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관계/한일관계사

대가야의 멸망 - 왜왕의 절규

imaginerNZ 2008. 11. 9. 17:50
  • 번호 58340 | 2008.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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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의 여파 : 대가야의 멸망 - 왜왕의 절규

 

          관산성전투의 결과  패전의 당사자는  백제뿐만 아니라  백제편을 들었던 대가야도 마찬가지였다.

          대가야는 관산성전투당시 약 1만명의 병력을 참가시켰었는데  백제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을 병력을  잃게 되었다. 그 충격이 너무도 엄청나서 백제와는 달리 가 야는 회복을  하고  8년뒤 신라의 보복  공격을 받고 망하게 된다.   가야는 당시 왜의 입장에서는 고향과도 같은 곳인데  그런 왜의 고향 이  신라에 망하게 된 것이다.

 

          이 소식을 들은 당시 왜왕 '흠명천황'이 절규하던 내용이 일본서기에 적나라하게 전하고 있다.

         관산성전투에서 백제와 더불어 가야와 함게 동맹을 형성하고 약 1천여명의 병력을 파병했던 고대일본  "왜"였다.  이런 "왜"이다 보니 신라에 대한 감정이 좋을리가 없었다. 대가야 멸망소식을 들은 왜왕  "킨메이(欽明)천황"은 자신의 감정을 그대로 노출하고 있는데 그 내용을 보면  한마디로 뼈에 사무친 원한의 절규 그 자체이다. 

 

이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고고학적으로도 일본열도와 가장 가까웠던 가야의 이주가 가장 빨랐슴이 증명되고 있다. 특히 가야의 주류세력이 왜로 도래하여 지배세력이 된 거은 여러부분에서 입증이 되고 있다. 

 또한 문헌기록이 없는 고대 가야와 왜의 관계를 가늠할 수 있는 설화를 보면 일본 큐우슈우(九州)지역 설화는 가야의 설화와 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일방적으로 가야에서 왜로 건너간 것만도 아니다.  고대 왜의 유물도 가야지역에서 심심치 않게 출토되고 있다. 대표적으로 파형동기(방패장식물)라든가  왜계 토기등도 가야지역에서 출토되고 있는데 그만큼 고대 가야와 왜는 교류가 많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사진설명 : 고대 가야와 왜의 교류를 증명하는 유물들 (국립박물관 설명그림)  특히 김해 대성동고분에서 북방계 유물의 대표격인 동복(솥)과 남방계 유물의 대표격인 파형동기가 동시에 출토되었다.

 

  사진설명 : 김해 대성동 고분에서 출토된 대표적인 왜계 유물로 알려졌진 파형동기(巴形銅기)이다.  용도는 방패꾸미게이다

  가야는  고대일본의  고향


 


고대 한일관계를 이해하려면  유럽과 미국의 관계를 통해 이해하는 것이 가장 쉽다.  좀더 쉽게 풀어본다면 영국과 미국의 관계를 통해서 고대 가야와 왜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오늘날 미국이라는 존재는 영국인들이 가장 먼저 건너가서 세운나라이다. 그 후에 독일인 등, 여러 유럽인들이 미국으로 건너갔다. 이들이 미국의 주류사회를 형성하는 백인집단이다. 그중에서도 정치 경제적 주류집단은 가장 먼저 미국으로 건너갔던 영국계 후손들이었고  그 다음으로 독일계였다.  이들이 바로 앵글로 색슨계이다.  앵글로는 영국을 그리고 색슨(saxen)은 독일어로  작센을 의미한다. 이렇게 유럽의 이민으로 성장한 미국입장에서는 유럽, 특히 영국은 항상 마음의 고향인 것이다.

이와 거의 똑같은 현상이 고대 한반도와 일본열도에서 벌어졌었다. 일본열도와 가장 가까웠던 고대 가야쪽에서 가장먼저 그리고 가장 빨리 고대일본으로 건너가서 정착하게 되고 그 다음으로 신라와 백제 사람들이었다. 미국에서도 영국계 후손들이 주류세력을 이룬 것과 마찬가지로 고대일본에서도 가야계 후손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니 고대일본인들 특히 가야계후손들이 볼때 가야는 고향 그자체인데 그런 고향이 공격을 받거나 하면 응당 지원에 나서는 것은 당연할 것 아닌가? 마치 영국이 공격을 받으면 미국이 군사적지원에 나서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유럽에서 서로 경쟁하던  영국 독일 프랑스의 관계처럼  이들이 이주한 미국에서도 영국계후손 독일계후손 프랑스계후손은 서로 경쟁하면서 성장하고 또 그바탕속에서 오늘의 미국이 형성된 것처럼  고대일본열도에서도  가야계후손, 신라계, 백제계 후손들이 서로 경쟁속에서 고대일본을 형성하였다.  대표적으로 고대일본의 가장 컸던 정치적 변란인 "임신의 난"이 이를 반증하는 역사적 사건이다.

 

결국 고대일본의 고향인 가야가 신라와 적대적이면 응당 신라와 왜의 관계도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또한 신라와 동맹관계인 고구려라면 왜와 고구려의 관계도 적대관계일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관계는 광개토대왕비에서도 일정부분 엿볼 수 있는데  영락5년(광개토대왕 5년) 왜의 공격을 받은 신라를 구원하기 위해 남정한 광개토대왕의 고구려군은 임라가라로 표현된 금관가야를 멸해 버린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또한 고구려와 적대적 관계인 백제와 왜가 동맹관계를 형성하는 것은 적의 적은 친구다라는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정리하자면  고구려와 신라의 동맹라인과  가야-왜-백제로 이어지는 동맹라인의 대결이 광개토대왕의 군사적 역학관계였다. 

  왜왕 "킨메이(欽明)천황"의 절규


 

이런과정을 통해서  왜의 고향인  금관가야가 신라에 흡수되고  또 대가야마저 서기 562년에 신라에 멸망당했으니 고향을 잃어버린 왜의 입장에선 얼마나 통한스럽겠는가? 그것의 기록이 일본서기에 장문으로 나오는 왜왕 킨메이천황의 발언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라는 서쪽 보잘것 없는 땅에 있는 작고도 더러운 나라이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며 우리가 베푼 은혜를 저버리고 황가를 파멸시키고 백성을 해치며 우리 郡縣(군현)을 빼앗았다. 지난날에 우리 신공 황후가 신령의 뜻을 밝히고 천하를 두루 살피시어 만백성을 돌보셨다. 그때 신라가 천운이 다하여 어찌할 바를 몰라 애걸함을 가엾게 여기사 신라왕의 목숨을 살려 있을 곳을 베풀어 번성하도록 하여주었다.

 

생각해보아라.

 

우리 신공황후가 신라를 푸대접한 일이 있는가. 우리 백성이 신라에게 무슨 원한을 품었겠느냐.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라는 긴 창과 강한 활로 미마나-이 미마나가 가야입니다-를 공격하여 온 백성을 죽이고 상하게 하며 간과 다리를 잘라내는 것도 모자라 뼈를 들에 널고 시신을 불사르기를 서슴지 않는다. 그들은 미마나의 우리 친척과 모든 백성들을 칼도마에 올려놓고 난도질을 마음대로 저지른다.



 하늘 아래의 어느 백성이 이 말을 전해듣고 가슴 아프게 생각지 않겠는고. 하물며 황태자를 비롯하여 조정의 여러 대신들은 그 자손들과의 情懷(정회)를 회상하며 쓰라린 눈물을 흘리지 않겠느냐. 나라를 지키는 중책을 맡은 사람들은 윗분을 모시고 아랫사람들을 돌보아 힘을 합하여 이 간악한 무리에게 천벌을 내리게 하여 천지에 맺힌 원한을 풀고 임금과 선조의 원수를 갚지 못한다면 신하와 자손의 길을 다하지 못한 후회를 뒷날에 남기게 될 것이다>

 

 <천황이 마침 대궐 밖으로 나가있던 황태자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 불러들이고 병상 가까이 오게 하여 그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내 병이 무거우니 너에게 뒷일을 당부하여 둔다. 너는 신라를 쳐서 미마나, 옛 가야를 재건하라. 그리하여 옛날과 같이 사이좋게 지내게 된다면 내가 죽어도 한이 없겠다.”
 천황이 이 달에 돌아가셨다>


한마디로 신라에 대하여  원한에 사무친 쌍욕 그자체이다.  그러다 보니 왜는 백제와 더욱 동맹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후 백제마저 망 한 후 
왜로 건너간 백제 지식인들이 일본서기 집필에 깊게 관여하였으니  백제가 신라에 가졌던 감정이 그대로 일본서기에 표현된 것이다. 가야계 후손, 백제계 후손이 신라에 가졌던 악감정은 신라에 대해서 악의적으로 표현하다 보니 신라에 유리한 내용은 악의적으로 왜곡하고 가야를 흡수한 신라를 말하지 않는 것이 일본서기이다. 

사진설명 : 경북고령의 대가야 지역 지산동 고분군에서 출토된 대가야 투구(국립박물관 소장)  사무라이투구와 외형에서 닮은 부분이 많다.


  군사적관점에서 본 일본서기왜곡과 임나일본부설


 


고대일본의 고향인 가야가 신라에 흡수되었다고 표현하자니 자존심 상하기 때문에  왜왕인 천황중심으로 역사를 새롭게 쓴 일본서기에선 그들이 임나일본부를 설치해서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고 왜곡한 것이 역사왜곡의 핵심이다.

 

임나일본부설의 왜곡된 사실을 군사적으로 풀이하면 이렇다. 영국의 식민지이자 이민지였던 미국이 200여년 정도 흐른 20세기 시점에선 군사적으로 영국을 능가하고  2차대전때는 영국이 공격받자 미국은 기꺼이 영국을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향이니까. 똑같은 맥락에서 가야의 이민지였던 왜가 성장하여  신라와 경쟁하던 가야를 도왔던 것이다.

 

 미국이 그들의 고향 영국을 도왔던 것처럼 왜는 그들의 고향 가야를 도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가지고 왜가 가야지역에 임나일본부를 두고 지배했다고 한다면 마치 미국이 영국을 지배했다는 논리와 같은 것이 된다. 한마디로 어불성설 그자체이다.  이렇게 군사적 관점에서 해석하면 일본이 주장하는 임나일본부설의 허구와 실상을 쉽게 해석할 수 있다.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제시되는 광개토대왕비를 토대로 보더라도 신라를 공격한 것은 왜로 나오는데 오히려 광개토대왕이 끝까지 추격하여 결과적으로 멸한 것은 금관가야였다. 그 이유는 뭘까? 바로 가야가 왜를 동원하여 신라를 공격하였기에 고구려 광개토대왕은 그 근본인 금관가야 멸했던 것이다.  역사는 곧 전쟁사이고 전쟁은 군사적관점에서 해석해야만 제대로 된 해석이 되는 이유이다.

 

 사진설명 : 전쟁기념관에 전시되고 있는 광개토호태왕비의 1:1 모형석. 이 광개토대왕비의 2면에 왜가 신라를 공격하여 고구려가 신라를 구원하고 임나가야를 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대한민국이 세운 서울 남산타워와 광개토호태왕비를 한장의 사진에 담았더니 묘한 기분이 든다.


사진설명 : (왼쪽) 광주광역시에 남아있는 왜의 전방후원분      (오른쪽)일본 오사카부 사카이시에 있는 왜왕 닌토쿠(仁德)천황의 전방후원분(세계 최대의 묘이다)

왜왕 인덕천황의 전방후원분의 크기는 단면적으로는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크다.  이런 대규모이 능을 조성한 것으로 볼때 고대 왜의  인력동원규모를 가늠할 수 있다.  이렇한 왜의 인력동원능력은 곧 군사력동원의 능력과 직결된다.  따라서 고대왜의 신라 공격을 단순한  왜구집단의 노략질로만 해석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그 반증으로 막강한 고구려의 광개토대왕도 당시로서는 대규모인 5만의 기보병을 신라구원에 파병한 것으로도 가늠할 수 있는 사항이다.  이런 사실관계에서  서기 554년 백제와 왜 그리고 대가야의  연합 3만군에 맞서 싸워 이긴 신라의 관산성 전투는 군사적으로나 우리 역사에서 분명하게 기억될 부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