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킴 작품방/수상록·에쎄이

슬픔의 연원에서 In the deep source of sorrow

imaginerNZ 2009. 12. 4. 13:07

슬픔의 연원에서

기쁨은 무상함의 거울을 장식하는 테두리와 같고
잠시 활개를 펼친 슬픔의 나래에 해당한다.

삶에 대해 오직 긍정적으로 알기 위해서 우리가 삶을 사는 것은 아니다.
한시적으로 이는 기쁨과 달리
슬픔은 죽음을 전제로 한 삶에 속속들이 배어 있어
생명의 반복적 일상을 도(道)와 예(藝)의 경지로 이어주는 첫 가교의 역할을 한다.

도와 예는 완전무결하지 않다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생명이 영위하는 일상생활은
좌우가 뒤바뀐 거울의 상과 같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반성적으로 인정하고 바라보면서 심지어 이용하고 즐기려 하여
일상적 삶을 수용할 수 밖에 없는 철칙으로 내심 미리 확정하고 그만큼 틀이 진 세상을 살고 있다
그들은 아무런 객관적인 평가없이 따라가야만 하는 인생길을
뭔가를 의식한 듯이 이따금 멈칫거리며 걸어가고 있다.

현대인들은 전자정밀화된 진화의 로봇들처럼 살며
세속에서 이미 획정된 자신의 구역 안에서 살아 있는 동안 머물며
무엇인가 나름대로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삶, 그중에서도 세속적인 삶 이외에 우주자연에 대해
인간의 사고와 감성이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발현되고 전개될 수 있는지에 대해 거의 의문을 품지 않는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진정성이 있는 인간정신의 역외자들이 되는 것조차 명확히 깨닫지 못한 채
현세에 마취된 일생을 살고 있다.

현대적 인간들의 삶의 조건은 매우 불안하고 부자연스럽고 자기부정적이다.
일년전, 한달전, 하루전, 혹은 한시간전이나 몇분전,
심지어 일초전의 자기자신조차
이런 저런 형세에 따라 부정할 수 있는 가변적이고 유동적인 자아로 살고 있다.
그들은 자연스런 인간의 참모습을 비정통화하는 안목을 키우며 살고 있다.
그들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가속화하고 있는 과학발전에 전적으로 의탁하다시피 하여
물질중심의 사고에 젖어든 나머지
현재까지 존재해 왔던 인류문명의 근원적이고 회귀적인 정신성마저
사소하다고 여긴다.
근래에 그런 유일무이한 풍조가 역력하다.

삶에 대한 그들의 태도는
살아 있는 동안의 현세적 감각을 위해서라면
그리고 삶을 과학의 도움에 위탁할 수 있다면
어떤 삶의 본질적 정신성도,
심지어 지구의 중력마저도 벗어버릴 수 있다고 확신하는 듯하다.

이런 대중의 풍조를 마음의 깊이를 가다듬어 고요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안일한 즐거움, 솟아오르는 쾌감, 평안함이 주는 감성정복의 기쁨에 빠져들기보다
인류 전체의 진화적 운명에 대한 근원적 슬픔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다.

우리 인류가
잠시잠깐 발양되는 여러 가지 기쁨의 감정이 지속적으로 이어지기만을 바라고 추구하며
개체의 유한한 삶만을 사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절망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는 운명의 그네로
인류 전체의 운명을 살며
인류 전체의 감성을 느끼고
인류 전체의 지성을 펼치고,

우주자연 안에 속하여
대자연과 더불어 사는 인류 전체로서
사색하고 정관하고 구도하며 깨달음에 달하는 것이
우리 인류영혼의 궁극적 정토(淨土)임을 인식하고,

지구는 우리네 생명 전체의 둥지이고
대자연은 생물계 전체를 낳아 형성한 생명의 어머니이고
광대무변한 우주는 우리 인류의 외가(外家)임을 사념하며,

인류 전체의 삶과 궁극적 운명을 떠올릴 때마다
슬픔에 아득한 대양에서 떠오르며 조각난 시간의 뗏목 위로 이따금 고개를 내미는 기쁨의 물개가 아니라
눈 먼 한 마리 영혼의 심해어가 되어 진정한 슬픔의 영원히 깊고 아득한 연원에 잠겨 들 수 있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