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킴 작품방/수상록·에쎄이

지금 여기에서(From Here and Now)

imaginerNZ 2007. 11. 27. 05:15

 


True Story(Paul Dzik)
 

 

 

지금 여기에서(From Here and Now) 

-엘리엇 킴


"지금 여기에 잠겨라. 

과거나 미래의 행복에 잠기기 전에.

그러면 현재적 삶의 의미가 느껴지고 새로 돋아난 움처럼 싱싱해질 것이다.

현재는 시간의 새싹이다."

  

   과거에 맛보았던 실패의 쓴잔을 지금 여기에서 맛보거나, 아팠던 기억의 생채기를 열어 지금 여기에서 한없이 들여다보면서 현재를 잊어버릴 필요는 없다. 과거의 행복하고 즐거웠던 추억을 지금 여기에서 반추하는 것도 역시 그렇다. 지금 여기에서 과거의 행복을 반추하는 것은 행복을 회고하는 어느 정도 희석된 행복이다. 그것은 과거의 행복만으로 현재라는 하얀 바탕의 옷감을 염색하는 것이다.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과거에 있었던 환희에 찬 성취의 순간에 지금 마냥 잠기거나, 고난을 극복한 자신의 수기를 읽으며 현재를 메워버릴 필요는 없다. 이렇게 과거의 기억에 빠져드는 것은 현재를 살 수밖에 없는 사람이 생생한 현재를 사는 태도는 아니다. 그대는 다만 지금 여기에 있으며 그것이 그대의 실존상황일 뿐이다. 

  

   미래도 마찬가지다. 불확실한 미래를 꿈꿀 수는 있다. 불확실한 미래에 소망을 심을 수는 있다. 그러나 소망은 실현가능성의 문제, 확률의 문제다. 미래에 큰돈을 벌어 사업이 성공한다거나, 사랑하는 이러이러한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다거나, 다니는 회사에서 중역이 된다거나, 지금의 사업이 크게 성공한다거나하고 바랄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손에 잡히는 확실성이 아니라 다만 바라는 바이다. 아무리 손에 잡힐 듯해도 그것이 손에 잡힌 것은 아니다. 현재의 차분하면서 의욕적인 마음자세와 구체적이고 탄탄하여 실현가능성이 높은 계획을 바탕으로 성취를 향해 노력하고 인내하며 재기하는 자세가 미래의 꿈을 현재로 잡아당긴다.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얀 바탕의 옷감을 과거의 노랑 물감이나 미래의 푸른 물감으로 물들일 필요는 없다. 가급적이면 현재의 하얀 바탕에 하얀 여백이 남아 숨을 쉬도록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디자인하고 염색하라. 현재는 시간성의 영속적인 기준이자 터전으로 하얗게 텅 빈 물길(江床)이다. 거기에 누렇게 이미 역류하고 있는 과거의 물살과 시시각각 밀려오는 푸른 물살의 미래가 있다. 저기 돌아오는 누런 물살을 바라보며 밀려오는 푸른 물살에 젖어들라. 현재는 누런 물살과 푸른 물살의 합수부(合水部)다. 첫 만남에 그 두 물살은 뒤섞이지 않아 띠를 이루다 서서히 뒤섞이며 마침내 하나의 물살로 현재의 물길을 채우게 된다. 현재는 그 두물이 합류하여 내리는 하나의 물길이다. 그것은 열린 가능성의 시간과 공간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과거를 추억하고 새기며 미래를 조망하고 상상할 수 있다. 반드시 지금 여기에서 일단 다 잊은 하얀 바탕 위에 평정심으로 그대만의 독특한 디자인에 무늬를 그려 넣고 채색을 하라. 그때에 그대는 비로소 그대가 지닌 본성의 구현에 잠기게 된다. 그대가 지금 여기에서 그리는 무늬와 칠하는 색깔은 과거와 미래에서 구해 온 것이다. 우리가 옷을 디자인하고 무늬를 넣고 채색을 할 수 있는 시간성은 현재뿐이다. 과거의 것을 과거에 그려 넣고 미래의 것을 미래에 그려 넣는 것은 비현실적이다. 현재는 과거와 미래의 물길이 화합하여 이루는 중용의 흐름이다. 현재에 섞이지 않을 과거와 미래는 없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이루고 있는 것만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현재의 행위가 과거를 낳고 미래를 잉태한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원하는 아름다움을 향하여 이루려는 정신적인 자세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출발하라. 현재는 모든 것의 출발점이지 새로운 종착점이 아니다. 삶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실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는 순간까지 우리에게는 현재가 주어지며 모든 종착역에서 모든 기차는 다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 출발하기를 지금 여기에서 바란다.

[2:54pm, 2/12(Sun), 2006 대치동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