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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의 정중동(靜中動)에 대하여

imaginerNZ 2007. 11. 27. 02:55

깨달음의 정중동(靜中動)에 대하여-초안 작성 중

 

고행을 통해서만 깨달음에 들 수 있다는 말을 나는 믿지 않는다.

고행을 통한 깨달음은 99.999...% 옳다.

그러나 100%는 아니다.

 

고행은 내면적인 고행이다.

고행은 인간의 유일한 바탕에 이르기 위한 방식이며

그것은 정신의 문제다.

육체적인 극한에 이르러 깨달음에 들었다는 것은

개인의 한계와 초절에 관한 문제로 흐르기 쉽다.

 

육체에서 정신으로 나아가는 것은

이미 정신에서 출발하는 과정을 넘어선다고 단언하지 못한다.

만일 육체의 정화를 통해 정신을 깨치고자 한다면

그의 몸가짐과 태도가 한치의 어긋남이 없이 곧바르다 해도

정신의 열정에 내리는 서리를 남김없이 서리게 하지 못 할 수도 있다.

역으로 온전한 정신의 씨앗에서

한 그루 깨달음의 나무가 성장하여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수 있다.

 

고행이 깨달음을 향한 유일한 방식이라는데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한계가 있는 사람은 어떤 고행을 해도 그 한계를 뛰어넘지 못한다.

심지어 극단적인 고행을 한 사람은

자신의 한계를 넘어섰노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그가 도달하는 경지는 그에게 어떤 최고의 경지라 할 수 있으나

만유에 대한 궁극적인 경지라고 규정할 수 없다. 

 

가사장삼은 도(道)의 옷이다.

깨달음에 이르렀다고 인정받고 심지어 칭송받는 이가

일체의 번뇌를 끊고 세속의 물상을 잊었다 해도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많다.

인간의 마음이 원래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만일 깨달음이 '오로지 정적(靜的)인 정각(正覺)'만은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문제의 본질이 확연히 달라질 수 있다.

깨달음은 '자연스런 마음의 흐름에 잠기는 것이다'라 한다면

마음의 화두가 자연스레 풀릴 수도 있을 것이다.

마음은 어느 기간동안 비우거나 멈출 수는 있으나

심신을 분리하지 않는 한 궁극적으로 비워지거나 멈춰지지 않는다.

 

마음바탕의 보편적, 본질적인 일체화의 특성을 먼저 혜량하는 것이

진정한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마음의 바탕은 학문 또는 체득의 정도와는 무관하여 변함없이 한결같고 소박하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으나 누구도 부처가 될 수 없다.

인간은 존재의 불완전성을 완벽히 극복하도록 태어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해탈은 광범위하고 보편적인 자연자각(自然自覺)의 영역에 속하며

해탈 이후에 자연에 속한 한 인간으로 비로소 돌아오는 것이다.'고 할 수 있다.

해탈이 지나치게 신격화된 범주에서 벗어나 원래대로 보다 인간적인 보편성을 띠었으면 한다.  

 

'도(道)는,

의지(욕구)에서 생기는 번뇌와의 지속적 경계와 투쟁이 아니다.

마음의 바탕은 무표정하다.

 

도(道)는, 

인간의 관점에서 무욕히 겸양하는 것이고

자연의 관점에서 있는 그대로 소박한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 자연인답다.  

(200711270300 엘리엇 킴)