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의 언어 마음은 외부적으로 온전히 드러나지 않는다. 그런 분명한 제약 속에서도 마음은 자체의 현상을 외부적으로 발로하려는 충동적인 욕구가 있다. 내부에서 내부를 지향할 수 없기에 결국 외부를 지향하게 되는 셈이다. 사람이 외부적으로 마음에 이는 현상을 표출하는 방법은 기호화이다. 그 기호화된 표출방식이 언어이며 사람에게는 세 가지 언어가 있다. 제 1의 언어인 몸짓 언어가 있고 제 2의 언어는 소리의 표출을 통한 음성언어다. 그 이외에 사람에게는 제 3의 언어가 있다. 그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동시공적(同時空的)으로 우러나오는 언어다. 사람의 '마음이 고요히 속삭이는 생생한 무늬결'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가 몸짓이나 혀로 드러내는 것은 의중(意中)의 언어다. 그런데 제 3의 언어는 심중(心中)의 언어라 할 수 있다. 몸짓언어와 발성언어는 제 3언어인 마음이 속삭이는 무늬결이 제한적 표현수단으로 제한적으로 외현되고 인간개체끼리 제한적으로 상호이해될 수 있도록 형상화된 기호다. 이렇듯이 기호화된 표현은 삼중의 제한을 받게 된다. 그것은 '제 3언어의 외투'이며 제 3언어가 외재화된 빙산의 일각이라 할 수 있다. 한편으로 인간의 심중에 고요하면서도 생생히 살아 움직이고 있는 무늬결, 즉 제 3언어의 소질(素質)은 다양하게 발현될 수 있다. 첫째로, 마음의 외부에 존재하는 매체인 예술의 장르별 매체에 의한 표현방식들이 있다. 성악과 여러 가지 악기의 음향, 미술의 색과 선과 형태와 질감, 도자기의 텅 빈 충만이라 할 수 있는 양감과 질감의 균형, 시의 비유와 상징, 등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 모든 예술의 매체들은 저마다 고유한 표현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그것을 넘어선 제 3의 언어를 발현하고 있다. 둘째로, 득도하는 순간과 그 이후의 간명한, 혹은 침묵을 통한, 표현들이 있다. 이 경우에는 표현만이 존재하고 매체는 굳이 필요하지 않다. 그만큼 직관적이고 직설적이다. 이러한 구도적 표현들은 우주의 시간성인 순간 속에서 발화된다. 여러 종교의 경전에는 제 3언어적인 표현들이 곳곳에 등장한다. 이런 다양한 표현방식의 공통점은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을 동시공적으로, 즉 '전체를 한꺼번에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것은 통찰의 지혜를 얻어 모든 것을 아우르는 합일에 도달하고자 하는 것이며 이때 혜지자가 마음의 깨달음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풀어 말해서, 궁극적인 시간성은 '순간'이며 궁극적인 공간성은 '우주 그 자체'라는 점을 혜량하고 이 두 가지 궁극성이 '합일하는 경지'를 체득하고 그 상황을 표현해 내는 것이 바로 제 3의 언어다. 우주는 우리 마음에 생생히 살아 움직이는 무늬를 그려넣고 있다. 또한 제 3의 언어는 필히 침묵의 분위기에 싸인 채 고독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으며 그 그림자는 제 3의 언어가 있으면서 행하는 모든 곳을 따라다니면서 힘께 있으면서 행한다. 그리고 어떤 혜지자가 제 3의 언어를 발현할 때 그 언어를 대하는 사람은 침묵이 속삭이는 소리도 함께 듣는다. 결국, 제 3의 언어는 고독한 침묵의 분위기 속에서 발현된다. 우리 모두는 어떤 예외도 없이 다 같은 인간이며 고독한 개체의 그림자를 운명처럼 드리우고 있고 우리 마음의 무늬결은 마치 북극하늘의 오로라처럼 고요히, 은은히, 생생히 살아 움직이고 있다. 그러니 지금부터 우리는 아득한 원시부터 인간의 마음이 발현하고자 소망해 왔던 합일의 경지에 들어서서 최종적으로 제 3의 언어를 말해 보자. 모든 존재와 현상의 法은 거기에 들어 있고 우리는 제 3의 언어를 말하고 들을 수 있다. (20080113 엘리엇 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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