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바이칼에선 동명성왕을 ‘고구려칸’이라 부른다
@바이칼 일대 부리야트족, 동으로 이주해 만주 부여족 이뤄…
@고구려와 뿌리 같은 ‘한민족’
@인당수 전설, 나무꾼과 선녀 등 ‘설화’도 우리와 유사…
@솟대·신목·당집 등 풍습도 비슷해
글 :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 소장·정신세계사 편집주간
바이칼호는 시베리아 대륙의 한복판에 있다. 러시아인들은 동부 시베리아에 속한다고 하지만 수천년 전부터 이곳에 살아온 몽골 사람들은 시베리아를 논할 때 바이칼 동쪽이냐, 서쪽이냐로 가름한다.
곧 이 광대한 유라시아 대륙의 중핵지대로서 시베리아를 상정하면서 바이칼 호수의 동서로 시베리아를 구분하는 잣대를 삼았던 것이다. 이는 그만큼 바이칼호가 이 지역에서 차지하는 역사적·지리적 중요성을 말해준다. 고대 유라시아 유목민들에게 바이칼은 삶의 형이상학적 의미와 형이하학적 조건들 모두를 통틀어 아주 밀접한 연관을 지니던 곳이었다. 이는 지금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우선 선사시대부터 역사시대의 중세까지 세계사의 전면에서 끊임없이 역동적인 변화와 이합집산을 통해 새로운 삶의 형태를 제시하고 문명의 교류를 실현시켜왔던 수많은 유목민족들의 정신적 지주가 바로 시베리아 샤머니즘이요, 이는 곧 바이칼호 지역을 모태로 하여 형성되었다.
지금 한반도에 사는 우리 또한 민족 문화의 뿌리를 북방 샤머니즘과 연관시켜 논의하려는 움직임이 이미 20세기 초부터 활발히 있어 왔다. 물론 고고학이나 문헌사학, 언어학, 농학, 유전학, 의학, 지질학, 해양학, 기상학 등 제반 학문 분야의 민족 기원 문제에 대한 연구와 접근도 중요하고 실제 연구 결과도 적은 바 아니지만 민속학, 민족지학(ethnography) 등의 측면에서 고대 북방인들의 정신문화적 복합 상태를 연구하는 작업이야말로 그 어떤 연구보다도 학문적 비중이 낮지 않다고 본다.
특히 우리는 분단시대의 공백으로 1990년대에야 비로소 우리 민족의 기원지로 언급되는 북방지역, 즉 중국 동북 만주지방, 발해만 연안, 시베리아 바이칼호 주변, 알타이 산맥 지역, 예니세이강 투바지역, 아무르강, 송화강 유역 등을 답사하기 시작하고 있으므로 사실상 이 지역들에 대한 개론서 수준의 정보도 아직 갖춰져 있지 않은 형편이다.
‘텡그리’ 신화, 단군 신화와 유사
결국 지금까지 우리가 국사에서 배워 온 겨레의 기원에 대한 부분을 비롯하여 북방지역 고대문화사의 상당 부분 역시 우리 손이 아닌 남의 손에 의해 채록된 연구 결과를 토대로 작성된 셈이므로 이제부터 진정한 국사, 진정한 조상들의 초상을 그리기 시작하는 게 아닐까 싶다.
민족지학 연구의 첫째 조건은 현장성이다. 바이칼호 지역을 고대 시베리아인들의 정신문화적 원류인 샤머니즘의 중심지로 볼 때, 이 지역 원주민 부리야트족의 전통과 문화에 대한 현장 연구가 가장 급선무이며 아울러 우리 전통문화 특히 한국 무(巫)와의 비교연구 또한 매우 중요하다 하겠다.
한국 무의 시작은 삼국유사의 단군신화에 나오듯 샤먼킹(shaman king) 단군이다. 단군은 하느님의 자손이며 지상의 평화를 건설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파견된 존재이다.
부리야트족 샤머니즘의 구비 서사시 ‘게세르’에서도 이 우주의 구조를 아버지격인 하늘과 어머니 땅, 그 사이에 인간을 놓고 인간이 악마에게 빠져 세상을 어지럽힐 때면 주기적으로 아버지인 하늘의 신 텡그리(Tengri)가 자신의 아들을 지상에 보내 악을 물리치고 땅 위의 평화를 이룩하곤 한다.
이때의 서사 영웅이 우리의 단군에 해당하는 게세르칸(Geser-Khan)이다. 그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 70살 할아버지와 60살 할머니가 사는 오두막집에 하늘로부터 내려온다. 이는 또한 단군신화를 비롯한 한반도의 각종 부족 신화(동명왕 설화 등)의 하늘 사상이나 천손(天孫) 강지(降地: 땅으로 내려옴) 사상과 똑같은 구조와 동기를 보이고 있다.
부리야트인들의 전설은 바이칼호 형성에 관해 “…옛날 옛적에는 바이칼 바다가 없었고 오로지 땅뿐이었다. 어느날 불을 토하며 산이 무너지더니 물로 변하여 커다란 바다가 만들어졌다”라고 말한다. 즉 바이칼 호수는 지금도 ‘서있는 불(standing fire)’ 이라는 뜻으로 땅속의 불이 식지 않고 있다고 믿고 있다.
한편으로는 샤먼의 바다라고도 불리는데 태초에 불을 토하며 형성된 원시의 바다가 주변 바이칼 사람들의 삶과 죽음에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한없는 동경과 함께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기 때문이다. 곧 바이칼 자신이 샤먼의 존재와 동격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이때 ‘바이’는 샤먼을 뜻하고 ‘칼’은 계곡·호수를 지칭하는 것으로 전해왔다.
‘바이칼’은 샤먼과 동격 의미
부리야트 샤머니즘에 의하면 이 세상은 수많은 선악의 영(Tengri)들로 가득하다. 서쪽의 선한 신령 55위(位)와 동쪽의 악한 신령 44위가 합하여 99위의 신들이 주재하고 있다. 산, 숲, 강, 호수, 별, 해, 달 등에는 에젠(ezen)으로 불리는 정령들이 있는 것으로 믿었고 자연의 존재 가운데 인간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바이칼 호수에는 텡그리 수준의 천신들 외에도 여신(女神) 바이겔 하탄 (Baigel Xatan)이 모든 자연 현상을 다스리고 있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매년 초여름 부리야트인들은 알혼섬이나 이르쿠츠크 인근의 바이칼 호숫가에서 성대한 타일라간(공동체의 하늘제사 이름) 의식을 집전했고 텡그리 신령들 가운데 가장 영험있고 세력이 센 것으로 알려진 바이칼 여신 바이겔 하탄에게 희생물을 바쳐왔다. 이때는 겨우내 호수를 덮은 얼음이 녹고 바이칼 물결이 드세지는 시기이므로 미리 항해의 안전을 기원하는 입장이 된다.
특히 알혼섬은 바이칼 호수 내 28개 섬들 중 가장 크고 예부터 부리야트인들을 비롯하여 바이칼 사람들의 원류가 시작된 곳으로 샤먼 민속 문학상 중요한 무대가 되어왔다. 신성한 땅인 이 곳에는 희생을 바치는 제사터가 곳곳에 널려있고 부리야트인의 피를 어머니로부터 이어받은 칭기즈칸의 무덤이 있다고 전해온다. 알혼섬은 바이칼인들의 정신적 고향이자 서사시의 산실인 셈이다.
또한 이곳은 코리(Khori)족의 발원지로서 이 부리야트족의 일파가 먼 옛날 동쪽으로 이동하여 만주 부여족의 조상이 되었고 후일 고구려의 뿌리가 되었다고 한다. 우리만 모르는 이 얘기는 동몽골이나 바이칼 지역에서는 상식적인 전설이다. 심지어 동명왕을 코리족 출신의 고구려칸(Khan)이라 부른다.
알혼섬 바다는 바이칼호 전지역 중 가장 수심이 깊고 풍랑이 센 곳으로 예부터 이 곳 뱃길을 항해하는 상인에 의해 몸을 던지게 되는 부리야트 심청의 인당수가 있다고 전해온다. 즉 희생처녀가 알혼섬의 바이칼 인당수에 몸을 던지자 금빛 비늘을 가진 물고기로 다시 환생하여 신들의 세계에서 영원히 살게 된다는 전설이다.
우리의 심청전이 먼저인지 바이칼 인당수가 먼저인지는 차치하고라도 이는 한반도의 우리와 수만리 떨어진 바이칼 지역의 민족지학적 상관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 밖에 우리의 대표적 전래설화 가운데 하나인 ‘나무꾼과 선녀’ 또한 바이칼호가 진원지이다. 나무꾼 이야기는 알타이 산맥 지역을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와 내몽골, 티베트, 만주지역까지 광범위하게 분포되어 있으나 바이칼호가 그 원류라는 점이 학계의 중론이다.
또 하나 중요한 바이칼 구비전승으로 ‘알탄샤가이(황금복사뼈)’ 신화가 있다. 이는 부리야트 전통 신화 중 대표격인 ‘울리게르 서사시’ 계열의 영웅서사시로 ‘게세르’ 신화와 함께 모두 샤먼문학으로서 수천년 아니 수만년 간 샤먼들에 의해 전승되어 왔다.
샤먼은 종교적 사제이자 제사장이며 질병을 치료하는 의사이자 종족의 역사와 우주의 기원을 설파하는 역사가이자 과학자이다. 또한 사회 윤리를 제시하는 도덕적 리더로서 행동하는 등 다양한 임무를 수행해온 특이한 존재였다.
이러한 샤먼이 전해준 ‘알탄샤가이’ 신화에도 여러가지 우리네 풍속과의 연관성이 드러난다. 손님에게 곰방대로 담배를 권한다거나, 상대방과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씨름으로 결판을 낸다든가, 지상의 혼란을 하늘에 거주하는 신의 아들이 인간의 육신으로 화하여 제거하고 다시 하늘로 돌아간다는 천신주재 사상 등을 역시 공통적으로 엿볼 수 있다.
바이칼의 구비문학은 이처럼 내용상 현재로부터 수만년 전의 지구 빙하기에 대한 인류의 기억까지 희미하나마 담고 있으며 바이칼 주변 알타이어계 여러 종족들의 역사가고스란히 녹아 있는 문화적 보고이다. 그리하여 시베리아 바이칼 지역과 한반도의 민족지학적 상관성을 밝히는 작업의 중요성이 더욱 절실해지고 있으며 앞으로의 연구과제가 산더미 같고 바다와 같음을 느끼게 된다.
부리야트 마을에도 ‘천마도’ 있어
아직도 바이칼엔 곳곳에 샤머니즘의 실상들이 넘쳐난다. 나그네 발길이 닿는 언덕과 언덕, 고개와 고개마다 솟대와 신목(神木), 당목(堂木), 당집이 있으며 소원을 비는 돌무더기와 오색 댕기들이 만발하여 있다.
질병을 고치는 약수라는 뜻의 ‘아르샨’ 지방에 가면 산중의 약수와 약초로 병자를 치료하는 샤먼을 지금도 만날 수 있고 어느 부리야트족 마을에는 비료자(자작나무의 러시아말)를 신성시하며 하늘로 솟구치는 천마(天馬)를 그려 놓았다.
마을마다 하늘 제사터가 있고 그 주변은 사람들이 출입 않는 소도이며 이 곳을 하늘과 땅의 소통이 가장 잘 되는 곳으로 여기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우리네 사촌 부리야트 사람들이다. 이르쿠츠크에서 한두 시간 거리의 부리야트족 마을 우스체르다 부근 제사터 안내문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이곳은 우스체르다 자치구 가운데 가장 지력(地力)이 센 곳입니다. 이 곳은 전통적으로 하늘의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 왔습니다. 저희 주민들이 경의를 표하는 곳이니 이 곳을 방문하는 분들은 각자의 종교적 신념이나 국경과 인종에 상관없이 저희처럼 경의를 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바이칼에서 샤머니즘은 결코 닫힌 박물관 내의 전시품이 아니다. 샤머니즘은 살아 있다. 그래서 한반도의, 세계의 수많은 정신들과 이제 다시 교통을 시작하고 있다.
바이칼은 부른다. 모두에게 공평히, 와서 보고 느끼고 깨달으라고.
글·사진 정재승 봉우사상연구소 소장·정신세계사 편집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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