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잘못돼 있다
김정강
우리 韓人(한인)은 일본의 고대사가 보잘 것 없는 미개사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런 인식은 착각이다. 이런 착각이 생긴 것은 8.15광복 후의 非리얼리즘적인 역사교육 때문이다. 일본에 대한 非리얼리즘적인 역사교육은 학교와 언론을 통하여 연계적으로 이루어져 왔다.
非현실적 교육과 언론에 의한 착각
고대 일본의 건국 정권인 大和朝廷(야마도 조정)은 야마도(奈良縣) 북부 분지를 중심으로 호족들이 통합되어 건국된 것이다. 당시 야마도 조정 건국을 주도한 최강 호족이 지금 일본 황실의 조상이다. 고분은 고대 국가권력의 권위와 힘을 나타내는 상징인데, 일본의 仁德天皇陵(닌도쿠 천황능)은 세계 최대의 능이다. 이 능은 大阪府堺市(오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있다. 이 능은 중국 秦의 시황제능이나 이짚트의 피라미드보다 크다. 이 능은 면적 10만4천㎡에 3중으로 된 인공 물 垓字(해자)로 둘러 쌓여 있다.
고대 일본의 국가체제를 천황 중심으로 정비하여 확립한 인물이 聖德太子(쇼도쿠 태자)이다. 쇼도쿠 태자는 冠位十二階(관위 12계)와 十七條憲法(17조 헌법)을 제정하여, 호족을 천황제하에 제도적으로 편입함과 동시에 호족이 지켜야 할 규범을 만들었다. 쇼도쿠 태자는 601년 辛酉年(신유년)을 자기의 혁신정치의 출발점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신유년이 21회 되풀이 되는 1260년 마다 대혁명이 일어난다는 중국 易法(역법) 사상에 따라, 601년으로부터 1260년 전인 B.C. 660년에 神武天皇(진무 천황)이 야마도에 즉위했다고 정하고, 그 해를 神武紀元(진무 기원) 1년으로 정했다. ‘日本’ 국호와 ‘天皇’ 직명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도 이 쇼도쿠 섭정시대(7세기 초)이다.
마르코폴로는 ‘일본’의 중국어 音譯(음역) ‘르펀=日本’을 듣고, 동방견문록에서 일본을 ‘지팡그’라고 썼고, 이것이 영국에 전해져 영어로는 Japan(재팬)이라고 하게 된 것이다. 쇼도쿠 태자는 고대 일본사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로 평가받는 최고의 건설자인데, 가정교사로서 그의 정치에 고문역할을 한 인물이 고구려 승 惠慈(에지, 혜자)이다. 에지는 당시 일본에서 ‘三寶(삼보)의 棟梁(동량)’으로 일컬어졌는데, 불교의 제1인자라는 뜻이다.
쇼도쿠 태자의 개혁에서 나타난 바와 같이, 일본도 고대에는 중국을 모방하여 律令政治(율령정치)를 펼쳤는데, 중세로 들어오면서 武士(무사)계층이 정권을 잡아 귀족관료 중심의 율령정치를 뒤업고, 일본 독특의 봉건제도인 幕府(바쿠후, 막부) 지배체제를 세웠다. A.D. 1180년 源賴朝(미나모도노 요리도모)는 鎌倉(가마쿠라)에 군부독재 정권인 막부를 열었다.
12세기이래 武士통치하의 봉건제도 발달
이를 가마쿠라 막부라 하는데, 요리도모가 가마쿠라에 있었기 때문이다. 막부가 열림으로써 귀족관료 중심의 율령정치는 종식되고 피라밋형 武家(무가) 지배가 성립됐다. 막부는 군부독재 정권이므로 통치기구는 간단·명료한 것이었는데, 중앙기구를 政所(만 도코로, 政廳), 問注所(몬쥬죠, 裁判), 侍所(사무라이 도코로, 武力)로 나누고, 그 각각에 수령을 두었다. 요리도모 자신은 征夷大將軍(세이이 다이쇼군)이 되어 독재권을 장악했다.
요리도모는 家人(게닌, 부하)인 무사와 엄격한 주종관계를 형성했다. 전란중에 요리도모에게 충성을 다하여 게닌이 된 자에게는 요리도모는 安堵狀(안도죠, 안도장)를 주어 조상전래의 領地(영지)를 소유하게 해서, 이를 本領安堵(혼료안도)라고 했다. 그들을 地頭(지도오, 지방장관)에 임명하여 적대세력에게서 뺏은 새 영지를 주기도 했다. 무사는 이렇게 혜택을 입는 것을 ‘御恩(고온)’이라고 했으며, 고온을 입은 자는 그 보답으로 요리도모를 ‘鎌倉殿(가마쿠라 도노)’라 호칭하고, 교대로 가마쿠라나 京都(교도)의 수비에 임하며 전시에는 명령에 따라 전투에 참가했다. 이와같이 토지를 매개로 피라밋형 주종관계를 형성한 것이 일본 봉건제도이다.
가마쿠라 막부에 의해 형성된 일본 武家 봉건제는 집권자와 기구형태의 변동은 있었으나, 본질적인 지배내용은 그대로 계승되어, 메이지 유신으로 도쿠가와 막부가 폐지되기까지 약 7백년간 계속되었다. 일본의 봉건제는 중국의 중앙집권적 관료봉건제와 다르고, 서구의 분권적 영주 봉건제와도 다른 독특한 것이다. 관료가 황제의 임명을 받아 농민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무사가 무력으로 영지를 장악하고 지배하며, 그 정점에 최강자인 大將軍(다이쇼군)이 존재한다는 점에서 중국과 다르고, 천황의 존재가 일관되어 있었다는 점과, 봉건제의 성립과정이 외부 蠻族(만족, 게르만)의 침입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 사회 자체내에서 발생한 侍(사무라이)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서구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자유자본주의 배태한 서구형 봉건제도
굳이 일본의 봉건제가 어느쪽에 더 가까운가를 따진다면 중국형 보다는 서구형이다.
봉건제도의 胎內(태내)에서 자본주의가 창출되어 나오는 것인데, 서구와 유사한 구조를 가진 일본의 봉건제는 중국식에 비하여 자본주의적 발전을 촉진하는데 유리했다. 일본이 경쟁에 기초한 서구의 합리적 자유 자본주의를, 非서구의 다른 후진국에 비하여 급진적으로 수용하여 선진화 할 수 있었던 것도, 일본의 봉건제도가 서구형이었기 때문이다.
일본인의 전통적인 심성을 이해하려면 무사도를 이해해야 한다. 메이지 유신전까지 일본을 지배한 것은 사무라이(侍, 武士)이고, 사무라이의 마음을 지배한 것은 무사도이었기 때문이다.
무사도에는 神道(신도)를 핵심으로 불교, 유교, 무도가 통합되어 있다. 神道, 즉 ‘가미노 미치’라는 말은 日本書紀(일본서기)에 처음 나타나지만, 일본 민족신앙으로서의 신도는 유사이전부터 있었다. 신도에서는 자연이나 영웅을 숭배하며 제사지내고, 인간의 육체 속에 영혼이 있으며, 인간이 죽으면 영혼이 분리된다고 본다. 영혼이란 現身(현신) 안에 있으면서, 영묘한 활동을 하는 半정신적·半물질적 존재로, 氣와 같은 일종의 실재로 인정하고 있으며, ‘み靈(미타마)’ 또는 ‘魂(타마시이)’라고 부른다. 신도는 경전이 없고 신의 모습을 有形化(유형화)하지도 않는다. 祭政一致(제정일치)로, 日本書紀(일본서기)와 古事記(고사기)는 천황을 現人神(아라히도가미, 현인신)으로 기록하고 있다.
誠과 忠은 사무라이의 절대적 도덕률
일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A.D. 538년 欽明天皇(긴메이 천황) 때이다. 백제 聖明王(성명왕)이 불상과 경전을 보내어 일본에 최초로 불교를 전했다. 긴메이 천황은 “나는 지금까지 이렇게 훌륭한 가르침을 들은 적이 없다(일본서기)…”고 했다. 무사도의 한 기둥이 禪(젠, 선)인데, 중국 선종을 일본에 전파한 것은 鎌倉(가마쿠라)시대의 榮西(에이세이)다.
에이세이는 比叡山(히에이 산) 延曆寺(엔랴쿠 사)에서 修行(수행)한 후 宋에 건너가 선종인 臨濟宗(임제종)을 배워 귀국 후 포교했다. 명상을 통하여 자기를 버리고, 직관적으로 존재의 근원을 파악하여, 자아와 존재의 근원을 일치시켜 大悟覺醒(대오각성)함을 목적으로 하는 禪은, 항상 생사의 갈림길에서 자아와 존재의 일치를 결단하려고 하는 사무라이의 삶과 맞아 떨어지는 것이었고, 무술 수련에 있어서 불가결한 정신통일에서도 일치했다. 그래서 劍禪一致(검선일치), 禪武一如(선무일여)라는 모토가 나왔다.
사무라이에게 소중한 것은 무술, 용기, 忠이다. 무사의 사생관을 밑받침하는 직관이 禪이었다면, 忠의 위계질서를 합리화하는 규범은 유교이다. 사무라이는 백성에 대한 절대적 권위와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백성이 사무라이에게 무례하면, 그 자리에서 베어도 무방했는데, 이것이 ‘切リ捨御免(기리 스데 고멘)이었다. 때문에 사무라이는 자신의 내면세계에서는 誠(마코도, 성실)을, 자아의 외부세계인 주군에게는 忠을 또한 절대적인 도덕율로 삼았다.
현대 일본인 가운데 무사도의 사표로 상징화된 자는 러일 전쟁에서 旅順港(여순항)을 함락한 육군 대장 乃木希典(노기 마레스케)이다. 그는 러일전쟁에 3개의 관을 준비하고 출전하여 두 아들을 잃었다. 1912년 7월 明治(메이지) 천황의 장례식 날 부인과 함께 천황 思慕(사모)의 유서를 남기고 천황 사진 아래서 切腹(셋부쿠)했다. 즉위전의 어린 히로히토 천황이 학습원 초등과에 다니던 어느날, 교장이었던 노기가 히로히토에게 통학을 어떻게 하는지 물었는데, 히로히토가 보통 걸어다니나 비가오면 마차를 탄다고 대답하자, 노기는 비가 오더라도 우의를 입고 걸어다니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일본이 天皇制 없애지 못하는 이유
천황제는 일본 고유의 민족적 문화현상이다. 천황은 정치적으로는 일본국가의 상징적 元首(원수)이지만, 종교적으로는 신도의 제사장이다. 일본인 대부분은 신도의 신자이다. 신도는 경전도 교의도 없고, 신사 참배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인데, 매년 정초의 신사 참배자 수는 8천만 내지 1억에 이른다. 伊勢神宮(이세 신궁)은 가장 대표적 신사로 ‘일본인의 정신적 고향’이다. 아놀드 토인비(Anold Toynbee, 역사가, 영국인)는 1967년 11월 이세 신궁을 방문하여, “이 성지에서, 나는 모든 종교의 기초적 통일을 느낀다”고 기록하였다. 천황이 皇居(황거) 안에 있는 논에 직접 모내기하여 거둔 햅쌀을 매년 이세 신궁에 갖다 바친다.
日本史(일본사)에서 천황을 폐지할 수 있는 힘을 가졌던 정권은 초기 도쿠가와 막부와 맥아더 사령부였다. 두 정권 모두 스스로의 필요성 때문에 천황제를 유지했고, 모두 천황제보다 생명이 짧았다.
1945년 8월 15일 천황은 “堪ヘ難キヲ堪ヘ忍ヒ難キヲ忍ヒ(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고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라고 하여 2차대전에서의 항복을 선언했다. 천황이 항복하게 되자 “폐하에 면목이 없다”고 셋부쿠하는 자가 연이었다. 육군대신 阿南惟幾(아나미 고레치카), 가미가제 특공대의 창설자 大西龍治郞(오니시 다키치로), 影山庄平(가게야마 쇼헤이)를 위시한 14명의 大東塾員(다이또쥬꾸잉) 등, 일본 전국의 자결자는 5백명이 넘었다. 당시 일본은 괴멸해버렸던 독일, 이탈리아와는 달랐다. 일본은 현역 7백만의 전투 용의 있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다. 이 7백만을 사고 없이 일제히 질서 있게 무장해제시킨 것이 천황의 항복선언이다. 일본이 패전후에도 천황제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와 같은 일본국민의 천황제에 대한 절대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대부터 동아시아 유일의 자주국 일본
A.D. 57년 倭奴(왜노) 국왕은 後漢의 光武帝(광무제)에게 조공을 바치고 ‘倭奴國王’의 인수를 받았으며, 107년에는 왜 국왕 帥升(스이쇼)가 ‘生口(생구) 160인’을 후한 安帝(안제)에게 바쳐 속국임을 인정받는 것을 명예로 자처하기도 했다. 유명한 卑 呼(히미코)도 魏에 조공했다.
그러나 고대의 후진 일본은 중국의 속국으로 안주하지 않고, 선진 중국에 배워서 중국에 버금가는 문명을 만들어 내었고, 마침내는 중국의 천자에 맞서서 독자적인 천황, 독자적인 년호, 독자적인 국기를 내 걸면서 독립·자존했다. 일본왕이 ‘皇帝’와 동격인 ‘天皇’을 칭하기 시작한 것은 쇼도쿠 태자가 섭정하던 推古天皇(스이고 천황)때부터다. 일본 국기인 日の丸(히노 마루)도 A.D. 701년 정월의 천황 행사 때부터 사용한 것이다. 고대, 중세를 통하여 東아시아에서 일본 만이 중국에 예속되지 않은 유일한 자주국이었다.
1853년 6월 相模國(사가미노 구니, 現 가나가와 현) 浦賀(우라가)港에 페리提督(제독)이 이끄는 美(미)동인도함대 소속 黑船(구로후네, 흑선) 4척이 나타났다. 그 중 2척은 증기선이었다. 페리는 美13대 대통령 펠모어의 편지를 가지고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일본과 국교를 열고 싶다, 무역을 하고 싶다, 미국선이 기항하면 연료와 음식을 보급해 달라는 것이었다. 페리는 대통령의 편지를 막부의 관리에게 전한 후, 내년에 다시 올 것이니 그 때에 회답을 달라면서 떠났다.
당시 미국은 원주민 인디안을 정복하면서 개척을 계속하여 1848년에는 칼리포니아를 병합하여 태평양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대서양에서 하던 捕鯨(포경)도 북태평양이 중심이 되고, 샌프란시스코에서 샹하이로 가는 항로도 열렸다.
이 파도가 일본에도 밀려 온 것이다. 페리는 1854년 1월 군함 7척을 이끌고 다시 우라가에 왔다. 쇄국을 계속하려는 막부를 군함과 대포로 강압하여 1854년 3월 미일화친조약을 맺어 개항시켰다. 그해와 다음해에 걸쳐 막부는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델란드와도 미국에게 해 준 것과 같은 조약을 맺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주의 아닌 富國强兵 목표의 시민혁명
1858년 미국의 요구에 의하여 미일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었는데, 추가개항과 자유무역을 규정하고 있다. 관세자주권이 없고, 치외법권을 인정하는 불평등조약이었다. 이 불평등조약은 영국, 프랑스, 러시아, 네델란드와도 맺어졌다. 불평등 자유무역의 결과, 외국에서 값싼 면제품 등이 대량 수입되고 生絲(생사), 茶(차) 등의 수출이 급증하여 경제에 혼란이 일어나고 상인이 몰락했다. 불평등한 미일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막부 정권의 실권자 井伊直弼(이이 나오스케)는 1860년 3월 3일 아침 출근 도중 尊王攘夷(손노조이, 존왕양이)를 주장하는 水戶藩士(미도 번사) 17인에게 습격되어 斬殺(참살)되었다.
힘을 배경으로 한 서구세력의 진입에 위기를 느낀 일본의 대응이 明治維新(메이지 유신)이다. 1867년 12월 9일 마지막 쇼군 德川慶喜(도꾸가와 요시노부)의 大政奉還(다이세 호깡, 대정봉환) 신청을 받은 조정은, 막부는 물론 섭정, 관백 등 봉건 통치기구 일체를 폐기하고, 그 대신 총재, 의정, 참여의 3직을 두고, 천황 스스로가 정치를 친재하는, ‘왕정복고의 대호령’을 내렸다. 1868년 3월 14일 메이지 신정권은 ‘五箇條の 御誓文(고까조노 고세이분 5개조 서약서)’를 발표했다. 회의를 하여 모든 일을 공론으로 결정한다, 상하 일심으로 경륜을 일으킨다, 구습을 타파한다, 세계로부터 두루 지식을 배운다 등이었는데, 이것이 메이지 유신의 기본방침이다. 藩이 폐지되고 전국은 통일되었으며, 士農工商(사농공상)의 신분제가 폐지되고 국민군이 조직되었다.
메이지 유신은 일본형 부르죠아 시민 혁명인데, 상공계급과 하층민이 봉기하여 권력을 탈취했던 서구와는 달리, 중하급 사무라이가 혁신을 주도했다. 왕을 처형했던 서구의 시민혁명과는 달리 천황의 왕정복고가 이루어졌다. 목표도 정치적 민주주의가 아니라, 부국강병이었다. 서구 부르죠아 시민 혁명의 목적이 억압적 절대왕권에 대한 상공계급의 자유요구였던데 반하여, 일본 메이지 유신의 목적은 구미 제국주의 침략위협에 맞서기 위한 자주적 부국강병이었다.
감정적 민족주의에 불지르려는 좌파
중국, 한국과 함께 후진국이었던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과 마찬가지로, 구미의 압박에 의하여 구미 제국과 불평등 조약의 체결로 근대를 영접했다. 이러한 후진 일본이, 메이지 유신으로 일거에 국내를 혁신하여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후, 초 단기간에 선진 제국주의 대열에 진입하여 최선진국인 미국과 전쟁을 겨루었다. 봉건적인 후진국이 서구 함포의 힘에 의해 개항한 후 서구의 식민지·半식민지 상태를 거치지 않고 선진 제국주의로 까지 진입한 것은 세계에서 일본이 유일하다. 그리고 지금 유일한 非백인 G-8 회원국이다.
한국 좌파는 미국을 主敵(주적)으로 삼고 있다. 대한민국을 건국하는데 절대적인 도움을 주고 6.25남침전쟁을 저지하였으며, 지금도 대한민국의 자유민주 체제를 떠받치고 있는 주 세력이 미국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을 주적으로 보면서도, 지난 시기 反美하지 않고 反日만 해 온 것은, 미국의 힘이 두려웠고, 6.25남침사변 이후 반미 슬로건에 대한 국민의 공감대가 없었기 때문이다. 반일을 계속하면서 배타적 민족주의를 고무하여 反외세 분위기를 부추기다가, 분위기가 성숙되어 반외세 슬로건에 미국도 포함시킬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주적인 미국을 칠 전략이었다. 근간에 와서 좌파가 반미 슬로건을 들고 나와 미국을 치는 것은, 이제 반미 투쟁의 정세가 성숙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다.
中·러·북한에 가담하려는 김대중정권
그런데 근간에는 통일 혁명의 기본 고리인 反외세 전략에 조정이 가해지고 있다. 즉 부활하는 일본의 역할과 능력을 내심으로도 재평가하게 된 것이다. 만일 자위대가 일본 국군으로 변화되고, 일본이 한미동맹에 드러내 놓고 가담하기라도 한다면, 한반도의 좌파 통일 혁명은 불가능해진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좌파는 어떻게 하던지 한일 관계의 개선을 막고, 한국민을 일본과 충돌시키고 이간시키려 한다. 일본과 일거리만 생기면 감정적 민족주의에 불길을 붙이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일본의 천황을 ‘日王’이라고 표기하는 언론은 세계적으로 한국밖에 없다. 미국은 “Emperor Akihito”라고 표기하고 있으며 중국은 “天皇”이라고 쓰고 있다. 이 나라들은 일본과의 교전중에도 이렇게 표기했다. 사실상 현실에 ‘일왕’이라는 칭호를 가진 인물은 존재하지 않는다. 국가 원수에 대한 칭호는 당해 국가의 국민이 만드는 것이며 그 국가의 헌법에 명기되어 있다. 국가 원수의 직명을 그 국가의 국민이 원하지 않는 비하된 용어로 부른다해서 무슨 이익이 있는가.
2000년 10월 25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는 江澤民(장쩌민), 李鵬(리펑), 朱鎔基(주룽지), 李瑞環(리루이환), 李風淸(리란칭) 등 중국 최고 지도부가 총출동하여, 胡錦濤(후진타오)의 主持(주지)로, ‘중국인민지원군 항미원조(抗美援朝) 출국작전 50주년 대회’가 전에 없이 성대하게 열렸다. 여기서 장쩌민은 ‘항미원조 전쟁의 승리’를 경하하면서, 북한과의 단결의 결의를 다시 한번 밝히었다.
미국은 북한, 이라크, 이란 등 불량국가의 대량살상 무기를 방어하기 위해서 NMD를 구축하려 한다. 그런데 중국은 미국과 맞서며 북한을 뒷받침하고 대만을 차지하기 위해서 미국의 NMD 구축에 반대하고 있다. 러시아 역시 미국의 주도권을 견제하는 입장에서 중국과 방침을 같이 하고 있다. 중국, 북한, 러시아는 미국이 추진하는 NMD 반대를 고리로 북방신3각 연합을 굳히고 있다. 일본은 NMD에 찬성하여 미국측에 가담하고 있다. NMD를 위요한 이 대결구도에서 김대중 정권은 중국·북한·러시아 측에 가담하고 싶어 한다.
좌파통일 위협직면, 반일주의 청산해야
김대중은 1999년 5월 5일 CNN과의 회견에서 “한국은 TMD(NMD의 지역 구성)에 참여할 계획이 없다”고 분명히 못박았다. 이는 그 당시 美국방부가 ‘아·태 지역의 TMD 시스템 선택’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한국에 대한 TMD 배치의사를 공식화한 직후, 김 정권이 자기의 입장을 대외적으로 명확히 한 것이었다.
李廷彬(이정빈) 외무(당시)는 2001년 2월 중순 한일협력위원회 초청연설에서 “미국이 NMD를 강력히 추진하는 것보다는 이같은 원인제공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더 빠르고 손쉬운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고 했다. 김대중 정권에서 국방장관·국정원장을 지낸 千容宅(천용택)국회 국방위원장은 2001년 1월 “어떠한 새로운 미사일 방위 계획도 군사적 이득이 없고, 북한과 중국을 자극할 뿐”이라며, “미국은 미묘한 안보상황에 인내력을 더욱 발휘해야 하며 (북한의) 기배치된 미사일 철수와 추가개발 제한을 중심과제로 삼아야 한다”고 했다. 마침내 김대중·푸틴 공동성명은 “72년 (미·소 간에) 체결된 ABM(反탄도 미사일) 조약이 전략적 안정의 초석”이며, “이를 보존하고 강화하기를 희망한다”고 했는데, 러시아는 바로 이 ABM 조약에 근거하여 미국의 NMD 추진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다.
김대중·푸틴 공동성명을 두고 러시아 이스베스챠紙는 푸틴 외교의 대성공으로 평가했다. 중국 人民日報도 김대중이 러시아를 편들었다면서 호평했다. 뉴욕타임스는 김대중이 러시아 편에 섰다고 하면서, 3만7천명의 미군을 주둔시키고 있는 나라에서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푸틴은 그길로 베트남으로 가서 베트남 지도부와도 NMD를 반대하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미·일과 동맹하여 자유민주주의 지켜야
김대중 정권에 의한 외교정책의 변질은 제동되어야 한다. 차제에 한국의 대일관계도 전향적으로 재정립되어야 한다. 이데올로기화된 반일주의를 청산하고, 국가이익의 합리성 위에서 대일관계를 재정립해야 한다.
일본의 유엔 안보이사회 상임이사국 참여는 긍정적으로 인정되어야 한다. 일본은 아시아의 유일한 완전 민주주의 국가일 뿐만 아니라, 세계적 수준에서 볼 때에도 선진 자유민주주의 제도를 정착시킨 나라이다. 한국은 미국, 일본과 동맹하여 자유민주주의를 지키고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한국은 좌파통일의 위협에 리얼하게 직면하고 있다. 한국과 東아시아의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는 韓美동맹, 韓日협조라는 개별적·분단적·마찰적인 틀을 넘어서 韓美日 삼각동맹의 새로운 개방된 틀로 나아가야 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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