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국의 주민이 된 고구려말갈
1. 말갈기록 검토
(1). 중국사에서의 말갈
발해의 주민구성을 푸는 열쇄이자, 발해사의 가장 큰 수수께끼인 [靺鞨]이 역사상 처음으로 기록된 것은 《북제서》<무성제기>이며, 그것이 정식으로 외국열전에 입전되기 사작한 것은 《수서》<동이, 말갈전>부터였다. 그런데 《수서》로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말갈은 그 거주 지역이 종래 말갈의 선조로 이해하여 왔던 肅愼 婁 보다 광범위할 뿐만 아니라, 《삼국사기》에도 그 이름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삼국사기》에서의 말갈은 《북제서》이전의 B.C년간으로부터도 나오고 있지만, 이것이 곧 말갈의 원래 모습이라고는 할 수 없다. 아무래도, 《수서》등의 말갈을 본래의 것으로 보는 것이 보다 진실에 가까우리라 생각한다. 따라서, 우선 말갈의 선조로 알려진 肅愼 婁 勿吉 등을 살펴 보아야 한다. 숙신과 읍루에 관한 필자의 견해는 이미 밝혀져 있다. 숙신, 읍루와 같이 중국사의 입장에서 기록된 것들의 특징은 흑룡강중하류를 비롯한 동북방주민들에 대한 정보를 晋代로부터 시작해 隋 唐代에 가서야 비로소 비교적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기록들은 만주전역 주민들의 역사상을 보여 주는 것이라기 보다 중원중심의 단편적 지식에서 출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晋代에 간행된 《삼국지》<동이, 읍루전> 이전의 것들은 당시 중국인들이 그들 동북방 주민들을 넓게 알고서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들과 인접한 지역의 주민들을 기준으로 해서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삼국지》를 포함해서 그 이전의 기록들은 만주 일부 주민들의 생활상을 전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고, 이들에 대한 정보를 비교적 자세히 알기 시작한 것은 수 당대가 되어서였다. 그런데 말갈 역시 중국 중심적 시각에서 기록되었음은 그들의 조상이었다고 하는 숙신 읍루 등의 경우와 같다. 그러나 말갈은 숙신 읍루 물길 등과는 달리 일곱 부락(부족)이었다는 것이 다르다. 즉, 이들이 살고 있던 지역은 숙신 읍루를 포함해서 이들과 계통을 달리하는 예맥계의 부여, 옥저까지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 다른 특징이다. 다음에 이 내용과 관련된 말갈에 관한 기록을 살펴 보기로 한다.
A. 靺鞨은 高句麗의 북쪽에 있다. 읍락마다 추장이 따로 있어 하나로 통괄이 되지 않는다. 모두 7종이 있는데, 그 첫째는 粟末部로서 高句麗와 인접하여 정예의 병사가 수천 명으로 용감한 병사가 많아 늘 高句麗를 침입하였다. 둘째는 伯 部로서 粟末部의 북쪽에 있으며, 정예의 병사가 7천이다. 세째는 安車骨部로서 伯 部의 동북쪽에 있다. 네째는 拂涅部로서 伯 部의 동쪽에 있다. 다섯째는 號室部로서 拂涅部의 동쪽에 있다. 여섯째는 黑水部로서 安車骨部의 서북쪽에 있다. 일곱째는 白山部로서 粟末部의 동남쪽에 있다. 이들은 모두 정예의 병사가 3천에 불과한데, 黑水部가 가장 굳세다. 拂涅部로부터 동쪽 지역은 화살을 모두 돌촉으로 사용하니 이곳이 바로 肅愼氏의 땅이다. 그들이 사는 곳은 모두 산이나 물을 의지하고 있으며, 그들의 우두머리를 大莫拂瞞 이라고 하는데, 東夷 가운데서는 강한 나라이다. 徒太山이라는 큰 산이 있어 사람들이 매우 숭상하고 두려워 한다.[中略] 開皇(581-600) 초에 [여러 부락이] 서로 어울려서 使者를 보내와 공물을 바치니, 文帝가 그 使者에게 '朕은 그곳의 사람들은 대체로 용감하고 민첩하다고 들었는데, 이제 만나 보니 실로 朕의 마음에 든다. 朕은 너희들을 아들과 같이 여기고 있으니, 너희들도 朕을 아버지처럼 공경하라.'고 말하니, [그 使者가] '臣들이 한 구석에 외지게 살고 있어서 길은 멀고 멀지만, 중국에 聖人이 계시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에 와서 朝拜를 하는 것입니다. 위로를 받고 친히 聖顔을 뵈오니 下情의 기쁨을 견딜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길이 奴僕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대답하였다. 그들의 나라가 서북쪽이 契丹과 서로 닿아 있어서 늘 서로 침략하므로, 뒤에 사신이 왔을 적에 文帝가, '내가 契丹을 생각해 주는 것은 너희들과 다를 것이 없다. 의당 저마다의 국경이나 지키고 있다면 어찌 안락하지 않겠는가. 무엇 때문에 수시로 서로 공격을 하여 나의 뜻을 이다지도 저버리는가'라고 타이르니, 使者가 사죄를 하였다. [中略] 그 사람들은 隋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粟末[部]과 白山[部]만이 가까왔다. [隋] 煬帝 초에 高句麗와의 싸움에서 자주 그들을 물리치니, 그의 渠帥 度地稽가 여러 부락의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해 왔다. 煬帝가 그에게 右光祿大夫를 除授하고 柳城에 거주시켜 변방 사람과 내왕을 하게 하였다. (《隋書》卷81, <東夷 靺鞨傳> )
B. 靺鞨은 대체로 옛날 肅愼의 땅으로 後魏 때에는 勿吉이라 불렸는데, 京師의 동북쪽 6천여리 떨어진 곳에 있다.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突厥과 접하며, 남쪽으로는 高句麗와 경계를 이루고, 북쪽으로는 室韋와 이웃하고 있다. 그 나라는 수 십개의 부락으로 나뉘어 있는데 각기 추장이 있다. 어느 부락은 高句麗에 附屬되어 있기도 하고 어느 부락은 突厥에 附屬되어 있기도 하다. [中略] 그 가운데 白山部는 본래 高句麗에 附屬되어 있었는데, 平壤城이 함락된 뒤에 部의 많은 무리들이 중국으로 들어 왔다. 汨 安居骨 號室 등의 부족도 高句麗가 함락된 뒤로는 뿔뿔이 흩어져 미약했으므로 별로 활동이 알려지지 않고, 더러는 高句麗 유민과 함께 渤海에 편입되었다. 오직 黑水部만이 전성기를 이루어 16部로 나뉘어졌는데, 部는 또 남부와 북부로 구분되어 일컬어지기도 하였다. (《舊唐書》卷199下 <北狄, 靺鞨傳>)
C. 黑水 靺鞨은 肅愼 땅에 있는데, 이것은 또 婁라고도 한다. 元魏 때에는 勿吉로도 불리었다. 京師 바로 동북쪽 6천리 되는 곳에 있다.동쪽은 바다에 닿아 있고, 서쪽은 突厥, 남쪽은 高句麗, 북쪽은 室韋에 소속되어 있다. 이들은 각각 數十部 씩이 있는데 部마다 추장이 있어 다 각각 다스린다. 그 중에서 가장 뛰어 난 것이 粟末部로서 제일 남쪽에 거주하고 있다. 太白山 즉 서북쪽에 이르러 高句麗와 이웃 하고 있다. 이들은 粟末水에 의지하여 거주하고 있는데, 이 粟末水는 太白山의 서북쪽에서 발원하여 漏河로 흘러 들어 간다. 粟末部에서 동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는 汨 部[伯 部]가 있고, 그 다음에는 安居骨部가 있으며 더 동쪽으로 가면 拂涅部가 있다. 安居骨部의 서북쪽에 黑水部가 있다. 粟末部의 동쪽은 白山部이다. 각 部 사이의 거리는 먼 경우 3 4백리가 되고, 가까운 경우 2백리가 된다. 白山部는 본래 高句麗에 臣屬되어 있었는데, 당의 군대가 평양을 함락시키자 그 무리들 대다수가 唐으로 들어 갔다. 汨 部[伯 部], 安車骨部 등은 모두 도망 분산되어 세력이 미약해짐으로써 그 뒤로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 유민들은 渤海로 들어 갔다. 다만 黑水部만이 완전하고 강했다. 이들은 16부락으로 나뉘어 있고 南黑水, 北黑水로 불렸는데, 대체로 제일 북쪽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新唐書》卷219 <北狄, 黑水靺鞨傳>)
D. 渤海는 본래 粟末靺鞨로서 高句麗에 부속된 者이니, 姓은 大氏이다. 高句麗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婁의 東牟山을 거점으로 하였다. 그곳은 營州에서 東으로 2천리 밖에 위치하며, 남쪽은 新羅와 맞닿아, 泥河로 경계를 삼았다.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契丹이다. 여기에다 城郭을 쌓고 사니, 고려의 망명자들이 점점 몰려 들었다. [中略] 국토는 5京, 15部, 62州이다. 肅愼의 옛 땅으로 上京을 삼으니, 府名은 龍泉府이며, 龍州 湖州 渤州 등 3주를 통치한다. 濊貊의 옛 땅으로 東京을 삼으니, 府名은 龍原府로, 柵城府라고도 하며 慶州 鹽州 穆州 賀州등 4州를 통치한다. 沃沮의 옛 땅으로 南京을 삼으니, 府名은 南海府이며, 沃州 睛州 椒州 등 3주를 통치한다. 長嶺府는 瑕州 河州 등 2주를 통치한다. 夫餘의 옛 땅에는 夫餘府를 삼아서 늘 강한 군대를 주둔시켜 契丹을 방어하는데, 扶州 仙州 등 2주를 통치한다. 詰府는 州 高州 등 2주를 통치한다. 婁의 옛 땅에 둔 定理府는 定州 潘州 등 2주를 통치한다. 安邊府는 安州 瓊州 등 2주를 통치한다. 率賓의 옛 땅인 率賓府는 華州 益州 建州 등 3주를 통치한다. 拂涅의 옛 땅에 세운 東平府는 伊州 蒙州 州 黑州 比州 등 5주를 통치한다. 鐵利의 옛 땅인 鐵利府는 廣州 汾州 蒲州 海州 義州 歸州 등 6주를 통치한다. 越喜의 옛 땅인 懷遠府는 達州 越州 懷州 紀州 富州 美州 福州 邪州 芝州 등 9주를 통치한다. 安遠府는 寧州 難州 慕州 常州 등 4주를 통치한다. 또 州 銅州 涑州 등 3주로 獨奏州를 삼으니, 涑州란 이름은 그곳이 涑沫江과 가깝기 때문이다. 涑沫江은 이른바 粟末水이다. (《新唐書》卷219 <北狄, 渤海傳>)
위의 사료 A로 보자면, 말갈은 속말, 백돌, 안거골, 불열, 호실, 흑수, 백산의 7부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숙신이나 읍루 심지어는 말갈의 전대 조상으로 알려진 물길까지도 그들의 종족 구성에 있어서는 단일 부족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함에도 말갈이 이렇듯 7부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말갈과 관련이 있는 숙신 읍루 물길 이외의 다른 종족의 경우는 한 종족이 몇 개의 부족[부락?]으로 나뉘어진 예는 없다. 단지 말갈의 후신으로 알려진 여진만이 30성 여진 등으로 나뉘어 있어 말갈과 그 맥을 같이 하고 있을 뿐이다. 말갈 7부에 대한 일반적인 호칭은 속말말갈, 백돌말갈, 안거골말갈, 불열말갈, 호실말갈, 흑수말갈, 백산말갈이다. 그러나, 위의 사료대로 하자면, 속말부 백돌부 안거골부 불열부 호실부 흑수부· 백산부로 부르는 것이 바르지 않은가 한다. 이것은 흑수부와 흑수말갈을 구별하는 견해도 있기 때문이다. 즉, 姜守鵬은 唐 總章 연간(668-669)에서 開元 13년(725) 이전에 흑수부가 흑수말갈로 확대 발전하였다고 하면서 양자의 존재 시기와 위치도 다르다고 한다. 또한 양자를 같이 보면서도 흑수부와 흑수말갈이 교대하였으며, 흑수말갈의 일부에 흑수부가 존재한다는 견해도 있어 주목된다. 필자는 이 논문에서 7부 말갈을 속말말갈, 백산말갈, 흑수말갈 등으로 쓰고자 쓰고자 한다. 그렇다고 말갈의 실상을 파악하려는 필자의 의도에서 이것이 큰 장애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중국 사서에서의 말갈은 그 주거 범위가 여러 종족계통이 포함된 넓은 범위였다는 것이다. 또한 이것의 두번째 특징은 7부 말갈의 종족계통이 명확하지 않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통설로 보아, 말갈은 숙신(先秦)→읍루(漢)→물길(後魏)→말갈(隋 唐)의 일원 계통 상의 한 종족이다. 그러나, 말갈의 전신으로 알려진 숙신[필자의 후기 숙신]과 읍루의 계통이 일원적이지 못하다거나 다르다는 점이 여러 군데서 확인되고 있는가 하면, 중요한 7말갈에 있어서도 다음에 살펴 보는 바와 같이 그 안에는 예맥계와 순퉁구스계의 후손들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위의 말갈은 《後漢書》(卷115)<東夷, 婁傳>과 《魏書》(卷100)<勿吉傳>에서와 같이 [읍루는 옛 숙신국이다] 라든지, [물길은 옛 숙신국이다]라는 등의 말갈의 선조에 대한 기록이 없다. 단지 불열부 동쪽을 숙신이었다고 하여, 말갈의 한 부분이 옛 숙신이었음을 밝히고 있을 뿐이다. 이러한 말갈은 《구당서》(B)에도 반영되고 있다. 《구당서》<북적, 말갈전>은 말갈과 숙신의 관계를 [말갈은 대체로 옛 숙신의 땅]이라고 하여 말갈 지역에 숙신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더구나 《구당서》의 [말갈]은 흑수말갈의 별칭이었기에, 이것의 범위는 흑수말갈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말갈 속의 숙신이란 보다 제한된 범위였음에 틀림없다. 이러한 사실은 《五代會要》(宋 建隆2년, 961)에서도 확인된다. 《구당서》(後晋 開運 2년, 945)보다 16년 후에 완성된 《오대회요》는 권30의 <흑수말갈전> 처음에 [(흑수:필자) 말갈은 대개 숙신의 땅]이라고 하여 《구당서》의 <말갈전>이 <흑수말갈전>임을 다시 한번 입증시켜 주고 있는가 하면, 고구려 시대 일곱 말갈이 모두가 숙신의 옛 땅이 아니었음도 확인시켜 주고 있다. 한편 《신당서》(D)는 《구당서》보다 더욱 제한된 범위에서 숙신을 언급한다. 즉, [숙신의 옛 땅으로 上京을 삼으니 府名은 龍泉府]라고 하는가 하면, 말갈 지역으로 알려진 발해가 [숙신의 옛 땅, 예맥의 옛 땅, 고구려의 옛 땅, 부여의 옛 땅, 읍루의 옛 땅, 불열의 옛 땅]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적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당서》의 이 기록은 《구당서》와 큰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숙신의 옛 땅을 《구당서》가 흑수말갈로 보는데 반해, 《신당서》는 <북적 발해>와 <북적 흑수말갈>을 따로 입전하면서 발해의 영역 안에 [숙신의 옛 땅]과 [읍루의 옛 땅],[불열의 옛 땅]이 각각 따로 있었던 것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숙신 예맥 고구려 부여 읍루 불열 등의 지리 고증 및 숙신 읍루 말갈의 종족계통 파악이 어렵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신당서》가 《구당서》보다 사료적 가치가 떨어진다면, 《구당서》와 《오대회요》의 [(흑수)말갈은 대체로 숙신의 옛 땅]이었다는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다. 그러나 위의 《수서》에 [불열이동은 옛 숙신씨] 라는 기록이 있음을 상기한다면, 《신당서》의 기록도 신빙성이 없다고 버릴 수만은 없다. 때문에 중국의 楊保隆은 숙신과 읍루의 연원 관계를 따질 때 《신당서》의 기록 즉, 발해의 영역 안에 숙신의 옛 땅과 읍루의 옛 땅이 함께 있다는 것을 의심하고, 이곳의 읍루는 [虞婁(우루)]의 잘못이라고 한다. 또한 그는 읍루의 옛 땅에 있었다고 하는 定理 安邊의 2부 위치를 요동 지구로 주장하고 숙신, 읍루의 동일 계통 및 동일 지역설을 지지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이미 김육불에 의해 읍루의 잔재가 《신당서》<흑수말갈전>(사료 C)의 [黑水西北又有思慕部(中略)又有拂涅虞婁越喜鐵利等部]에 나오는 [虞婁]에 있다고 하였던 적이 있다. 또한 이러한 생각들은 숙신과 읍루의 동일계통설을 주장하는 설홍이 위의 <흑수말갈전>이 우루부의 위치만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하고 읍루의 위치를 《신당서》<북적, 발해전>(사료 D)의 [ 婁故地爲定理府 安邊府]에서 찾아, 오늘날의 小綏芬河에서 우수리강[烏蘇里江] 상류로 추정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할 수 있는 점은 숙신, 읍루의 동일계를 주장하는 견해들마저 읍루의 위치가 서로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요컨대 말갈의 일부 지역에 한하여 숙신 사람들이 살던 곳이라고 하는 사실은 말갈 전체를 흑수숙신--이른바 숙신--의 후예로 보는 시각이 잘못되었다는 점을 반증해 준다는 것이다. 말갈이 그 전신이라고 하는 숙신 읍루 등과 계통성이 박약하다는 사실은 각각의 소리말이 다르다는 점에서도 일정하게 확인된다. 말갈의 어원에 대해서는 많은 의견들이 있다. ① 흑룡강을 뜻하는 골리드족이나 오로찌야족의 언어인 Mangu에서 나왔다는 견해. ② 한 위대의 옥저 읍루 부여와 수 당대의 물길 말갈, 명대의 兀者, 청대의 渥集을 모두 同音異譯으로 보면서 물길, 말갈이 만주어로 밀림 삼림의 뜻인 窩集(Weji)에서 나왔다는 견해. ③ 말갈은 동호족의 일계로 《위서》 거란전 등에 나오는 추장의 존칭인 [莫賀弗]이 와전되어 [말갈]이 되었다는 견해. ④ 숙신족어로 大人을 渠帥라고 하다가 남북조시대에는 大莫拂瞞 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말갈](특히 동옥저의 백산말갈)의 어원이 되었다는 견해.) ⑤ 貊族과 族이 융합한 貊 이 말갈이 되었다는 견해) ⑥ [말갈]은 스키타이계의 돌궐어와 근칭성을 갖는 종족명으로써 [大]가 [말]로 [弓]이 [갈]로 변하여 [말갈(malkar)]이 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이들 주장들은 말갈의 어원이 강이나 삼림, 그리고 족장 및 종족명에서 와전 기원되었다고 전할 뿐, 숙신과 읍루에서 그 어원을 찾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말갈은 물길과는 일정하게 어원적으로도 관련이 있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고대의 작은 종족(부락)이 왕실을 세워 정복국가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그들이 갖고 있던 종족명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국가를 형성하는 예는 거의 없고, 대개는 본래 그들이 가지고 있던 하나의 지명이라든지 부락 또는 종족명이 漢譯되어 왕조명으로 쓰였던 예가 대부분이다. 부여 이전 중원북계 및 남만주에 살았던 숙신[필자의 전기숙신]이 조선과 통하는 것도 그 한 예라 하겠다. 그러나 말갈, 물길의 전신이 단지 숙신, 읍루만으로 그친다면 서로가 어떻게 그토록 소리말이 다른지 의문스럽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결국 이 사실은, 말갈의 거주지였다는 발해의 영역에 숙신고지, 읍루고지, 예맥고지, 부여고지 등이 있다고 하는 사실 등과 더불어 말갈의 종족계통을 단순히 숙신, 읍루만으로 연결하는 지금까지의 주장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2). 《삼국사기》의 말갈
말갈이 나오는 기록은 《북제서》, 《수서》 등에 국한되지 않는다. 신라 후손들이 썼던 《삼국사기》에도 상당한 비중을 갖고 나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국사기》의 그것은 만주에서 활약했던 말갈은 소수이고, 임진강이나 한강 유역 등의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그들은 독자적인 것보다 주로 낙랑 및 고구려의 부용 세력으로 활약하였던 것이 큰 특징이다. 그러나 그들의 실상을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전통적으로 중국 정사를 중심으로 하여 말갈의 종족계통을 언급해 왔고, 그 거주 지역에 있어서도 임진강이나 한강 유역은 숙신 읍루 등과는 전혀 관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갈의 원래 모습을 전하는 것이 《북제서》나 《수서》라면, 《삼국사기》는 거짓말갈 이른바 僞靺鞨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함에도, 《삼국사기》의 말갈은 기록자가 전혀 어떤 원칙도 없이 쓴 것이 아니라, 일정한 역사 인식을 갖고 쓴 사서임에 틀림없다고 본다. 《삼국사기》의 말갈이 갖는 첫재 특징은 시간적으로 중국 정사와는 달리 <고구려본기> 東明聖王 원년(B.C.37)부터 <신라본기> 景明王 5년(A.D-921)까지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정사에서 본격적으로 말갈을 다룬 것은 위에서도 밝힌 바와 같이 《수서》부터였고, 최초 기록은《북제서》 <무성제기> 하진 2년(563) 이었다. 그러나 《삼국사기》의 말갈은 중국 왕조로 보자면, 한에서부터 오대의 후량에까지 이른다. 둘째, 이 기록들은 공간적으로도 중국정사와는 달리 임진강 유역과 남한강 유역 등에까지 등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세째, 《삼국사기》에 나오는 말갈은 그들 독자의 왕조나 중심적인 거점이 없고 삼국의 접경에서 대개 활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독자적 활동상보다 낙랑이나 고구려의 부용세력으로 등장하는 것이 압도적이라는 점이다. 《구당서》 등의 대부분 말갈이 고구려의 부용 세력으로 등장하면서 고구려 당과의 외교 관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것과 같이, 이곳의 말갈도 한국사의 전개과정 즉, 삼국의 형성 및 그 전개과정에서 중요한 구실을 하고 있다. 그러나 《구당서》등에 나오는 말갈과 이곳의 말갈은 전자가 수 당대에 국한하고 그들의 활동 지역도 일정한데 반해, 후자의 것은 고구려 내지 삼국의 전 시기에 걸치면서 그들의 활동 지역도 삼국의 국경 지대와 같이 유동적이다. 물론 《삼국사기》(본기) 에는 중국 정사에서 인식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말갈도 있다. 영양왕 9년(598) [왕이 말갈인 만여명을 거느리고 요서지방에 침입하다가, 영주총관 위충에게 격퇴당하였다]는 것을 필두로 영양왕 23년(612), 보장왕 2,3,13(654)년 등에도 이것과 같은 부류의 말갈이 있다.(뒤의 사료H1). 이와 똑같은 내용이 《수서》나 《자치통감》, 《신당서》 등에도 나오는 것이기에 이곳의 말갈은 《삼국사기》의 다른 말갈과는 전혀 다른 眞靺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삼국사기》의 말갈에 관한 견해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① 한진서, 정약용 등은 《삼국사기》의 말갈을 대개 거짓말갈의 [僞靺鞨]로 보면서 이것들은 不耐濊일 것이라고 주장하고, 특별히 정약용은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말갈과 수 당전에 참여하는 말갈만큼은 眞靺鞨이라고 한다.
② 이용범은 《삼국사기》의 말갈은 위말갈과 진말갈의 두 종류 말갈이 있었다고 하는 한진서 등의 의견을 따르면서도, 위말갈의 시간적 범위를 백제 무녕왕 이전으로 잡고 있다.
③ 서병국은 낙랑과 관련을 가졌던 수 당 이전의 말갈이나 고구려에 예속된 생활을 하며 한반도에 남하하였던 말갈 모두는 중국 정사에 나오는 흑수, 속말, 백산부의 말갈과 같다고 하여, 예맥계설 및 위말갈설을 부정한다.
④ 那珂通世는 중국 漢代와 같은 시기에 나오는 《삼국사기》의 말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여, 이것은 오히려 숙신 다음에 바로 말갈로 그 종족계통이 연결된다는 사실ㅇ보여 주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⑤ 鳥山喜一은 《삼국사기》의 말갈과 중국사에 나오는 말갈은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하고, 다만 이 말갈이 모두 예족만을 가리키는가에 의문을 제기하였다. 아울러 그는 고구려본기 동명성왕 원년조(B.C 37)에 나오는 갈은 읍루로써, 이것은 뒷날의 칭호에 의해 치환된 것이며, 태조대왕과 서천왕기에 나오는 숙신도 연대적으로 보아 읍루여야 한다고 하는 등 《삼국사기》의 말갈은 김부식이 중국의 《수서》, 《(구 신)당서》의 것을 차용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 말갈의 예계설은 신채호가 낙랑과 관련한 말갈을 예로 보는 것으로부터 주장되기 시작하여, 이병도 역시 이것들을 예맥(동예)의 잘못된 지칭이라 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김철준은 삼국시기의 말갈을 고구려 세력권 에 있는 예나 동옥저 계통의 족속이라 하였고, 천관우도 이것을 예를 주로 하여 옥저도 혼합한 일정 지역의 주민으로 파악하였는가 하면, 북한의 박진욱도 백제와 신라에 이웃하였던 말갈은 고구려 북쪽에 있었던 말갈과는 전혀 다른 [예]의 말갈이라고 하면서 예계설을 수하고 있다. 그러면, 고구려의 남쪽 경계 내지 고구려의 남방 영토의 범위가 어디까지였는가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고구려의 남방 영토 내지 그들의 영향권 안에 있었던 지역에서 말갈의 활약상도 확인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고구려의 영토라고 생각할 수 있는 중원고구려비가 신라 영역으로 생각되던 충주 지역에서 발견되고, 소백산맥을 넘어 발견된 경북 영풍 순흥의 6세기 초의 於宿墓와 己未銘 벽화 고분이 고구려의 정치적 영향과 결부되어 나타난 문화적 산물이라는 의견들은 고구려의 정치 군사적 세력권 내지는 그들의 영토라고까지 할 수 있는 지역이 남한강과 동해안의 상당히 남쪽까지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삼국사기》에 보이는 말갈의 활동 지역은 이들과 군사적 접촉이 있었던 고구려, 백제, 신라의 접경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먼저 <백제본기>에 있는 말갈 즉, 말갈과 백제 관계를 통해 볼 때 말갈의 활동 지역은 대체로 지금의 서울 및 광주군을 포함한 한강 일대와 연천군내 적성 부근과 이곳을 휘감아 흐르는 임진강 및 개성부근, 경기도 여주군 일대 등으로 볼 수 있고, <신라본기>에 있는 말갈 즉, 신라와 말갈 관계를 통해볼 때 말갈은 삼국시대 泥河로 생각되는 지금의 충주 제천 등을 중심으로 한 남한강의 긴 구역에서 활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러한 결과는 위에서 제기한 말갈의 예계설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어서 더욱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한국측의 《삼국사기》에서 나타나는 대부분의 [말갈]은 중국측의 [말갈 칠부]와는 다르다. 필자는 그렇다고, 뒤에서 논증해 보이는 것과 같이, 《삼국사기》의 이와 같은 말갈 기록이 아무런 원칙도 없이 오직 동예만을 잘못 기록한 것이라고도 보지 않는다. 이것은 《삼국사기》 찬자의 말갈에 대한 역사인식이 반영된 기록이었다고 생각한다.
2. 중국 동북방 이민족에 대한 범칭 비칭
말갈 기록이 갖는 위와 같은 특징들--특히 중국측의 말갈기록--에서 필자는 몇 가지 다른 의문을 갖게 되었다. 말갈이란 그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사용했던 종족명이었는가 아니면 다른 지역 특히 중국인들이 이들을 일방적으로 불러 기록한 이름이었는가? 다시 말해 만주 주민들이 秦 이전에는 스스로 肅愼이라고 하다가 漢代에는 婁, 後魏(元魏)代에는 勿吉, 隋 唐代에는 스스로 靺鞨이라 그들의 종족명을 고쳐 불렀을까 하는 점이다. 도대체 중국의 왕조 교체에 따라 주변 민족이 그들의 이름을 이렇듯 달리 불렀다고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것은 중국측 기록자이 정확하지 못한 정보를 바탕으로 하여 일방적으로 불렀던 타칭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결론을 앞세우면, [말갈]이란 어느 특정의 종족명이 아닌 넓은 지역 이민족을 통칭하여 부르는 범칭으로써, 이것은 중국사의 이민족 호칭에 대한 일반적인 예와 같이, 중국중심의 일방적 낮춤말의 비칭이었다고 생각한다. 말갈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오게 된 것은 작은 씨족 부락의 한 이름에서 나온 특별한 호칭이었으나, 일정한 시간이 지나서는 그들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다른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말갈]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노태돈이 [중국인들이 새외민족의 단위체를 기술할 때 사용한 부라는 술어는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뚜렷한 한정된 개념이 없이 쓰여졌고, 때로는 한 종족이나 부족을, 때로는 한 부락이나 행정단위를 지칭하기도 한다]는 주장은 필자도 동의하는 바이다. 정약용은 말갈을 자칭으로 보고, 발해국 이름은 당에서 준 것으로 주장한다. 이러한 생각은 《신당서》의 기록을 존중하여 내린 것이라고 보는데, 중국측의 일반적인 견해도 이와 같다고 여겨진다. 그런데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말갈의 어원은 강이나 삼림, 그리고 족장 및 종족명에서 전와 기원되었다고 한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이 이와 같은 종족명을 스스로 썼다고 하기는 어렵다. 말갈의 어원에 대한 주장들은 어느 지명이나 종족명으로부터 출발하지만, 말갈이 그들 주민들의 종족 의식 내지 왕조 의식을 통해 나온 이름은 아니다. 고구려시대(수 당대) [말갈] 지역에서는 국호를 자칭할만한 국가도 없었다. 따라서 말갈이란 그들 주민들이 살던 곳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의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호칭한 것에 불과하다. 물론 당대에도 말갈이란 호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것은 당나라 사람들이 [말갈]로 부르니까 당에 드나들던 송화강이나 백두산 주민들도 이들에게 [말갈]이라고 자기들을 소개하였다고 볼 수 있을 뿐이지, 이것들이 곧 그들 스스로에 대한 호칭이었다고 볼 수는 없다. 발해인 스스로가 [말갈]이라 자처했던 예는 중국이나 일본 어느 기록에도 찾아볼 수 없다. 노태돈은 위의 사료 A의 度地稽[突地稽] 기록을 근거로 속말부 사람 스스로가 말갈족이라 자칭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수와 아주 멀리 떨어져 있고 속말[부]과 백산[부]만이 가까왔다. [수] 양제 초에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자주 그들을 물리치니, 그의 거수 도지계가 여러 부락의 무리를 거느리고 항복해 왔다]는 것만 가지고 이렇게 주장하는 것은 무리다. 그러나 위와 같은 외국 열전은 중국인들이 이민족에 대한 以夷制夷와 중국적 天下觀이라는 입장에서 기록되었다는 사실도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말갈을 범칭이자 타칭으로 보는 또 다른 이유는 말갈이 살았던 거주 범위가 지나치게 넓어서 그들의 선조들로 알려진 숙신이나, 읍루를 포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선조와 전혀 관계없다는 예맥 및 부여 지역까지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도 관련되지만, 말갈 앞에 [속말], [백돌], [흑수], [백산]등의 수식어가 덧부쳐지는 것도 말갈의 타칭 가능성을 높여 주는 사실이 아닌가 한다. 아울러 《삼국사기》에 B.C 년간으로까지 말갈이란 종족명이 나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왜냐 하면, 《삼국사기》가 중국의 《북제서》에서 처음 언급했던 563년 이전에도 말갈을 언급하고 있는 것은 말갈을 특정 시대, 특정 종족이라는 관점에서 기록했다기 보다, 동북방 이민족이나 고구려와 관련된 어느 지역 주민을 통털어 불렀던 이름으로 서술하였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구려와 관련이 많았던 말갈은 5세기 초 광개토왕릉비문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데 《삼국사기》에서는 5세기 이전으로까지 [말갈]이 출현하고 있다는 것인데 혹 여기에서 우리는 말갈이 갖고 있는 의문의 실마리를 풀 수도 있지 않을까 한다. 필자는 그렇다고 말갈이 어떠한 근거도 없이 일방적으로 중국인들이 지은 이름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북사》<물길전>에서 말갈보다 먼저 물길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둘 때, 처음에는 [물길] 등으로 불리는 조그마한 씨족 부락이 있다가 이것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당시 중국인들의 동북방 이민족에 대한 범칭이 되었다는 생각이다. 엄격히 말해 말갈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왔을 때의 의미와 이것이 동북방 이민족을 전체적으로 부르게 되었을 때의 의미는 상당히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말갈이 갖는 또 다른 의문은 이것이 혈연을 중심으로한 종족명인가 아니면 혈연 보다 지연을 중심으로 한 부락명인가 하는 점이다. 말갈 사회를 종족과 부락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접근 방법이겠는가의 문제는 말갈의 사회발전단계와 더불어 다시 검토되어야 할 문제이다. 그렇지만, 필자가 문제삼는 것은 말갈이라는 말 속에는 당시 중국인들이 만주 주민들을 모두 통털어 부르던 의미라는 점이다. 사료상에 말갈을 부락으로 표현했던 예가 다음과 같이 확인되고 있다.
E-1 (開元 2年 2月, 714) [是月 拂涅靺鞨首領失異蒙 越喜大首領烏施可蒙 鐵利部落大首領 許離等 來朝](《冊府元龜》卷971, <外臣部> 朝貢4) 2 (開元 4年, 716) [閏十二月 東蕃遠蕃 靺鞨部落拂涅部落勃律國 皆遣大首領來朝(《冊府元龜》卷971, <外臣部> 朝貢4)
그렇다면, 靺鞨로 불리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어떻게 부르고 있었는가? 적어도 그들은 자기가 살고 있는 지역의 지명을 앞세웠지 않았을까 한다. 이를테면, 나는 [백산사람]이라고 하였다든지 [송화강사람]이라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론 현지 주민들의 생각과 이들 통치자들의 생각이 똑 같지는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당시 수 당에 알려지고 기록에 남는다고 생각되는 무리는 대개 치자 쪽의 사람들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요컨대, 중국측 기록이 말갈을 7부로 나누어 [속말부]니 [백산부]니 하는 식으로 넓은 지역의 주민들을 나누어 언급하고 있는 것 자체는 이것의 범칭적 성격을 반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 중 일을 막론하고 고조선 예맥과 숙신의 거주 지역에 대한 의견은 분분하다. 그러면, 왜 중국인들이 남긴 동북방 주민들에 대한 역사가 이렇게 불분명한가? 그러한 이유는 지금까지 이러한 견해들이 주로 중국 정사를 비롯한 사료에 바탕을 두고 중원 중심의 민족 이동에 따른 종족의 잡거 및 혼란됨을 제시해 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조선, 예맥, 숙신 등과 같이 민족 이동설의 공통된 견해는 그 기원지가 모두 중원근방이라는 점이며, 여기에서 요동, 남만주, 한반도 북부 등으로 이동하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모든 종족의 기원을 과연 중원에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을까? 문화 전파설의 입장에서라면 모르나 민족 이동설의 입장은 근본적으로 중국 중심의 역사관이 투영된 해석이다. 중국 사서는 숙신의 기원을 중원 근방에서 기록하다가 백두산 근방을 비롯한 만주 일대,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신당서》와 같이 흑룡강 일부의 범위에 국한해서 기록하였다. 그런데 필자는 이와 같은 변화가 있게된 원인은 단순히 숙신족의 이동과 왜축으로 인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그 보다 기록자의 변방 국가들에 대한 주관적 인식의 변천 때문에 일어난 원인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즉, 7말갈도 중국의 동북방 미개지역이었던 [물길]에서 수 당대가 되자 그들 동북방 이민족을 통털어 부르는 범칭이자 비칭으로 확대하여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유원재도 이같은 주장을 한 적이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한 것이었다. 즉, 동예사의 복원이라는 측면에서 [위말갈]설을 받아들여, 《삼국사기》의 말갈을 [불내예]나 [동예]였다고 하였기에 말갈의 전체적인 파악에는 못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에 반해 권오중은 [흑수말갈]을 [읍루계]로 그리고 기타 남만주 계통의 말갈을 [예계]로 보아 말갈의 실상에 보다 접근하였다. 물론 오래 전에 白鳥庫吉은 [말갈이란 이름은 넓은 동북 지방의 여진 민족을 총칭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여 말갈의 종족 구성이 다원적임을 제시하였고, 나아가 日野開三郞은 말갈 7부 중 속말과 백산부를 예맥계로 보고 기타 다른 5부는 순퉁구스계로 보아 말갈의 다원계통설을 확실히 다져 놓았다. 한편 중국의 손진기도 말갈을 [몇몇 민족의 총칭(若干民族的總稱)]이라 하고, 말갈에는 원예맥계를 포함하고 있는 발해말갈과 원숙신계를 포함하는 흑수말갈의 양계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권오중, 손진기의 말갈은 발해시대를 중심으로 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필자의 견해와 통한다. 필자는 여기에 말갈이 수 당대 만주 주민 전체에 대한 비칭이었다는 생각을 덧부치고 있다. 말갈의 다원적 범칭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었으나, 그것의 비칭에 대해서는 박시형이 이미 주장한 바 있다. 즉, 그는 당나라가 발해인들이 스스로 '말갈'이라고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발해말갈' 또는 '말갈'이라고 하였던 것은 당나라 사람들의 침략에 대한 집요성에서 나온 것이라고 주장한다. 즉, 그는 당나라는 "자국의 수십, 수백만의 생명을 희생시키고 방대한 재부를 탕진하여 고구려국을 멸망시켜 그 령토를 완전강점하려"다가 그 기도가 수포로 돌아가고 오히려 고구려인들에 의한 발해가 건국되자, 이러한 사실을 자국민들에게 드러내 놓고 말할 수 없어 고구려의 발해를 말갈의 발해라 속였다는 것이다. 그는 "당시 당인(唐人)에게 있어서 고구려라는 말은 심한 공포나 금기(禁忌)의 감정을 자아내는 말로 되여 있었"기에 "고구려 대인들의 이름인 개소문(蓋蘇文)이라는 말이 오래도록 료동 및 그 부근 지방에서 공포의 대명사로 남아 있었던 것은 유명했다"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당인들은 당시 멸시의 감정을 포함한 '말갈'이라는 말로써 고구려라는 말을 대치하였고, 또 그것을 오래도록 계속하였다"고 주장한다. 한편, 현명호도 비칭의 발해말갈이라는 용어는 발해 1대 고왕 대조영기(698-718)와 2대 무왕 대무예기(719-736)에 쓰여지던 것이라고 하고, 그 사용범위도 당나라 사람들끼리 또는 그들을 '추종한 신라통치자들과의 사이에서나 통용되였지 그 당사자인 발해를 대상하여서는 단 한번도 사용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결국 '발해말갈'이라는 별칭은 당나라가 발해를 적대시할 때 사용하던 용어라는 것이다. 말갈의 비칭설은 酒寄雅志도 언급한 적이 있다. 즉, 그는 唐의 [渤海] 국호 칭호에 있어 唐의 입장에서, 발해가 그들의 자립성을 강조하고 있을 때는 멸시하는 [靺鞨] 칭호를 썼으나, 唐에의 귀속이 심화되면서 [渤海]라는 정당한 국호를 썼고, 일층 唐과의 관계가 긴밀화되었을 때는 [國王]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 생각은 말갈의 다원 계통과 범칭설을 도외시하고 있는 것으로 오랑케족의 일반적 비칭이라는 의미밖의 다른 의미는 없는 것 같다. 《구당서》와 《신당서》가 발해와 흑수말갈을 <발해말갈>과 <발해>이거나 <말갈>과 <흑수말갈>이라고 통일되지 않게 입전하고 있는 것도 말갈이 자칭이 아닌 범칭(타칭)이자 비칭이었음을 보여 준다. 발해와 당이 적대 관계에 있을 때는 당이 발해를 한사코 [말갈]이나 [발해말갈]로 불렀던 사실에서도 확인되기 때문이다. 즉, 《신당서》<발해전>은 발해가 건국되고 난 직후에는 [말갈]이라 하다가, 당에서 대조영을 [좌효위 대장군 발해군왕]과 [홀한주도독]을 겸임시키고 나서는 비로소 [말갈을 버리고 오로지 발해로만 불렀다]고 전한다(아래 사료 F-2). 당이 발해를 말갈로 불렀던 예는 《책부원귀》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즉, [開元元年十二月(713) 靺鞨王子來朝奏曰臣請 就市交易入寺禮拜許之]에서의 말갈은 김육불도 지적했듯이 발해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당이 발해를 [말갈]로 불렀다거나 [발해말갈] 또는 [발해]로 불렀던 문제는 발해와 당의 대립과 교섭의 분위기를 이해하는 데서 풀린다. 즉, 안사의 난(755-763) 등 당이 발해의 도움이 필요로 한 시기에는 발해를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그 왕호도 [郡王]이 아닌 [國王]으로 불렀던 예(사료F1) 등이 그렇다.
F-1 渤海靺鞨의 大祚榮은 본래 高句麗의 別種[高麗別種]이다. 고구려가 멸망하자 祚榮은 家屬을 이끌고 營州로 옮겨가 살았다. 萬歲 通天 年間에 契丹의 李盡忠이 반란을 일으키니, 祚榮이 말갈의 乞四比羽와 함께 각각 [그들의 무리를 거느리고] 동쪽으로 망명하여 요새지를 차지하고 수비를 굳혔다. 盡忠이 죽자, 則天[武后]가 右玉鈐衛大將軍 李楷固에게 명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그 餘黨을 토벌케 하니, [楷固가] 먼저 乞四比羽를 무찔러 베고, 또 天門嶺을 넘어 祚榮을 바짝 뒤쫓았다. 祚榮이 高句麗靺鞨의 무리를 연합하여 楷固에게 항거하자, 王師가 크게 패하고 楷固는 탈출하여 돌아왔다. 이 때 마침 契丹과 奚가 모두 突厥에게 항복하였으므로 길이 막혀서 則天[太后]도 그들을 토벌할 수 없게 되자, 祚榮은 마침내 그 무리를 거느리고 동으로 가서 婁部의 옛 땅을 차지하고는 東牟山에 웅거하여 성을 쌓고 살았다. 祚榮은 굳세고 용맹스러우며, 용병을 잘 하였으므로 말갈의 무리 및 고려의 餘黨이 점점 모여 들었다. 聖曆(則天武后) 年間에 스스로 振國王에 올라 突厥에 사신을 보내고 통교하였다. 그 땅은 營州 동쪽 2천리 밖에 있어 남쪽은 신라와 서로 닿고, 越喜靺鞨에서 동북부로 黑水靺鞨까지 지방이 2천리에 민호가 십여만이며, 勝兵이 수만명이다. 풍속은 고구려 및 거란과 같고, 문자 및 典籍[書記]도 상당히 있다. 中宗이 즉위하여, 侍御史 張行 을 보내어 招慰하니, 祚榮이 아들을 보내와 入侍시켰다. 이 때 冊立하려 하는데, 마침 거란과 돌궐이 해마다 변경을 침입하므로 사명이 전달되지 않았다. 睿宗 先天 2년에 郞長 崔 을 보내어 祚榮을 책봉하여 左驍衛員外大將軍 渤海郡王으로 삼고, 아울러 거느리고 있는 지역으로 忽汗州를 삼아서 忽汗州都督의 직을 더하여 주었다. 이로 부터 해마다 사신을 보내와 조공하였다. 開元 7년에 祚榮이 죽으니, 玄宗이 사신을 보내어 弔祭하고, 이어서 그의 適者 桂婁郡王 大武藝(武王)를 冊立하여 아버지의 뒤를 이어 左驍衛大將軍 渤海郡王 忽汗州都督으로 삼았다. (中略) [開元] 25년에 武藝가 병으로 죽으니, 그의 아들 欽茂가 왕위에 올랐다. 玄宗이 內侍 段守簡을 보내어 左驍衛大將軍 忽汗州都督을 삼았다. 欽茂는 이 詔命을 받들고 경내에 사면령을 내리는 한편, 守簡의 편에 사신을 들여 보내 조공하였다. [貞元] 11년 2월에 內常侍 段志贍을 보내어 大嵩璘을 책봉하여 渤海郡王으로 삼았다. 14년에 銀靑光祿大夫 檢校 司空을 더 올려 渤海國王으로 진봉하였다. 嵩璘의 아버지 欽茂는 開元 연간에 아버지 위를 세습하여 郡王 및 左金吾大將軍이 되고, 天寶 연간에 누차에 걸쳐 特進 太子太子詹事 賓客이 더하여 졌으며, 寶應 1년에 國王에 進封되고, 大曆 연간에 司空太衛 제수받았는데, 嵩璘이 襲位를 할 적에는 다만 郡王과 將軍만을 제수받았다. 이에 嵩璘이 사신을 보내와 도리상 그럴 수 없음을 피력하므로, 다시 冊名을 더 하였다. (中略) [貞元] 4년 嵩璘의 아들 元瑜로 銀靑光祿大夫 檢校秘書監 忽汗州都督을 삼아 종전대로 渤海國王으로 삼았다. (中略) [貞元] 8년 1월에 元瑜의 아우 權知國務 言義를 銀靑光祿大夫 檢校秘書監都督 渤海國王으로 제수하였다. 內侍 李重旻이 책봉사로 갔다. [大和] 5년에 大仁秀가 죽으니, 權知國務 大 震을 銀靑光祿大夫 檢校秘書監 都督 渤海國王으로 삼았다.[下略](《舊唐書》卷199下 <北狄, 渤海靺鞨>)
2. 渤海는 본래 粟末靺鞨로서 高句麗에 부속된 者이니, 姓은 大氏이다. 高句麗가 멸망하자, 무리를 이끌고 婁의 東牟山을 거점으로 하였다. 그곳은 營州에서 東으로 2천리 밖에 위치하며, 남쪽은 新羅와 맞닿아, 泥河로 경계를 삼았다. 동쪽은 바다에 닿고 서쪽은 契丹이다. 여기에다 城郭을 쌓고 사니, 고려의 망명자들이 점점 몰려 들었다. 萬歲通天年間(696-697)에 契丹의 李盡忠이 영주도독 趙 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舍利 乞乞仲象이라는 者가 靺鞨의 추장 乞四比羽 및 高麗의 남은 종족과 동쪽으로 달아나 遼水를 건너서 太白山의 동북을 거점으로 하여 婁河를 사이에 두고 성벽을 쌓고 수비를 굳혔다. 武后가 乞四比羽를 책봉하여 許國公을 삼고 乞乞仲象으로 震國公을 삼아 죄를 용서하였다. 그러나 比羽가 그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武后가 玉鈐衛大將軍 李楷固와 中郞將 索仇를 시켜 쳐 죽였다. [中略] 祚榮은 곧 比羽의 무리를 합병하여 지역이 중국과 먼 것을 믿고 나라를 세워 스스로 震國王이라 부르며 突厥에 使者를 보내어 통교하였다. [中略] 睿宗 先天 年間(712-713)에 사신을 보내어 祚榮을 左驍衛大將軍 渤海郡王으로 삼고, 그가 거느리고 있는 지역을 忽汗州로 삼아서 忽汗州都督을 겸임시켰다. 이로 부터 비로소 靺鞨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오로지 渤海로만 불렀다. 玄宗 開元7年(719)에 祚榮이 죽으니, 그 나라에서 사사로이 諡號를 高王이라 하였다. 그의 아들 武藝가 왕위에 올라 영토를 크게 개척하니 동북의 모든 오랑캐들이 겁을 먹고 그를 섬겼으며, 또 사사로이 연호를 仁安으로 고쳤다. 玄宗이 典冊을 내려 王 및 都督을 세습시켰다. 얼마 안되어 黑水靺鞨의 使者가 入朝하므로, 玄宗은 그 땅에 黑水州를 설치하고 長史를 두어 總管케 하였다. [中略] (武藝가) 아우 門藝 및 舅 任雅相을 시켜 군사를 동원하여 黑水를 치게 하였다. 門藝는 일찌기 볼모로 京師에 와 있으므로 利害를 알더라. [中略] 10년 뒤에 武藝가 大將 張文休를 파견하여 해적을 거느리고 登州를 치니, 玄宗이 급히 門藝를 파견하여 幽州의 군사를 동원시켜 이를 공격하는 한편, 太僕卿 金思蘭을 新羅에 보내어 군사를 독촉하여 渤海의 남부를 치게 하였다. [中略] 武藝가 죽자 그 나라에서 사사로이 諡號를 武王이라 하였다. [中略] 玄宗의 시대가 끝날 때까지 29번 조공하였다. 寶應1年(762)에 代宗은 渤海를 나라로 인정하여 欽茂로 왕을 삼고, 檢校太衛로 승진시켰다. 大曆 年間(766-779)에 25번 조공하였고, 또 日本의 舞女 11명을 조정에 헌상하였다. [中略] 欽茂가 죽으니, 사사로이 諡號를 文王이라 하였다.[下略] (《新唐書》卷219, <北狄, 渤海傳>)
위의 《신당서》대로라면, 대조영이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은 시기는 발해가 나라를 세운지 14년이 지난 후이다. 아울러, 그 해에 당은 발해를 [말갈]이라 하지 않고 [발해]로 고쳐 썼다. 당의 책봉에 의한 발해의 국호 변경으로 보기는 어렵다. 말갈에서 발해로 고쳐부른 주체는 발해가 아닌 당이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발해는 처음부터 振國 내지는 渤海라는 이름을 쓰고 있었다. 이러한 생각은 당이 발해를 [발해군왕]에서 [발해국왕]으로 인정해 가는 사정과도 통한다고 생각한다. 당은 대조영의 아버지인 걸걸중상에게 거란출신 이진충의 반란을 맞아 대조영 집안을 회유하기 위해 [震國公]이라는 책봉을 내려 놓고서, 막상 그들이 당의 명을 어기고 振國을 세운 이후에는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발해와 당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대조영의 발해 건국은 기정사실화되었으며, 대조영도 713년에는 당으로부터 책봉의 형식을 빌어 인정받았다. 그렇지만, 당의 발해국 인정은 [발해국왕]이 아닌 [발해군왕]에 머므르고 있었다. 이른바 당의 [지방 정권]으로서의 발해로밖에 인정받지 못하였다. 당이 발해를 나라로 인정한 시기는 발해국이 선 지 64년이 지난 762년이었다. 또한 당의 발해에 대한 일방적 자세는 발해왕의 시호나 연호 사용에 관한 자세에서도 나타난다. 즉, 위 사료 방점 부분에서도 확인되듯이, 발해가 당의 허락을 받지 않고 [사사로이] 그들 왕의 시호나 연호를 정하였다는 점이다. 이렇게 볼 때 [말갈]이라는 국호를 713년 대조영이 당으로부터 책봉을 받기까지 사용하였다고 할 수는 없다. 위의 기록에서 [말갈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발해라고]하였다는 것은 당이 [발해]라 자부하며 국가적 기틀을 마련하고 있었던 발해를 인정치 않고 말갈이라는 비칭으로 불러 오다가, 양국간의 관계 개선이 이루어지면서 겨우 발해라는 국호로 사용하였다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발해국왕 대조영이 당으로부터 받은 [발해군왕]의 책봉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였겠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이 문제는 발해가 건국 초기에 신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로부터 발해왕 대조영이 신라의 [제오품 대아손]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 등과 맥이 통한다. 비록 당이나 신라로부터 발해의 외교적 자존심을 손상당하는 이러한 형식상의 문제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이러한 것이 발해의 외교적 독자성까지도 좌우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결국 발해는 그들의 연호와 왕의 시호 등에 있어 당에 개의치 않는 자주적 내정을 실천하고 있었던 것처럼, 그들의 국호도 [사사로이](사료F2) 정했다고 보아야 한다. 한편, 주국침 등은 당 현종 때 파견된 사신 최흔의 관함이 여순의 황금산 아래에 남아 있는 석각 명문에서와 같이 [勅持節宣勞靺 ]이었다는 점을 들어 발해가 말갈국이었다고 강변한다. 그러나 이것도 당이 발해를 일방적으로 말갈이라 낮추어 불렀던 것의 한 증거일 뿐이지, 이것이 곧 발해 스스로가 말갈이라 자칭했던 것의 증거는 될 수 없다. 발해를 말갈로 불렀던 왕조는 당에 국한하지 않는다. 신라도 발해를 [渤海靺鞨], [靺鞨], [狄國] 등으로 부르기도 하고 [渤海], [北國]으로 불렀기 때문이다. 송기호의 지적대로, 신라의 발해에 대한 위와 같은 태도는 발해를 고구려 유민 국가로 인식하기도 하고, 때로는 말갈 국가로 인식하기도 하는 양면성을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신라의 발해에 대한 양면적 태도는 발해의 주민 구성과 사회 성격이 종래의 일반적 견해대로 지배층은 고구려 유민, 피지배층은 말갈이라고 하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니다. 신라의 이와 같은 태도는 신라가 발해를 고구려 유민 국가로 보아서 [발해]라는 정식 국호나 이와 비견하는 [북국]이라는 국호를 썼고, 말갈 국가로 인식하여서 [渤海靺鞨], [靺鞨], [狄國]이라는 호칭을 섰다고는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단지 신라와 발해의 남북국 시대가 전개되는 과정에서 서로의 관계가 우호적이었는가 아니면 적대적이었는가에 따라 이와 같은 국호의 쓰임이 달랐다고 생각한다. [狄國]이라는 용어만 보아도 이것은 중국인들이 복쪽 오랑캐를 낮추어 불렀던 호칭이다. 요컨대, 고구려 시대를 중심으로 쓰여진 7부의 말갈 이란 중국 중심의 기준에서 동북아시아의 이민족을 편의상 구분하여 불렀던 타칭의 비칭이었던 것으로, 말갈로 표현되는 종족의 거주지는 종래 말갈의 선조로 불렸던 숙신 읍루를 포함해서 부여 고구려의 선조였던 예맥 등이 포함된 방대한 지역의 주민들에 대한 타칭의 범칭이었다. 따라서, 말갈이란 일원적으로 종족명으로써 적합하지 못하다. 단지 중요한 것은 흑수인, 속말인, 백산인과 같이 앞의 지역 이름이다. 즉, 속말말갈이란 송화강유역 주민이란 뜻이고, 흑수말갈이란 흑룡강유역 주민이란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리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말갈을 일원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없으며 각 말갈 7부의 실상을 역사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는 주장이다.
* 權五重, <靺鞨의 種族系統에 관한 試論>{震檀學報}49, 1980. 王承禮 저 宋基豪 역, {발해의 역사}, 翰林大學 아시아文化硏究所, 1987. 傅朗云 楊暘, {東北民族史略}, 吉林人民出版社, 1983.에 의함.
3. 고구려 변방인에 대한 범칭 비칭
(1). 종족계통상의 고구려와 말갈
말갈의 종족계통이 다원적이라는 것은 7부 말갈 중에 고구려와 관련이 깊은 예맥계가 상당수 있다는 점이고, 이것은 7말갈의 위치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7말갈의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그 의견이 분분하다. 일본의 이 방면에 대한 연구는 만선사 아래에서 상당히 많은 성과를 쌓아 놓았다. 중요한 발해 유적이 일제에 의해 상당수가 조사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는 중국과 러시아의 현지 학자들에 의해 그 연구가 계속되고 있고, 북한도 발굴 등에 많은 힘을 쏟고 있다. 그러함에도, 7말갈의 위치에 대해서는 일본뿐만 아니라 중국 학자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일치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부랑운과 양양은 백산부의 위치를 오늘날 백두산의 송화강 발원처 근방으로, 속말부는 오늘날 송화강상류, 호실부는 오늘날 흑룡강성 의란현, 백돌부는 오늘날 길림성 부여현 일대, 안거골부는 오늘날 아십하유역, 불열부는 오늘날 목단강유역 영안현일대, 흑수부는 오늘날 흑룡강중 하류로 보고 있다. 또한 왕승례는 백산부의 위치를 오늘날 연길, 훈춘을 중심으로 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광대한 지역, 속말부는 오늘날 길림시를 중심으로 한 송화강중류의 광대한 지역, 호실부는 오늘날 소련의 연해주, 백돌부는 오늘날 길림성 서란현과 흑룡강성 오상 일대, 안거골부는 흑룡강성 영안-목단강시를 중심으로 한 목단강 유역, 불열부는 오늘날 흥개호 일대, 흑수부는 송화강과 흑룡강의 합류 지점과 흑룡강 하류의 광대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여러 견해들 가운데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는 지역은 속말부와 백산부 정도밖에 없지 않은가 한다. 즉, 백산부는 훈춘지역에 있었고, 속말부는 오늘날의 길림시를 중심으로 한 송화강 중상류였다는 점이다. 백산부와 속말부 이외의 [말갈] 거주지에 대한 견해가 각기 다르다 하더라도, 7부의 전 지역은 부여 고구려의 통치 영역과 대부분 중복되는 것이 특징이다. 천관우는 5세기 장수왕대를 기준으로 고구려의 영역에 대해, 서쪽으로는 요하(요동반도 포함)를 넘어서고, 서북쪽으로는 瀋陽 開原까지를 포함하며, 북으로는 길림 지역을 포함해서 개원과 영안을 잇는 선, 동쪽 끝은 훈춘-영안선, 남쪽은 아산만에서 조령--영일만을 잇는 선까지였다고 하고, 그 전의 광개토왕대에는 임진강 이북의 한반도 북부 일대까지 걸쳤다고 한다. 또한 길림과 요녕 등지에서 발견되는 고구려 산성과 고분들 역시 부여 고구려 문화가 주류이다. 한편 고구려왕들이 그들의 통치영역 확인을 위해 행하였던 변경의 순수가 태조왕대에는 柵城(지금의 훈춘)과 南海(지금의 함흥)에서 행해졌고, 서천왕대에는 新城(지금의 훈춘?), 그리고 광개토왕대에는 襄平(지금의 요양)과 力城(요동)에서 행해졌다는 것은 이들 지역이 고구려의 국경상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고구려의 영토였음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위 말갈의 거주지로 생각되는 지역과 고구려의 영역을 대비시켜 볼 때, 백산부와 속말부, 호실부, 안거골부, 백돌부, 불열부 등 6부의 말갈 정도가 고구려 영역과 겹치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여기서 위치 비정에 거의 이견이 없는 백산부와 속말부가 고구려의 영역과 일치하고 있는 것은 이 두 말갈과 고구려의 관계를 푸는 중요한 단서가 되리라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고구려시대의 고구려 영역이 현대적 의미로 생각하는 [육지적 영토, 국내 수역, 영해 그리고 이를 덮고 있는 일정한 정도의 하늘인 영공을 포함하는] 의미의 영토 개념은 아니다. 또한 당시 일시적으로 점령했던 지역까지를 고구려 영토로 편입할 수도 없다. 이를 테면, 고구려가 일시적으로 전투를 벌여 [後燕의 宿軍城 즉 朝陽 동북쪽 간 일이 있고, 시라무렌강[潢水] 쪽의 거란까지 간 일이 있고, 남쪽으로는 훨씬 내려가서 고령 내지 김해 근처까지]갔는데 이 지역들이 고구려의 영역이었다고는 할 수 없다. 그리고 고대의 국경 개념이란 線개념이었다기 보다 城중심의 점개념이었는 점도 고려되어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의 국경과 영토 개념이 이러 했다고 하더라도, 위의 장수왕대 영역을 고구려의 최대 영역으로 이해하는 것은 별 무리가 없지 않을까 한다. 박경철도 5-7세기 고구려의 군사 행동이 압록강유역, 두만강유역, 대동강유역, 요하유역, 송화강유역의 5개 전구에서 실시됐음을 확인하고 있다. 그러면 7부의 말갈 지역에 거주했던 고구려와 말갈의 선주민들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말갈 지역의 선주민으로 판단되는 종족은 고조선 숙신 예맥 부여 옥저 고구려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부여와 고구려 등은 예맥족이 중심이 되어 국가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이들을 [부여족]이나 [고구려족]으로 예맥족과 구별하여 생각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이 지역의 첫 주민은 잘 알려진 대로 숙신이다. 그러나 필자가 <숙신 읍루 연구>에서 확인했던 바와 같이, 초기의 숙신은 이곳과는 전혀 관계가 없던 중원 북계라든지, 산동 및 장성 이북 지역 주민이다.(필자의 전기숙신). 그러나 말갈 7부와 관련이 있는 숙신은 [전기숙신]의 동북 지역 즉, 길림 이동지역에 국한하고, 여기에 말갈의 선조로 언급되는 필자의 [후기숙신] 즉, 흑룡강 중하류의 [흑수숙신] 지역(수 당대에 본격적으로 중국측에 알려진 지역이자 흔히 숙신 지역으로 알려진 곳)과 읍루 지역을 포함한다. 따라서 [전기숙신]의 동쪽과 [후기숙신]이 살던 곳이 당대에는 모두 말갈 7부의 거주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말갈 7부가 모두 한 종족의 후손들은 아니었다. 특히 이들 중에는 고구려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는 말갈도 있었다. 日野開三郞은 만주 주민의 종족적 전신을 크게는 퉁구스[통고사]와 몽고종으로 나누고, 퉁구스를 다시 순퉁구스와 예맥종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부여족의 후신이라고 하는 속말부와 옥저족의 후신이라고 하는 백산부는 예맥종에 속하고, 후숙신(읍루)족--필자의 후기숙신의 일부--의 후신인 불열부와 물길족 정계의 후신인 안거골부와 물길족 방계의 후신인 백돌부와 수 초에 처음 모습을 보인 흑수부와 호실부 모두는 순퉁구스종에 속한다고 하였다. 이어 그는 말갈 7부 이외의 예맥종으로 고구려족과 동예를 꼽고 있다. 日野開三郞의 큰 전제는 속말부나 백산부, 그리고 고구려나 동예라 할지라도 그들 모두는 퉁구스계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퉁구스를 순퉁구스와 예맥종으로 나누고 예맥종으로 속말부, 백산부, 고구려, 동예를 들고 있는 것은 이들 두 부류사이의 독자성은 인정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가 불열부 등의 말갈 5부도 두 부류로 나누고, 그 중 흑수부와 호실부의 출현을 수 초로 잡고 있는 것도 주목된다. 그 이유는 흑수부와 호실부를 제외한 불열, 안거골, 백돌부 등도 예맥 내지 방계 예맥이었을 가능성을 확인하는 연구로 평가될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을 중심으로 제기되고 있는 고구려족의 형성에 대해 잠시 언급하고 넘어 가고자 한다. 앞의 日野開三郞도 고구려족을 상정한 바 있으나, 고구려족에 대한 일반적 견해는 중국 학계에서 찾아볼 수 있고, 최근에는 발해족의 형성을 언급할 정도이다. 비록 발해족의 형성에 관해서는 부정적인 견해도 나오고 있으나, 긍정적인 견해가 보다 힘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이러한 견해에 대하여 부정적이다. 예맥을 중심으로 건설된 고구려를 다시 예맥과 고구려족으로 분류하여 각각의 독자성을 언급한다는 것이 논리에 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맥이 국가를 세우고 그 국호를 고구려라 하였음에 불과한 것인데, 독자적 고구려족을 상정하는 것은 왕실 중심의 지배층으로 고구려인을 따로 구별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떠한 의미도 없지 않은가 한다. 말갈의 종족계통을 언어학적 측면에서 논증한 이등룡은 말갈의 퉁구스계설을 부정하고, 스키타이계의 돌궐어와 말갈어의 근친성을 주장한다. 그리고 [속말], [흑수], [말갈] 등은 모두 [한]과 함께 역사 이전 시대에는 공통조어를 쓰는 같은 문화권의 구성원이었을 것으로 주장한다. 이것의 결론도 [靺鞨]이 [突厥], [韓] 및 [濊貊]과 일정하게 공통점을 갖는다는 것을 확인하는 논고이다. 요컨대 중국 사서에 나오는 [말갈]이란 중국식 표현 방법에 따른 것으로 이것들의 종족적 계통은 [속말부]나 [백산부]와 같이 예맥계를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말갈 7부 중의 하나를 가르키지는 않았지만, 정약용 이병도 등은 《삼국사기》에 나오는 말갈의 일부가 위말갈이라 하고 이들을 동예의 잘못이라고 지적하여, 말갈의 종족계통에 예맥계가 있음을 지적하였다. 이어 유원재 등 많은 학자들이 이에 따랐으나, 말갈 7부와 대비시켜 말갈의 종족계통을 체계적으로 정리한 이는 권오중이다. 그는 위의 《신당서》<흑수말갈전>(사료 C)에 근거하여 고구려에 부속하거나 관련된 말갈로써 속말 백산 안거골 골돌을 예계로 보고, 그 이외의 말갈을 읍루계로 간주하였다. 그리고 발해시대의 흑수말갈이 읍루계의 후신이고 발해말갈은 예계의 후신이며, 《삼국사기》의 말갈도 위말갈이 아닌 고구려에 부속되었던 예계의 말갈이라고 하였다. 이 주장은 비록 숙신, 읍루 등 말갈의 선조로 알려진 종족들과 고조선, 예맥간의 종족계통에 관한 이해가 결여되었다고 하더라도, 이미 일야개삼랑 등에 의해 지적된 백산과 속말부의 예맥계설과 함께 말갈의 실상을 파악하는 과정에 중요한 다리가 되었다. 이 논고에 힘입었음을 밝힌 이기백은 발해 건국의 주체였던 속말말갈의 대조영을 [부여계]로 보고 있는데, 이것은 속말말갈의 예맥계설이라는 시각에서 볼 때에도 자연스러운 결과가 아닌가 한다. 말갈 7부의 종족계통에 관한 가장 전통적인 견해는 숙신→읍루→물길→말갈이라는 일원적 종족계통론이다. 그러나 앞에서 손진기도 말갈 7부가 갖는 종족적 다원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을 소개하였다시피, 말갈의 종족계통에 대해서는 그들도 이견이 있다. 그러나 많게는 일원론을 믿으려 하지 않은가 한다. 특히, 발해 건국의 주체가 되었다고 하는 속말말갈과 백산말갈에 대해서는 예맥계설과 숙신계설로 팽팽히 맞서 있다. 즉, 손진기 애생무 장엄 유경문 장지립 등은 속말말갈을 예맥계로 보는가 하면 설홍 왕승례 유진화 양보륭 등은 숙신계로 본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는 속말말갈 지역이라는 길림의 西團山文化에 대한 입장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즉, 서단산문화를 예맥이나 숙신으로 보느 견해에 따라 전체 속말말갈에 대한 입장이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또한 옥저족이 남겼다는 단결문화의 백산말갈에 대해서도 이것을 예맥 및 숙신의 융합으로 보는 견해와 읍루(숙신)계로 보는 견해가 있다. 있다. 물론 서단산 문화나 단결문화만을 가지고 이 지역의 종족계통을 일반화시키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그러나 속말말갈의 선조를 예맥이나 숙신계로 보는 견해들은 말갈의 종족계통이나 발해의 주민구성 등에 영향을 주거나 연결되어 있다. 필자는 <숙신 읍루 연구>에서 서단산문화를 전기숙신의 예맥계로 보았기에, 결국 중국측의 해석대로라 해도, 필자의 속말과 백산말갈은 예맥계이다. 한편, 고구려에 [臣屬]하였던(사료C) 것으로 알려져 있고, 종족적 계통에 있어서도 고구려에 가장 가까웠거나 같았다고 여겨지는 백산말갈에 대해 살펴 본다. 위의 일야개삼랑은 이것을 옥저의 후신으로 보고 예맥계로 간주하는데 반해, 최근 중국의 학자들은 옥저족의 문화유존으로 알려진 단결문화의 성격 논쟁과 함께 옥저의 읍루계설과 예맥 및 숙신의 융합설을 주장하고 있다. 특히, 후자의 동만륜은 백산말갈을 (조선)반도의 [말갈]인 동옥저의 후예로 인정하면서 그들의 선조는 동부 연해주에 살다가 반도의 동북부로 들어 온 고숙신족과 대륙에서 온 예맥인이 융합하여 형성된 종족이었다고 주장한다. 중국의 말갈에 관한 연구는 말갈 및 그들 선조들로 알려진 숙신, 읍루, 물길과 고대 중원과의 긴밀성을 강조하는 방향에서 고구려사나 발해사 또는 만주사가 아닌 [중국 동북 민족사]로서의 의미를 부각하는데에 있다. 아울러 최근에 발견된 고고학적인 발굴들도 이러한 견해를 뒷받침하는 수준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도 속말말갈로 알려진 길림 중심의 예맥계설과 옥저 지역이자 백산말갈 지역인 훈춘 간도를 포함한 남연해주 중심의 예맥계설이 유지되고 있음에도, 전 만주 지역의 숙신 문화설은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 현대 중국 학계의 대세이다. 이를 테면, 최근 왕건군이 고구려의 숙신계설을 주장하고 있는 것도 그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말갈의 예맥계설은 언어학적 측면에서도 논란이 되고 있다. 노태돈은 [맥 또는 예와 말갈 간에 그 종족 명칭상의 상사점은 찾기 힘들다]고 하고 [말갈이란 종족 명칭은 그들 스스로와 다른 사람들이 불렀던 것이기에 말갈을 굳이 예(맥)족으로 파악할 근거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의 손진기 등이 말갈을 몇몇 민족의 [총칭]이라고 하였다든지, 말갈의 어원에 있어서도 손진기, 부랑운, 양양 등이 貊 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는 것들은 모두 노태돈의 주장과 배치된다. 필자는 손진기 등의 견해가 예맥과 말갈의 일부를 같은 계통으로 보려는 필자의 주장과 통한다고 생각되어 이것을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 들이려 한다. 속말말갈을 부여의 예맥계로 볼 수 있는 근거는 다음에서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G-1. 愼州는 武德(618-626) 초에 설치되어 營州에 예속되어 있었고, 涑沫靺鞨의 烏素固 부락을 다스리게 하였다.[中略] 黎州는 愼州를 쪼개어 載初 2年(691)에 설치되어 浮 靺鞨의 烏素固 부락을 살게 하였고 營州 都督에 예속시켰다.(《舊唐書》卷39, <地理志>2, 河北道 愼州,黎州條 ) 2. 武德2年(619) 병사들의 우두머리인 突地稽가 사신을 파견하여 조공하였다. 突(地:필자)稽란 靺鞨의 渠長이다. 隋 大業中(605-617)에 [그의] 형인 瞞 과 함께 그들의 부락을 이끌고 營州에 內屬하였다. 瞞 이 죽자 [그가] 그들의 무리를 이어 총괄하게 되니, [唐 조정은] 그에게 遼西太守로 拜하고 夫餘侯로 封하였다. (《冊府元龜》卷970, 外臣部 朝貢3 )
위의 사료는 涑沫靺鞨(粟末靺鞨)을 浮 靺鞨이라고도 하고, 당에 투화(귀부)한 속말말갈의 돌지계에게 당이 부여후의 작호를 주었다고 전한다. 그런데 부유말갈의 浮 와 夫餘는 같은 어원으로 볼 수 있어, 粟末(涑沫)靺鞨을 浮 靺鞨이라고 하였다는 사실은 곧 浮 靺鞨을 夫餘靺鞨이라고도 할 수 있다는 데에 위의 사료가 갖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노태돈은 위와 같은 사실이 [곧 속말부의 전신이 부여족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바는 아니다]고 속말말갈의 예맥계설을 부정한다. 그 이유로 [6세기 초 물길에 의해 부여지역이 점거되었고, 부여왕실은 고구려 내지로 이거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부여의 일부 지역이 공허케 되어졌고, 그러한 곳에는 말갈족이 상당수 이거케 되었었다]고 하여 원래의 부여족이 살던 곳은 비게 되고 새롭게 말갈이 와서 살았기에 고구려시대 그 지역에 살았던 속말말갈이 곧 부여족의 후신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돌지계가 받았던 작호인 부여족의 부여나 부유말갈의 부유는, 돌지계 집단이나 오소고 부락이 부여족이라는 뜻이 아니라 수 당으로 이주해 가기 전의 거주 지역의 명칭]이라고 하여 속말말갈의 예맥 내지 부여계설을 부정한다. 그러나 부여족 모두가 이동하였다고 볼 수 없고, 이동의 주체는 소수의 중간 지배 집단 내지 지배층의 이동이었을 것으로 생각되어 부여족의 [空虛化]에는 동의할 수 없다. 왜냐 하면, 대부분의 부여족이 거주하던 지역은 민족 이동이 어려운 농경 지역이었기에, 그들 피지배층 내지 다수의 부여는 고향을 지키고 있었다고 보아야 한다. 백산말갈과 속말말갈을 예맥의 후신으로 생각한다면, 나아가 예맥의 종족적 계통에 대해서도 문제가 된다. 예맥에 대해서는 ① 넓은 의미의 퉁구스로 보는 견해, ② 몽고와 퉁구스의 잡종으로 보는 견해, ③ 퉁구스나 몽고 퉁구스 잡종 중 어느 것도 아닌 독자적 예맥종이라는 견해 등으로 다양하다. 필자는 세번째 견해와 뜻을 같이 하면서, 앞의 <숙신 읍루 연구>에서 이미 예맥이 (고)조선과 깊은 관련을 갖는 종족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중국의 동만륜이 [조선반도의 동북부 옛 민족이 순수한 혈통의 예맥어족이었다면 청대가 되어서는 마땅히 조선인이 되었어야 할 것이다. 사실상 그들은 조선인이 아니라, 현지의 여진 즉 만주인이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은 민족 이동이 갖는 한계와 역사 전개의 계기성을 고려치 못한 주장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고대 중국인들이 濊를 穢 蔿 라고도 썼는가 하면, 貊을 貌 등으로 썼던 것과 같이, 예맥도 그들이 동북방 이민족으로써 낮추어 불렀거나 그만큼 그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이것도 역시 일정하게 말갈의 경우와 공통점을 갖고 있어 주목하여 볼 점이라고 생각한다. 요컨대 말갈의 일부는--적어도 백산부와 속말부 정도-- 그 종족적 계통에 있어서 예맥계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권오중과 같이 위의 두 말갈을 비롯해 안거골과 백돌(골돌)도 [예계]로 보고 있는데, 이럴 개연성은 크다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발해 시대 만주 주민들을 《구당서》와 《신당서》가 <북적전>에 [흑수말갈]과 [발해[말갈]]로 입전하였던 것과 같이, 당시의 주민들을 크게 두 개의 공동체 집단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예)맥의 후손인 고구려와 이들 예계의 말갈은 역사적으로도 같은 뿌리를 가졌다고 단정지어도 좋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고구려가 예맥만을 이은 단순한 그런 국가는 아니었다. 그곳은 청동기 시대 이래로 비슷한 문화 기반을 공유해 왔던 예맥, 예계의 집단은 물론이고 일부 漢人들도 흡수되었고, 그 領內에 포함되어 있던 諸種族 중 상대적으로 덜 융화가 진전된 집단도 있었음은 인정되어야 한다. 그러나, 500여년의 고구려사는 이와 같은 소수의 이질적인 집단들도 거의가 고구려인으로서의 의식을 갖게 하였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수 당인들이 말갈이라 하였던 사람들이 세운 발해인들은 스스로 고구려의 후손임을 자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2). 정치 군사상의 고구려와 말갈
역사적으로는 같은 뿌리를 가졌던 백산말갈과 속말말갈 등이 예맥계 말갈이었다고 할지라도, 고구려시대의 고구려 지배 집단과 이들의 피지배층이었던 지방의 주민들은 똑 같은 문화 생활을 영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 지배 집단은 이미 당으로부터 선진 문명을 받아 들여 중국화한 부분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그들의 왕성한 외교 활동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그러함에도 속말부와 백산부가 고구려의 지배 집단과 가졌던 관계는 [臣屬] 내지 [附屬]으로 표현되는 사이였다. 말갈 중 고구려와 가장 관계가 깊었던 세력은 백산과 속말부이다. 그런데 백산부는 앞에서도 확인하였듯이, 고구려에 [신속] 내지 [부속]되어 있던 세력으로 역사적으로도 고구려와 같은 예맥계이면서 고구려시대에는 고구려의 변방 피지배 세력으로 보아 큰 무리가 없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 왕들이 지금의 훈춘이자 백산말갈의 주거주지로 알려진 책성에 자주 순수하였던 사실에서도에서도 확인된다. 그러나 속말부의 경우는, 비록 그들이 살던 곳과 고구려의 통치 영역이 겹치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백산부와 좀 사정이 달랐다. 왜냐 하면, 그들은 고구려에 어느 때는 부속 내지 협조자로써 역사적 운명을 같이 했는가 하면, 다른 어느 때는 배반 내지 적대 관계를 유지하여 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계를 생각할 때 일야개삼랑이 속말말갈을 3세력으로 나눈 것은 의미가 있다. 3세력의 하나인 伊通河 유역의 속말말갈[일야개삼랑의 부여말갈]은 고구려와의 관계 외에도 돌궐 및 수 당과도 밀접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수나라 초기에는 돌궐에, 583년(開皇3) 이후에는 고구려에, 그리고 당 초기에는 돌궐에, 돌궐이 당에 궤멸되었던 630년 이후에는 고구려에, 돌궐에 이은 薛延陀세력이 늘어 나면서는 그 동쪽이 설연타 세력에, 그리고 설연타의 붕괴와 함께 646년(貞觀20) 이후에는 다시 고구려에 귀속되는 등 고구려가 전 속말말갈을 지배하기까지 3차례에 걸친 큰 세력 변화의 와중에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설연타에 신복되어 있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고구려와도 통하는 등 고구려와의 관계를 끊지 않았고, 646년 설연타가 멸망해서는 고구려에 다시 신복하였다. 이로써 전 속말말갈은 고구려의 지배 밑에 들어 가는 결과가 되었다. 백산부나 속말부로 생각되는 말갈이 고구려 병사의 일원으로 활약하였던 사실은 고구려와 당의 전쟁에서도 확인된다. 안시성 전투로 알려진 644-646년(고구려 보장왕3-5; 당 정관18-20)까지의 전쟁과 647-648년(보장왕6-7; 정관21-22), 655년(보장왕14; 영휘6), 658년(보장왕17; 현경3), 659년(보장왕18; 현경4), 661-662년(보장왕20-21;용삭 원-2) 666-668년(보장왕25-27; 건봉 원년-총장3)의 전쟁에서 고구려와 말갈이 운명을 같이 했던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말갈이 고구려의 선봉적인 역할을 하였던 수 당대의 대표적인 사료를 옮겨 본다.
H-1. 高句麗 陽王9년(598) 왕이 靺鞨 사람 만여명을 거느리고 [隋의] 遼西 지방을 치다가, 營州總管 韋沖에게 격파당하였다. 隋文帝가 [이 사실을] 듣고 크게 노하여 漢王 諒과 王世績(積)을 원수로 삼아 水陸軍 30만을 거느리고 와서 [高句麗를] 치게 하였다. 6월에는 隋主는 조서를 내리어 왕이 [隋에서 받은] 관작을 삭탈하였다.(《三國史記》卷20, <高句麗本紀>8 ) 2. (高句麗 寶藏王4年:645)唐主가 安市城에 진군하여 치니, 北部 薩 高延壽와 南部 욕살 高惠眞이 我軍과 靺鞨兵 15만을 거느리고 安市를 구하려 하였다. [中略] 延壽와 惠眞은 그 무리 3만 6천8백명을 거느려 항복을 청하고 軍門에 들어와 拜伏하며 명을 청하였다. 唐主가 薩 이하 官長 3천5백명을 가려서 [唐] 내지로 옮기고 나머지는 모두 놓아 平壤으로 돌아가게 하고, 靺鞨 사람 3천3백명은 거두어서 모두 구덩이에 묻어 죽였다.(《三國史記》卷21, <高句麗本紀>9 上) 3. 儀鳳 年間(676-679)에 高宗이 高藏에게 開府儀同三司遼東都督을 除授하하여 朝鮮王에 봉하고 安東에 가 살며 本蕃을 진무하여 군주 노릇을 하라고 하였다. 그런데 高藏이 安東에 이르러서 몰래 靺鞨과 서로 통하여 모반을 꾀하였다. 일이 사전에 발각되자 다시 불러다 州로 유배시키고 나머지 사람들은 河南 右 등 여러 州로 분산하여 옮겼는데, 그 가운데 빈약한 자는 안동성 부근에 머물러 살게 하였다. (《舊唐書》卷199上, <東夷 高麗傳>)
위의 사료에서 주목할만한 사실은 당에 패했을 때 고구려인은 관대한 처분을 받고 말갈로 불리는 사람들은 모두 구덩이에 파묻히는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는 점이다. 당이 말갈을 철저히 보복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당의 차별적인 보복에 대해서는 다음에 언급하기로 하고, 위에서 지적해야 할 점은 말갈이 고구려군의 한 구성분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사실이다. 특히 고구려가 멸망하여서도 당에 의해 임명된 高藏(보장왕)이 요동에서 [말갈]과 함께 서로 통하여 고구려를 부흥시키려다 발각되었던 사실은 고구려와 말갈의 관계가 불가분의 관계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그리고 말갈은 고구려에 臣服 臣屬하면서 고구려왕실에 빈부의 차등에 따라 수취의 의무도 지고 있었던 집단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고구려에 신속하였던 동옥저가 고구려에 조부와 특산물 및 여인을 공납하여야 했던 사실것 등과도 통한다고 하겠다. 그러면, 고구려가 이러한 속말부와 백산부를 비롯한 여타의 말갈을 어떠한 방법으로 지배하였을까? 여기에 대해 일야개삼랑은 속말부와 백산말갈은 고구려의 직할령이었고, 백돌 안거골 불열은 그들의 기미 지역이었다고 하며, 권오중은 백산부는 고구려에 신속하고, 속말 백돌 안거골 등 예계 말갈은 고구려에 부속하였다고 한다. 노태돈은 속말부는 완전히 고구려의 지배하에 귀속되었고, 백산, 백돌, 안거골, 호실부 등은 고구려의 지배 또는 강한 영향권 하에 있었을 것으로 간주하고, 고구려가 말갈을 지배하는 방식으로는 직접 지배와 간접 지배의 이중적 지배 정책을 구사하였을 것이라 한다. 필자도 이중적 지배에 관한 주장에 찬성한다. 단지 고구려의 말갈에 대한 이와 같은 지배 방식은 고대 국가들의 지방 통치 정책의 일반적인 경향이었으며, 특별히 이민족의 지배 방식의 일환이었다고는 볼 수 없다고 생각한다. 군사적인 면에서 보더라도, 고구려의 지방에 대한 간접 지배 방식은 비록 왕권의 중앙 집권에는 부정적이었다고 하더라도, 끊임없이 위협을 받고 있던 [침략군을 성과적으로 막아내고 나라를 튼튼히 지켜내는데]는 효과적이었지 않았는가 한다. 그러나 박진욱이나 하상양이 주장하는 것처럼 [말갈]도 고구려와 비슷한 국가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수령 등의 지방장관이 통치하는 고구려의 지방 행정 조직이 있을 뿐이었다. 고구려와 말갈이 신속 내지 부속의 관계를 유지했던 사실은 그들의 종족계통과도 일정하게 맥을 같이 하고 있음도 주목할만 하다. 앞에서 적어도 백산부와 속말부는 예맥계였다는 점을 확인하였는데, 이들의 후손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들이 고구려시대에 고구려의 백성으로 볼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은, 그들이 고구려의 힘에 의해 일시적으로 신속 내지 부속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고구려 왕실과는 오래전부터 내려 오는 얼마간의 역사적 공통체 의식을 갖고 있었기에 그러했다는 주장이다. 앞의 사료 H에서도 확인하였듯이, 말갈은 고구려 왕실이 붕괴될 즈음에 이르러서도 그들과 더욱 힘을 합하여 운명을 함께하고 있었다는 점은 과소 평가할 수 없다. 앞에서 설명을 미루어 왔던, 당이 포로병인 고구려군과 말갈군을 차별적으로 처리하였던 점을 어떻게 볼 것인가하는 점을 생각해 본다(사료 H2). 필자는 당의 말갈병에 대한 가혹한 보복의 배경을 단순히 고구려의 부용 세력이 앞으로 다시는 고구려에 협력하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기 위해서 단순히 그렇게 하였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여기에서 한발 더 나아가 그들의 가혹한 보복은 고구려인으로 불리는 도시(평양) 중심의 지배층과 변방의 피지배 주민들을 철저하게 이간시켜 고구려의 응집력을 분쇄하려는 분열 정책에서 나온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이 사료는 말갈과 고구려인으로 기록되는 고구려 국민이 결코 이질적 두 집단이 아닌 동질 집단의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관계로 파악되어야 하는 사료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여겨진다. 말갈은 언제나 고구려에 신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위에서도 보았지만, 돌궐, 설연타의 영향권 밑에 있기도 하였다. 그들 중의 어떤 무리는 당과 협력하여 고구려를 치기도 하였다.
I. 新羅가 계속 원병을 청하자, 이에 吳船 4백척에 군량을 실어 보내고 營州 都督 張儉 등에게 명하여 幽州 營州의 군사 및 契丹 奚 靺鞨 등의 군대를 거느리고 토벌케 하였으나 마침 遼水가 넘쳐서 군사가 돌아왔다. (《新唐書》卷220, <東夷 高麗傳> )
당이 고구려를 치기 위해 거란 및 말갈을 이용하였다는 것인데, 수말에는 속말말갈의 돌지계가 당에 투화하여 그 아들 李謹行까지도 당에 충성하였던 사실은 유명하다. 여기서 일부 말갈이 그리고 일시적으로 당에 협조자로 등장하여 고구려에 적대적이었다고 해서 이들만의 독자 정권을 인정할 수는 없다. 그들의 이익을 위해 당에 투화하는 예도 있었지만 이것은 말갈의 전체적 행동에서는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였다. 어느 왕조에서건 적대 배반하였던 지방의 피지배민은 얼마든지 있다. 이것은 중앙 귀족과 지방 귀족의 정치적 갈등이라는 측면에서 서로의 갈등과 화해 종속 관계가 시간의 선후에서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나아가 두 집단이 우호적이거나 종속적 관계의 지속만이 있었다고 하는 것을 종족의 동질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도 또한 문제가 있다. 왜냐 하면, 일정한 지역에서 다른 집단간의 치열한 항쟁이나 전쟁 역시 정치적 갈등 등에서 나타나는 적극적인 교섭의 일환으로 볼 수 있고, 현실적 이해관계에 따라 종전의 왕조를 배반하고 주변의 다른 왕조에 의지하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수 당과 고구려시대 접촉이 많았던 말갈이 중국측의 모든 기록에 수 당과 단독적이고 자주적인 외교 접촉을 하였는가 하는 점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중국측의 말갈은 대개 [말갈]로 기록되고 혹 [黑水靺鞨]이나 [涑沫靺鞨], [營州靺鞨]로 되어 있는데, [말갈]로만 되어 있는 것은 말갈 부락 중에서 고구려 시대 수 당과 가장 접촉이 활발하였다고 하는 속말말갈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아 좋을 듯하다. 그러나 이들이 고구려의 피지배주민이었음에도 말갈로 따로 기록되어 있는 것은 속말말갈 등 고구려의 완전한 중앙집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서는 그들의 경제 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수 당과 단독으로 접촉했을 개연성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이 수 당에 네세웠던 실체는 [우리는 속말수사람]이었다든지 [우리는 영주사람]이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을 수 당인들은 그들대로 [靺鞨]이나 [涑沫靺鞨]로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주로 중국 정사에 나타나는 고구려와 말갈 관계를 살펴 보았다. 앞에서도 보았듯이, 말갈은 중국 정사의 말갈 7부 지역과는 전혀 다른 《삼국사기》의 말갈이 있음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이곳의 말갈이 갖는 특징은 시간적으로 B.C연간에까지 올라 가고, 그들이 출현하는 곳도 신라의 영역으로 생각되는 남한강의 깊은 지역에까지 이른다고 하였다. 이러한 의미에서 말갈을 단순히 수 당 사람들이 동북아시아의 이민족을 낮추어 불렀던 범칭이었다고 결론짓기에는 미흡하고, 나아가 고구려의 일부 피지배 주민을 가리키는 종족명이었다는 점을 지적하여야 한다. 특히 고구려의 피지배 주민을 말갈로 낮추어 불렀을 것으로 보이는 기록은 《삼국사기》에서 더욱 많이 나타난다. 즉, 이것들은 왕조중심적 역사관에 의해 피지배 주민을 평양 중심의 [고구려국인]과 구별하여 [말갈]로 기록하였다고 보아진다. 《삼국사기》의 말갈은 낙랑과 백제, 신라, 고구려와의 관계에서 많이 나타난다. 이강래는 B.C 16년부터 A.D 387년까지 백제와 신라 접경 지역에서 나타나는 말갈을 [낙랑]의 부용 세력으로 이해하고, 낙랑의 압박에 따른 말갈의 백제 신라 침략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낙랑 소멸 후의 말갈은 고구려 남방 정책의 부용 세력으로 다시 백제와 신라에 침입하였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때의 말갈은 분명 중국 정사의 말갈 7부와는 다르다. 중국 정사의 《북제서》 이전에 나타났던 《삼국사기》의 말갈은 낙랑의 부용세력이었거나 고구려의 부용 세력이었다. 그런데 이들 말갈은 낙랑과 고구려의 피지배민이었다. 《삼국사기》의 말갈 중에 중국측 《북제서》 이후의 말갈은 507년 기록이 최초이다 그런데 507년 이후 《삼국사기》에 나오는 말갈은 이보다 무려 90년이 지난 598년(영양왕 9년; 위의 사료 H1)에 나타난다. 물론 중국측의 기록에 보이는 말갈들은 《삼국사기》의 이 90년 동안에도 자주 등장한다. 고구려의 북경이나 수 당과 접촉이 있었던 말갈들은 대개 백산부와 속말부의 말갈로 보아 좋으나, 598년부터 《삼국사기》에만 나타나는 말갈 즉, 고구려 멸망을 전후해서 고구려의 남쪽 변경에서 신라와 관계를 가졌던 말갈들은 그렇지가 않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