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킴 작품방/수상록·에쎄이

'비움과 흐름'에 대해 지혜를 구하는 글

imaginerNZ 2007. 7. 18. 00:32

'비움과 흐름'에 대해 지혜를 구하는 글.

-엘리엇 킴

 

'마음을 비운다'는 것과

'마음은 흐른다'는 것은

종이의 양면과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마음을 비우는 것과

마음이 절로 흐르는 것은

매한가지가 아닐런지요?

 

불교에서 말하는 마음 비움,

즉 공(공)의 개념이

예술에서 말하는 마음의 흐름,

즉 색(색)에 해당하지 않을까? 라고 상념해 봅니다.

이 두 가지의 구도행이

공즉시색에 대한 각각의 접근방식이라는 생각도 더불어 해봅니다.

공은 색을 무념히 바라보고 색은 공을 무상히 회향하며-

 

근본적으로 사유했을 때,

우리 마음의 태초가 공(공)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 상태는 마음의 바탕입니다.

마음의 백지상태라고나 할까요?

 

그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

즉 마음이 흐르는 물살의 무늬를

공(공), 즉 '마음의 캔버스' 위에 묘사하는 것이

예술이라는 생각도 해봅니다.

 

불교에서는 마음의 바탕 위에

진리의 경을 새기고

예술에서는 마음의 바탕 위에

무늬를 흘리는 것이 아닐런지요?

 

이 두 가지 방식의 공통점은

마음이 티 없이 맑고 고요함에 젖어들어 '투명'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습니다.

한편으로,

수행정진하시는 스님들은 사유와 태도, 그리고 언어와 행동의 일치를 구합니다.

그러한 고행은 '자아의 우주화'를 거쳐 '우주의 자아화'에 이르는 과정이며

진리에 깨달음의 서릿발이 서 있는 길을 앞서서 몸소 구하여 용맹정진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먼저 심신의 일체화에서 비롯하여

궁극적으로는 '옴' 안에 들어 '옴'의 일부가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 안에서 수행자는 한치의 어긋남이 없습니다.

그러한 상태는 항상적이고 지속적입니다.

 

그길은 끝이 없으나

어느 정도 조망할 수 있는 산상의 길위에 이르러 세상과 우주를 바라보면

그 위치에서만큼 펼쳐져 있는 풍광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 시야는 바라보이는 것에 대한 일체화의 안목이며

고행자는 자신이 서 있는 높이와 넓이만큼의 일체화를  깨닫습니다.

그 높이와 넓이는 하늘 아래의 깊이와 넓이에 해당합니다.

또한, 그 높이와 넓이와 깊이에 대한 안목은

그만큼 내면적으로 마음의 높이와 넓이와 깊이가 축적, 형성되고나서

그것이 유발시키는 내외향성의 일체화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예술의 길을 걷는 사람은

정신의 수행에 열정을 스며들게 합니다.

예술가는 타고난 열정을 어쩌지 못합니다.

그는 오로지 자신의 창작열이 낳는 작품 속에서 '선정'을 추구합니다.

예술가는 세상 안에 떠다니면서도 세상은 그에게 너무 낯섭니다.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예술가의 행동은 개별적인 성향과 상황에 따라

때로 괴팍할 수도 있고,

때로 자폐적일 수도 있고,

때로 도취적, 열광적일 수도 있고,

때로  격변무쌍할 수도 있고,

때로 누구보다도 의젓하고 점잖을 수도 있고,

때로 한없이 비관적일 수도 있고,

때로 상인보다 더 교묘할 수도 있고

때로 군인이나 정치가보다 더 지략적일 수 있으나,

결국은 어린이의 상태-순수 그자체-에 머물러

결단코 거기에서 벗어날 줄 모릅니다.

'정감의 의인'이라고나 할까요?

 

예술가는 굳이 언행일치를 구하거나,

사회적인 상식 또는 양식을 무시하거나 그에 합치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통시적인 관점에서 세속법이 옳든 그르든,

인세의 공동선을 지향하고 유지하기 위한 객관적인 준거인 법을

아예 무시하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세속의 어떤 법도 만법이 아니어서,

인류의 역사를 지속적으로 관할하거나 지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위와 같이, 예술가들이 일탈하는 이유는 

그의 내부에 들어 있는 열정의 불덩어리를 이겨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예술가는 최고선을 지향하는 이상주의자입니다.

그는 속세에 물들지 않습니다.

그는 진정한 사랑을 꿈꿉니다.

그는 대자연과 인류를 사랑합니다.

그는 세속적인 삶을 살면서 비세속적인 불변의 지혜를 형상화하고저 합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형식에도 영원한 문외한입니다.

 

그는 운명적인 방랑자입니다.

그는 모든 '종교(Religion)와 주의(ism)'를 일체적인 근원으로

돌이키려는 이룰 수 없는 소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그는 우주의 근원을 거스르려는 연어의 본능을 타고 났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소망이 사회적으로 실현가능하다는 점에

'아직은 아니다(No, not yet.)'라고 확신적으로 말합니다.

그것은 안타까운 심정의 절절한 표현입니다.

그러한 예술가는 그리움의 연인입니다.

 

결국  삶의 지혜를 구하는 구도의 길은 하나이며

불교의 일심정진하는 구도의 길은 곧고 바른 지름길이고

예술이 귀일지향하는 길은 메아리의 길입니다.

불교의 득도자는 마음을 정히 비워 생시에 깨달음을  얻어

영원의 치마폭에 스치듯 다다르며

진정한 예술가는 사후에도 돌아오지 않을 메아리로 흘러갑니다.

 

끝으로,

보다 많은 예술인이 진정한 미의  구현을 위하여 

세속적인 사람됨과 주어진 장소에 구애됨이 없이 

수행정진하는 기회를 많이 가져

부처님의 미소를 닮아가기를 기원합니다.

그것이 예술을 통해 구도로 나아가는 길, 구극의 길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모든 구도와 예술의 수행자들이시여,

마음이 공즉시색하여 예외없이 옴에 입거하소서!

여기 오시는 어느 님께서 일법일계의 큰 가르침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  ㅣ  !!!.)

---------------------------------------------------------

[200707180024 : 대치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