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동북아민족사

[스크랩] 임나일본부설의 허구

imaginerNZ 2007. 9. 21. 02:03
임나일본부설의 허구
 

일본의 신공황후가 신라 ‘정벌’을 위해 한반도에 발을 내딛는 장면을 형상화한 일본 메이지 시대 상상도. ‘정한론’의 모티브를 제공한 이 신공황후의 실존 모델로 추정되는 야마토 소국의 히미코 여왕은 무당 내지 신녀였다는 점에서 이는 철저히 후대 가공의 산물이다.

《일본이 한국역사를 극심하게 왜곡 날조한 식민주의 사관의 하나에 소위 ‘임나일본부설(任那日本府說)’이 있다. 일본의 ‘야마토(邪馬壹 또는 大和)’ 고대 왕국의 신공황후(神功皇后)가 3세기 중엽 신라를 ‘정벌’하여 신라왕의 항복을 받았으며, 4∼6세기에 야마토 왕국이 한반도의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 6가라(加羅)를 정복하여 임나일본부라는 일종의 총독부를 두고 직할 식민지로 약 200년간 통치했다는 것이다. 백제와 신라도 임나일본부를 통해 야마토 왕국에 신복(臣服)하여 조공을 바쳤으며, 고구려도 임나일본부에 조공을 바쳤다는 것이다. 일제는 19세기 말 한국을 침략할 때 임나일본부설을 침략도구로 사용했다. 즉,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로 점령하려는 것은 4∼6세기의 식민지 구강토를 복구하려는 것이라고 일본 국민의 한국 침략 정신교육에 임나일본부설을 사용했다. 그러나 당대의 사료를 보면 역사적 진실은 임나일본부설과 정반대라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변진조에 보면 변진12국이 등장한다. 이 가운데 변진미오야마국(弁辰彌烏邪馬國)은 지금의 경북 고령지방에 있던 변한의 소왕국이었다. 이 명칭에서 변진은 변한·진한의 합성어이고, 미오야마는 고대변진어이다. 미오는 왕족계통의 뜻이고 야마는 부족명이었다. 필자는 변한 12개국이 6가라로 개편된 시기에 변진미오야마국의 야마족 일부가 일본열도에 건너가 세운 소왕국이 야마토 소왕국이라고 본다.

 

한국역사에서는 변한 12개국이 6가라로 개편된 원인과 과정을 밝히지 못했다. 그런데 부여족의 이동 경로를 보면 일부가 남하해 고구려를 건국하고 다시 백제를 건국한 다음 다른 한 부여족 군단이 육로로 죽령·조령을 넘어 낙동강과 섬진강 사이로 남하해서 변한 12국을 정복 흡수 융합하여 최고 귀족장군들과 왕족이 6가라를 건국한 흔적이 보인다.

 

이때 선발대가 이른바 김수로(金首露)이며 그가 건국한 가라가 금관가라(金官加羅)다. 부여의 최고 귀족장인 가(加)들은 각각 5개 가라의 나라를 세우고 부여왕족은 미오야마국 자리에 임나(任那)를 세워 6가라연맹이 수립됐다. 이때 임나는 ‘임금나라’의 뜻임을 이미 일제의 학자들도 밝힌 바 있다. 가라는 ‘가(부여의 최고 귀족장 호칭)의 나라’라는 뜻의 보통명사이고 그 앞에 붙이는 호칭이 나라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변한 12개국이 6가라로 개편될 때 변한 12개국 지배세력은 일부가 투항하여 정복자에게 융합됐으나 일부는 그 후 새 정착지를 찾아 일본열도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왜인전에 변한 12개국과 이름이 동일한 야마토국(耶馬壹國), 구야국(狗倻國), 안야국(安邪國), 구노국(狗奴國 또는 樂奴國) 등 4개 나라 이름이 나온다. 일본열도의 이 4소왕국은 6가라 수립 직후 변한 12개국의 일부가 일본열도에 건너가 수립한 분국들인 것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야마토국을 변한미오야마국의 야마족이 일본열도에 건너가 세운 것이라고 설명할 때, 여기서 ‘야마’는 부족 이름이고 ‘토’는 ‘또’로 ‘땅’의 뜻으로 해석한다. 한국 고대어에서 ‘땅’은 ‘ㅱ’나 ‘ㅱ’이다. ‘따’와 ‘또’는 호환된다. 야마토는 ‘야마족의 땅(the Land of Yama)’이란 뜻이다. 고조선문명권에서는 이주민족이 새 정착지에서 대체로 자기 부족 다음에 땅을 붙여 나라 이름을 만드는 관습이 있었다. 훈족이 ‘훈의 땅’이라는 뜻으로 헝가리(Hungary)를, 불가족이 ‘불가족의 땅’이라는 뜻으로 불가리아(Bulgaria)를 쓰듯 야마는 ‘높은 산(高山)’ ‘산’ ‘동산’을 뜻하는 것으로 보인다.

 

한반도 ‘미오야마국’ 자리에 교체 수립된 6가라의 하나인 임나를 그 후 일본열도에 이주해 수립된 ‘야마토’에서 계속 ‘미마나’로 훈독한 것은 임나의 한문자 훈독이 아니라 ‘미오야마나’(‘나’는 ‘국’의 고대 한국어)의 준말 훈독으로 봐야 한다. 이 역시 ‘야마토’의 기원이 한반도 변한 ‘미오야마국’이었음을 보조적으로 증명해 준다. 결국 일본의 민족과 국가의 기원이라고 하는 ‘야마토’의 기원이 한반도 변한의 ‘미오야마국’이다.

 

‘삼국지’ 왜인전은 야마토 소왕국에 대해 이례적으로 자세한 기록을 남겼다. 이 사료는 야마토에 대해 ‘이 나라도 본래 역시 남자가 왕이 되었으나 정착한 지 70∼80년간 서로 싸우기를 여러 해 했다. 마침내 한 여자를 함께 세워 왕을 삼으니, 이름이 히미코(卑彌呼)다’라고 기록했다.

 


이 야마토 소왕국이 그 후 발전하여 일본 고대국가를 수립했고, 히미코는 일본 최초의 여왕이며 후에 ‘신공황후’의 원형이 된 여왕이다.

 

삼국지 왜인전에 의하면 히미코는 귀도(鬼道)를 섬기고 뭇사람을 혹하는 데 능했다. 즉, 무녀(巫女)였다. 나이가 들어도 남편을 취하지 않았다. 남동생이 있어 치국을 보좌했다. 여왕이 된 후에는 사람들 앞에 잘 나타나지 않고 여종 1000여 명으로 시종 들게 했다. 남자는 오직 한 사람이 음식을 공급하고 명령 전달을 위해 출입하게 했다.

 

필자는 히미코는 부여족계 왕족 여성이라고 본다. 이름에서 ‘히’는 ‘해’의 일본식 발음이다. ‘미’는 왕족계보를 나타내고 ‘코’는 ‘자녀’이다. 부여의 왕족은 ‘해’씨였다. 백제의 왕족은 ‘부여’씨였고 ‘해’씨는 백제의 상층 귀족이었다.

 

부여족 일단이 변한에 내려와 정복 합성해서 6가라를 수립하고 그 후 미오야마국 일부가 일본열도에 들어와 야마토 소왕국을 건설했는데 처음 남성 왕의 70∼80년 통치를 거친 후에 무장들의 합의로 부여 왕족 여성 히미코를 여왕에 추대한 것으로 해석된다.

 

‘삼국지’ 왜인전에 의하면 히미코는 서기 238년 대방군(帶方郡) 태수에게 사절을 보내 중국 위나라 황제에게 공물을 바치고 ‘친위왜왕(親魏倭王)’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이때부터 야마토는 ‘야마토 왜(倭)’라고 불리면서 일본열도 안 약 30개 소왕국 가운데서 무력은 약하지만 중국의 공인을 받은 대표적 ‘왜’로서 행세했다.

 

야마토의 히미코 여왕은 247년에는 일본열도 안의 구노국이 ‘야마토’를 무력 정복하려 위협하므로 급히 사절을 대방군에 보내 도움을 청했다. 위 황제는 사절 장정(張政) 일행과 조서 및 황당(黃幢·관군의 깃발)을 보냈다. 야마토는 이 조서와 황당으로 배후에 강국인 위나라가 있음을 과시해 위기를 면했다.

 

히미코가 248년에 죽자 무덤을 큰 규모로 쓰고 남자 왕을 세웠다. 그러나 나라 안이 불복해 다시 내란이 시작되고 1000여 명이 죽었다. 이에 히미코의 종친인 13세의 이요(壹與) 또는 다이요(臺與)를 여왕으로 세워 나라를 안정시켰다. 위나라 사절 장정은 이때까지 체류하면서 이요에게 통치술을 가르치다 돌아갔다.

 

삼국지 왜인전은 위나라 사절 장정 일행이 직접 야마토에 와서 수년간 체류하며 직접 관찰한 것들을 자료로 했기 때문에 상세하고 정확함을 일본 학자들도 인정하는 사료이다. 그런데 이 사료에 히미코 여왕이나 이요 여왕의 치적 어디에도 한반도 남부를 침공 점령했거나 신라를 ‘정벌’하여 신라왕의 항복을 받았다는 기록은 없다. 야마토 소왕국은 이웃 구노국의 침입도 막아내기 어려울 만큼 무력이 약했으므로 신라 정벌을 실행할 여지도 없는 약소국이었다.

 

400여 년이 흘러 야마토왕국이 강성해져서 일본을 통일한 후 역사 정립이 필요하게 되자 서기 712년에 ‘고사기(古事記)’를 찬하여 역대왕의 계보를 체계화하고 8년 후인 720년에 ‘일본서기(日本書紀)’를 편찬하여 그 내용을 보강했다.

 

이때 고사기에서 야마토의 초대 남자 왕을 ‘신무(神武)’ 천황으로 시기를 끌어 올려 높이고 히미코와 이요 여왕에 해당되는 자리에 신공황후라는 섭정 황후를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때문에 양심적인 일본 학자들은 신무부터 제9대 ‘개화(開化)’까지는 가상의 천황이라고 실재를 부정하고 있다.

 

그런데 고사기와 일본서기 신공기 49년(서기 249년)에 신공황후가 직접 배를 타고 물고기의 도움을 받으며 신라에 도착하니 신라왕이 싸울 엄두도 못 내고 스스로 몸을 결박하여 항복하므로 신라를 ‘정벌’해서 신라왕을 말먹이꾼으로 정했으며, 이 소식을 듣고 고구려왕과 백제왕이 신공황후를 찾아와서 야마토의 서번(西藩)이 되고 영구히 조공을 그치지 않겠다고 하므로 내관가둔창(內官家屯倉)으로 정했는데 이것이 삼한(三韓)이라는 것이요, 해마다 신라왕이 80척 배의 조공을 일본국에 바치는 것이 이러한 연유라고 기록돼 있다.

 

신공황후가 신라를 ‘정벌’했다는 서기 249년은 히미코가 죽은 248년의 다음 해이고 이요의 제1년이다. 위나라 사절이 야마토를 떠나기 직전이다. 만일 이 엄청난 사건이 사실이라면 위나라 사절이 본국에 보고했을 것이고 왜인전에 기록되지 않았을 리 만무하다.

 

그러면 왜 고사기와 일본서기 편찬자는 이러한 역사날조를 자행했을까? 혹시라도 일본에 근거자료가 있었을까? 일본서기의 이 부분을 필자가 글자를 낱낱이 캐 보며 읽다가 깨달은 것이 있다. 일본서기 신공황후기는 히미코를 기리는 일본 8세기 초 무녀(巫女)의 본풀이(서사무가)라는 것이다. 문장 구성과 표현, 그리고 황당한 내용 구성이 무당의 전형적인 본풀이 그대로다. 역사적 사실이 아님은 명백하다. 더 연구해 볼 일이다.  


가야 철기 기술의 일본 전파
경북 고령군에서 출토된 가야의 철제갑옷 및 투구(왼쪽)와 일본 고분시대(4∼7세기) 고분에서 출토된 철제갑옷 및 투구. 당시 가야의 철기 기술이 일본을 훨씬 앞질렀다는 점에서 오늘날 일본의 학자들도 가야문명의 일본 전파 내지 영향을 인정하고 있다. 사진 제공 일조각출판사

일제 어용사가들의 ‘임나일본부설’도 그 유일한 근거인 ‘일본서기(日本書紀)’ 흠명기(欽明紀)를 읽어 보면 ‘신공황후 신라정벌설’과 유사하게 날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첫째, 일본 열도에서 ‘일본’이라는 용어를 처음 만들어서 사용한 것은 7세기 말∼8세기 초다. 이것은 일본 학자들도 다 인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에 앞서 4∼6세기에 어떻게 ‘일본부(日本府)’라는 명칭의 기관이 한반도에 설치될 수 있었겠는가. 명칭부터 ‘일본서기’ 편찬자가 날조한 것이다.

 

둘째, 일본 야마토 왕국이 4∼6세기에 한반도의 6가라를 점령해 직할 식민지를 만들고 임나일본부라는 총독부를 두어 200년간이나 통치했다면 이 엄청난 사건을 한국과 중국의 사서들이 한 줄이라도 다루지 않을 리가 없다. 또 일본서기에 단지 8년 앞서 편찬된 ‘고사기(古事記)’에서도 다루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런데 그러한 기록이 단 한마디도 없고 오직 일본서기에만 나온다는 것은 임나일본부가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 일본서기 편찬자가 ‘신공황후 신라정벌설’과 유사하게 날조한 것임을 시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일본서기 흠명기에는 일본 열도의 일이 한반도 내 사건처럼 다수 기록돼 있다. 예컨대 흠명기 23년(553년) 8월 초에 일본의 흠명왕이 대장군을 보내 고구려를 쳤는데 고구려왕은 담장을 넘어 도망가고 야마토의 대장군은 고구려 궁중을 점령해 왕의 침실 장막 7개, 철옥(鐵屋·지붕 위에 얹는 철제 장식물) 1개, 미녀 원(媛)과 시녀 오전자(吾田子)를 빼앗아 와서 흠명왕에게 바쳤다고 기록돼 있다.

 

‘임나일본부설’을 꾸민 일제 어용학자들처럼 이 기록을 한반도 평양의 고구려 기사로 해석하면 야마토 왕국의 흠명왕이 553년에 한반도의 고구려 수도 평양을 습격 점령한 것으로 되고 명백한 역사 날조가 될 것이다. 고구려가 야마토 왕국에 수도나 왕궁을 습격·점령당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고구려는 거리가 멀고 매우 강성했으므로 후안무치한 일제 어용사가들도 일본서기의 이 명료한 고구려 궁성 점령 기사를 갖고서도 차마 ‘야마토 왕국의 고구려 수도 정벌설’을 꾸며 내지 못했다.

 

그러나 만일 이 기록을 일본 열도에 이주해 간 야마토 왕국 부근의 고구려 이주민 마을의 촌장 집 습격 사건이라고 해석하면 그 짧은 거리나 대장군의 노획물의 영세한 규모가 설명된다. 당시 일본 열도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주민이 자치촌, 소분국을 다수 형성해 살고 있었다. 같은 흠명기의 임나 관계 기사들도 이러한 이주민 자치마을, 소분국의 기사가 아닐까?

 

넷째, 한국 역사에서 실재했던 가라국은 임나를 포함해서 6가라, 임나를 빼면 5가라 체계였다. 그런데 일본서기 흠명기의 임나일본부가 통치했다는 임나는 10개 가라체계로 가라(加羅), 안라(安羅), 사이기(斯二岐), 다라(多羅), 졸마(卒麻), 고차(古嵯), 자타(子他), 산반하(散半下), 걸찬(乞찬), 염례(稔禮) 등 10가라가 공존한 것으로 돼 있다.

 

일제 어용사가들은 일제강점기에 총동원돼 그들의 10개 가라를 한반도에 비정하려고 총력을 기울였으나 4개 정도를 비슷하게 찾아내고 나머지는 모두 실패했다. 반면 1960년대 ‘삼한·삼국의 일본열도 내 분국설’을 제기한 북한 김일성종합대의 김석형 교수와 그 제자들은 일본 열도 안에서 일본서기의 10개 가라국을 기비(吉備) 지방을 중심으로 모두 찾아냈을 뿐 아니라 몇 개 가라계열 소분국을 더 찾아냈다.

 

일본서기가 임나일본부를 둬 통치했다는 10개 가라국은 한반도 내의 6가라가 아니라 일본 열도로 이주해 들어간 6가라 계열 이주민들의 소분국들과 관련된 것이었음이 증명된 셈이다.

 


다섯째, 일본서기 흠명기 2년(532년)에는 임나일본부와 함께 ‘안라(安羅)일본부’가 병존하여 신라에 항복한 임나의 부흥대책회의가 거론되는가 하면 안라일본부 관리가 흠명왕의 견책을 받는 기사가 나온다. 이것이 한반도 내 일이었다면 모순된 기술이다. 한반도에서 안라는 아라가라(김해가라 또는 함안가라)이고 임나는 본가라(고령가라)로서 532년에 신라에 병합된 것은 안라가라이고 임나는 그 훨씬 뒤 30년 후인 562년에 신라에 병합됐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와 함께 안라일본부가 532년 이후 기사에도 나오므로 이것은 한반도 안의 일이 될 수 없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부의 내용도 임나 또는 안라의 관리들과 연락하는 야마토 조정의 2명 정도의 연락소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사실이라면 임나일본부나 안라일본부는 일본 열도 안에서 야마토 조정의 일본 열도 안 가라계열 이주민 자치촌의 연락사무소 같은 것에 불과하다.

 

여섯째, 일본서기에는 630년까지 임나가 존재해 계속 야마토 조정에 조공하는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임나(고령가라)가 신라에 병합돼 사라진 것은 이보다 70여 년 앞선 562년(신라 진흥왕 23년, 일본 흠명왕 32년)의 일이었다. 이 역시 일본서기의 임나일본부가 한반도가 아니라 일본 열도 안에 있던 기관이었고 임나도 일본 열도 안의 소분국 임나임을 입증하는 기록이다.

 

여기까지만 보아도 일본의 야마토 정권이 4∼6세기에 한반도 남부에 직할 식민지를 설치하고 임나일본부라는 총독부를 두어 200년간 통치했다는 소위 임나일본부설은 사실이 아니며 일제 어용사가들이 날조한 허구임이 명명백백한 것이다.

 

일본이 1945년 패전한 후 황국사관에 의거한 역사 날조에 대해 일본 사학계에서도 반성이 일어났다. 그 결과의 하나가 일본 민족의 기원을 한반도에서 구하여 밝히면서 나온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등의 ‘기마민족 일본정복설’이다.

 

이 학설은 한반도로부터 기마민족이 4세기 초에 일본 기타큐슈(北九州) 지방으로 이동해 들어와 야마토 왕국을 세웠는데 이것이 제10대 왜왕 숭신(崇神) 때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학설은 고사기와 일본서기의 제1대∼9대 천황을 가공인물로 보았다. 그리고 제15대 왕인 응신(應神) 때 동정(東征)을 하여 기나이(畿內) 지방으로 이동한 것으로 설명한다. 가라→기타큐슈→기나이 지방으로 연결되는 마구(馬具) 출토품이 동일 유형이라는 점이 증거였다. 에가미는 ‘신공황후 신라정벌설’이나 ‘임나일본부설’도 가공의 것으로 보았다.

 


일본 고교 교사용 역사 자료에 실려 있는 ‘4세기말 조선’의 지도. 가야에 해당하는 영토를 임나라 칭하면서 신라나 백제보다 크게 그려 놓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기마민족설이 여기서 끝났으면 과학적 연구로 끝났을 터인데 에가미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왜한연합왕국설(倭韓聯合王國說)’을 제기했다. 그 요지는 한반도 진왕(辰王)의 후예라는 의식을 가진 숭신왕이 4세기 초 일본 열도에 건너와 기타큐슈에 수도와 본거지를 두고 한반도 가라(加羅) 지방과 기타큐슈 지방을 아우르는 왜한연합왕국을 설립했다는 것이다. 이 왕국이 강성해져서 4세기 말∼5세기 초 한반도에서 고구려의 남하를 막는 주도 세력이 됐는데 그 증거가 광개토대왕비의 ‘왜’ 기사라는 것이다.

 

그러나 왜한연합왕국설도 6가라 지방이 일본의 식민지가 아니라 기타큐슈와 대등한 영토였다는 변화뿐이지 역사적 사실과 무관한 가공의 역사다. 왜한연합왕국이 한반도 남부와 일본 기타큐슈에 걸쳐서 200년이나 존속했다면 국호라도 있었을 터인데 이를 증명할 단 한 줄의 기록도 없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존재했던 6가라는 소국마다 고유 명칭이 있었고 임나는 그 가운데 고령지방의 소왕국이었다. 기타큐슈에 있던 나라는 변한에서 건너간 변한의 구야국의 분국으로 4세기 말∼5세기 초에는 ‘구야왜(狗邪倭)’라고 불리게 된 소왕국으로 6가라에서 완전히 분리 독립된 별개의 소왕국이었다. 4세기 말∼5세기 초 구야왜가 백제와 가라가 동맹해 신라를 공격했을 때 백제의 요청에 응해 소규모의 원병을 보냈다가 신라의 구원 요청에 응한 고구려 광개토대왕의 강군에게 거의 전멸당한 일이 있었다. 이때도 백제군의 포로가 8000명이 넘었다는 데서 알 수 있듯 주력군은 물론 수만 명의 백제군이었고 원병인 왜군은 겨우 1000명 미만의 보조적 원병이었다. 이때 왜군은 왜한연합왕국의 군대가 아니라 기타큐슈 구야왜국의 일회성 파견 원병에 불과했으므로 광개토대왕비문이 왜한연합왕국 실재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대한제국 말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한국을 침략할 때 일제 어용사가들이 침략 도구로 고안한 임나일본부설을 2007년의 일본 중고교 교과서에 수록해 한국 침략 정신을 교육, 고취하고 일본 문부과학성이 이러한 한국 역사 왜곡을 권장 또는 독려하고 있으니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용하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출처 : 좋은 글의 美學
글쓴이 : 언덕에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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