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킴 작품방/수필집(미셀러니)

제주도의 고유명칭 복원에 대한 제언

imaginerNZ 2008. 5. 15. 19:38
 

제주도의 고유명칭 복원에 대한 제언(초안)


-엘리엇 킴



제주도(濟州道)는 한국의 행정구역상의 도(道)에 해당한다.

제주도(濟州島)는 한반도의 남쪽바다에 위치하며 한국에서 가장 큰 섬(島)의 한자어이다.

이 낱말은 조선반도인의 입장에서 바다 건너(濟)에 있는 뭍(州)으로 칠 수 있을 정도로 제법 큰 섬(島)의 뜻이다. (한반도는 한족이 사는 반도의 뜻인데 고대에 한족은 반도의 중남부에 위치했던 삼한지역에 거주하던 부족에 해당하고 고조선은 만주의 일대와 반도 북부에 걸쳐 융성했으니 이 두 용어는 각각의 지리적 한계가 있다. 그러면 우리가 국체를 정립하고 현재까지 국가로서 존립했던 역사를 살펴 반도의 이름을 정하는 게 타당하다는 관점에서 문제에 접근해 보자.

 

 우리 민족의 원류는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오래전 구석기 시대부터 반도 전역에 걸쳐 거주했던 반도 토착인 부족들이 있었다.

둘째로,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에 걸쳐 존립했던 고조선과 그 터전에 후속해서 거주했던 부족들이 있었다.

셋째로, 고조선 시대 이전에도 지속적이고 축차적으로 북방거주인들의 반도유입은 이루어지고 있었으나 정치적인 면에서 큰 의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한반도 부족국가의 성립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인구의 반도 유입을 중심으로 파악해 보면, 고조선 시대부터 반도로 남하하여 지배권을 확립했던 부족들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들은 개별적인 집단을 이루어 앞선 청동무기로 무장하고 기마용 말을 탄 무사들을 앞세워 반도로 진입하여 가지의 토착민들을 지배하여 웅거하였다.

현재의 조선인 또는 한국인은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유형의 혼혈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반도인의 정체성을 따져 보았을 때, 우리는 한 가지 난제에 봉착하게 된다. 피지배민이긴 하나 다수의 풀뿌리였던 반도 토착인들을 중심으로 반도의 명칭을 정할 것인지, 아니면 만주의 대부분과 조선북부를 지배했던 고조선과 그 후손인 남하 정복세력을 중심으로 반도인의 정체성을 결정할 것인지의 문제가 그것이다. 

이 난제를 해결하는데 중요한 역사적인 사례를 우리는 일본의 경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은 신석기 시대 이후로 사람이 거주해왔다. 구석기 시대에도 사람이 살았다는 설은 완전히 조작된 것임이 밝혀졌다. 신석기 시대말-청동기 시대-철기시대에 이르기까지 반도인이 지속적이고 축차적인 큐슈(九州)섬과 혼슈(本州)섬으로 유입(일본에서는 '도래(건널 渡 올 來)'라 함)이 이루어졌다. 기원전 30~10세기이후부터 소규모 유입이 지속되었다. 그러다 기원 전 3세기를 전후하여 고래부터 있었던 중국대륙 북부의 패권세력과 만주지역의 고조선 세력간의 충돌로 인한 정치적 불안정의 여파로 만주 일대에 거주하고 있었던 일부 지배층의 대규모 반도유입이 시작되었다. 강력한 남하세력의 영토 선점의 시도에 토착 씨족들은 복속과 항거를 반복하면서 점차 협조협조 또는 피지배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반도 내에 여러 토착 씨족세력들은 협조적인 피지배 또는 다른 곳으로의 회피적 이주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이합집산하던 세력쟁탈전의 와중에 토착민 중심의 지배세력들이 복속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일본열도로의 이주였다. 이제 일본으로의 이주는 과거와 판이한 양상을 띠게 된다. 북방부족의 대규모 반도로 진입하기 이전에 토착지배세력으로 군림했던 토착 씨족 또는 선대에 남하한 북방계 지배층들과 이 두 집단간의 혼인에 의한 혼혈 지배층이 전란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패배하거나 혹은 지배권을 탈취 당하여 신 지배층에 예속된 이후에 계획적이고 집단적으로 일본이주를 감행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아마도 그들은 전쟁에서 패배한 경우가 다수였을 것이다. 반도 곳곳의 쟁탈전에서 승리한 측이 애써 확보한 그들의 영토를 눈앞에 두고 있는데, 피가 채 마르지도 않은 영토의 경영을 우선하지 않은 채, 눈여겨 보지 않았던 미개발의 섬을 차지하기 위해 군대를 앞세워 일본으로 간다는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이런 반도의 세력쟁탈전의 여파로 일본열도의 서남부에 생겨난 것이 야요이 문명이다. 야요이인은 일반적으로 키가 장대하고 피부가 희며 눈이 가늘고 눈꼬리가 치켜 올라간 체형적 특질이 있다. 물론 일본열도에 반도의 북방계 정치권력을 박탈당한  지배층이 추종 토착민들을 거느리고 일본으로 갔다는 진술이 가장 타당하고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유의할 사실을 짚어보자.일본의 야요이 문명과 관련된 유적에 접근할 때, 고고학적으로 분묘를 발굴하고 그 인골과 부장품의 내력을 조사해 보면 그들은 모두 일본의 지배세력들에 해당한다. 거기에서 일본의 선주민들이나 반도에서 야요이인을 따라간 반도 토착민들의 유골이 발견될 가능성은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점이다. 

 

 

  

반도의  조선국에 들어 비로소 반도의 통일을 이루었으니 조선반도라 함이 타당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제주섬 사람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제주도는 한라산의 용출에 의해 생긴 화산섬(火山島)으로 어머니의 자태를 지닌 한라산의 자락이 바다위에 두둥실 떠있는 듯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는 섬이다. 즉 산세가 완만하게 낮아지는 아스피데(aspide)식 화산섬이기에 수평선 너머 멀리에서부터 다가오며 바라보면, 수평선 위로 서서히 한라산 봉우리가 고개를 내밀며 바다 밑에서인 듯 아스라이 모습을 떠올린다. 더우기 겨울철에 거친 바다 위로 한라산의 하얀 설봉이 솟아오르는 모습은 마라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회가 솟아오르게 한다. 그것은 인간의 짧은 이주의 역사 너머에서 떠오르는 자연의 위대한 한 형용이라 할만하다. 그 모습은 반도인에 의한 수탈의 역사와 반도 안의 모든 쟁탈로부터 초연한 듯이 보인다. 누군가가 제주도의 독립성을 마음에 품는다면 아직까지 그것은 그 사람 마음 속의 언어다.

 

그러면 제주도(건널 濟 고을 州 섬道)라는 명칭이 우리네 섬에 과연 어울리는 것일까? 필자의 대답은 ‘No!’다. 제주도라는 말은 반도인이 '물 건너 있는 섬'이라는 뜻으로 썼던 말이기에 더욱 그렇다. 우리 옛말에 기초해서 제주도의 원래 명칭을 회복하고 모두가 그렇게 부르는 것이 옳지 않을까 생각한다. 반도인의 입장에서 '바다 건너에 있는 땅 또는 섬'이란 한자어인 제주도(濟州道)를 한라(漢拏)섬이라 부르는 것이 우리 고장사람들의 옛말에 가까우리라 생각한다. 필자의 생각은 '한뫼섬'이라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다만 여기에서 '한뫼'는 하나의 큰 산이란 뜻이며 '한뫼'인 어머니와 그 자락이 마치 바다 위에 사뿐히 떠 있는 치마폭처럼 펼쳐져 있다는 뜻으로는 역시 한라(漢拏)섬이 적격이다. 여기에서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한라'라는 말이 한자어가 아니라 순우리말의 발음에서 비롯된 것인가 하는 문제다. 물론 당연히 '한라'라는 말은 순우리말에서 기원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참조 1(다음사전에서)

/나라   

수, 물 이름 나라(왕조 이름) 종족 이름 은하수 사나이, 놈
14   
庖漢(포한) 賊漢(적한) 田舍漢(전사한) 前漢(전한) 前漢書(전한서)

 

*참조 2(다음사전에서)

붙잡을 (나)  

붙잡다 맞당기다 체포하다
9    
漢拏莎草(한라사초) 漢拏山(한라산)

 

탐라(耽羅)나 한라(漢拏) 역시 한자어이고 이전에 간혹 불리웠던 영주(瀛州)라는 이름 역시 한자어다. 영(瀛)은 ‘바다, 못 속, 늪 속, 전설상의 산 이름’을 뜻한다. 영주((瀛州)는 ‘바다 한 가운데 전설처럼 높은 산이 솟아 있는 섬’이란 뜻이다. 그리고  한라(漢拏)라는 말에서 한 (漢)의 뜻이다.

 

참조 3(다음사전에서)

바다   

바다 신선이 사는 섬
19   
釜山廣域市影島區瀛仙洞(부산광역시영도구영선동) 釜山廣域市中區瀛州洞(부산광역시중구영주동) 大瀛(대영) 東瀛(동영) 登瀛州(등영주)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러 신하들을 파견했고 그중 일행인 서시가 서쪽 중국으로 떠나갔다는 포구의 이름이 서귀포인 것도 흥미로운 사실이다. 

아울러 삼성혈에서 나왔다는 고양부 삼성씨의 전설과 성산읍 온평리에 있는 혼인지에 얽힌 산성씨의 혼인설화 등도 그렇다. 

 

제주도의 거주 기원에 관해 개인적인 의견으로 몇 가지 가능성을 상정해 본다.

첫째로, 제주도에 최초로 상륙하여 거주한 토착인은 원(原) 반도인의 일파였을 것이다. 아마도 북방부족의 일족인 백제계가 남하하기 훨씬 이전인 신석기 시대에 마한지역 거주민의 일족이 처음으로 제주도에 정착했을 것이다. 이 점은 신라와 가야계 부족의 일파가 일본열도에 상륙한 최초의 도래인들이라는 점에 비추어 보면 지리학적으로 타당하다. 일본으로 처음 건너간 신석기인들은 경남 부산에서 눈에 보이는 대마도를 거쳐 일본열도로 이입하였고, 제주도에 처음 입도한 신석기인들은 남해의 여러 섬과 추자도에 이르는 시각적 경로를 따라 이동하였다.

둘째로, 삼성씨가 진시황의 사신들 중에 제주도에 정착하여 토착 정주민을 복속시키고 그 부족의 여성들과 결혼을 통해 혼인동맹을 이룸으로써 부족장의 지위에 오른 경우다. 진시황이 불노초를 구하기 위해 보낸 사신에 관한 전설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들이 한라산의 정기를 차단하는 말뚝을 여기저기 요지에 박아놓았다는 언급이 등장하는데, 이는 이미 일정한 토착정주세력들이 존재했기에 이렇듯이 반감이 섞인 표현이 가능했을 것이다. 결정적인 언급은 진시황의 신하인 서시가 서쪽 중국으로 돌아갔다는 전설이 얽혀 있는 '서귀포(西歸浦)' 라는 지명이다. 이 서귀포라는 지명이 제주도의 토착세력을 평정하고 제주도에 남은 서시의 일행이 지은 이름인지, 서시가 떠난 후에 토착세력이 지었는지는 알 수 없다.  
셋째로,  정치적 패권다툼이나 영토전쟁에서 패한 고조선-고구려계 또는 백제계 유민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제주도 삼성씨인 고씨, 양씨, 부씨는 옛 고조선과 고구려에 흔한 성씨였던 것으로 미루어 그럴 가능성이 가장 농후하다. 물론 이들이 서해안과 다도해를 따라 징검다리 건너듯 이동했을 것이다. 제주도로 이동하게 된 근거는 망명의 여정 중에 들은 다도해 토착주민들의 진술에 의거했을 수도 있고 이미 그 이전에 진시황의 사신들이 들렀다는 전설 속의 섬이 중국의 동해안 지역에 유포되어 구전되고 있었고 그러한 구전을 바탕으로 고국을 등지고 떠나는 망명 귀족들이 지향하는 목적지로 삼았을 수 있다. 그 옛시대부터 제주도는 한자어로 중국의 동해안과 고조선-고구려의 해역인 황해연안에서는 '영주', '한라', '탐라'로, 다도해 주민들 사이에서는 '영주', '한라', '탐라' 또는 '이어도(다도해의 섬들이 이어진 끝에 있는 섬)'라 불리웠을 수 있다.

 

그리고 제주도의 첫 서양식 명칭은 Quelpart였다는 점도 매우 흥미롭다.

유럽인들이 대항해 시대에 인도의 여러 해안지역을 근거로 하여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의 바타비아(네덜란드령)에서 마카오에 이르기까지 축차적으로 여러 식민지를 세우고 이곳을 거쳐 일본에 이르는 해로를 개척하던 와중에 난파한 일부 상선원들이 제주도를 발견하고 해도에 'Quelpart('귤밭'이 와전된 말)라고 지어 도록했다. 그 이후에 네델란드인들이 여러 차례 표착한 곳이 바로 제주도 즉 '한라섬'이다.

 

제주도가 그 당시 이후로 유럽에서 Quelpart로 알려져 있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하멜표류기의  저자 하멜이 제주도를 Quelpart로 기술했기  때문이다. 하멜을 포함하여 승무원 64명이 탑승한 배는


 - 1953년 1월10일 네들란드 텍센 출발

 - 1953년 6월1일 인도네시아 자카르트 도착

 - 1953년 6월14일 대만으로 출발

 - 1953년 7월16일 대만 도착

 - 1953년 7월30일 일본향해서 대만 출발

 - 1953년 태풍으로 난파되어 승무원64명중 36명 제주도에 상륙


어찌되었든 간신히 목숨을 건진 후 제주도 해안가에 상륙하니 제주도민들이 이상한 사람들을 보려고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하멜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여 제주도민에게  손가락을 가리키며 이섬이 어디냐고 물었는데, 네델란드말을 알 수 없는 제주도민들은 하멜 손가락이 귤밭을 가리키고 있었으므로 “귤밭-귤밭” 이라고 대답을 하였습니다. 하멜은 착각하여 '아! 이섬의 이름이 귤밭이구나'라고 기억하였다. 제주도에서 머물고 있던 하멜 일행은 전남 여수로 이송된 이후에 한양으로 가서 대포 등의 무기제조에 종사하며 머물고 있다가

-1666년 9월4일 일본으로 탈출하여 9월 14일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머물다

-1668년 7월20일 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도착하였다.

-후에 하멜표류기를 지어 유럽의 일반인들에게 제주도가 Quelpart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추론적으로 우리말의 근원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 보면 한라(漢拏)라는 한자어로 이름을 짓기 이전에 한(‘하나’의 뜻)이라는 원음을 무시하고 새로이 이름을 지었으리라고 추론하기는 힘들다. 원래 비슷한 이름으로 불리고 있던 제주도의 어머니산 이름을 그와 유사한 한자음을 차용하여 한자어로 한라산(漢拏山-은하수를 붙잡을 만큼 높이 솟아 있는 산)이라고 불렀으리라 필자는 생각한다. 제주시내의 일부 지역명칭으로 아라(羅)리, 오라(羅)리, 사라(羅)봉으로 불리듯이 한라(拏)의 ‘라’도 ‘뭍(땅) 또는 벌판’의 뜻으로 쓰였을 것으로 생각한다.

 

여기에서 유념해야 할 점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로, 라(羅)는 ‘-벌어지다, 벌리다’의 뜻인데 벌(판)과 같은 의미로 평지형 벌판을 뜻하고, 라(拏)는 ‘붙잡다, 비비다, 뒤섞다, 맞당기다’의 뜻으로 하나의 주봉을 중심으로 펼쳐 내리는 지세, 즉 굴곡이 뒤섞여 있는 주름진 습곡형 벌판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지형적으로 섬의 특성상 주봉이 있는 바다 위에 솟은 산이기에 하나의 큰 봉우리가 솟아 이루는 주름진 산세(라:拏)와 그 자락이 고르게(平) 펼쳐져 있는 들녘(羅)의 지형을 각기 구분하여 뜻글자인 한문을 차용하였다고 보는 관점이다. 이 두 글자 모두  뭍(육지)의 뜻이다.

둘째로, 이두식으로 라로 표기하게 된 라는 원래 우리 고유어이고 애초에 한라, 탐라, 사라봉, 아라리, 오라리 등에 들어 있는 발음 라는모두 벌판, 땅, 뭍의 뜻으로 동일한 의미였는데, 제주의 주몽인 한라산에 독특한 의미를 부여하기 위하여 한라산(漢拏山)으로 표기했으리라는 추론이다. 


이 경우에 흥미를 끄는 점은 라(羅)가 벌 혹은 벌판을 이두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신라(서라벌, 셔벌→새벌;새로운 벌판)의 ‘~벌’과 같은 표기라는 점이다. 서울도 ‘새벌’ 즉 ‘새로운 벌판’이라는 뜻이다. ‘-뻘’이나 ‘개펄’도 같은 어원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 옛 조상들은 ‘-나라’ 혹은 ‘-누리’의 뜻으로 ‘-어(옥저), -에(백제), -여(부여), -예(동예), -려(고구려), -라(신라)’ 등을 썼음을 알 수 있다. 우리나라의 행정구역인 도(道)의 한자어 명칭 중에 유독 전라도(全羅道)에만 ‘-라’가 붙어 있다. 이는 전라도가 한국 최대의 곡창지역으로 ‘벌(羅)’이 너르게 펼쳐져 있기에 ‘-라(羅)’라는 명칭을 붙인 것으로 여겨진다. 즉 전라(全羅)의 뜻은 평야가 널리 펼쳐져 있어 ‘온통 벌판’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한편으로, 탐라(耽羅)의 탐(耽)은 ‘즐기다, (기쁨을)누리다’의 뜻이다.


[이하 인용-출처 망각 이후 밝히겠음]

한편으로 탐라라는 말이 백제 지배기에 ‘담로’ ((백제는 웅진(熊津 : 지금의 공주) 천도 뒤에는 22담로(擔魯) 제도가 확정되었다. ≪양서 梁書≫ 백제조에 의하면, 담로의 장관으로 왕자·왕족을 봉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신흥귀족 중에서 지방의 왕이나 후(侯)로 분봉(分封)된 사례가 있는 것으로 보아 중앙 왕족 이외에 신흥귀족들도 담로의 장관으로 봉해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이 제도는 왕족 및 신흥귀족을 각 지방의 왕·후로 분봉함으로써 지방세력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고 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리고 이 제도는 일종의 봉건제적인 지방통치의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라는 행정구역의 명칭에서 나왔을 수도 있다.


또한 탐라라는 말이 애초부터 한자어였을 수도 있다는 점이다. ‘먼 바다에 의외로 크고 너른 섬이 하나 있어 가히 누리고(탐: 누리다, 즐기다, 기뻐하다) 살만한 뭍’이라 여겨 그리 지었는지의 여부는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탐라’가 제주섬사람들이 쓰던 음을 흉내 내어 차용했을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낱말 끝에 ‘-라’가 붙어있음은 그것이 고유한 우리말에서 비롯되었음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탐라는 탐벌이라는 뜻인데, 탐의 어원이 탐인지 담인지 땀인지는 확정하기 어려우나 탐과 담은 한자어 표기가 가능하고 땀은 해당하는 한자음이 없다. 이로 미루어 탐은 탐이거나 땀일 수 있는데, 땀벌이라는 말은 뜻의 조합적인 구성이 어렵다. 결국 탐(耽)은 우리말 발음인 탐에서 왔다고 볼 수도 있으나, 담이나 땀을 전적으로 배제하기도 어렵다. 어떤 낱말소리가 변화하게 되는 방향성은 누구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이며 오용(誤用)의 사례가 전용(專用)화 하는 경우도 숱하기 때문이다.  

 

혹은 경계 삼은 '돌담들이 들(벌)에 여기저기 늘어서 있는 섬'이라는 뜻으로 제주도를 '담라' 즉 '탐라'라 했을 수도 있다.


'한라'라는 명칭에 대해 필자는 다음과 같은 추정을 해본다.

예부터 제주도의 토착민들이 '하나의 큰 산'인 한라산을 '한나('하나'의 뜻)뫼' 혹은 '할라뫼'라 부르고 있었다. 그런데 식자들이 이 발음을 그럴듯한 한문으로 표기하려던 중에 '하늘에 맞닿아 하늘의 별을 끌어당기는 듯하다'는 뜻의 한라(漢拏)산으로 운치 있게 한자식 개명을 했을 수도 있다. 그래서 한라산(漢拏山)이라는 한자식 표기는 원래 한나산('하나의 큰' 산) 또는 할아산(할아버지산)에서 비롯되었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토착어 발음을 한자어로 표기할 때 원래의 고유어 발음을 가급적 살리려는 의도가 작용한다는 점은 주지의 사실이다. 참고로 제주도에서는 최근까지도 하나를 '혼나'(아래아 음 포함), '호나(아래아 음 포함)' 혹은 '한나'라고 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