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동북아민족사

순수 한족(漢族)은 없다

imaginerNZ 2007. 7. 19. 03:34

中교수 “순수한 漢族은 없다”… 多민족 섞여 혈통 불분명



2007년 02월 16일 | 글 | 베 이징=하종대 동아일보 특파원ㆍorionha@donga.com |


일개 민족이 전 세계 인구의 19%인 13억 명이나 될 수 있을까.

이런 의문을 가진 학자가 있었다. 중국 란저우(蘭州)대 생명과학학원의 셰샤오둥(謝小東) 교수. 회족(回族)인 그는 한족(漢族)과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유전자(DNA)를 몇 년에 걸쳐 조사했다. 중국 서북지역 소수민족의 기원과 이동 경위를 파악하기 위한 연구였다.

조사 결과 세계에서 인구가 가장 많다는 한족은 실제로 1개의 민족이 아니었다. 한족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혈통이 존재하지도 않았다.

중국 언론은 13일 셰 교수의 연구 결과를 자세히 보도했다.

셰 교수는 “오래 전부터 한족은 중원(中原)에 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이는 어느 한 시기에 한족을 주변 국가 또는 민족과 구별하기 위해 지역적으로 획정한 것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일반적으로 ‘염제와 황제의 자손(炎黃子孫)’으로 생각돼 온 한족이지만 연구 결과 염제와 황제의 발원지는 중원이 아닌 ‘북적(北狄·북쪽 오랑캐)’지역으로 드러났다는 점이다.

황제(黃帝)의 발원지는 현재의 간쑤(甘肅) 성 친양(沁陽)에서 톈수이(天水)에 이르는 지역이고 염제(炎帝)의 발원지는 간쑤 성 동부에서 산시(陝西) 성 서부에 걸쳐 있는 황토고원으로 이들 지역은 원래 ‘북적’ 지역이었다.

중국 역사에 나타나는 중원의 범위는 산시(山西) 성 남부와 장쑤(江蘇) 성 서부 및 안후이(安徽) 성 서북부를 포함한 허난(河南) 성 일대. 따라서 이 지역에 사는 사람이 바로 중원 사람이라고 생각돼 왔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른 것으로 나타났다. 셰 교수는 “연구 결과 현재 소수민족이 된 객가족(客家族)이 오히려 고대 중원인의 문화전통을 계승한 것으로 드러났다”며 “순수한 한족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주변의 소수민족이나 주변 국가가 한족과 융합한 결과”라고 덧붙였다.

그러나 셰 교수의 연구결과에 중국의 일부 누리꾼은 셰 교수가 한족의 ‘동포감정’을 훼손했다며 사죄할 것을 요구했다.

한족의 비율은 중국 대륙이 92%, 대만이 98%, 홍콩과 마카오가 각각 95%와 9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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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간동아>에서

“漢族, 단일민족 아니다 해!”

중국 유전연구소 충격 발표 … “지배민족 편입된 ‘가짜 한족’ 수천 년간 묵인”

중국을 여행해 본 사람이면 누구나 중국의 남쪽과 북쪽 사람의 생김새가 너무나 다르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문외한이 보더라도 광둥(廣東) 지방 사람과 베이징 사람과는 겉모양이 뚜렷이 구분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자신들을 같은 한족(漢族)이라며, 한족과 닮지 않았다는 말에 상당한 불쾌감을 표하곤 한다. 그러나 최근 중국에서는 이들을 몹시 불쾌하게 할 만한 발표가 있었다. 54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 국가임에도 13억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중국 정부의 공식 인구 통계를 부정하는 연구결과를 발표했기 때문. 거대 순수 혈통으로 인정받던 중국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는 이번 연구 결과는 중국 사회를 뒤흔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번 발표가 중국 한족에게 더욱 충격적인 것은 중국 한족의 ‘순수혈통론’에 반기를 들고 나선 주체가 바로 중국 국영 연구소라는 점이었다. 중국 과학원 소속 유전연구소 인류유전자연구센터가 지난 5월 26일 15년 동안 진행한 중국인의 성씨와 유전자 관계에 대한 분석을 토대로 한족이 단일한 민족이 아니라고 전격 선언하고 나선 것. 분석자료를 통해 연구팀이 내린 결론은 중국 남부 지역인 푸젠성(福建省)과 장시성(江西省)에 걸쳐 있는 우이산(武夷山)과 난링산맥(南嶺山脈)을 경계로 남쪽과 북쪽에 거주하는 ‘한족’이 혈연상으로 확연하게 구분된다는 것이었다. 심지어 연구팀은 두 개의 ‘한족’이 한족과 소수 민족 간 유전적 차이보다 더욱 큰 차이점을 보였다고 발표해 파장을 더했다.

난링 산맥 경계 두 개의 ‘별개 집단’

이 연구팀의 한 관계자는 “한족이 통치하던 송나라와 명나라 시기, 그리고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 등 모두 세 차례의 인구조사 내용을 분석하고 500여 편에 이르는 고문헌과 족보를 참조했다”며 “동시에 수백만 명의 중국인 혈액을 검사해 분석한 결과 이와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고 주장한다.

유전학자들의 이런 연구 결과는 일부 소장 역사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중국의 역사는 황허(黃河) 유역 한족세력의 남방 침략과 정복의 역사였고, 이 과정에서 남방의 토착민이 자신의 출신을 속이고 한족 행세를 하면서 이같은 결과가 빚어졌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북경의 한 역사학자는 “한족만이 중국 사회에서 정치적 파워를 가질 수 있는 상황에서 토착민들이 우월한 중화문화권에 편입하기 위해 한족임을 자처했다”며 “중앙 정부도 소수민족 복속정책의 일환으로 그것을 묵인하고 장려해 왔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 ‘가짜 한족’ 외에도 한족과 소수민족 간의 결혼으로 인해 태어난 후손 중 절대 다수가 소수민족을 포기하고 사회생활에 유리한 한족을 택한 것도 한족 양산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현재 중국에서 부모의 출신 민족이 서로 다르면 자녀에게 선택 권한이 주어지지만, 소수민족을 택하는 자녀는 거의 없는 실정. 바로 이와 같은 상황이 수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것이다.

결국 한족은 ‘가짜 한족’에 대한 묵인과 ‘민족 선택제’라는 소수민족 통치 기술로 그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이는 거꾸로 지배민족으로서 한족의 위치를 수천 년 동안 보전하는 힘이 되었다.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을 한족의 수로 압도하려는 중국 정부의 ‘인해전술식’ 인구정책의 결과물이 바로 92%라는 통계수치라고 비웃는다.

어쨌든 ‘중화주의’라는 민족적 개념을 통치 이념의 전면에 내세우는 중국 당국에게 ‘한족이 사실상 두 개의 별개 집단’이라는 사실은 커다란 부담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인지 인류유전자연구센터의 이번 발표는 국영 연구소의 발표임에도 중국 언론매체에 거의 소개하지 않고 있다. 한족의 이익이 중국 전체의 이익을 대변하였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단면이다.



< 소준섭/ 상하이 통신원 > youngji@81890.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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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만리)장성의 이해



첫 번째 오해는 이 모든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모두 진시왕이 축조했을 것이라는 점 이다.
물론 진시왕이 만리장성을 축조하긴 했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만리장성을 처음 만든 사람은 진시왕이 아니다.

굳이 만리장성의 기원을 따진다면 지나 최초의 통일국가 진나라가 아닌 그 전의 춘추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만리장성이라는 말이 문헌에 나타난 것은 전국시대이다.

결국 엄밀히 말하면 진시왕은 전국시대 연(燕)·조(趙)·진(秦) 등의 여러 나라가 외적(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이미 구축했던 장성들을

통일 이후 연결하고 더 연장한 것에 불과하다.





북경대 출판 지나 고대사 교학참고지도집상의 "진장성 (진시왕의 장성)"






진시왕의 장성은 만리장성의 서쪽 일부에 불과하다. (진나라는 원래 서쪽 귀퉁이의 작은 나라에 불과했으니 그 당시 자신의 영토만 지켰으면 됐으니 당연한 일이다.
만약 그 너머를 침범하려 했으면 타국과 전쟁을 각오하야 했을테니까)

지금의 만리장성은 명나라때 완성됐다.
두 번째 오해는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의 존재가 진시왕 때 축조한 장성의 모습 그대로 일 것이라는 점 이다.
유감스럽게도 진나라 때 축조된 고대 장성은 세월이 흐르고 여러 왕조의 명멸을 거치는 동안 이루어진 수많은 개 ·보수 및 방치 등을 거쳐 거의 본모습을 볼 수 없다.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만리장성은 거의 명나라 시대에 축조된 것 이다.
명의 영락왕 시대 이후부터 진행된 만리장성의 개축은 무려 18차례의 개수를 거쳐서, 16세기 말 동쪽의 하북성 산해관(압록강 인접)으로부터 서쪽의 감숙성 가욕관까지 연결된 실제거리 1만2000여리나 되는 오늘날의 만리장성이 완성되었다

특히 만리장성은 강력한 국가의 상징일 것이라는 일반인의 세 번째 오해와는 달리 실제 역사상 비교적 세력이 약한 한족 왕조 때 더 활발하게 축조 되었다.
만리장성의 축조 목적이 북방의 한민족들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이므로

실제 한민족국가이면서 문물이 융성했던 당(선비족)대나 유라시아를 통치한 원(몽고족)대, 마지막 왕조 청(만주족)대에는 만리장성에 대한 개보수나 증축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면 더욱 쉽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제는 지나의 상징이 되어버린 만리장성과 진시왕의 악연,

진시왕의 입장으로 볼 때 어쩔 수 없는 고육지책으로 기존의 장성들을 연결하여 만리장성을 축조했을 뿐인데, 두고두고 백성들의 피와 땀을 강탈해간 폭군으로 회자되는 점은 안된 일이나 그의 악명으로 후세가 두고두고 먹고 살게 되었으니 참 역설적이다.



-참 조-



"황제" 란 단어는 복희씨,신농씨,공손헌원,요임금,순임금 등

배달민족이었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 '황'과 '제'를 따와 삼황오제이상의 위대한 이라고

진시황이 처음 표현한데서 유래합니다.
실제로 진시황의 진나라조차도 배달갈래 흉노계국가입니다.


우리가 Emperor의 의미 "皇帝" 와 삼황오제의 "오제" 중 한명이던 "黃帝" 는 전혀 다릅니다.
"黃帝(공손헌원)" 는 "五帝" 중 한 사람일 뿐, 여기서 말하는 "제후국을 거느린 본국의 왕, 지배자" 의 의미인 "황제(皇帝)" 하고는 다른 말 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천자(天子)" 역시도 본디 동이(東夷)가 그들의 왕, 수장을 일컫을때 쓰던 명칭이다라는

건 쥐나 고서에도 나와있습니다.


천손사상이 있던 우리 조상들에게서 나온 특징적 명칭이라 할 수 있죠.
우리의 해, 개, 어라하, 이사금, 마 립간, 거서간, 나랏님, 태왕, 왕, 대왕,열제 등등이 "황제"와 같은 의미의 용어입니다.
졸본부여(고구려)는 태왕,열제(장수태왕이후로 가끔씩 등장)를 썼고, 22담로의 백제(남부여)는 천황이란 용어를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