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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신라 문무왕 일본을 발전 시키다.

imaginerNZ 2008. 9. 15. 05:05

 

 

[밝은 앞날 되시기를]

 

[역사는 미래를 위하여]

 


-펀-


신라 문무왕 일본을 발전 시키다.


7, 8세기의 한일 고대 교류사에 관한 일본 역사학자의 주장을 소개한다.


"신라 제30대 문무왕(661∼681 재위)은 681년 7월 1일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었으나

실은 이에 앞서 동해 대왕암 근처 바닷가를 떠나 일본으로 망명했다.

그가 일본의 제 42대 문무왕(697∼707 재위)이다."


일본 사학계의 '매서운 칼잡이'로 최근 주목을 받는 여류 학자 '고바야시 야스코' 여사가

그의 저서 <왜왕들의 7세기... 천황제의 시작과 수수께끼의 왜왕들>(현대사조사)에서 제기한 폭탄 선언이다.

일본 문무왕은 수수께끼의 명군(名君 - 뛰어난 임금)이다.

일본 역사책 일본서기(日本書紀·신들의 이야기와 제41대 지통여왕까지의 기록)나

속일본기(續日本記·제42대 문무왕과 50대 환무왕 등 8세기의 왕에 관한 기록)를 통틀어

그의 태어난 해에 관한 서술은 어디에도 없다.

문무왕은 생일없는 임금인 셈이다.

뿐만 아니라 몇살에 죽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

다른 옛 문헌 등에 문무는 15세에 즉위했고 25세에 요절한 임금으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통치 10년의 치적은 참으로 눈부시다.

즉위 하자마자 법률을 만들어 나라의 기틀을 마련했고

일본에서는 처음으로 도, 량 즉 길이와 부피를 재는 잣대나 됫박 등을 만들어 백성에게 나누어 주었고

돈을 찍어 내는 관청을 처음 두었고,

처음으로 의관을 만드는 관청을 두었고

처음으로 대학을 열어 학문을 장려했고,

화공사를 처음 두어 미술 공예를 장려했고

공자를 제사 지내는 의식도 처음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처음....' 일색의 업적을 남긴 임금이다.

험준한 산길을 닦아 국도도 열었고,

백성에게 두루 의약품을 나누어 주는가 하면 세금도 탕감해 주는 등 어진 행정을 폈고,

각지에 말 사육장을 마련했으며,

배를 만드는 한편 항구도 수리 하는 등 국방도 다졌고 ,

즉위하자마자 신라와의 국교를 원활히 했다.

"매우 박학하며 누구보다도 활쏘기에 능했다"며 <속일본기>는 문무를 마냥 칭송했다.

안으로 백성을 위하는 정치를 폈고 밖으로 선린 외교도 활발히 한 그야말로 문무에 달통한 명군이었다.

15세에 즉위하고 25세에 죽은 임금치고는 실로 엄청난 치적이다.

이 노련한 행정력에 알맞게 그의 시호도 매우 노인답다.

즉, '아마노마무네토요오호지'(天之眞宗豊祖父)이다.

(퍼온이주: 天之眞宗豊祖父 - 대강 "우리를 풍요롭게 해준 하늘의 진짜 할아버지")

그런데 1220년께 자원이 편찬한 일본 최초의 사론서인 <우관초>에 따르면 문무가 돌아갔을 때 나이는 25세 혹은 78세로 되어 있다.

두세 살 정도의 차이라면 몰라도 25세 혹은 78세라니...

필시 무슨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닐까?

대왕암은 문무왕을 위해 신문왕이 완성한 감은사 바로 동쪽에 위치한다. 이 대왕암은 문무왕이 수중릉이라 일컬어 왔다.

마치 분지처럼 푹 팬 깊은 곳에 바다물이 넘나들어 괴었고,

커다란 넙적바위 하나가 가운데 있다. 흡사 고인돌 모양이다.

이 곳을 수중릉이라 주장하는 학자들은 이 넙적바위 밑에 문무왕을 화장한 재 또는 유물을 담은 석관이나 석호를 안치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후 몇몇 학자들의 추적에 따르면 바위 아래는 석관도 석호도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일 뿐이요,

관을 안치했을 만한 흔적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수중릉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주장이다.

고바야시 여사도 대왕암은 능이라기보다는 문무왕이 일본으로 피신한 출항기념지로 본다.

당나라 세력에 항거하여 싸우다 끝내 아들 신문왕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스스로는 죽은 것 처럼 꾸며 일본으로 망명했으리라 추정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일본서기> 그리고 당나라 문헌 등을 면밀히 비교해 검토하면 이런 결론이 추출된다고 한다.

그리고 이 문무왕이 신라에서 죽은 지 16년 후 일본에서 다시 문무왕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일본의 고대서) <만엽집>에는 일본 문무왕이 읊은 노래가 실려 있다.

권1의 74번.

생생한 신라말, 즉 경상도 사투리가 이 노래의 최대의 특징이다.

또한, 일본의 문무왕은 편지를 자주 썼다.

주로 신라 성덕왕(신문왕의 둘째 아들)에게 보낸 편지다.

첫번째 편지는 703년(신문왕의 큰아들)이 죽었을 때 보낸 것으로 애틋함이 흥건하다.

두번째는 '이른 봄 추위에 별고 없이 지내느냐'며 선물을 보낸다는 정겨운 사연이다.

세번째는 그가 죽기 1년전인 706년 11월에 보낸 편지다.

신라 문무왕이 아들 신문왕에게 보낸 유언장을 방불케 한다.

'국기를 튼튼히 하며 나라 안이 안락토록하고 풍속을 순화하게 할 것'을 간곡히 당부한다.

어버이가 자손에게 타이르는 듯한 말투다.

당시의 일본 왕이 강대한 통일 신라 왕에게 보낸 서한치고는 앞뒤가 영 맞지 않는다.

신라는 문무왕 시대에 통일의 대업을 이룩했고 당의 간섭을 물리치며 국기를 다졌다.

일본도 문무왕 시대에 독립 국가로서의 갖가지 면모를 갖추어 나라의 기초를 튼튼히 했다.

일본 조정의 제반의식도 이때 비로소 제정됐다.

정월 초하룻날 대극전에서 베푸는 하례 행사에

금동제 세다리 까마귀의 눈부신 당(幢)과 해, 달, 청룡, 백호, 주작, 현무 등 모양의 그림을 그린 갖가지 기치를 처음으로 세우게 한 것도 문무왕이다.

'금동의 삼족오(세발 까마귀)'는 가야 세력의 상징이고

'당(幢)'은 기치(깃발)를 지칭한 낱말인 동시에 신라 군제(軍制 - 군사 제도)의 (부대)단위 명이기도 하다.

같은시대를 산 두 사람의 명군(名君).

신라와 일본의 두 문무왕에 관한 비교연구는 반드시 추진되어야 할 중요하고도 흥미로운 과제다.

(이영희 지음·'노래하는 역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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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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