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과 악은 대립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의 심중에
온유하고 건실한 것과
안정적이면서 맹목적인 것과
강하면서 곧은 것과
강하되 비틀린 것의 가능한 여러 가지 조합의 덩어리를
한 칼에 '쩍' 소리가 날 정도로 쪼개어 생각하는 것이다.
불가분의 마음을 쪼개는 분리의식에서 선과 악의 개념이 생긴다.
순수한 선이나 순수한 악은 없다.
성선설이나 성악설은 사람의 성정을 선과 악으로 분단하려는 발상이다.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짓는 것은
선을 악으로부터 멀리 떼어내어 보호하고자 하는 의지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막상 우리의 내면을 평정한 상태에서 있는 그대로 들여다보면
선과 악은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덩어리다.
우리가 내심을 발로할 때,
선은 선으로 악은 악으로 있는 그대로,
선이 악에 가깝게 혹은 악이 선에 가깝게 드러날 수도 있다.
그런 현상이 생기는 것은
마음이 안정적인지의 여부에 달려 있다.
마음이 평정한 상태에서는
선이 선으로 악이 악으로 드러나는데 가감이 별로 없다.
그러나 마음이 동요할 때에는
그 반대로 선과 악이 교차발현될 가능성이 갑자기 증대된다.
왜냐하면 마음이 동요하면 할수록 선과 악이 제자리에 고정되지 않고
서로의 영역을 괘종시계의 추처럼 왔다갔다 하며 침범하기 때문이다.
이런 선과 악의 진자운동이
선의 영역과 악의 영역을 고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뇌가
선의 영역을 침범한 악을 선으로,
악의 영역을 침범한 선을 악으로 오인하는 현상을 낳는다.
서양종교에서 선의 영역의 무게중심은 악에 가까운 곳에 있다.
그래서 선과 악의 대립을 강조하는 경향이 강하고
거기에서 원죄의식이 생겨났다.
한편으로 동양종교에서 선의 영역의 무게중심은 악에서 먼 곳에 있다.
그래서 선과 악의 대립을 통한 악의 경계와 극복보다
선 자체를 수도를 통해 끝없이 지향하여 궁극적인 경지에 이르는 길을 추구한다.
전자와 후자 둘다 선을 구현하고 악을 경계한다는 점에서
인세를 보다 아름답게 변화시키려는 공동선의 목표가 있다.
사람은 일심하지 않으면
의혹에 휩싸이거나
우유부단하거나
지나치게 단호하거나
무조건적으로 맹목적일 수 있다.
또한 사람은
두루 상통하여
변덕스럽지 않으며
경건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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