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의 무위와 진선미의 지향하는 바 일체의 도를 깨달은 후에 쓰라.
그리움이나 천성만으로 글을 쓰면 너무 길거나 짧아진다.
한편 한편의 마지막 불꽃을 피워라.
최근 20년 동안 쓴 시를 모두 폐기하고 그 20년 후에 기억에 남는 시가 있으면
그것은 스스로 이루어질 것이다. 참된 시는 사람의 마음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시는 사후에 발표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다.
통관의 이치는 모든 훌륭한 소산의 근간이다.
시는 말의 사원이라 했다. 그대는 이 사원의 진정한 승려인가?
시는 지어지는 것이 아니라 비가 내려 내를 이루고 바다가 되 듯
스스로 이루어져 절로 흐르는 것이다.
창조는 천성이나 퇴고는 피를 말린다.
그리움은 시의 출발점이며 대상이나 실체의 문제가 아니라 자아의 문제이다.
너만의 목소리가 트인 후에 인간과 자연을 노래하라.
시는 죽음을 예비하고 넘어서는 과정이라 할 수 있어 삶과 죽음, 사물과 생물의 이치를 궁구한 후에 얻어진다.
천성의 발현은 연륜에 상관없이 예지와 직관, 지혜와 통찰 그리고 통관과 초집이 낳는 뜨거운 결정물이다.
시는 한 순간에 뜨겁게 얼어붙는다.
천성은 스스로 깨닫는다.
비천(非天)은 스스로 느끼고 깨닫지 못하여 상향을 꿈꾼다. 그것은 춘몽과 같은 것이다.
비천이 비천을 깨닫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여 그것은 스스로의 업보가 된다.
천성(天性)이 깨닫는 천성은 업이 된다. 그가 업을 이루지 못하면 외나무다리를 무사히 건너가는 일그러진 후회 또는 건너다 떨어지는 파멸의 외길을 가게 된다.
천성이 쓰는 시에는 종언이 없다. 그는 끝을 맺지 못한다. 다만 봉우리가 있을 뿐이다.
시에는 일류와 이류만이 있다. 이류는 첫째 천성의 게으름이나 자만 또는 과로나 과욕에서 비롯된다. 둘째 비천과 천성의 양성을 지닌 사람이 쓴 경우이다. 그는 극소수의 일류와 대다수의 이류를 낳는다.
자연은 모든 인간행위의 거울이자 어머니이다. 아들은 어머니의 낯과 마음을 쓰고 있다.
시는 자연의 일부이지 그것과 대등하거나 넘어설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시는 객자연의 상태를 매우 소박하게, 간명하게, 휘황하게, 또는 거룩하게 찬미하거나 묘파하거나 동일화한다. 그것은 총체적 지향성이다. 자연의 비를 피해 시의 우산을 쓰는 시인은 시인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밭을 갈 일이다.
진정한 시인은 예술가이자 철학자이자 종교가이며 또한 사업적 기질의 전화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모든 진선미의 결실은 노래이다. 노래하지 않는 진선미는 봉오리에서 꽃으로 개화하지 못한다. ‘모든 봉우리에서 넌 느끼리’라고 한 괴테의 말 중에서 봉우리가 아닌 모든 봉우리에 대해 답사를 하고 느끼고 깨쳐야 한다.
시는 누구도 무엇도 통치하지 않는다.
시는 성과 속의 두 반분을 통할한다.
시를 쓰기 전에 사물과 식물, 동물, 자연의 이치와 현상에 대해, 그리고 인간의 역사와 행위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궁구의 시간을 예비하라.
그것은 시를 늦추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발현을 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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