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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홍윤기의 역사기행] 21 ~ 26

imaginerNZ 2008. 5. 8. 01:32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오사카에 우리나라엔 없는 백제왕족 사당이…

<21>다라스의 유서 깊은 '백제왕신사'


오사카부 히라카타(枚方)시 니시노초 나카노미야(西之町中宮 1-68) 언덕에 올라서면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라는 큰 간판이 우뚝 서 있다. 백제왕신사는 백제사 사적공원 경내와 서쪽으로 잇대어서 함께 자리 잡고 있다. 백제왕신사는 그 옛날 구다라스(百濟洲) 땅에서 백제 왕족이 조상을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으로 백제사 터전 사적과 함께 매우 유서 깊은 명소이다. 따져 보면 우리나라에는 없는 백제 뿌리의 백제왕족 사당이 오히려 여기 오사카땅에는 엄존하고 있지 않은가. 그만큼 중요한 이 구다라스, 오늘의 오사카땅 난파진 앞바다는 본국 백제와의 직통 항로가 되었던 곳. 그러기에 백제인이 일본 본토에서 최초로 개척한 구다라스땅에 가장 먼저 백제왕족 사당이 섰다는 것은 지정학적으로도 설득력이 있다.

현재 백제왕신사에 전해지는 고문서들을 중심으로 이곳의 역사를 캐 보자. 우선 살펴볼 필요가 있는 것은 ‘미마쓰가계도’(三松家系圖)다. 이 고문서에는 “비다쓰천황(敏達天皇·572∼585 재위) 어대에, 백제왕족 왕진이(王辰爾·6C)가 이곳에다 사당을 세우고 그의 조상을 제사지냈다”고 왕진이의 직계 후손인 미마쓰 가문의 가계도가 밝히고 있다. ‘비다쓰천황은 백제 왕족’이라는 사실은 일본 고대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서기 815년 일본왕실 편찬)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비다쓰왕 당시의 조정은 나라(奈良)땅 백제(百濟)의 ‘백제대정궁’(百濟大井宮)에 있었다.(‘부상략기’ 13C경 편찬) 바로 그 무렵 백제왕족 왕진이의 직책은 난파진 앞바다를 관장하는 선사(船使·해무청장)였으며, 그의 행적은 ‘일본서기’에 다음처럼 특필되어 있다.

◇백제왕족이 조상을 제사지내기 위해 세운 사당인 백제왕신사의 배전(拜殿).


“비다쓰천황 원년(572) 5월 15일. 천황은 고구려왕(평원왕·559∼590 재위)의 국서를 받아 대신(소아마자 최고대신)에게 건네주었다. 조신(문서담당 고관)들을 소집하여 해독시켰다. 고관들은 사흘이나 걸렸으나 아무도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다. 이때에 선사 왕진이를 불러들이자 그가 국서 내용을 완벽하게 풀어냈다. 이에 천황과 대신은 함께 칭찬해 마지않으며, ‘잘했소, 왕진이. 훌륭한 일이오. 만약 그대가 한문에 통달하지 않았다면 과연 누가 이 문장을 풀 수 있었겠소. 이제부터는 이 왕실에서 근무하여 주기 바라오’라고 명을 내렸다. 그러면서 동서(야마토 지방과 난파진 구다라스 지방)의 고관들에게 ‘그대들의 학문은 아직 멀었어. 그대들은 숫자가 많지만 왕진이 한 사람만도 못하구먼’ 하고 말했다. 또 고구려의 다른 문서는 까마귀 날개였다. 검은 색 날개에 검은 색으로 씌어져 누구도 해독할 수 없었다. 왕진이는 날개를 밥솥에서 뜸들이던 밥의 김을 쐬게 하더니 그것을 흰 비단에다 꾹 눌러서 문자들을 고스란히 찍어냈다. 조정 신하들은 이 광경에 모두 경탄했다.”(‘일본서기’)

슬기로운 왕진이는 백제 계열 비다쓰왕과 소아마자 대신의 후광 속에 정사에 힘썼고, 그의 역량은 곧 구다라스의 백제왕족 터전에 백제왕신사라는 사당을 지어 이국 땅에서도 당당하게 조상신들의 제사를 모시게 되었다.

◇백제왕신사의 경내.


미마쓰 가문은 왕진이의 직계 후손 백제왕경복(百濟王敬福·궁내경 등 대신·698∼766)의 뒤를 이어 장장 1240년이나 계속됐다. 그동안 번창하여 오늘날까지 줄기차게 대를 이어오고 있다. 현재 본종가의 후손 미마쓰 도시쓰네(三松俊經·이바라키현 도리데·1932∼)는 필자에게 “지난해 10월(14∼15일)에도 백제의 왕도 부여에 가서 조상님 큰 제사에 참석했습니다. 저의 두 번째 모국 방문이며 매우 뜻깊게 생각합니다. 히라카타의 백제왕신사로 한국에서도 많이들 참례해 주셔서 고맙게 여기고 있습니다. 저희 집안의 묘소는 긴야(禁野)에 있습니다”(2006.12.24)라고 역시 구다라스의 히라카타 지역이 백제 왕족의 본 터전임을 밝혔다.

현재 그의 슬하에 두 아들(俊典 42세, 俊裕 40세)이 백제 왕족의 가문을 계승하고 있다. 그는 직계 선조 백제왕경복에 관하여는 후일 상세하게 쓰겠다고 다짐했다. 백제왕경복은 백제 계열 제45대 쇼무천황(724∼749 재위)대부터 역대 왕의 총애를 받았던 명재상이며 외위대장(外衛大將)이라는 왕실 최고 장군으로서 무공도 컸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675년 쇼토쿠여왕(764∼770 재위)이 구다라스의 “유게사(弓削寺)에 거동했을 때 천황 앞에서 ‘백제 춤’을 추었다”(‘속일본기’ 796년 왕실 편찬 역사서)는 내용은 유명한 역사 기사다.

◇백제왕신사의 후원자들의 석패(石牌)가 줄지어 섰다.


미마쓰 가문 직계 후손인 미마쓰 미요코(三松みよこ·55·나라시 호렌초)는 “미마쓰가문과 백제왕신사에 관해서 현재 2년째 연구서를 쓰고 있으며 내년에 탈고하면 교수님에게 전해드리겠다”(2006.12.7)고 필자에게 밝힌 바 있다. “저희 집안의 가계를 올바르게 써서 백제 왕실에 관한 일반의 역사 인식을 드높이고 싶다”는 의욕 속에 집필에 골몰하고 있다. 물론 백제의 순수한 핏줄을 이어오는 이들은 오늘날 완벽한 일본인들이다. “현재(1972) 일본 동부 지역에는 미마쓰 가문이 약 4000명 정도 살고 있다”(‘日本人の姓’ 1972)고 발표한 사쿠마 에이(佐久間英·1913∼ )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일본인 20대 성씨 중의 태반이 한국계 성씨이기도 하다. 도쿄대학 인류학과 하니와라 가즈로 교수의 연구(‘日本人の成り立ち’ 1995)는 고대(BC 3∼AD 7)의 한반도 등 도래인은 150만명이며, 선주 일본인(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지역 이주 정착민들) 1 대 8.6명이라는 압도적인 시뮬레이션 연구 결과가 나와 주목받고 있다.

백제왕신사에는 현재 ‘백제왕영사묘유서’(百濟王靈祠廟由緖)라는 것이 있음을
후지쓰 유키코(藤津由己子) 궁사가 공개했다.(2006.12.7) 이 고문서는 지금부터 560년 전인 1446년 우누카네(宇努勘彌)가 썼다. 고문서의 주요 대목은 다음 같다.

“백제왕신사는 백제왕족의 신주를 모시고 제사지내는 사당이다. 일본에 문자를 전해 준 것은 백제인 왕인이며 오진왕 시대였다. 스이코여왕 시대에 백제왕자
아좌태자가 성덕태자에게 석가모니 불상과 경전 3600권을 주었다. 성덕태자는 기뻐하며 아좌태자에게 가도노(현재의 백제왕신사 일대)에 토지와 주택을 주고, 왕실의 벼슬(位階)을 주었다. 쇼무천황 시대에는 왕인과 아좌태자의 후손인 백제왕남전, 자경, 효충, 경복 등을 조정에서 중용했다.”



또 “이 중요한 고문서의 집필자 우누카네는 성명으로 살필 때 백제왕족의 자손이며, 이 사당의 궁사 집안 사람이 아닌가 본다”(야마노 마키오 ‘백제왕신사―창립 연혁과 본전과 배전에 관한 고찰’ 1975)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백제왕신사 설계 대표건축가이며 문화재보존기술협회 야마노 마키오(山野滿喜夫) 위원은 “
백제 의자왕의 왕자 선광(禪光)왕자가 지토여왕(持統·686∼697 재위)시대 일본으로 건너왔을 때, 여왕으로부터 ‘백제왕’이라는 사성(賜姓)을 받아 ‘백제왕’씨의 시조가 되었으며, 난바(難波)에 살면서 모름지기 옛날 구다라군(百濟郡)에서 거주하며 조정으로부터 후대 받았다. 아들은 창성(昌成)이며 증손자가 종3위 백제왕경복이다”(앞 연구론)라고 역사를 밝힌다.

그런데 이 사당의 편액을 보면 거기에는 제신(祭神)의 이름 두 개가 세로로 나란히 새겨져 있다. ‘백제대왕’과 ‘우두천왕’(牛頭天王)이 그것이다. 백제대왕은 당연한데 신라 신인 우두천왕을 합사하고 있는 것을 주목해 보자. 일찍이 1891년 도쿄대학 사학과 구메 구니다케(久米邦武·1839∼1931) 교수는 “우두천왕은 신라신 ‘스사노오노미코토’(素盞吾尊)”(‘神道は祭天の古俗’)라고 단정해 뒷날 국수주의자들의 탄압 대상이 돼 끝내 도쿄대학에서 추방당했다.(‘산세이판 인명사전’ 1978) 여하간 백제 신과 신라 신을 합사한 것은 뜻깊은 일이며, 이는 아마도 일본 왕실 제사의 신라 신인 ‘원신’(園神)과 백제 신인 ‘한신’(韓神) 합동 제사(‘延喜式’ 서기 927년 일본왕실 편찬)에 기인하는 게 아닌가 한다.

이와 같이 백제왕신사는 일본에 현존하는 유일한 백제왕실 사당이며 신라 신도 합사하고 있으므로 주목받는 것은 당연하다. “많은 일본인 유지들이 막대한 헌금을 하여 이 사당은 오늘날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는 후지쓰 유키코 궁사는 협조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채 백제왕신사 어귀 도로변을 길게 장식하며 줄지어 서 있는 석재 돌기둥들을 가리키며 밝게 미소지었다.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日 신사의 바탕은 단군 섬긴 신라 ''곰의 신단''

<22>신라 천일창 왕자와 히메코소신사

 


“1889년 4월1일, 고래로부터 구다라군(百濟郡)이었던 지역에 행정상 새로운 정촌제(町村制)를 시행하면서 북구다라촌과 남구다라촌이 생겼다. 남구다라촌은 종래의 나카무라촌 등 4개 촌을 통합하여 생긴 새로운 행정지명이다. 1896년에 가서 남백제촌은 히가시나리(東成)군에 속하게 되었다.”(井上正雄·‘大阪府全志’, 1922) 110년 전에 ‘남구다라촌’이었던 오늘의 히가시나리구(히가시고바시3-8-14)에는 ‘히메코소신사’(比賣許曾神社)가 자리하고 있다.

히메코소신사의 혼마 요시부미(本間良文) 궁사는 “이 신사 터전은 장장 2000년의 긴 역사를 이어오는 신성한 곳입니다”라고 정중한 어조로 말하며 사무소 안으로 안내했다. 고가쿠칸대학 신도과 출신인 혼마 요시부미 궁사는 필자에게 “이 터전은 고대 신라의 천일창(天日槍) 왕자와 연고가 깊은 신성한 사당”이라고 설명했다.

일본 역사책 ‘고사기’(712년 편찬)와 ‘일본서기’(720년 편찬) 등에는 ‘천일창’이란 신라왕자가 등장한다. 일본 말로는 ‘
아메노히보코’(あめのひぼこ)라 부른다. “천일창 왕자는 고대에 신라로부터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하는 다양한 기록이 전해진다. 그 때문에 일본 각지에는 천일창 왕자의 이야기와 행적이 전설처럼 널리 퍼져 있지만 우리나라에는 알려져 있지 않다. 일본 고대 역사에서 우리가 천일창 왕자의 발자취를 주목할 대목은 다음과 같다.

“스이닌(垂仁, 수인) 천황 3년 3월 신라로부터 천일창 왕자가 여러 가지 옥과 검과 거울과 ‘곰의 신리’(熊神籬, 구마노히모로기·くまのひもろぎ) 등 모두 일곱 가지 물건을 가지고 왜섬으로 건너왔다”(‘일본서기’)고 한다. 천일창 왕자가 왜나라 스진(崇神, 숭신) 왕의 아들 스이닌 왕 초기에 신라로부터 건너왔다는 것은 신라 왕실과 스이닌 왕가의 밀접한 혈연 관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는 것으로 본다. “현재도 일본 각지에는 천일창 왕자를 제신(祭神)으로 모신 신사들이 여러 곳에 많이 있어, 그 당시 천일창의 존재는 왕에 필적하는 높은 신분이었음을 살피게 한다.”(谷川健一·‘靑銅の神の足跡’ 集英社, 1979)

천일창 왕자가 신라에서 가져온 ‘곰의 신리’라는 것은 무엇인가. 신리란 대나무로 만든 신단(신령을 제사 지내는 제단)이다. 이것은 단군의 어머니인 웅녀신(熊女神)을 모신 신단이 아닌가 한다. 신라 왕실에서 제사를 모시던 신들 중에는 단군의 어머니 웅녀신도 들어 있었다고 추찰(推察)하고 싶다.

에도시대인 18세기 고증학자 도테이칸(藤貞幹, 1732∼97)은 역사 고증저서인 ‘쇼코하쓰’(衝口發)에서 다음과 같이 신라의 신앙 체계를 밝히고 있다. “신리(히모로기)는 후세의 신사(神社)이다. 무릇 신리는 그분의 몸으로 삼아 제사드리는 분을 모시는 물건이다. 신리를 히모로기(比毛呂岐)라고도 새겨서 읽는 것은 본래 신라의 말(新羅語)이며, 그 신라어를 그 당시 빌려 쓰게 된 것이다. 천일창이 가지고 온 곰의 신리도 천일창이 조상님을 신주로 모신 것임을 알아둘 일이다.”

천손 민족인 한민족의 조상 단군을 섬기는 신앙의 발자취를 천일창의 곰의 신리를 통해 비로소 확인할 수 있다. 도테이칸의 지적에서 더욱 특기할 점은 천일창 왕자가 일본으로 건너오기 전까지 일본에서는 조상신 제사를 모시는 사당인 신사나 신궁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증언이다. 곧 일본 사당인 신사의 바탕은 천일창 왕자의 곰의 신단이다. 도쿄음악학교 다카노 다쓰유키(高野辰之, 1876∼1947) 교수는 명저 ‘일본가요사’(1926)에서 “스진 천황이 히모로기를 가사키누이노무라(나라땅 미와산)에다 세워놓고 조상신의 제사를 지냈다”라고 밝혔다.

스진 왕은 제10대 일왕으로 ‘일본서기’에서 쓰고 있으나, 사실은 왜나라 초대왕이며 신라계의 지배자이다.(‘
일본문화사’ 서문당 1999) 와세다대 사학과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1873∼1961) 교수는 “일본 초대 진무 천황부터 제9대 가이카 천황까지 9명은 역사에 없는 조작된 왕들이다”(‘古事記及日本書紀の硏究’ 1924, 초판)고 적시해 유죄판결까지 받았다.

‘곰의 신리’야말로 일본 왕가 신상제(매년 11월23일 밤에 제사를 거행함)의 한신(韓神, 백제신)·원신(園神, 曾富理神, 신라신) 신전(神殿)의 원형이다. 일왕의 신맞이(迎神) 축문에서 모시려는 아지매(阿知女) 여신이 어쩌면 웅녀신(熊女神) 아닐까. 우리 겨레가 부여 시대에 하늘의 천신에게 감사드리며 제사 지낸 영고, 고구려 때의 동맹, 마한과 예의 무천 등은 가을 추수가 끝난 뒤에 거행했던 제사와 축제였다. 농본(農本)의 시대에 가장 고맙고 또한 두려운 존재는 하늘의 천신이었기에 숭앙해 마지않았던 것이다. 농경시대 사람들은 햇빛과 비를 잘 내려주는 하늘을 우러렀고, 쇠붙이를 달구어 삽 괭이 칼 창 등을 만드느라 대장간을 세웠다. 천일창은 대장간과 철기 문화를 가지고 일본에 건너왔다.(谷川健一 앞책) 천일창 왕자가 처음으로 고대 일본에 가지고 온 것들 중에 ‘삼신기(三神器)’인 거울과 옥과 검이 고루 갖추어져 있었다.

다음은 ‘고사기’에 나오는 천일창 왕자 일본 도래설 설화다.

‘그 옛날 신라의 왕도에 아구늪이 있었다. 어느 날 아구늪가에 어여쁜 여인이 홀랑 벗은 채 벌렁 누워 낮잠을 잤다. 하늘에서 내리비치는 무지갯빛 햇빛이 그녀의 음부로 파고들어갔다. 대낮에 햇볕을 쬔 여인의 배가 점점 불러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드디어 빨간 알을 낳았다. 붉은 옥이었다. 이 때 사내가 여인에게 달려들었다. 사내는 지금까지 벌거벗고 낮잠 자던 여인의 거동을 큰 나무기둥에 숨어서 몰래 엿보던 녀석이다.

“그 알을 내게 줘!”

“안 돼요! 내 알이에요.”

“이리 내놓으라니까!”

사내는 우악스럽게 여인에게 달려들어 빨간 알을 빼앗아 도망쳐버렸다. 그녀는 벌렁 주저앉아 눈물을 뿌렸다. 남의 귀중한 알을 탈취한 사내녀석은 붉은 옥을 천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 소중하게 제 허리춤에 차고 다녔다. 이 사내가 새 밭을 일구라고 일꾼들을 산골짜기로 보냈다. 그는 그들에게 먹일 음식을 잔뜩 소의 등에다 얹고, 소를 몰며 서서히 산길로 접어들었다. 때마침 천일창 왕자가 사내의 거동을 수상히 여기며 앞을 막아섰다.

“네 이 녀석! 왜 소를 산속으로 몰고 들어가는 거야? 소를 잡아먹으려는 것이지?”

“아닙니다! 왕자 나으리. 실은 저쪽 골짜기 쪽에 제 일꾼들이 지금 널찍한 땅을 파서 밭을 새로 만들고 있나이다.”

“거짓말! 너희는 산골짜기에서 몰래 이 소를 잡아먹으려는 것이야! 가자 관가로!”

그 옛날에는 누구나 소를 잡아먹을 수 없었다. 소를 몰래 잡아먹으면 옥에 가두어 엄벌했다. 소는 농사에 소중한 가축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사내는 허리춤에 찬 주머니 속에서 옥을 꺼냈다. 천일창 왕자의 눈이 번쩍 빛났다.

“아니, 이것은….”

“왕자 나으리께 선물로 드리겠나이다. 지금 농군들은 몹시 배고파할 것이니, 서둘러 음식을 갖다 먹이게 해주소서!”

“알았다. 이 소를 잡아먹는 날에는 내게 혼날 줄 알거라.”

천일창 왕자는 눈부시게 빛나는 붉은 알을 왕자궁으로 가져갔다. 자기방에 들어선 그 순간이었다. 이게 웬일인가, 알은 대뜸 아름다운 아가씨로 변신하는 것이었다. 여신 아카루히메(あかるひめ)의 탄생이다.

“오호! 어여쁜 당신.”

천일창 왕자는 저도 모르게 낭자를 덥석 껴안았다. 순식간에 둘은 부부가 되었다. 행복한 날이 이어졌다. 왕자비는 정성껏 음식을 만들어 천일창 왕자에게 바쳤다. 맛난 것을 먹으며 즐거워했던 왕자가 어느 날 음식투정을 하기 시작했다. 천일창 왕자는 요리를 젓가락으로 이리저리 쑤시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날마다 버릇처럼 음식 투정을 하는 바람에 아카루히메는 마침내 발끈했다.

“모름지기 저는 당신 아내가 될 여자가 아니었어요. 제 고향으로 돌아가겠어요!”

그녀는 몰래 짐을 싸들더니 작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버렸다. 뒤늦게야 아카루히메가 도망친 것을 알게 된 천일창 왕자는 당황하여 곧 뒤쫓았다. 아카루히메가 돌아간 곳은 왜나라 난바(なんば, 난파진)의 히메코소신사라는 사당이었다.’

현재도 오사카 히가시나리구의 히메코소신사에서는 이 아카루히메 신주를 제신으로 받들어 제사를 모시고 있다.

저명한 신화학자 미시나 아키히데(三品彰英, 1902∼1971) 도시샤(同志社)대 사학과 교수는 “물가의 여자가 햇빛을 음부로 빨아들여 붉은 옥을 낳았다는 이야기는 일광감정형(日光感情型)과 난생형(卵生型) 설화 요소가 함께 엮어진 것으로 이런 것들은 둘 다 대륙계 또는 조선계(朝鮮系) 설화의 요소들이다. 천일창 왕자와 결혼한 뒤 왕자의 곁에서 도망쳐 온 아카루히메 여신은 본래 무녀(무당)적인 여성이었다”(‘日鮮神話傳說の硏究’ 平凡社, 1972)고 지적했다. 일본신화의 원류가 신라 등 한반도 무속이란 사실을 명백히 한 지적이다.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나라 땅 사쿠라이시에 신라神 모신 사당이…

<23>신라 대국주신 모신 대신신사


나라(奈良) 땅 사쿠라이시(櫻井市)의 사쿠라이역 인근 ‘미와초’에는 대신신사(大神神社·오미와신사)가 우뚝 서 있다. 이 사당에서 모시는 신주는 신라 계열의 신 ‘대국주신(大國主神)’. 대신신사는 나라 지방에서 규모가 가장 큰 사당이다. ‘대국주신’은 이름이 ‘대물주신(大物主神)’ 등 일곱 가지나 되는 다양한 명칭을 가진 신(靑木周平 교수 외 ‘日本の神の事典’ 1997)이다. 신라신 대국주신의 신체는 이 대신신사의 뒷산인 ‘미와산’(三輪山 표고 467m)이라는 산 그 자체라고 한다. ‘미와산’ 그 산 전체를 대국주신의 몸뚱이로 삼고 제사 지내는 것이다(久米邦武·1839∼1931). 나라 땅의 미와산이 신산(神山)이 된 발자취는 일본 왕실 편찬 역사책 ‘일본서기’(720)에 상세히 기록돼 있다. 제10대 스진 천황(崇神·BC 97∼30·숭신 천황)이 꿈에 신라 신 대국주신을 만나게 된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숭신 천왕 5년 나라 안에는 전염병이 많이 돌아 백성 중 사망자가 반 이상에 이를 지경이었다. 왕 6년에는 백성 중에 떠나가는 자, 혹은 반역하는 자까지 생겨서 덕으로 다스리려고 했으나 어려웠다. 그래서 천황은 아침저녁마다 천지신명에게 기도드렸다. 신점(神占)도 쳤다. 이때 신의 말씀이 ‘백습희명(百襲姬命·모모소히메노미코토)’을 통해 내려졌다.

“어째서 천황은 나라를 다스리지 못하는 것을 걱정하고 있느냐? 만약에 그대가 나를 공경하며 나에게 제사를 지내 준다면 어김없이 자연스럽게 잘 다스려지게 될 것이로다.”

◇신화에 나오는 대국주신의 뱀이 산다는 ‘뱀신의 삼나무 고목’·巳の神衫). 대신신사 경내 한가운데 위치한다.


천황이 물었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어느 신이십니까?”

“나로 말하자면
야마토 지역 경내에 살고 있는 신이다. 내 이름은 대물주신(대국주신)이로다. 만약에 그대가 내 아들 대전전근자(大田田根子·오타타네코: 대국주신이 이쿠타마요리히메와 남몰래 정을 통해서 낳은 아들)를 시켜서 나에게 제사를 지내준다면 즉시 나라가 평정될 것이로다.”

천황은 기뻐했다. 즉시 천하에 포고령을 내려서 대국주신의 제주가 될 대전전근자의 행방을 수소문한 끝에 ‘스에무라’에서 대전전근자를 찾아냈다. 천황은 몸소 그 고장에 거동하여 왕족과 신하들을 거느리고 대전전근자에게 직접 물었다.

“너는 대체 누구의 자식이냐?”

“아버지는 대국주신이며 어머니는 이쿠타마요리히메라고 합니다”

숭신천황은 “아아, 과인은 틀림없이 번영할 것이로다”라며 기뻐했다.

대전전근자를 제주로 삼아 대국주신에 제사 지낼 준비가 진행되면서부터 고장마다 질병은 사라지기 시작했고, 나라 안은 진정됐다. 오곡은 풍성하게 여물었다. 12월20일 천황은 대전전근자로 하여금 대국주신을 제사 드리게 했다. 대국주신을 제사 드린 곳은 나라땅 미와산 기슭에 마련한 신전, 즉 지금의 ‘대신신사’ 터전이다.

◇‘이즈모대사’에서 대국주신 신주의 위폐가 그곳에서 바다 건너 서쪽(고국 신라 땅)을 향하고 있다는 설명판.


대국주신의 신체라는 미와산에 담긴 신화도 주목된다. “어여쁘고 단정한 ‘이쿠타마요리히메’에게 남의 눈을 피해 남자가 밤에만 찾아왔다. 부모는 딸의 배가 부른 것을 눈치채고 “너는 어떻게 혼자서 아기를 가졌느냐?”고 묻자, 그녀는 “매일 밤에만 찾아오는 이름 모를 사람과 함께 지내다가…”라고 했다. 부모는 적잖이 당황하더니 그 젊은이의 신원을 알아내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붉은 흙을 네 방 바닥에 뿌리고 삼실을 바늘에 꿰어 그 사람의 옷에다 몰래 꽂아 두어라”고 했다. 그녀는 부모가 가르쳐준 대로 했다. 남자가 돌아간 이튿날 아침에 보니, 삼실이 문고리 구멍을 통해서 밖으로 나갔다. 청년은 뱀이었다. 삼실을 따라갔더니, 나라의 미와산에 이르자 그곳 신을 모시는 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즉 신이 뱀으로 변신하여 매일 밤 문고리 구멍으로 그녀의 방에 찾아들었던 것. 이쿠타마요리히메는 아들을 낳았다. 그 아들은 이름이 ‘대전전근자(오오타타네코)’이고, 아버지인 신은 ‘대국주신’이었다.

우리 ‘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후백제왕 ‘견훤’의 탄생 설화도 이것과 유사하다. 광주 땅 북촌에 살던 어여쁜 아가씨가 임신하자, 아버지는 “밤마다 네게 찾아오는 남자의 자줏빛 옷에다 기다란 실을 바늘에 꿰어 몰래 꽂도록 해라”고 말했다. 아침에 실을 따라 북쪽 담 밑에 나가 보니, 바늘이 큰 지렁이의 허리에 꽂혀 있었다. 아가씨가 낳은 사내아이가 견훤이다.

◇미와산이 보이는 대신신사 어귀의 ‘미와명신(三輪明神)’의 석등.


숭신 천황은 신라 계열의 왕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숭신 천황의 왕자가 뒷날의 제10대 ‘수인(스이닌) 천황이며, 수인 천황 당시 신라의 천일창 왕자가 신라로부터 일본 왕가 최초의 ‘삼신기(三神器)’와 ‘곰의 신리’(히모로기·신의 제단)를 신라로부터 가지고 왔기 때문이다(22회 연재 참조). 와세다대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裕) 교수는 천일창 왕자가 수인 왕조 때 칼 등 삼신기를 가지고 일본으로 건너온 데 대해 “칼은 일찍이 금속기 문화가 있었던 옛날 귀화인계의 대장간 기술민 집단, 이를테면 천일창 전설에 나타나는 것과 같은 신라계 귀화인들의 신보(神寶)였다고 생각한다. 옥과 거울과 칼이라는 신보를 천황이 갖추어 갖는 데서 비로소 주권의 표상으로서 천황가의 ‘삼종의 신기’가 성립되기에 이르렀다”(‘天皇家の秘密’ 山手書房, 1977)고 나라 지방에서 등장한 초기 왜 왕실의 신라인 지배의 배경을 지적했다.

“대국주신은 소잔오존(素盞烏尊·스사노오노미코토)의 아들 신 혹은 5세신 내지 6세신으로 알려지고 있다”(가도가와판 ‘日本史辭典’ 1976)는 기록도 주목된다. 도쿄대 사학과 구메 구니다케 교수는 “소잔오존(스사노오노미코토)은 하늘나라(高天原)에서 신라 땅
우두산(牛頭山)으로 내려간 신라신으로서, 배를 만들어 바다 넘어 일본 이즈모(出雲) 땅으로 건너왔다”(‘神道は祭天の古俗’ 1891)는 논문을 발표해 교수직에서 추방당했다(사키사카 이쓰로 ‘嵐のなかの百年―學問彈壓小史’ 1970). “대국주신은 바다에 빛을 비추며 건너온 신”(安萬呂 편저 ‘古事記’ 712)이라고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고대 왕실 역사에서도 전하고 있듯이 대국주신은 신라에서 바다를 건너온 신이다. 대국주신은 이즈모 지방에서 활약하다 나라 땅으로 옮아간 고대 신이다. 이즈모의 이름난 큰 사당인 이즈모대사(出雲大社)에도 그의 신주가 모셔져 있다. 마쓰마에 다케시(松前健) 교수는 “대전전근자의 직계 후손으로 대신신사의 궁사(宮司)를 세습해오는 오미와(大神)씨의 가문은 본래 한반도에서 건너온 도래인이거나 한국에 연고가 깊으며, 5세기 이후에 신산(神山) 미와산의 제사권(祭祀權)을 장악했다고 본다”(松前健 ‘出雲神話’ 講談社, 1976)고 지적했다.

◇대국주신의 동상(왼쪽), 대국주신의 신주 모신 ‘청명전’.


일본의 ‘나라(奈良, なら)’라는 땅 이름을 처음으로 만든 사람도 ‘야마토’의 지배자 신라인들이다. 일찍이 일본 학자들도 문헌을 통해 시인하는 사실이다. 1900년 일본의 역사 지리학자 요시다 도고(吉田東伍·1864∼1918) 박사는 자신의 저서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나라(奈良)는 국가라는 뜻이다. ‘나라’는 야마토 지방의 옛날 땅이름이며,
상고시대에 이 고장을 점령한 한국 출신 이즈모족의 땅 이름이라고 생각한다(‘大日本地名辭書’). 요시다 도고 박사뿐이 아니다. 일본의 이름난 고어학자였던 마쓰오카 시즈오(松岡靜雄) 교수도 ‘고어대사전’(1937)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라(ナラ)는 한국어 ‘나라’라는 말에 국가라는 뜻이 있으므로, 상고시대에 이 지방을 점거한 자가 붙인 이름일 것이다.” 마쓰오카 시즈오 교수는 일본어 ‘ナラ’가 한국어의 ‘나라’라고 애써 한글로까지 그의 ‘일본 옛말 큰사전’에 써넣었다.

동해를 건너 이즈모로 진출한 신라인 지배자들은 계속 남하하여, 멀리 나라 땅을 점거하고 나라를 세웠던 것이다. 한자어의 ‘내량(奈良)’을 일본어 발음의 이두식으로 표기한 것이 ‘나라’이다. 신라 시조
박혁거세 탄생지 나정(蘿井)의 옛 이름이 나을(奈乙)이었다는 것도 참고할 만하다. 나을은 제21대왕 소지 마립간이 박혁거세의 신궁(487)을 세운 성지다. 이 성지는 한일 양국을 통틀어 최초의 신궁(큰 사당)이기도 하다.

나라로 명명된 시기는 2세기 전후로 추정된다. 일본의 실질적인 초대 왕은 3세기 전후에 통치한 신라인 숭신 천황으로 본다. 숭신천황이 신라인이란 것은 필자가 이미 ‘
일본문화사’(서문당 1999)에서 밝힌 바 있다. 오사카시립대 사학과의 나오키 고지로(直木孝次郞) 교수는 “제1대 진무 천황부터 제9대 가이카 천황까지는 조작된 가공적인 천황들이다”(‘日本神話古代國家’ 1993)라고 단정했다. 그러므로 제10대 숭신천황이 초대 왜왕이다.

와세다대 사학과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1873∼1961) 교수도 일찍이 “9명의 조작된 왕들이다”(‘古事記及日本書紀の硏究’ 1924 초판)라고 지적했다. 도쿄대 오바야시 다료(大林太良) 교수는 “숭신은 처음으로 인간이 지배하는 국가를 개시한 왕이며, 대전전근자를 통해 오미와산의 대국주신을 모신 최초의 왕이다”(‘日本神話の構造’ 1987)라고 결론지었다.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 속의 한류를 찾아서]<24>日 천태종 총본산 히에이산의 엔랴쿠지 사찰

신라인의 후손 '전교대사' 최징이 개창
가족묘 고분·도요지에도 신라 흔적 뚜렷


히에이산(848m)은 일본 고대 왕도였던 교토시 동북쪽으로 솟구친 성산(聖山)이다. 이 산에 올라서서 동쪽을 바라보면 바다처럼 펼쳐지는 ‘비와코’라는 일본 최대 호수(면적 672.4㎢)가 시원스럽게 전개된다. 이런 경승지의 산 정상에 자리 잡은 거대한 가람이 명찰 ‘엔랴쿠지(延曆寺)’. 일본 천태종 총본산인 이 사찰은 전교대사(傳敎大師) 최징(最澄·사이초 767∼822)이 처음으로 산 위 한 귀퉁이에다 움집인 암자를 지으면서 창설됐다.

전교대사 최징은 신라인 후손이다. 그는 히에이산 동쪽 산기슭 마을에서 신라인 오토모(大友) 가문 ‘미쓰노오비토 모모에’(三津首百枝 8세기)의 아들로 태어났다. 최징의 속명은 ‘미쓰노오비토 고야’(三津首廣野). 오우미 땅 ‘사카모토(坂本)’에 자리 잡고 있는 지금의 ‘쇼겐지(生源寺)’라는 사찰 터전이 그의 생가다. 이 지역은 신라인 호족 집단 오토모 가문의 오랜 역사의 본고장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신라인 “오토모 가문에서는 고대로부터 이 고장에서 신라명신(新羅明神)의 신주를 모신 사당을 세우고 대대로 제사를 받들어 왔다”(太政官牒 ‘天台座主記’ 866)는 것. 이러한 발자취가 기록된 866년(정관 8) 7월에는 이미 44년 전에 세상을 떠난 승려 최징에게 세이와천황(858∼876 재위)으로부터 ‘전교대사’의 시호가 내려졌다.

◇근본중당.


신라인 전교대사 최징이 개창한 엔랴쿠지 입구로 들어서면 나지막한 언덕길을 따라서 최징의 성지로 이름난 법당인 ‘근본중당’(根本中堂·일본 국보 건조물)으로 가게 된다. 이 길가에는 천태종을 선전하는 그림 간판(‘조사 어행적 회간판’)들이 줄이어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쇼겐지’에서 탄생하는 그림을 보면 그 밑쪽에 최징의 신분을 중국인이라고 쓴 설명문이 있다. “전교대사 최징은 후한(後漢) 효헌제(孝獻帝)의 후손으로서 일본에 귀화한 ‘미쓰노오비토’(三津首) 일족이다”라는 주장이다.

태정관첩 ‘천태좌주기’에 오토모 가문이 신라인으로 명시되어 있는데 언제부터 신라인 ‘미쓰노오비토’(삼진수) 가문이 중국인으로 뒤바뀐 것일까. 문헌을 조사해보니, 9세기 초에 일승충(一乘忠)이 썼다는 ‘에이산대사전’(叡山大師傳)을 18세기 이후에 필사한 ‘에이산대사전’에서 최징을 중국인 후손으로 쓰고 있다. 일승충이 처음으로 전교대사 최징에 관해 기록했을 때는 모름지기 스님을 신라인으로 썼을 것 같다. 태정관첩 ‘천태좌주기’는 9세기 후반인 서기 866년 세이와 천황이 최징 스님에게 전교대사의 시호를 내렸을 당시에 쓰인 관보(官報)이므로 이 고문서 이상 더 정확할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후세에 ‘에이산대사전’을 필사하던 당시에 역사 왜곡이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왜곡된 대목은 다음과 같다.

“히에이산 동쪽 기슭의 사카모토 땅에는 후한의 효헌제 자손으로서 일본에 귀화한 미쓰노오비토 일족이 번영해 왔다. 그 당시인 ‘진고게이운 원년’(서기 767) 8월 18일의 일이다. 사카모토 땅에는 하늘에서 연꽃잎이 떨어져 내리는 축복 된 징조가 나타났고, 때마침 미쓰노오비토 모모에의 집에서는 옥 같은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뒷날 일본 천태종 히에이산의 개조가 된 사이초 성인이었다.”

◇전교대사 최징의 석조좌상(왼쪽), 고대 신라인들의 ‘백혈(百穴)고분군’.


‘일본서기’(720)에 보면 “오토모노누시(大友主)는 미와노키미(三輪君)가 조상”(스이닌 3년조)이라고 한다. 여기서 가리키는 ‘미와노키미’는 신라신인 대국주신이다. 즉 전교대사 최징은 신라 계열의 후손인 셈이다.

근세며 심지어 현대 일본에 와서조차 고대 일본에서 눈부시게 활약한 한국인들이 예외 없이 중국인으로 뒤바뀌었다. 일본 왕실 역사책 ‘고사기’며 ‘일본서기’에서 ‘백제인 왕인’으로 기록된 왕인 박사를 고마자와(駒澤)대학 와타나베 미쓰오(渡邊三男 1908∼) 교수는 “왕인은 한(漢) 고황제(高皇帝)의 후손”(‘日本の苗字’ 1965)이라고 쓰고,
아스카 시대(592∼710) 왕실 재무장관이었던 신라인 진하승(秦河勝 6∼7세기)을 가리켜 “진나라 시황제의 후손”이라고도 했다. “진나라 시황제의 성씨는 영씨(瀛氏)”(司馬遷 기원전 145∼68 ‘史記’)라고 했으니 진하승이 진시황제 후손이라면 영씨 성이어야 하지 않을까.

현대 사학계에서 전교대사 최징이 신라인이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입증한 것은 도쿄대 사학과의 이노우에 미쓰사타(井上光貞 1917∼1983) 교수. 이노우에 교수는 고대 일본 고승들은 거의 한반도 출신임을 고증하였다. 후학을 위해 여기 굳이 함께 거명해 둔다. “고승들은 조선인 출신으로서 도자(道慈)를 비롯하여 지광(智光) 경준(慶俊) 근조(勤操) 도소(道昭) 의연(義淵) 행기(行基) 양변(良弁) 자훈(慈訓) 호명(護命) 행표(行表) 최징(最澄) 원진(圓珍) 등이다”(‘王仁の後裔氏族と佛敎’ 1943). 이 논문은 이노우에 교수의 도쿄대 사학과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이다. 이 논문에서 왕인 박사는 완벽한 백제인으로 규명돼 있다.

◇전교대사 최징이 생가 ‘쇼겐지’에서 탄생하는 그림(‘조사어행적회간판’).


지금부터 1240년 전인 8세기 후반, 아름답기 그지없는 비와코 호수가의 신라인 호족 오토모 가문의 큰 산마을 사카모토에서 옥동자가 태어난 발자취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전교대사의 아비는 슬하에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산에 올라가서 아들이 태어나기를 기도하게 되었다. 히에이산 왼쪽 기슭인 사당(神宮) 오른쪽에 이르자 홀연히 그윽한 향기가 일대로 번지기 시작했다. 향기의 근원을 찾아내기 위하여 그곳에다 초가집 한 채를 세웠다. 그리고는 7일 동안 모든 죄를 뉘우쳐 참회하려고 기도를 시작했더니 4일째 되던 날 밤 태몽을 꾸고 아들을 얻게 되었다”(‘에이산대사전’).

이 전기에서 사당이란 히에이산 아래 규모가 거대한 ‘히요시대사(日吉大社)’이다. 이 사당의 제신 대국주신이 다름 아닌 ‘신라명신’이다. 도쿄대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는 “히요시대사에서는 미와산 대국주신의 신주를 이곳으로 모셔 왔다”(‘국보중요문화재안내’ 1963)고 밝혔다. 미와산 신산의 대국주신은 여러 곳에서 봉안돼 있으며, 오미와신사(나라 사쿠라이시)에서는 대국주신의 신주를 현재 ‘미와명신’으로도 호칭하고 있다. 히에이산 서쪽 산기슭에 지금도 서 있는 ‘히요시대사’에는 서본궁 본전(일본 국보)과 동본궁 본전(〃) 등 사당 두 채가 중심축을 이루고 있다. 서본궁에 모신 신주는 역시 ‘이즈모대사’에서처럼 서쪽(바다 건너 모국 신라)을 바탕으로 하는 신라명신 대국주신을 봉안하고 있고, 동신궁에도 신라신 대산작신(大山昨神)을 모시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 이웃으로는 ‘신라선신당’(新羅善神堂·온조지 사찰 경내)도 현재까지 건재하고 있다.

이 인근이 고대 신라인들의 큰 터전이라고 하는 것을 고증하는 것이 이 지역의 횡혈식(橫穴式) 고분인 ‘백혈고분군(百穴古墳群)’이다. 한국 고대 지석묘처럼 넓적한 바위로 지붕(돔형식)을 얹고 그 밑에 바위로 양 기둥을 세워 현실에 이르는 선도(통로)까지 갖춘 격식 있는 신라인들의 가족묘(2∼3명 매장) 고분군으로 우리를 주목하게 한다.

◇신라인 고승 영충대사가 세운 숭복사 터전이 주춧돌들과 함께 남아 있다.


교토대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가와치(구다라스)의 스에무라(陶邑)와 그 주변 지역은 주목할 만한 스에키 생산지였다. 도래인계 스에키 생산자 집단의 경영은 가와치에서 크게 눈에 띈다”(‘倭國の世界’ 1976)고 지적했다. 또한 와세다대 사학과 미즈노 유(水野裕) 교수도 “도기, 즉 스에키는 신라구이(新羅燒)를 말하는 것으로서 마쓰에(松江)시의 중간 바다에 면한 지역 일대에서 수많은 요지(窯址)가 발견됐으며, 텐표(天平 729∼749) 시대 이전부터 스에키 제작 직업부가 존재하였다는 것이 문헌적으로나 고고학적으로도 일치하고 있다”(‘出雲のなかの新羅文化’ 1978)고 스에키가 신라인들의 소산임을 강조했듯, 히에이산 동쪽 기슭 일대가 고분(古墳)시대 신라인들의 거점이었다는 사실이 ‘백혈고분군’에 의해 고고학적으로 입증되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백혈고분군’에서 출토된 스에키 등 오지그릇류와 제사용 불을 지피는 소형 아궁이며 가마솥과 냄비 등도 다수 발굴된 점이다. ‘스에키’는 쇠기(鐵器)라고 하는 한국어에서 생긴 말이다.

더구나 이 고분 지대로부터 불과 200m 정도 거리의 언덕 위쪽에는 서기 667년에 창건했던 ‘소후쿠지 터전(崇福寺趾)’이 주춧돌들과 함께 남아 있다. 이 절터는 신라인 고승 영충대승도(永忠大僧都 8∼9세기)가 신라에서 건너와 있던 절터라는 것도 이 지역의 신라인들과의 깊은 연고를 살피게 하고 있다. 일본 역사에 의하면, “사가 천황(嵯峨天皇 809∼823)은 오우미(近江)의 가라사키(韓崎)에 거동하여 소후쿠지(숭복사)에 들렀을 때, 대승도 영충(永忠) 스님이 차를 달여서 대접했다”(‘類聚國史’ 892)는 기록이 있다. 이처럼 전교대사 최징 탄생지는 고대 신라인들의 일대 거점이었음을 문헌학뿐 아니라 고고학적인 고분군과 각종 유물들에서도 잘 살필 수 있다.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25)일본 천태종 총본산 엔랴쿠지 사찰의 적산궁

'신라明神' 받드는 사당… '자각대사' 원인이 세워

 


입적 2년째에 ‘자각대사’ 시호를 받은 원인(慈覺大師 圓仁·엔닌 794∼864)은 일본 성산(聖山) 히에이산(848m)에 있는 엔랴쿠지 사찰에 15세 때 동자승으로 들어가 고승이 됐다. 먼 훗날 일본 천태종 총본산인 엔랴쿠지의 ‘제3세 천태좌주’(第三世 天台座主)로 가람을 지배한 승직자다. 스승은 엔랴쿠지 사찰을 세운 신라인 전교대사 최징(767∼822). 그 제자로 입문한 것은 808년 무렵이다.

원인은 시모노국(下野國) 쓰가군(都賀郡)의 신라인 호족 니부(壬生) 가문에서 태어났다. 신라 계열 왜의 실질적인 초대왕 숭신천황(스진·3C 전후의 나라 지방 지배자)과 핏줄이 이어진다. 하루키 가게야마 박사(교토국립박물관)는 “그의 선조는 숭신천황의 제1왕자와 연결되는 지방의 명문가였다”(‘比叡山その宗敎と歷史’ 1970)고 말했다.

히에이산 입산에 앞서 원인은 9세 때 고향 쓰가땅의 다이지지(大慈寺) 사찰에 들어가 중국인 광지(廣智)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다. 다이지지 사찰은 본래 백제인 고승 행기보살(行基菩薩·뒷날 왜왕실 최초의 대승정이 됨, 668∼749)이 세웠던 48곳의 사찰 중 한 곳이다. 원인의 ‘일기’에 따르면 “어느 날 밤 꿈에 ‘위엄 있는 고승’을 만났다. 이 꿈에 나타난 고승을 히에이산에서 최징의 얼굴을 처음 대하는 순간 확인했다”고 한다.

히에이산에 온 원인 소년은 당시 42세인 최징 스님의 직제자가 되어 주로 지관(止觀)의 법문(法文)을 배우며 자그마치 20년 동안이나 학생생활을 했다. ‘지관’이란 천태종에서 헛된 망상을 버리고 고요한 속에서 밝은 지혜로 천지 간의 온갖 법도를 관조하는 일을 가리킨다. 35세 때 잠시 산에서 내려와 고향땅 쪽으로 돌아다니며 포교생활도 했으나 곧 다시 히에이산으로 돌아와 산 북쪽 후미진 곳에 틀어박혀 깊은 명상 속에 참선 고행을 시작했다고 그의 전기인 ‘자각대사전’(9세기)에 적혀 있다. 원인 스님의 고행을 기록한 ‘예악요기’(叡岳要記·10세기)에 따르면 그는 히에이산 깊은 산속인 요가와(橫川)에서 죽음에 처할 만큼 큰 고통을 견뎌내며 3년 동안 참선을 행했다고 한다.

◇엔랴쿠지 사찰 근본중당 앞 언덕의 신라 해상왕 ‘장보고 기념비’(왼쪽), 요가와중당 내의 불상.


“원인은 커다란 고목인 삼나무 구멍 속에 자리를 잡고 들어앉아 3년 동안 칩거했다. 밤낮없이 ‘법화경’을 외워 그 묘리를 깨달으며 참선하는 가운데 건강이 극도로 악화했다. 마침내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고통 속에 생명마저 위급하게 되었다.”

‘자각대사전’은 이런 3년 고행 끝에 꿈을 꾸니 하늘에서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독특한 맛이 나는 ‘불사의 묘약’이 내려왔다고 전한다. 그것을 꿈결에 받아먹으니 이튿날부터 곧장 건강은 회복되고 시력마저 되찾게 됐다. 이에 힘을 얻어 초필(草筆)을 만들어 ‘법화경’ 8권 6만8000 글자를 모두 써냈다고 한다. 훗날 그 제자들은 원인이 쓴 ‘법화경’을 ‘근본여법경’이라 부르며 받들었다. 오늘의 히에이산 엔랴쿠지 사찰 북쪽의 중심 가람인 ‘요가와중당’(근본관음당)은 ‘근본여법경’을 본존(本尊)으로 받드는 터전이다.

요가와중당 맞은편 언덕에는 ‘신라명신’(新羅明神)의 신령을 받드는 사당인 ‘적산궁’(赤山宮)이 서 있다. 적산궁을 세운 이는 다름아닌 원인이다. 원인이 적산궁을 건립한 것은 10년 동안 당나라에서 고행하며 구법순례(求法巡禮)를 마치고 돌아온 직후인 847년. ‘요가와중당’의 경내 안내문은 다음과 같이 전한다.

“자각대사 원인 스님이 왕의 칙허를 받아 당나라로 유학을 갔을 당시 중국 적산(赤山)에서 신라명신을 받들기로 했다. 그런 공덕에 의해 10년간의 수행을 무사하게 마치고 귀국한 후에 이곳에 사당을 세우게 됐다. 그 이후 전국 사찰에서는 천태종을 전승하는 대사(大師)로 자각대사를 우러르게 됐고 천태종의 불법수호신으로 신라명신을 제사모시게 됐다. 재해를 막고 장수를 누리도록 이끌어 주시는 신으로서 ‘적산명신’이라 받들어 부르는데 이 신은 ‘
지장보살’의 화신이기도 하다.”

신라명신의 뿌리는 어디에 있는가. 신라명신은 본래 원인의 스승인 최징을 수호한 신이다. 그 발자취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최징은 803년 4월16일 간무왕(781∼806 재위)의 칙허를 받아 당나라 유학길에 오르게 됐다. 그가 구다라스(백제주·지금의
오사카부)의 ‘나니와쓰’(난파진)에서 배를 타고 찾아간 곳은 당나라가 아닌 규슈의 신라신 터전인 ‘가와라다케’(香春岳)의 가와라신사였다.

◇요가와중당 경내 ‘원인’(圓仁) 스님의 모습 그림과 설명문.


최징 스님은 “이곳에서 1년3개월 동안 ‘신라명신’을 모시다 804년 7월6일 신라배를 얻어타고 당나라로 떠나갔다”(‘叡山大師傳’)고 기록에 전해진다. 그 무렵 일본의 학문승이나 사절은 항해의 선진국이었던 신라 배에 의존해 당나라를 오갔다는 것이 규슈대 불교사학자 다무라 엔쵸(田村圓澄) 교수의 연구 결과다.

“…일본으로 귀국할 때 신라를 경유한 것이 틀림없다. 일정 기간 신라에 머물렀을 것이며 신라의 왕도 경주에 체류했을 것이다. 이 때문에 신라 불교가 일본으로 전해지는 길이 열렸다.”(‘古代日本佛敎と朝鮮佛敎’ 1985)

최징은 당나라 유학을 무사히 마친 후 9년째인 814년 다시금 신라신의 터전 가와라다케로 찾아가 ‘가와라신궁사’(香春神宮寺)라는 사당 겸 사찰을 창건하고 신라명신을 모셨다. 고대 일본에서 신령님과 부처님을 함께 합사하는 이른바 ‘신불습합’(神佛習合)이라는 왕실제도를 따르는 것이 바로 ‘신궁사’다. 신과 불은 일심동체라는 종교관에서였다.

원인도 당나라로 가면서 스승이 세운 ‘가와라신궁사’에 참배했고, 이때부터 스승이 모시던 신라명신을 숭모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원인이 10년 당 유학 경험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으로 유명한 것이 ‘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다. 현재 교토국립박물관에 수장된 ‘입당구법순례행기’의 고본에 의하면, 원인은 836년 5월14일 구다라스의 나니와쓰 나루터를 떠나 가와라신궁사로 향했다. 7월2일 신궁사를 떠나 당나라로 가려 했으나 폭풍 때문에 눌러앉았다. 결국 당나라 항로에 오른 것은 2년 후인 838년 6월13일이다.

◇‘요가와중당’ 언덕 위로 보이는 ‘신라명신’의 ‘적산궁’(赤山宮) 사당.


양자강 하구에 당도한 것은 838년 7월. 그러나 중국 관헌들은 목적지인 절강성 천태산으로 가는 것을 허가하지 않고 일본으로 추방했다. 원인 일행은 11개월을 허송하다 신라인 승려이자 일본어 통역인 도현(道玄) 스님과 신라 사람들, 특히 해상왕 장보고(출생년 미상∼846)의 도움으로 839년 6월7일 산둥반도의 동쪽 기슭에 당도해 신라 사찰에 가서 보호받게 됐다. 원인은 이 사찰을 ‘적산승원’(赤山僧院)으로 일컬었다. 원인 일행은 산둥성 신라방 사회의 따사로운 보호 속에 신라 승원에서 대접받으며 가을과 겨울을 조용하게 보냈다.

적산승원의 신라 스님들은 원인에게 멀고 가기 힘든 남쪽의 천태산 대신에 그곳에서 가까운
산시성 동북쪽의 오대산으로 가도록 이끌어 주었다. 오대산도 성스러운 산으로서 천태산에 못지않은 불교 학문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원인은 권고를 따랐다. 840년 2월19일에 적산승원을 떠난 원인은 신라인 친구의 도움으로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중국 관청의 허가증도 받았다. 그 후 원인은 수업과 고행을 하며 당나라 순례를 마치고 다시금 신라 선박의 도움으로 847년 9월2일 중국 연안을 떠나 15일간의 항해 끝에 출발지였던 가와라신궁사로 일단 귀국했고, 848년 3월29일 왕도 헤이안경(지금의 교토시 히에이산)으로 귀환했다.

원인 연구로 저명한 미국 하버드대 교수였던 에드윈
라이샤워 박사는 “원인은 장보고를 몹시 존경하며 대사라고 존칭했다. 또 원인은 장보고가 적산승원을 창설한 데 대해 경의를 표했다. ‘보잘 것 없는 이 사람에게 너무나 큰 행운을 안겨주셨고 대사님의 서원에 의해 축복된 터전에 체재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밝힐 정도로 장보고의 은혜에 감사했다”(‘Ennin’s Travels in T’ang China’, 1955)고 지적했다. 엔랴쿠지 경내 문수루(文文殊菩薩堂) 옆에 서 있는 ‘청해진대사장보고비’(완도군 건립)는 유난히 참배자들의 눈길을 끈다.

당나라로 타고 간 선박에 대한 원인 일기의 기록도 주목된다. 신라신인 ‘스미요시대신’(住吉大神)의 신단을 모시고 무사 항해를 기원했다고 나와 있기 때문이다. 스미요시대신이란 최징의 생가 사카모토에 이웃한 ‘스미요시대사’(住吉大社)의 신주인 ‘신라명신’을 가리킨다.
 

[홍윤기의 역사기행 일본속의 한류를 찾아서](26)온조지 사찰의 신라선신당

원진스님이 신라明神 모시려 개창
일본 고대 명문가문들도 떠받들어

 


‘신라명신’(新羅明神)을 자신의 신주로 모신 히에이산 엔랴쿠지 가람 출신 고승은 모두 네 명이다. 전교대사 최징(傳敎大師 最澄·사이초 767∼822)과 그의 직제자인 자각대사 원인(慈覺大師 圓仁·엔닌 794∼864), 지증대사 원진(智證大師 圓珍·엔진 814∼891), 그리고 원삼대사 양원(元三大師 良源·료겐 912∼985) 스님이 그들이다. 모두 일본 땅의 신라인 후손들이다.

일본 교토시 동북쪽의 명산 히에이산(848m) 일대가 장기간에 걸쳐 신라에서 건너 온 수많은 신라인이 번창했던 대규모 지역이라는 것은 우리나라는 물론 일본에서도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신라로부터 동해를 건너 이 고장으로 이주해 온 고대 신라인들은 모국 터주신을 이 고장에 모셔다 제사 지내며 풍년과 부귀다복한 인생을 기원했다.

이 고장에서 주목받는 것은 히에이산 ‘엔랴쿠지’ 사찰 ‘요가와중당’ 경내의 ‘신라명신’을 신주로 모시고 제사 지내는 ‘적산궁’(연재 제25회)이다. 이 적산궁이 선 것은 지금부터 1159년 전인 848년. 신라 흥덕왕(826∼836 재위) 당시부터
신무왕(839 재위)과 문성왕(839∼857 재위) 대에 이르기까지 청해진 대사 장보고(출생년 미상∼846)가 서해를 주름잡으며 중국 산둥성신라방’ 지역에서 신라 스님들의 ‘적산선원’을 이끌어주면서, 이 선원에서 활발하게 신불(神佛)을 함께 공양하며 터전을 닦았다. 또한 자각대사 원인 스님도 최징 스님의 직제자로서 스승을 모범하여 히에이산에다 ‘적산궁’을 세워 직접 신라명신을 제사 지냈다.

이곳 ‘오우미’ 출신인 지증대사 원진 스님도 15세 때 히에이산에 올라 엔랴쿠지 좌주며 전교대사 최징의 직제자였던 신라인 의진(義眞·기신 781∼833) 스님 밑에서 수업했다. 원진은 신라인 와케(和氣) 문중(‘신찬성씨록’ 815)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도 신라인인 사에키(佐伯)다. 더구나 원진 스님의 모친은 일본의 대표적인 신라계 명승 홍법대사 공해(弘法大師 空海·구카이 774∼835)의 조카딸이기도 하다. 와세다대학 사학과 미사키 료슈(三崎良周) 교수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승전(僧傳)으로 평가한 ‘일본고승전요문초’(日本高僧傳要文抄, 1251년쯤)에 보면 “홍법대사 공해는 신라 신족(神族)”이라고 쓰여 있다. 그 밖에 여러 불교 전적에도 같은 내용이 담겨 있다.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원진 스님의 와케 가문은 신라계인 제11대 스이닌 천황 후손이기도 하다.

◇(사진 왼쪽)신라선신당의 사당 안에 모신 본존인 ‘신라명신’의 신상(神像, 일본 국보), 지증대사 원진 스님의 화장한 유골을 넣어 만든 목조좌상


일본에서 한국 고대 관계 사찰과 신사에 관한 연구로 권위 있는 이마이 게이이치(今井啓一) 교수는 “원진이 신라신 신령을 고대 일본 땅으로 모셔왔다”고 밝히면서 “신라신사(신라선신당, 필자주)에서는 지증대사 원진(엔진)이 당나라에 구도하러 갔다 돌아올 때 감득(感得)했다고 하는 ‘신라명신’을 제사 지내게 되었다”(‘歸化人と社寺’ 1974)고 지적했다. 이와 같은 내용은 온조지 가람의 고대 기사에도 담겨 있다. 즉, “신라선신당의 본존인 목조 ‘신라명신상’은 텐안 5년(天安, 서기 858년) 원진 스님이 당나라로부터 귀국하는 배 안에서 감득한 ‘신라신’이다. 원진 스님이 당나라에서 귀국하던 뱃길에 한 노옹이 선박 앞쪽인 이물에 나타나서 ‘그대의 교법을 지켜주겠도다’고 했다.

그 후 원진이 왕도로 입경하여 당나라로부터 가져온 경전들을 태정관(최고 관청)에 제출할 때, 노옹이 다시 나타나더니 원진 스님을 온조지로 인도해 주었고, 그 이후에도 온조지 가람 북쪽에 머물렀다. 원진은 서기 860년에 그곳에다 신당을 세우고 이 신을 제사지내게 됐다”(‘園城寺龍華會緣起’ 서기 1062년 편찬). 이에 대해
도쿄대학 오타 히로타로(太田博太郞) 교수도 “원진 스님은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다음, 히에이산 아래 오우미(지금의 오쓰시) 땅에다 온조지 사찰을 창건하면서 가람의 진수(鎭守) 수호신으로서 뱃길에서 만난 신라명신을 위해 신당을 세우고 제사 지내게 되었다”(‘국보·중요문화재 안내’ 1963)고 밝혔다.

원진 스님이 히에이산 엔랴쿠지 가람에서 수도하다가 왕실의 윤허를 받고 당나라 유학길에 오른 것은 서기 853년, 그의 나이 39세였다. 당시 원진은 원인 스님의 가르침을 받았고 원인 스님을 스승이자 핏줄을 나눈 골육처럼 존중하며 따르다 당나라로 떠났다. 그도 최징·원인 등 선배 학승들과 마찬가지로 신라 선박을 얻어 타고 유학길에 올랐고, 당나라를 왕래하는 과정에서 북큐슈의 신라신을 모신 가와라신궁사를 경유하며 신라 신도와 접했을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그는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오는 길에 신라신의 도움으로 무사히 귀국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그는 귀국한 뒷날 ‘신라명신’을 제사 지내기 위해 스스로 개창한 온조지(園城寺·현재 三井寺, ‘미이테라’로도 부르고 있음) 경내에 ‘신라선신당’을 건립했다.

◇온조지 정문(왼쪽), 1599년에 재건된 온조지 금당 전경(일본 국보)


그와 같은 사실은 이마이 게이이치 교수가 상세하게 논술하고 있다.

“오우미땅의 ‘신라선신당’은 오쓰시 벳쇼초(大津市別所町)에 위치하고 있다. 이 신사는 천태종 사문파(寺門派)의 총본산 온조지 경내 엔만인(園滿院) 옆의 산속 수정보 북동쪽에 위치한다. 신라선신당은 온조지 사찰 오사진수(五社鎭守)의 하나로서 북원(北院)에 속한다. 현재의 건물은 지붕을 노송나무(편백) 껍질로 이은 국보 건물이며 아시카가 다카우지(足利尊氏 1305∼1358·무로마치막부 초대 쇼군인 국가 최고 권력자 장군)가 신사 건물을 중수했다. 이 사당은 순수한 신사 건축물이다. 이 신사의 본존인 국보 신라명신의 신상(神像)은 산형(山形)의 관을 쓰고 갈색 도포를 입었으며 흰 수염을 드리운 노인의 용모이다. 이 분이 소잔오존(素盞烏尊·스사노오노미코토, 일본의 개국신이 된 신라신)이라고 한다.”

이마이 교수는 거침없이 신라선신당의 본존 신라신을 일본 신화(‘일본서기’)에서 신라 땅 ‘
우두산’(牛頭山) 지역으로부터 동해를 건너 ‘이즈모’(出雲)로 왔다는 신라신 소잔오존이라고 전했다. 물론 현대의 이마이 교수 외에도 도쿄대학 사학과 구메 구니다케(1839∼1931) 교수가 똑같은 주장을 펼치다 도쿄대학 교수직에서 해임됐다. 이른바 ‘황국신도’의 군국주의 일제가 한창 기세를 떨치며 학문의 자유를 유린하던 시절인 1892년의 일이다.

“무릇 ‘속고사담’(續古事談)에 보면 신라명신은 소잔오존이며, 오우미 지방은
문수보살의 터전이로다”(‘越前國名蹟考, 14세기쯤’)라고 하듯이 히에이산 엔랴쿠지 가람에서 문수보살을 신앙하는 것을 지적한다. 일본에서도 신라를 뒤따라서 신불(神佛)을 동등한 존재로, 사찰이며 신사에서 함께 모시고 제사 지낸 사실을 고증하고 있다. 와세다대학 야마모토 쓰토무(山本 勉) 교수는 “원진의 신라명신 감득은 신라 가문의 사찰로서 온조지를 창건한 오토모(大友)들이 신앙해오던 도래계의 신과 원진을 연결시켜준 전설로 보인다. 신라명신은 1052년에 ‘신라제’(新羅祭) 마쓰리(제사 축제)가 거행되면서부터 각종 기록이 빈번하게 나타난다”고 했다.

그런데 “신라명신은 온조지 사찰에서 오토모 가문에서만 모신 것은 아니고 대부호이자
야마토정권의 장경(재무부장관)을 지낸 진(秦·하타) 가문에서도 관여하고 있었다”(‘寺門傳記補錄’)고 사학자 오와 이와오(大和岩雄 1928∼)가 밝힌 바 있다. 교토와 오쓰 지방의 신라계 유력 가문에서는 서로 손을 맞잡고 함께 ‘신라명신’을 받들어 왔다는 것이다.

이마이 교수는 현재의 오쓰시 일대가 신라인들이 번창하던 지역이라고 했다.

“오우미땅 시가군(滋賀郡·오쓰시)은 현저하게 귀화인들이 번창하던 지역이었다. 온조지의 전신이었던 ‘오토모노스구리테라’(大友村主寺) 사찰이며 신라선신당 역시 온조지가 개창되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 와서 살고 있던 귀화인들이 숭배하던 외국신이며, 온조지가 서면서부터 사찰을 지켜주는 ‘옹호신’으로 받들어 모시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신라신사’로서 사당으로 모시고 있다.”

그런데 일본 고대 명문 무가(武家)인 ‘겐지’(源氏) 가문이 이곳 ‘신라명신’을 떠받들어왔다는 것에 주목하고 싶다. “겐지 가문의 명장 미나모토노 요리요시(源賴義 988∼1075)의 셋째 아들 미나모토노 요시미쓰(源義光 1045∼1127)는 20세에 신라선신당에 찾아와 신라명신 신주 앞에서 관례를 올리고, 이름도 ‘신라삼랑’(新羅三郞)으로 개명했다”(三省版 ‘人名辭典’ 1978). 이 발자취를 이마이 교수도 “요시미쓰가 신라명신 보전(寶殿) 앞에서 관례를 올림으로써 신라삼랑의광(新羅三郞義光)으로 이름붙인 것은 유명하다”고 지적했다.

이는 아마도 신라 제24대 진흥왕(534∼576 재위) 당시 원화(源花)의 뒤를 이은 화랑도(花郞徒)를 훈모하여 스스로 화랑도(花郞道)의 5계 등 무사 정신을 신라인 지역 오우미땅에서 도입한 것이 아닌지 향후 연구과제로 삼을 일이다.

왕실에 무공을 세워 고위 무장으로 장수한 그는 사후 신라선신당 바로 이웃에 스스로 묘지를 잡고 82세에 영면했다. 이마이 교수는 일본에서 ‘신라’를 표기하는 우리의 이두식 ‘만요가나’(萬葉假名)의 여러 가지 표기를 다음처럼 한자로 제시하고 있다. “신라를 나타내는 말은 白木, 志良岐, 志樂, 信樂, 設樂, 白國 등. 이처럼 신라를 훈(訓·새김) 글자로 나타내고 있는 ‘신라훈’(新羅訓) 지역들은 신라계 사람들과 연고가 있는 터전들이다.”

끝으로 밝힐 것이 있다. 고대 일본 왕실에서 천황이 직접 제사 지내는 11월23일 밤의 천황가 ‘신상제’(新嘗祭) 제사(‘延喜式’ 서기 927년에 성립된 왕실 법도) 때 모시는 3신은 원신(園神) 한 분과 한신(韓神) 두 분 등 모두 3신주를 받든다.
교토대학 사학과 우에다 마사아키(上田正昭) 교수는 “원신(園神)은 신라신이며 한신(韓神) 두 분은 백제신”(‘神樂の命脈’ 1969)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면 신라인 원진 스님이 신라명신을 모시면서 세운 온조지라는 사찰 명칭도 천황가가 제사지내는 신라신인 원신(園神)의 성터 가람을 상징하는 표현이 아닌가 싶다. 신라명신은 고대부터 지금까지 온조지 사찰을 지켜주시는 진수신(鎭守神)이기 때문이다.
한국외대 교수 senshyu@yahoo.co.kr
출처 : keiti
글쓴이 : 세발까마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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