다. 일찍 농경사회가 시작된 우리 고대사회의 대부분은 추수가 끝날 무렵 대대적인 농경의례를 행했는데,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의 무천(舞天), 삼한의 10월제가 이에 속한다. 영고를 부여어의 한자표기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맞이굿[迎神祭]과 같은 성격의 것으로 보고, 북[鼓]이 활과 화살처럼 하늘과 통하는 신비력을 지녔다고 여긴 예맥(濊貊) 계통의 사회 풍속에서 나온 종교행사였다고 보기도 한다. 〈삼국지〉에는 부여가 자리잡은 지역이 동이(東夷) 지역 중에서도 가장 넓고 평탄한 곳이며, 오곡이 자라기에 적당하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또 옛 부여 풍속으로 가뭄이나 장마가 계속되어 오곡이 제대로 영글지 않으면 그 허물을 국왕에게 돌려 
왕을 바꾸거나 죽이자는 논의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부여는 기본적으로 농경을 주된 산업으로 삼고 있었던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영고라는 행사가 행해진 때가 유독 겨울이었던 점은 부여사회에 유목이나 수렵의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부여의 경우 중앙의 최고 관직명이 가축의 이름을 딴 것이고, 납월의 '납'(臘)이 제사의 명칭으로 짐승을 사냥하여 선조를 제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는 점도 이를 뒷받침한다
  
‘영고’에 관한 기록이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부여조에 전한다. 추수를 마친 12월에 온 나라의 백성이 동네마다 한데 모여서 하늘에 제사지내고 회의를 열었는데, 의식 직전에 ‘맞이굿[迎神祭]’을 벌였다. 며칠 동안 계속 노래하고 춤추며 음주를 즐기고, 죄가 가벼운 죄수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부여 사람들은 지금의 중국 북동부 눙안[農安] ·창춘[長春] 지방을 중심으로 자리잡아 주로 농업에 종사한 농경 민족으로서, 농사를 잘 짓게 하여준 하늘에 감사하는 의식인 고구려의 ‘동맹(東盟)’, 동예(東濊)의 ‘무천(儛天)’, 삼한(三韓)의 ‘농경의례(農耕儀禮)’ 등과 같은 일종의 추수감사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