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엇 킴 작품방/편지글(서한집)

2006년 3월 02일 목요일, 오후 22시 25분 36초(지금여기에잠겨라)

imaginerNZ 2007. 11. 27. 05:08

지금 여기에[Here Now]


지금 여기에 잠겨라.

과거나 미래의 행복에 잠기기 전에

그러면 현재적 삶의 의미가 느껴지고 여러분이 새로 돋아난 움처럼 신선해질 것이다.

과거에 맛보았던 실패의 쓴잔을 지금 여기에서 맛보거나 아팠던 기억의 상채기를 열어

지금 여기에서 들여다보면서 현재를 지워버릴 필요는 없다. 환희에 찬 과거의 성취순간에 지금 마냥 잠기거나 고난을 극복한 자신의 수기를 읽으며 현재를 메워버릴 필요는 없다.

그대는 다만 지금 여기에 있으며 그것이 그대의 실존상황일 뿐이다.

과거의 행복하고 즐거웠던 추억을 지금 여기에서 반추하는 것도 역시 그렇다.

지금 여기에서 과거의 행복을 반추하는 것은 행복을 회고하는 어느 정도 희석된 행복이다.

그것은 과거의 행복만으로 현재라는 하얀 바탕의 옷감을 염색하는 것이다.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지금 여기에 있는 하얀 바탕의 옷감을 과거의 노랑 물감이나 미래의 푸른 물감으로 물들일 필요는 없다. 가급적이면 현재의 하얀 바탕에 하얀 여백이 남아 숨쉬도록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함께 디자인하고 염색하라. 현재는 시간성의 영속적인 기준이자 터전으로 하얗게 텅 빈 역류의 물길(江床)이다. 거기에 누렇게 이미 역류하고 있는 과거의 물살과 미리 역류하는 푸른 물살의 미래가 시시각각 밀려오고 있다. 저기 돌아오는 누런 물살을 바라보며 밀려오는 푸른 물살에 젖어들라. 현재는 누런 물살과 푸른 물살의 합수부(合水部)이며 아직은 그 두 물살은 뒤섞이지 않아 띠를 이루고 있다. 현재는 그 두물머리에 나 있는 두물의 물길일 뿐이어 열린 가능성의 시간과 공간이다.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으면서 동시에 과거를 추억하고 새기며 미래를 조망하고 상상할 수 있다. 반드시 지금 여기에서 일단 다 잊은 하얀 바탕위에 평정심으로 그대만의 독특한 디자인에 무늬를 그려 넣고 채색을 하라. 그때에 그대는 비로소 그대에 잠기게 된다. 그대가 지금 여기에서 그리는 무늬와 칠하는 색깔은 과거와 미래에서 구해 온 것이다. 우리가 옷을 디자인하고 무늬를 넣고 채색을 할 수 있는 시간성은 현재 뿐이다. 과거의 것을 과거에 그려 넣을 수는 없고 미래의 것을 미래에 그려 넣을 수도 없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이루고 있는 것만이 우리의 것이다. 이러한 현재의 행위가 과거를 낳고 미래를 잉태한다. 그러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원하는 아름다움을 향하여 이루려는 정신적 자세이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오로지 지금 여기에서 출발하라. 현재는 모든 것의 출발점이지 종착점이 아니다. 삶에서 우리는 궁극적으로 실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죽는 순간까지 우리에게는 현재가 주어지며 모든 종착역에서 모든 기차는 다시 출발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지금 이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 출발하기를 지금 여기에서 바란다.

[2:54pm, 2/12(Sun), 2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